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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 Ernst Theodor Amadeus Hoffmann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 프로필

  • 국적 독일
  • 출생-사망 1776년 - 1822년

2020.02.26.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인리히 폰 클라이스트(1777-1811)

클라이스트(Heinrich von Kleist)는 프랑크푸르트 안데어 오더에서 태어났다. 그의 선조들은 대대로 프로이센의 장교였다. 젊은 시절 그는 집안의 전통에 따라 장교가 되었으나 군대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1799년 군직을 떠났다. 한때 칸트 철학에 몰두하기도 했으며, 프랑스, 스위스로 여행하던 중 작가가 천직임을 깨닫게 되어 1802년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했지만 별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1805년 쾨니히스베르크 시의 행정부에서 일하던 중 나폴레옹이 프로이센을 함락하자 관직을 그만두었다. 드레스덴으로 여행 중 스파이로 간주되어 프랑스군에게 체포되었다. 1807년 석방된 후 클라이스트는 친구 아담 뮐러와 함께 베를린에서 잡지 《푀부스》를 발행하였으며 희곡과 소설을 써 나갔다.
클라이스트는 몽상적이고 격정적이어서 낭만주의의 위험한 경향을 모두 타고난 인간이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강력한 의지와 함께 투철한 리얼리스트의 관찰력 또한 지니고 있었다. 그가 남긴 단편소설은 독특한 비극적 요소와 마력적이며 박력 있는 간결한 서술 방식을 통해 클라이스트 특유의 산문 문학을 형성했다. 그의 작품들에서 볼 수 있는 격렬한 비극적 결말은 그 자신의 생애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1811년 겨우 34세의 나이로 클라이스트는 베를린 근방의 호수에서 여자 친구를 권총으로 쏘아 죽인 다음 자살했던 것이다.
「로카르노의 거지 여인」은 1810년 《베를린 석간》에 발표된 작품이다.


프리드리히 푸케(1777-1843)

푸케(Friedrich de la Motte Fouque)는 프랑스의 귀족 집안 출신인데, 그 집안은 신교도로서 17세기 말에 독일 북부로 이주 귀화하였다. 그래서 그는 독일에서 출생한 독일인이다. 프로이센의 장교를 여럿 배출한 가문의 전통에 따라 그도 군인이 되어 소령까지 진급했다. 중병을 앓은 후에 군을 떠난 푸케는 슐레겔 학파에서 여러 언어를 익히고 문학을 집중적으로 배웠다. 푸케는 문학의 모든 영역에 손을 댔으며, 당시에는 상당히 인기 있는 작가였다. 그러나 시대가 지남에 따라 그의 명성은 쇠퇴했다. 동화소설 「운디네」만이 낭만주의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작품은 1810년 라이프치히에서 발간된 ≪판테온≫에 「만다라화에 관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처음 발표되었다. 만다라화는 인간의 모습을 한 뿌리이며, 교수대 밑에 서식한다고 해서 ‘만드라고라’라고도 불린다. 그리고 이것을 소유한 사람은 행복과 건강, 부를 얻는다는 전설이 있다.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1776-1822)

호프만(Ernst Theodor Amadeus Hoffmann)은 프로이센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법학을 공부하여 베를린, 포젠, 플록, 바르샤바 등에서 법과 시보 및 법관으로 근무했다. 1806년 나폴레옹의 바르샤바 진군으로 법관직을 잃었다. 그 뒤 여러 곳에서 자신이 원하던 대로 예술가로서 살아가지만 경제적으로는 매우 불운했다. 1814년 다시 법관으로 복직하여 1822년 46세를 일기로 베를린에서 사망할 때까지 낮에는 빈틈없는 법관으로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거나 작곡을 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그 유명한 ‘이중생활’을 영위했다.
1814년 첫 작품집 『칼로풍의 환상곡』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문학활동을 시작하여, 10 년도 안 되는 짧은 기간에 놀랄 만한 문학적 업적을 남겼다. 또한 오페라를 작곡하며 작곡가, 음악 이론가로도 활동했다. 호프만은 도스토예프스키, 고골, 보들레르, 발자크, 포 등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차이코프스키는 호프만의 동화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을 바탕으로 하여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했으며, 오펜바흐는 그의 기이한 생애를 「호프만 이야기」라는 오페라로 만들었다.
포흐만의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악마의 묘약」, 「고양이 무어」와 작품집 『세라피온의 형제들』이 있다. 작품들에는 환상과 현실의 갈등, 자아 인식의 문제 등 그가 주요하게 다루는 주제가 아주 다양하게 형상화되고 있으며, 이런 주제는 치밀한 심리 묘사, 무의식의 세계를 파헤치는 탁월한 문체와 잘 융합되어 있다.
「잃어버린 거울상 이야기」는 4장으로 이루어진 액자 소설 「섣달 그믐밤의 모험」의 마지막장으로 『칼로풍의 환상곡집』(1814)에 수록되었다.


테오도르 슈토름(1817-1888)

슈토름(Theodor Storm)은 슐레스비히 홀슈타인 주의 후줌에서 유복한 법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837년 킬 대학과 베를린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다. 1842년 슈토름은 변호사가 되어 고향에 머무른다. 1846년 사촌인 콘스탄체 에스마르흐와 결혼하며 그 뒤 일생 동안 가정을 인생의 구심점으로 삼았다. 지방재판소 판사, 후줌의 지사 등을 지내다 63세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홀슈타인의 소읍에서 은거하였다.
그의 문학은 고향 후줌에 뿌리박은 향토적인 특색을 지니고 있다. 초기에는 서정적이고 감상적인 경향이 짙게 드러나지만 중년기에 이런 경향은 사실적인 심리 묘사로 발전하였다. 만년에 이르러서는 뚜렷한 인물의 성격, 부자 또는 부부의 갈등, 종교, 사회 투쟁 등 현실문제가 등장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임멘호」, 「늦장미」, 「백마의 기수」 등이 있다.
「치프리아누스의 거울」은 1866년 함부르크 마우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오스카 파니차(1853-1921)

파니차(Oskar Panizza)의 아버지는 이탈리아 출신의 카톨릭 교도이자 부유한 호텔 소유주였다. 또한 권위적이고 폭력적이며, 사치스러운 세속저인 인물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엄격한 경건주의자로 의지가 강했으며, 문학적 명예욕을 가지고 있어서 시오나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24세의 늦은 나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학을 공부한 파니치는 1882년 오버바이에른의 정신병원에 면허의로 고용된다. 그러나 그는 1884년 문학 활동을 하기 위해 의사라는 직업을 포기하고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가 쓴 풍자적인 작품인 「교황의 순수한 피로연」(1893, 취리히)은 독일 제국 전역에서 출간 금지되었다. 그는 이 작품 때문에 카톨릭 교회와 평생에 걸친 싸움을 시작한다. 교황 알렉산더 6세의 궁전에 웃음 전염병이 퍼진 것을 소재로 한 「사랑의 협의회. 5막으로 된 천국의 비극」으로 그는 1년간 암베르크에 수감되었다. 그 후에 그는 스위스에 체류하면서 출판사를 설립했다. 그러나 1898년 스위스에서 추방 당해 파리로 도주했다. 또한 독일에서는 빌헬름 2세에 반박하는 연작시 「파리스야나」(1900)가 황제의 명예를 손상했다고 해서 법정에 섰다. 이 때 그의 재산은 압류되었지만 정신병을 이유로 그 재판은 기각되었다. 그는 피해망상증을 앓으며 파리에서 2년간 거주했다. 1905년 이후로 그는 바이로이트 근처의 신경 정신 수용소에서 금치산 선고를 받고 살았다. 그는 정신적으로 건강하다는 판정과 정신병이 있다는 판정을 동시에 받았다.
「인간 공장」은 『어두운 작품들. 네 편의 단편소설』(1890, 라이프치히의 빌헬름 프리드리히 출판사)에 처음으로 발표된 작품이다.


하인리히 만(1871-1950)

하인리히 만(Heinrich Mann)은 유명한 토마스 만의 형으로 독일 북부의 자유도시 뤼베크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9년 고등학교 졸업 후에 만은 서적 판매 도제로 드레스덴으로 간다. 1890년부터 베를린의 피셔 출판사에서 일하면서 대학에서 철학 강의를 듣는다. 하인리히 만은 토마스 만과는 달리 일찍부터 서구적 민주주의와 라틴 문화 및 예술에 이끌리는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로 인해 1차 대전 전후에는 동생과 이념적으로 적대적인 관계에 있었다. 그는 과장되고 공상적이며 도취적인 문체를 사용해서 표현주의 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또 한편으론 에로틱과 그로테스크의 경향을 띤 베데킨트와 가까이 지냈다.
대표작으로는 「운라트 교수」, 「충복」 등이 있으며 이 밖에 역사에서 취재한 작품들, 문학 및 정치에 관한 평론들을 남겼다. 나치 집권 당시에는 문예원 원장으로 있다가 토마스 만과 함께 추방된 바 있다. 미국 망명 생활을 거쳐 전후에 다시 예술원장의 명예를 회복하였으나 독일 귀환 직전에 사망하였다.
「경이로움」은 1894년 뮌헨에서 집필되었으며, 초기 소설 중에서 그의 전집(1925년부터 1932년까지 총 12권이 발간됨)에 수록된 유일한 작품이다. ≪팬(목축신)≫2(1896. 11.)에 처음으로 발표되었다.


파울 에른스트(1866-1933)

에른스트(Paul Ernst)는 하르츠 지방의 광산 감독의 아들로 태어났다. 클라우스탈과 노르트하우젠에서 김나지움을 다녔으며, 1885년 괴팅겐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튀빙겐을 거쳐 베를린으로 간 에른스트는 거기서 자연주의자들과 사회주의 노동당의 문학 정치 연합인 ‘두르히!’와 가까이 지냈다. 1890년 이후 그는 노동당을 위해 베를린 민족 잡지의 편집자로 일했으며 1892년에는 베른에서 국민경제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유쾌하며 비극적인 단막극으로 문단에 등단했다. 노동당에서 나와 클라우스탈로 돌아가서는 1903년부터 1914년까지 바이마르에서 극 평론가이자 매우 생산적인 극작가로 정착했다. 처음에는 신낭만주의의 감상적인 문체로, 나중에는 신고전주의의 엄격하고 지루한 문체로 작품을 써 나갔다. 그는 희곡과 장·단편소설 등을 발표했는데 희곡보다 소설이 더 뛰어났다. 작센 왕, 프랑켄 왕, 슈바벤 왕의 역사를 이야기한 세 권짜리 산문집 『황제연대기』(1923년부터)가 그의 대표작이다.
「이상한 도시」는 1900년 인젤 사에서 출간된 소설집 『여섯 가지 이야기』에 실린 작품이다.


파울 쉐어바르트(1863-1915)

셰어바르트(Paul Scheerbart)는 선박 목수의 자녀 11명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네 살 때 어머니가,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일찍이 그는 동양 철학과 독일 이상주의에 빠졌으며, 쇼펜하우어의 비관주의를 과격하게 거부했다. 그는 라이프치히, 할레, 뮌헨과 빈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다. 그리고 1887년에는 베를린에서 종교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는 베를린의 보헤미안이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생활양식임을 발견했다. 그는 항상 외톨이, ‘그로테스크한 익살꾼’으로 남았으며 자신의 문학적 상상력에만 몰두했다. 1900년에 그는 나이가 자신보다 여덟 살 많은 집주인 여자와 결혼했다. 셰어바르트는 1892년에 ‘환상가들의 출판사’를 설립했지만 자신의 작품을 출판할 출판 업자를 찾는 데 평생토록 어려움을 겪었다. 자유분방한 환상, 사회 비판적인 괴팍스러움, 그리고 언어적인 관용이 뒤섞인 그의 작품들을 읽어 줄 만한 독자는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백만장자 라콕스」는 ≪인젤≫ 1(1900년 3월)에 처음 발표된 작품이다.


아르투어 슈니츨러(1862-1931)

슈니츨러(Arthur Schnitzler)는 훌륭한 이비인후과 전문의의 아들로 빈의 상류층 시민계급 출신이다. 1885년 의학 박사학위를 받고 1888년 피부과와 외과 일반의가 되었다. 1886년 이후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1893년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슈니츨러는 개인 병원을 열었지만 더욱 집중적으로 문학에 몰두했다. 단막극 「아나톨」(1888-92)과 희곡 「사랑의 유희」(1895년 초연)를 발표한 뒤로 그는 오스트리아에서 극작가와 산문 작가로 명성을 쌓아 갔다. 노벨레 「구스틀 소령」(1900)은 산문으로는 첫 번째 대작이었다.
1902년에 완성된 노벨레 「예언」은 ≪노이에 프라이에 프레세≫(빈), 1905년 12월 24일자 크리스마스 부록에 발표되었다.


한스 하인츠 에버스(1871-1943)

에버스(Hans Heinz Ewers)는 문학 비평가들한테는 아주 형편없는 작품을 쓴 작가로 악평을 받았다. 그러나 1926년경 인기가 절정에 오를 때까지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작가였다. 그의 두 번째 장편소설인 「알라우네. 어느 살아 있는 존재의 이야기」(1911)는 10년 동안 22만 5,000부 이상이 팔렸으며 19181919년과 1928년 두 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졌다.
1894년 에버스는 베를린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에 신낭만주의적 데카당스 문체의 서정시인으로서, 그로테스크한 해학 소설가로서, 카바레 작가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희곡을 쓰기로 했으며 전 세계로 여행을 많이 다녔다. 그러면서 그는 어머니의 병적인 집착에 계속 시달렸다. 1935년 그의 책들은 히틀러에 의해 판매가 금지되었으며, 에버스 자신은 집필 금지 명령을 받았다.
「거미」는 1908년 뮌헨 게오르크 뮐러 출판사에서 출간된 소설집 『신들린 사람들. 기이한 이야기들』에 수록되었다.


칼 한스 슈트로블(1877-1946)

슈트로블(Karl Hans Strobl)은 부유한 상인 가문 출신으로 프라하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관직에서 성공적으로 이력을 쌓았다. 1901년부터 1913년까지 브륀에서 재정위원을 하면서 동시에 《타게스보텐》의 연극 비평가로도 활동했다. 제1차 대전 때 그는 여러 전장에서 전쟁리포터로 일하다가 1918년 이후 빈에 거주하며 전업 작가로 활동한다. 슈트로블은 100권이 넘는 책을 발표했다. 그 중에는 연구서와 여행 보고서, 장편소설도 있다. 그는 자신을 “독일 환상 소설의 개혁자”로 여겼으며 수많은 작품을 통해 환상 소설 작가로서 인기를 유지했다. 점점 국수주의적인 경향이 강해지는 전쟁 일지와 기이하고 환상적인 단편소설들이 주로 라이프치히의 슈타크만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수정공」, 「늪지의 유령. 환상적인 빈의 장편소설」, 「기적의 정자. 비밀의 나라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들」 등의 작품이 있다.
「사악한 수녀」는 1911년 『뼈로 만든 손과 다른 것들』(뮌헨의 게오르크 뮐러 출판사)에 수록된 작품이다.


알렉산더 모리츠 프라이(1881-1957)

프라이(Alexander Moritz Frey)는 뮌헨에서 화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하이델베르크와 프라이부르크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제 1차 대전 당시 때때로 히틀러와 같은 연대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1918년부터 전업 작가로 활동했으며, 괴기스럽고(grotesque) 무시무시한 소설과 환상적인 노벨레를 주로 집필했다. 대표작으로는 「일상의 유령. 꿈과 혼란 속에서 나온 11가지 이야기들」(1920), 「무서운 밤」(1923), 「유령. 기이한 이야기들」(1925) 등이 있다. 전쟁 일기인 「위생병. 전쟁 위생병 소설」(1929)은 그가 1933년 잘츠부르크로, 이어서 바젤로 도주하게 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었다. 취리히에서 그는 여러 일간지의 특파원으로 일했다.
「두 개의 가면」은 1913년 뮌헨의 델핀 출판사에서 나온 『어두운 골목. 밤과 그림자의 12가지 이야기』에 실린 작품이다.

<독일 환상 문학선> 저자 소개

에른스트 테오도르 아마데우스 호프만 작품 총 17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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