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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경수

    노경수 프로필

  • 국적 대한민국
  • 출생 1960년
  • 학력 단국대학교 대학원 아동문학 박사
    한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학사
  • 경력 한경대학교 겸임교수
    한서대학교 강사
  • 수상 2011년 단국문학상
    2009년 범정 학술논문 우수상
    1997 년 MBC 창작동화 대상

2015.02.04.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조창희
혼란 속의 유년기

나는 이 나라가 일제 식민 통치의 억압에서 채 풀려나지 못했던 1939년, 충청북도 청원군(당시는 청주군) 강내면 연정리라는 외진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 고장은 한양(漢陽) 조씨(趙氏) 집성촌으로 자자일촌이 대대로 모여 사는 완고한 반촌이었다. 근동의 상민 마을 사람들과는 혼인도 하지 않던 양반의 자존심이 대단했다. 내가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낼 무렵만 해도 종산의 산지기 등 신분이 낮았던 사람들을 하대하며 부리고, 샌님이나 마님, 도련님 등의 호칭으로 불렸다.
한학자이셨던 조부 조철형[趙喆衡, 아호 벽천(碧泉)]의 만득자 성진(誠振)과 여산(礪山) 송씨(宋氏) 부현(富賢)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조부의 특별한 사랑을 받았던 듯하다. 당시 조부의 연세 64세, 아버지는 19세, 어머니는 20세였다.
그때 조부로서는 늦게 얻은 자식을 조혼시켜 첫 손자를 보시고 무척 기뻐하셨던 모양이다. 지금껏 남아 있는 한문으로 기록된 조부의 일기 행간에는 그 기쁨이 역력히 엿보인다.

기묘(己卯) 7월 18일. 날씨 청명하고 장손 출생하다. 양력으로는 9월 1일 금요일 오후 2시 50분경 미시말(未時末).

이틀 뒤,

기묘 7월 20일. 날씨 청명하고 장손 삼 날을 맞다. 명왈장희(名曰莊熙) 자왈경재(字曰敬哉)라 하다. 장차 시(詩)를 즐기며 문장은 자유롭고 활달한 기상을 타고나다.

셋째 날 장손 이름을 성급하게 지으신 조부는 친지들을 불러 조촐한 잔치를 베푸셨다고 들었다.
손자가 걸음마를 배운 뒤로는 자신의 서실로 불러들여 놀게 하며 재롱을 보셨다고 한다. 그러나 말썽쟁이 손자는 옷에 먹칠하기 일쑤요, 쓰시던 문방사우를 장난감 삼아 놀았으니 아끼시던 연적도 여러 개 깨뜨렸다고 한다. 조부와 말썽꾸러기 손자의 인연은 오래가지는 못했다.
조국 광복 한 해 전인 1944년 69세에 조부가 돌아가시니, 내 나이 다섯 살이었다. 내 어렴풋한 기억으로는 몰려드는 수많은 문상객들과 울긋불긋 펄럭이던 만장들이 마치 깃발 같았다. 마치 잔칫집 같았다는 기억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난 1939년 9월 1일은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 날이다. 이에 9월 2일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이어 1941년 오만했던 제국주의 일본이 미국의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공격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 세계는 온통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다.
분수를 모르고 세계대전에 뛰어들었던 일본은 처음에는 잘 싸우는 듯했으나 미드웨이해전에서 해군함대가 전멸을 당한 뒤부터 전세가 완전히 뒤집혀 전쟁 물자 부족에 허덕이게 된다. 이에 식민지 조선을 향한 수탈은 더욱 악랄해져 갔다.
청년들은 전쟁터에 총알받이로 끌려가고, 장년들은 보국대라는 미명 아래 군수물자 생산 공장에, 꽃다운 처녀들까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전쟁터에 끌려가 희생되었던 것이다. 농사한 쌀은 군량미로 공출되고 민생들은 콩깻묵 밥으로 연명하며 배를 곯았다. 심지어는 유기 밥그릇까지 총탄을 만든다고 빼앗아 갔다.
결국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일본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고 말았다. 이 나라는 1945년 일제의 36년 식민 통치에서 해방되었으나 감격도 잠깐 남쪽에는 미군이, 북쪽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38도선으로 허리를 자르고 각각 군정을 실시한다. 결국 남쪽에는 선거를 거쳐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해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북쪽에는 김일성의 공산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
이상이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겪은 유년기의 혼란이었다면 1946년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세상의 혼란은 소년기까지 이어진다. 참으로 어지러운 시기에 유․소년기를 보낸 셈이다.

네 개 초등학교를 전전

1946년 나는 신탄진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대한민국이 수립되기 전의 미군정하에서 일이다. 교과서는 군정청․학무국 발행이었다. 그 후 나는 철도 기관사였던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네 곳의 국민학교를 전전했다. 친구도 사귈 틈이 없었다. 자연 외로운 소년 시절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때에 ≪소학생≫, ≪소년≫ 등의 어린이 잡지를 정기구독하게 된다. 또한 꽤 많은 책을 남독하게 된다. 이때 읽은 책으로 기억이 나는 것은 ≪왕자와 거지≫, ≪장발장≫(≪레미제라블≫), ≪암굴왕≫(≪몽테크리스토 백작≫) 등 세계 명작 번안 소설 및 이광수의 ≪흙≫, ≪꿈≫, 심훈의 ≪상록수≫, 김동인의 <감자>, <배따라기> 등 국내 작가의 소설이 있다. 심지어는 연애소설이라고 못 읽게 하던 방인근의 <여학생의 정조>를 어른들 몰래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나는 이때에 내 평생에 가장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된다. 철도 기관사이셨던 아버지를 1949년 잃었다. 스물아홉 살의 청년으로 갑작스럽게 요절하셨다. 내 나이 열한 살, 초등학교 4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때의 충격을 나는 뒷날 동화 ≪꽃나라를 달리는 기관차≫에 썼다.
그 이듬해 1950년에는 6․25 사변이 일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었다. 나는 공산치하의 3개월을 학교도 가지 못했다. 전쟁은 압록강까지 올라갔던 전선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38선에서 밀고 밀리는 소강상태에 빠지게 되고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1952년 나는 전시하에 임시로 실시되었던 전국중학임시국가고사를 치르고 청주사범병설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거의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시위에 동원되었다. “무찌르자 공산당! 통일 없는 휴전은 결사반대!” 구호를 외치며 궐기대회를 하고 시가행진을 했다. 몸이 약했던 나는 이때 매우 견디기 힘들었다는 기억이 있다.
독자적으로 반공 포로를 석방하고 북진 통일을 염원했던 이승만 대통령 뜻과는 달리 6·25 사변으로 1953년 휴전이 성립되고 말았다. 이후 이 땅은 휴전선 비무장지대를 사이에 두고 남북으로 갈려 지금껏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아 있다.
1955년 청주사범병설중학교를 졸업한 나는 인문계인 청주고등학교로 진학했다. 집안에서는 사범학교 본과로 진학해 3년 뒤에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기를 바랐다. 당시는 사범학교 본과 3년만 졸업하면 초등 교사가 되던 때라 빨리 취직해 경제적으로 독립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범학교에도 응시해 합격했으나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했다. 대학 진학에 대한 욕심 때문이었다.
방황은 계속되고 나는 청주고에서 평생의 벗이 된 한 친구를 만나게 된다. 그는 당시 청주고의 문예 반장으로 뒷날 소설가가 된 김문수(金文洙)다.
그때 청주 지방의 고교생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푸른문학동호회’란 문학 서클이 생겼다. 이때 김문수는 그 문학 서클의 2대 회장이기도 했다. 나는 그의 권유로 그 문학 서클의 회원이 되어 몇 편의 콩트를 써서 문학의 밤에서 낭독하기도 했다. 그리고 단편소설 한 편에 몇 편의 콩트를 더해 문수와 함께 2인 동인지를 등사판으로 만들려고 준비를 하는 중에 사정이 생겨 중도 포기하기도 했다. 나는 그 무렵 평생의 반려, 청주여고 3년의 정인숙을 만났다.
그때는 TV가 없어 라디오 드라마가 지금의 TV 연속극을 능가하는 인기를 끌고 있던 시대였다. 6·25 사변이 휴전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때다. 청주지방방송국에서는 반공․방첩 드라마를 모집했다. 귀가 솔깃했으나 방송극 대본을 어떻게 쓰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서점을 들러 헌책 더미를 뒤지다가 눈에 확 뜨이는 보물 하나를 발견했다.
≪CBS 무대≫라는 검은 표지의 그 책은 기독교 방송국에서 방송했던 단막극 중 우수한 작품을 골라 책으로 낸 오리지널 라디오 드라마 대본집이었다. 나는 이 대본에서, 효과−대문 여닫는 소리 삐이직, M−음악 기쁨의 환희를 나타내는 정서, UP DOWN(높았다 낮아진다) 등등의 드라마 대본의 용어와 대사의 감정 있는 전개 등을 알았다.
수록 작가는 당대 최고의 인기 방송국 작가들이었다. 조남사, 이보라, 한운사, 김영수 등등이었다.
나는 이 대본을 단숨에 한 번 읽고 학교엔 결석을 하고 60장의 라디오 드라마 한 편을 썼다. 마감이 바로 그날이었다. 방송국에 직접 찾아가 제출하고 발표를 기다렸더니 내가 하루에 써서 응모했던 그 작품이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뽑혔다고 발표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와 함께 가작으로 뽑힌 어느 대학생의 작품은 방송되지 못하고 내 작품만 방송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분의 작품은 방송용 대본으로 쓰이지 않아 대본으로 각색하지 않으면 방송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만큼 방송극 대본이 알려지지 않던 시절이었다.
당시 청주지방 방송국에는 드라마에 출연할 성우도 없었거니와 연출자 또한 없었다. 내 작품을 녹음하는 스튜디오에 갔다가 일반 PD가 연출하고 그 방송 아나운서들이 성우 노릇을 하는 걸 목격하고 나 또한 성우로 급조되어 출연하기도 했으니, 정말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그 드라마를 들었던 친구들이 많았던지 나는 학교에서 ‘학생 조남사’란 별명을 얻었다. 마침 내 성이 당시의 인기 방송극 작가와 같은 조씨였던 탓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별명이 별로 싫지 않았던 기억이다.
1957년도 저물어가고 있었다. 마침 그 고장의 유일한 지방지였던 ≪충북신보≫(≪충청일보≫의 전신)에서 1958년도 신춘문예 모집 사고(社告)가 났다. 나는 졸업을 앞두고 여기 동화 부분에 처음으로 동화 한 편을 써서 응모했다. 문수는 여기 학생부 소설 부분에 응모하며 나와 함께 당선되었다. 나는 동화 부분에 ≪영만이와 우장옷과≫라는 작품이 당선작 없는 가작으로 입선됐다.

서라벌 58학번

고교 졸업도 닥쳐왔으니 대학 입시도 닥쳤다. 이때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장학생 모집을 한다는 공고가 났다. 고교 재학 시절의 문학 활동(공모에 당선되었거나 입선된 경력 포함)을 한 경력자들이 학교의 추천으로 응시하면 실기 시험만으로 장학생을 뽑는다는 것이었다.
나는 예의 라디오 드라마 입상 및 ≪충북신보≫ 신춘문예에 입상한 동화를 비롯해 푸른문학동호회에서의 활동을 들어 학교의 추천을 받아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응시했다. 이때 청주고에서는 김문수와 함께 시인 지망생인 홍기삼 등 셋이 함께 응시해 합격했다. 이때 장학생 모집 덕분이었던지 전국의 내로라하는 문학 지망생이 많이 모여들었다. 그때 중앙신문의 신춘문예에 이미 입선한 경력이 있는 재재다사(才才多士)들이 많이도 모여들었다. 김동리, 서정주, 박목월 등의 문단 대가들의 강의를 직접 듣고 재학 중 또는 졸업 후 많은 작가 시인들이 배출되었다. 바로 전무후무한 서라벌 58학번의 신화가 생긴 것이었다. 시인으로는 박경용, 박이도, 이근배, 최계식, 이창년, 서영수, 오재철, 조상기 등등, 소설가로는 성승세, 김문수, 유현종, 김주영, 송상옥, 오찬식 등등, 동화 작가로는 조장희, 조대현 등, 평론가 홍기삼, 방송 작가 윤혁민 등등이 모두 문단에 진출한 서라벌 58학번이었다.

잡지 제작에 몰입한 30여 년

나는 196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엄마 마중>이 가작으로 입선되고 이듬해 196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산골 겨울밤>이 당선(윤석중 심사)되었다. 마침 이해 같은 신문에 고교 동기인 김문수의 <이단부흥>이란 단편소설이 함께 당선되어 청주 지방에서는 두 사람의 문단 진출을 축하해 주는 축하 모임도 있었다.
그해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자 나는 8월 1일 공군에 자원입대해 1964년 7월 31일 만기 제대하고 신구문화사란 출판사에 취직했다. 1966년 11월 6일에는 문단에 등단시켜 준 윤석중 선생을 주례로 모시고 고교 때부터 사귀던 정인숙과 결혼했다. 이해 어린이 잡지 ≪어깨동무≫의 편집부로 옮기고 편집장을 거쳐 1969년 3월에는 중앙일보사의 출판국으로 옮겨 ≪여성중앙≫의 창간에 참여하고 이어 ≪학생중앙≫을 창간했으며, 이후 ≪소년중앙≫, ≪음악세계≫, ≪영레이디≫, ≪라벨르≫ 등등의 월간지의 부장 주간을 지내고 계간지 ≪중앙미술≫, ≪문예중앙≫ 등등의 계간지를 비롯한 10여 종이 넘는 중앙일보사의 잡지 군단을 총괄 제작 지휘하는 출판제작국장을 지냈다.
30여 년 동안 잡지 만드는 일에 빠져 있던 나는 창작 활동을 거의 잊고 있었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창작 요구는 버리지 못하고 1970년경부터는 어느 계기를 맞아 태평양화학의 사보 ≪향장≫에 다달이 열 장 내외의 짧은 동화를 약 3년여 동안 연재하며 동화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이 짧은 동화들은 대개 동식물들의 생태를 의인화해 인간의 선악과 삶을 풍자한 것들이었다. 이 동화들을 연재하는 동안 뜻밖에도 1982년 세종아동문학상을 수상했다. 현대판 이솝 우화라는 평을 들었다.
이 작품들을 비롯해 단편동화 몇 편 등을 엮어 첫 동화집 ≪아기개미와 꽃씨≫를 출판했다. 등단 후 2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이 동화집으로 1986년 대한민국문학상을 받았다. 이후 여기 실린 단편동화들을 문단에서는 내 대표작으로 인정하기도 했다.

내가 생각하는 동화

내가 생각하는 동화, 즉 내 동화관을 나름대로 세워 보고 나는 더욱 동화 창작에 매료되었다. 한 문학상 수상식에서 수상 소감을 피력한 한 대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는 동화란 모든 문학의 원초라고 생각합니다. 문학이 문자로 기록되기 전의 구전(구비) 문학 즉 옛날이야기, 그게 바로 동화였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겪게 되는 문학적인 충격, 그게 바로 동화입니다. 그래서 나는 동화(Märchen)는 어린이들만의 읽을거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어린이는 세파에 시달리며 어른이 되어 갑니다. 그사이 우리가 잊었던 무구한 동심의 순수를 마음 밑바닥에서 일깨워 불러내는 감동의 문학, 그게 바로 동화입니다. 그래서 나는 동화를 어린이들만의 읽을거리가 아니라 어른들도 함께 읽는 유일한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나는 동화야말로 독립된 독특한 문학의 한 장르라고 주장합니다. 동화는 편협한 의미의 두루뭉수리의 ‘아동문학’이란 정의는 옳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나는 동화가 풍자와 해학, 주의, 주장과 비판을 포함한 환상의 서사로 창작되어야 바람직한 동화, 승화된 문학이 된다는 동화관을 피력해 봅니다.

그동안 나는 이와 같은 생각으로 동화를 써 왔다. 그 결과가 제대로 되었는지 아직은 모르겠다. 그래서 군사독재를 비판하고 풍자하며 민주화 과정을 상징하는 이야기를 환상 속에서 그린 이야기를(<해를 삼킨 이무기> 등등) 계엄하의 검열이 심했던 시절 몇몇 일간지에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작품 및 수상 연보

196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동시 <산골 겨울밤> 당선.
1982년 세종아동문학상 수상.
1986년 첫 동화집 ≪아기개미와 꽃씨≫(샘터사) 출간. 그 뒤 푸른책들에서 현재까지 계속 중판.
1986년 ≪아기개미와 꽃씨≫로 대한민국문학상 수상.
1994년 도깨비 이야기 장편동화집 ≪벼락맞아 살판 났네≫(동화출판사) 출간. 어린이문화대상 수상. 2005년 효리원에서 재출간.
1995년 장편동화집 ≪괭이씨가 받은 유산≫(중앙일보) 출간, 소천아동문학상 수상. 2010년 푸른책들 재출간.
1998년 단편동화집 ≪해를 삼킨 이무기≫(교학사) 출간.
1999년 ≪해를 삼킨 이무기≫로 방정환문학상 수상.
2002년 단편동화집 ≪도깨비는 심심하다≫(푸른책들) 출간. 동화 <진주를 품은 조개>(원제 <몸살 앓는 조개>) 초등학교 국어 3학년 읽기 교과서 수록.
2011년 장편동화집 ≪꽃나라를 달리는 기관차≫(에디터) 출간. 박홍근문학상 수상.

해설 - 노경수
1960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했다.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아동문학을 전공하여 문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97 MBC 창작동화 <동생과 색종이>로 대상, 2009년 <윤석중 연구>로 범정 학술논문 우수상, 2011년 <오리부부의 숨바꼭질>로 단국문학상 수상했다. 저서로 ≪괭이의 꿈≫, ≪옹고집전≫, ≪엄마를 키우는 아이들≫, ≪윤석중 연구≫, ≪오리부부의 숨바꼭질≫, ≪집으로 가는 길≫ 외 다수가 있다. 현재 한경대학교 겸임교수로, 한서대학교, 우석대학교에서 강사로 아동문학을 강의하고 있다.

<조장희 동화선집> 저자 소개

노경수 작품 총 3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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