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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사나이 상세페이지

모래 사나이작품 소개

<모래 사나이> 차이코프스키의 발레곡으로 더 잘 알려진 <호두까기 인형>의 작가 에른스트 호프만의 대표작이다. 호프만은 <모래 사나이>를 통해 인간의 심연 깊숙이 자리한 환상과 몽상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하고 있다. 빈틈없이 짜인 이야기 구조 속에 현실과 환상, 초자연적인 것이 뒤섞이고 광기와 눈의 모티브, 자동인형 등 이색적인 소재가 등장한다. 인간의 분열된 내면세계를 잘 보여주는 그의 이야기는 당혹스럽고, 괴기스러우면서도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모래 사나이(Der Sandmann)≫는 독일 낭만주의 시기의 대표적 작가 에른스트 호프만의 작품 중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며 후기 낭만주의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또한 이 작품은 사회사적, 정신분석학적 방법론 등 다양한 해석이 시도되는 작품이다. 노벨레적 요소와 동화적 요소, 현실적인 것과 환상적·초자연적인 것이 뒤섞여 있을 뿐 아니라 광기와 눈의 모티브, 자동인형 등 이색적인 소재가 등장하며, 이야기가 여러 시점에서 전개되는 등 ‘현대적’ 서사 전략이 동원되고 있어 하나의 고정된 시각으로 작품 전체를 조망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호프만의 기록에 따르면 이 작품은 1815년 11월에 완성되었고, 1816년에 출간된 그의 두 번째 노벨레 작품집 ≪밤의 풍경들(Nachtstucke)≫을 열어주는 첫 번째 이야기로 실렸다. ‘밤의 풍경’이란 원래 16세기 회화에서 유래된 개념으로 달빛이나 횃불, 촛불로 불완전하게 조명된 대상에서 명암이 날카롭게 대비되어 독특한 색채를 띠며 낯설고 불안한 효과를 자아내는 그림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 개념은 18세기부터는 문학에 전용되어 유령이나 강도 등 범죄자들이 등장하는 무서운 이야기들, 나아가 기괴하고 무서운 사건이나 현상들의 배후에 있으며 인간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불가해한 어두운 힘을 소재로 한 이야기를 뜻하게 되었다. ≪밤의 풍경들≫에는 이런 성격의 작품들이 모두 여덟 편 실려 있다
≪모래 사나이≫에서는 ‘광기’의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대학생 나타나엘이 어린 시절의 끔찍한 체험을 떠올리게 하는 사건들을 겪으면서 점차 광기에 사로잡혀 파멸해 가는 것이 전체 줄거리다. 꿈과 환상, 광기나 최면술과 같은 초자연적 현상, 무의식적이고 비합리적인 경험들은 독일에서 이성과 합리성을 내세웠던 계몽주의 시기에는 금기시되고 배척되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은 계몽주의적 합리성의 세계가 가져온 답답한 현실에서 심한 소외를 느끼게 되자 예술에서 상상의 나래를 펴면서 내적인 자유를 추구했던 낭만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했던 문학적 소재가 되었다. 즉 낭만주의 문학에서는 환상적인 세계가 일상의 세계와 통합되며, 인간의 무의식적이고 비합리적인 경험들이 중요한 소재가 된다. 그리고 초자연적 요소가 풍부한 낭만주의 초기의 환상적 이야기들은 차츰 세계의 마성적인 힘, 인간 내면에서 파멸을 가져오는 어둡고 기이한 정신적인 과정, 사악한 충동, 광기, 불안, 경악을 소재로 하는 ‘공포 낭만주의’로 나아간다. 아울러 낭만주의 시대에는 의학과 자연과학 분야에서도 광기와 같은 인간 정신의 ‘밤의 측면들’에 주목하는 집중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광기는 인간의 오성으로는 다가갈 수 없는 영역이었고 정상과 광기 사이에 분명한 경계를 긋는 것은 불가능한 현상으로 여겨졌으며, 특히 광기는 1800년대에 문학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가 되었다. ≪모래 사나이≫는 바로 ‘광기’에 대한 당대의 이러한 담론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광기’나 주인공의 정신적 외상 자체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광기에 사로잡힌 주인공의 시점에서 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특이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저자 프로필


저자 소개

저자 - 에른스트 호프만(Ernst Theodor Amadeus Hoffmann, 1776∼1822)
호프만은 독일의 후기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가다. 호프만은 법률가로 활동하면서 문학뿐 아니라 다방면에서 예술적 재능을 보여주었던, 낭만주의자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술의 종합을 실천한 예술가였다. 그는 유능한 법률가라는 시민적 직업에 만족하지 않고 작곡가, 음악비평가, 극장의 음악장, 캐리커처 화가 그리고 작가로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했다. 작가로서는 출발이 늦었던 그는 먼저 음악가로서 소명을 느끼고 음악을 무척 사랑하였으며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흠모하여 자신의 원래 이름 에른스트 테오도르 빌헬름 호프만(Ernst Theodor Wilhelm Hoffmann)에서 빌헬름을 아마데우스로 바꾸기도 했다. 또 작곡가로서 많은 성악곡과 기악곡, 오페라를 남겼다. 하지만 그는 작가로서 현실과 꿈·환상이 뒤섞인 것, 광기, 초자연적인 것을 소재로 한 환상적인 작품들을 통해 후대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의 문학작품들은 평일에는 ‘낮의 세계’에서 법관으로 활동하고 밤이나 주말에 창작활동에 몰두하는 이중생활에서 나온 것인데, 이것은 당시의 낭만주의 사조와도 관계가 깊다.
호프만이 살았던 시기는 1789년의 프랑스혁명과 이에 따른 혼란, 나폴레옹 군대에 의한 신성로마제국의 해체, 1815년 이른바 ‘빈 회의’를 통한 구(舊)체제 복귀 등 유럽이 정치적으로 격변을 겪던 시기였다. 아울러 독일은 18세기 후반에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진전으로 서서히 산업사회로 진입하면서 세계의 물화, 파편화 등 부정적인 측면들이 급속히 대두되어 개인의 소외가 심화되던 시기였다. 대혁명을 기점으로 정치적 발전이 계속되었던 프랑스와는 달리 독일에서는 봉건적 정치체제가 계속 유지되어 시민계층의 욕구가 현실 정치에서 충족되지 못했으므로 독일의 시민계층이 겪는 소외는 더 심한 편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괴테와 실러를 중심으로 한 독일의 고전주의는 현실의 분열과 혼란을 문학과 예술에서 극복하고 인간성을 고양한다는 강령을 표방했다. 반면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한 낭만주의자들은 현실의 분열을 더욱 의식하고 중세와 같은 과거, 동화나 민담 등 상상력의 세계, 그리고 일상을 넘어선 환상과 초자연적 현상에 관심을 돌렸다. 특히 후기 낭만주의자들은 계몽주의 이후 지배적인 사고가 되어왔던 이성에 의해 완전히 설명될 수 없는 꿈과 광기, 몽유병 등 인간 영혼의 ‘밤의 측면’에 주목하였는데, ≪모래 사나이≫를 포함해 호프만의 여러 작품은 이러한 범주에 속한다.

호프만은 1776년 1월 24일 발트해 연안의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으며,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대학까지 다녔다. 이 도시는 독일 지역에서 프로이센이 강력한 왕국으로 부상하던 18세기 말 당시 인구 4만이 조금 넘는 상업도시였는데, 동프로이센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임마누엘 칸트(1724∼1804)가 일생을 보낸 도시이기도 하다.
호프만의 집안은 여러 세대를 걸쳐 동프로이센에서 개신교 목사와 선생들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호프만은 이런 가문에서 첫 법조인으로서 궁정법원 변호사를 지낸 아버지(크리스토퍼 루드비히 호프만)와 역시 명망 있는 법률가 가문이자 친척관계였던 어머니(루이제 알베르티나 되르퍼)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프만의 어린 시절은 행복한 편이 아니었다. 작은형은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고, 양친은 화목하지 못한 결혼 생활을 하다가 곧 별거했다. 호프만이 두 살 되던 해인 1778년, 양친이 헤어지면서 아버지는 여덟 살 많은 큰형을 데리고 인스터부르크로 떠나갔고, 호프만은 어머니와 함께 외가로 들어가게 된다. 이로 인해 호프만은 아버지의 존재를 제대로 알 기회가 없었으며, 큰형과도 거의 교류를 갖지 못했다. 호프만은 외할머니 집에서 성장하게 되는데, 정신적으로 불안하고 늘 기죽어 지낸 어머니, 집안의 유일한 남자이면서 엄격하고 까다로운 성격의 외삼촌, 그리고 두 이모 사이에서 자라났다. 어머니는 아들과 친밀한 관계를 갖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고, 호프만이 가장 좋아하던 막내 이모 역시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래도 외삼촌과 두 이모는 당시 시민가정에서 중요시하던 음악을 연주하면서 호프만으로 하여금 음악의 세계를 접하게 해줌으로써 소년 호프만의 상상력을 키우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어두운 분위기의 가정에서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해야 했던 호프만은 1782년에 신교 계통의 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에서 호프만은 열 살이 되던 해인 1786년에 개신교 목사의 아들이자 같은 나이의 친구 히펠(Theodor Gottlieb Hippel)을 사귀면서 서로 많은 관심사를 나누게 된다. 호프만은 이 친구에게 속내를 터놓고 자신의 감정과 동경, 불안, 예술적 활동계획, 연애사 등을 열심히 편지로 적어 보내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한때 서먹서먹한 시절도 있었지만, 히펠은 호프만이 조언을 필요로 할 때는 조언을 해주고, 경제적인 궁핍에 빠졌을 때는 물질적인 도움을 제공했던 평생의 친구로 남았다.
호프만은 가문의 전통에 따라 열여섯 살이 되던 1792년에 쾨니히스베르크에서 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대학 생활에는 특별한 흥미를 보이지 않았고 당시 유명했던 칸트의 강의도 듣지 않았다. 대신 그는 예술에 관심이 많아 작곡과 그림에 몰두했으며, 이 시기에 소설도 두 편이나 썼으나 발표되지 못하고 소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젊은 호프만은 특히 작가로서 출발하기 전에 음악가로서의 소명을 느끼고 음악을 무척이나 사랑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크리스티안 포드비엘스키와 같은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유명한 음악가들에게서 대위법 등 작곡법을 사사받기도 했다. 한편 호프만은 열일곱 살 때 그에게서 성악과 피아노 레슨을 받던 아홉 살 연상의 유부녀 도라 하트(Dora Hatt)를 정열적으로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이 첫사랑은 벌써 다섯 아이의 어머니였던 도라 하트가 여섯 번째 아이를 출산하고 또 다른 연적이 나타나는 등 걷잡을 수 없는 스캔들로 발전하면서 끝나게 된다.
호프만은 열아홉 살 때인 1795년 1차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난 다음 해에 도라 하트와의 스캔들을 정리하기 위해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글로가우에서 머물면서 2차 사법시험을 준비한다. 이곳에서 그는 스물두 살이 되던 1798년 자신의 외사촌 미나 되르퍼(Minna Doerffer)와 약혼한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2차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베를린의 상급지방재판소에서 근무를 시작하게 된다. 프로이센의 수도였던 베를린은 당시 인구 17만의 도시로 프로이센에서 가장 큰 도시였으며, 1797년에 왕위에 오른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아래서 국립극장의 부흥을 비롯한 문화적 활동이 활성화되었다. 이곳에서 호프만은 오페라와 연극을 관람하고 지휘자, 작곡가, 극작가, 배우들과 친분을 쌓으며 음악가로도 발전한다. 호프만은 작곡 등의 활동에 몰두하느라 조금 늦기는 했으나 1800년 3월 사법고시 3차 시험에 합격한다.
호프만은 두 달 후에 베를린에서 동쪽으로 200킬로미터 떨어진 포젠 지역의 법관 시보로 첫 공식 발령을 받았다. 젊은 호프만에게 이 도시는 처음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한 곳이자 친척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곳이었다. 약혼녀를 베를린에 두고 온 호프만은 이곳에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다가 폴란드 여성 미하엘리나 트리징카를 알게 되어 1802년 결혼한다. 그런데 호프만은 같은 해 사육제 가장무도회장에서 점령군 독일 장교들과 관리들의 오만한 태도를 풍자하는 만화를 그려 배포한 일이 문제가 되어 폴란드의 오지 플로크로 좌천되어 주정부 참사관에 임명된다.
호프만은 플로크에서 단조로운 생활을 지겨워하다가 1804년 바르샤바의 참사관으로 영전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당시 폴란드 수도였던 바르샤바는 인구 7만의 도시로 프로이센에서 베를린 다음으로 큰 도시였고 문화적으로도 활기가 넘치는 도시였다. 이곳에서 호프만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하고 작가 브렌타노의 희곡을 작곡하여 공연하는 등 왕성한 음악 활동을 펼친다. 아울러 호프만은 같은 바르샤바 참사관인 이치히(Julius Eduard Itzig)를 사귀게 되는데, 그는 호프만에게 당대 낭만주의 문학가들의 작품을 접하게 해주었고 호프만의 첫 전기를 썼다. 이 시기에 호프만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경모하여 빌헬름이라는 중간 이름을 아마데우스로 고친다. 바르샤바 시절은 호프만의 인생에서 행복한 시기였다. 1805년에는 첫딸이 태어났다. 그런데 호프만이 참사관과 음악가 생활을 겸하고 있을 무렵 프로이센을 제압한 나폴레옹 군대가 1806년 11월 바르샤바를 점령하게 되면서 호프만을 비롯해 나폴레옹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공직자는 모두 해임된다.
호프만은 이 사건을 계기로 일단은 공직을 떠나 예술 활동에 전념하기로 마음먹는다. 호프만은 아내와 두 살 난 외동딸을 포젠으로 보내고 베를린에서 정착을 시도한다. 하지만 자유로운 예술가로서의 출발은 순조롭지 못했다. 이 시기에 외동딸이 죽고 아내가 중병에 걸리는 등 힘들고 불운한 날들을 맞는다. 또 그가 작곡한 음악에 주목하는 사람들도 없었다. 호프만은 1808년 봄에는 친구 히펠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요청할 정도로 재정적으로 완전히 파탄 상태를 맞는다.
이러한 가운데 호프만은 독일 각지로 일자리를 찾는 지원서를 보냈고, 1808년 가을에 가톨릭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던 남부 도시 밤베르크의 극장 음악장 자리를 제의받는다. 그는 아내와 함께 밤베르크로 이주한다. 그러나 그는 지휘자로 데뷔한 무대에서 실패를 맛보면서 곧바로 직장을 잃게 된다. 하지만 호프만은 1808년 9월부터 1813년 4월까지 5년 가까이 이곳에서 작곡을 하거나 음악 개인지도를 하면서 음악가로서 생존을 시도했으며, 이러한 시도는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그는 차츰 음악가로서 평판이 높아져 <일반 음악신문>의 발행인으로 참가했으며, 1809년에는 작곡가 글루크를 소재로 한 첫 문학 소품 <기사 글루크(Ritter Gluck)>를 썼다. 1810년에는 <악장 요하네스 크라이슬러의 음악적 고뇌>라는 제목으로 글들을 기고하는데, 사회에서 괴상한 존재로서 예술가가 겪는 고통에는 호프만 자신의 체험이 녹아 있다. 악장 크라이슬러라는 인물은 나중에 로베르트 슈만의 피아노 소품집 <크라이슬러리아나>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호프만은 이것을 계기로 점차 음악가에서 작가로 전환한다. 아울러 호프만이 밤베르크에 머물던 시절에 낭만주의적인 의학 및 자연과학 논쟁들에 관심을 가지면서 받은 자극들은 후기 그의 작품에 영향을 미친다.
호프만은 1810년 밤베르크 극장의 지배인이 된 홀바인(Franz von Hohlbein)에 의해 조감독 직을 맡게 되고 조감독, 고문, 극장 작곡가, 무대장치가로 일하게 된다. 또 밤베르크의 부유층을 대상으로 성악과 피아노 레슨을 하기도 한다. 1811년, 서른다섯 살의 호프만은 성악 개인지도를 하던 20살 연하의 율리아 마르크(Julia Marc)에게 광적으로 빠져든다. 결국 이 짝사랑은 율리아가 모친의 명령에 따라 함부르크의 부호와 결혼하면서 정리되지만, 호프만은 혹독한 정신적 고통을 가져다준 율리아와의 사랑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데, 특히 1912년에 쓴 <돈 후안>에서는 이 경험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율리아와의 스캔들로 인해 호프만은 더 이상 밤베르크에 머물기가 어려워졌다. 따라서 호프만은 1813년 봄에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에서 오페라단을 이끌던 세콘다(Joseph Seconda)가 악장 직을 제안하자 이를 기꺼이 받아들인다. 밤베르크 생활을 청산하면서 호프만은 작가로서의 경력에 중요한 진전을 보이는데, 1813년 3월 18일 ≪칼로풍의 환상집≫이라는 제목으로 음악가에 대한 이야기들을 모아 출판하기로 계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이어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로 이사한 호프만은 해방전쟁의 와중에서도 지휘자 활동 외에 음악 비평문을 계속 쓴다. 이 시기는 호프만의 작곡가로서의 인생이 정점에 달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푸케의 소설을 대본으로 유명한 오페라 작품 <운디네(Undine)>를 작곡했다. 작곡가, 음악 비평가 활동 외에도 호프만은 새롭게 발견한 창작 영역인 글쓰기에도 몰두했다. 그 결과 1814년 봄에 그에게 ‘천재 작가’의 명성을 가져다준 ≪칼로풍의 환상집≫ 1권, 2권이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이어 1814년 말에는 제3권 ≪황금 단지(Der goldne Topf)≫, 그리고 1815년 5월에 환상집의 제4권이 출판된다.
프랑스 판화가 자크 칼로(Jacques Callot, 1592∼1632)는 오랫동안 로마와 피렌체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궁정과 민중의 삶, 전쟁의 참상, 기괴한 인물들을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적으로 표현한 화가였다. 호프만에게 있어서 ‘칼로풍’이라는 것은 인물들을 파악하고 형상화하는 독특한 주관적 시각을 의미했는데, 예를 들어 모든 이질적인 요소들을 동원한 구성, 일상적인 것과 환상적인 것의 결합 등이 그러한 것이었다. 서문을 비롯해 모두 열아홉 개의 텍스트가 수록된 ≪칼로풍의 환상집≫은 독자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불러일으키면서 새로운 천재 작가의 탄생을 알렸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자전적이며 악마적인 예술가 상을 표현한 <크라이슬러리아나>와 <황금 단지>가 있다. 호프만이 ‘새로운 시대의 동화’라는 이름을 부여한 <황금 단지>는 안셀무스라는 대학생 주인공의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경험들을 제시하면서 낭만주의적인 세계관에 걸맞게 합리적으로 접근 가능한 일상의 현실과 시적인 심성의 사람들에게만 열리는 환상의 영역이라는 두 세계를 대비적으로 보여준다.
해방전쟁이 끝나고 프로이센이 나폴레옹 군대에 대해 마침내 승리를 거두면서 호프만은 다시 공직에 복귀할 기회를 얻게 된다. 호프만은 1814년 9월에 아내와 함께 여러 해에 걸친 타지에서의 불안한 생활을 청산하고 마침내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1822년 죽을 때까지 이곳에 머문다. 베를린 고등법원에 얻은 자리는 처음에는 월급을 제대로 받는 자리가 아니었다. 따라서 ≪칼로풍의 환상집≫이 가져다준 ‘천재 작가’로서의 명성은 호프만의 작가 생활에 새로운 길을 열어주었으며, 베를린에서 당대의 다른 작가들과의 교류도 가능하게 해주었다. 호프만은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괴기소설 ≪악마의 묘약≫과 작품집 ≪밤의 풍경들≫의 집필도 시작한다. 그리고 1816년에는 고등법원 법률고문관에 임명되면서 월급도 제대로 받기 시작한다.
베를린으로 돌아오면서 떠돌이 생활을 청산한 호프만은 죽기까지 8년 동안 법률고문관과 작가라는 이중생활을 하면서 왕성한 창작열을 보였다. 베를린 생활 초기에 ≪모래 사나이≫를 포함한 작품집 ≪밤의 풍경들≫(1816∼1817), ≪악마의 묘약≫(1815∼1816)이 출간되었으며, 이어서 1815년부터 작업한 이야기들을 모은 노벨레 작품집 ≪세라피온의 형제들≫(1819∼1821), ≪클라인 자케스≫(1919), 사회 풍자 소설 ≪수코양이 무르의 인생관≫(1819∼1821), ≪브람빌라 공주≫(1821), ≪벼룩 대왕≫(1822)이 모두 이 시기에 출간되었다.
호프만은 베를린 시절 낮에는 법관으로서 공식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고 밤에는 창작에 몰두했다. 퇴근길에는 주로 ‘루터와 베그너’라는 단골 지하 주점에서 샤미소, 브렌타노, 아르님 등 당대 낭만주의 작가들과 술을 마시고 담소할 때가 많았다. 자유분방한 천재 기질을 가진 그를 사람들은 ‘도깨비 호프만’이라고 불렀다. 1818년에는 친구들과 매주 수요일 저녁에 만나 문학에 대해 논하는 ‘세라피온의 밤’이란 모임을 결성하는데, 그의 노벨레 모음집 ≪세라피온의 형제들≫은 바로 이 모임을 모델로 한 것이다. 세라피온의 축일에 모인 예술가 기질의 친구들이 서로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평가를 하는 구조를 갖춘 이 작품집의 대표 작품으로는 <스퀴데리 양(Das Fräulein von Scuderi)>(1819)이 있는데, 17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일어난 수수께끼의 살인사건과 더불어 예술가의 모티브도 함께 다룬 이 작품은 독일의 첫 범죄추리소설로 간주되는 작품이다.
베를린에서의 문인들과의 교류는 호프만의 작품세계를 풍성하게 해주었고, 비정상적인 생활은 특히 그를 기이한 환상의 세계와 인간 영혼의 ‘밤의 측면’으로 이끌어갔다. 이러한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는 그의 작품에 그대로 투영되었다. 모두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작품집 ≪밤의 풍경들≫에는 각 권마다 4편씩 모두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첫째 권의 첫 작품으로 실린 대표작 ≪모래 사나이≫는 특히 인간 정신의 어두운 측면, 악마적인 측면, 광기 등 비합리적인 측면을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후기 낭만주의의 대표적 조류인 ‘공포 낭만주의(Schwarze Romantik)’의 전통에 서 있다. 비슷한 시기에 집필되어 1816년과 1817년 두 권으로 출간되었던 장편소설 ≪악마의 묘약(Die Elixiere des Teufels)≫(1815) 역시 여기에 속한다. ‘악마의 묘약’을 마시고 세속적 욕망에 영혼을 빼앗긴 수도사 메다르두스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이 소설은 죄와 운명, 욕망과 경건, 광기와 정체성, 인간의 이중성, 예술과 현실 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베를린의 문단의 총아로 등장한 호프만은 음악가로서의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816년(40세)에는 국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왕립극장에서 <운디네>를 처음으로 무대에 올렸는데, 이 오페라는 대성공을 거두어 다음 해 화재로 극장이 휴관될 때까지 연속 14회 공연기록을 세웠다.
한편 호프만은 1819년 국가 모반과 관련된 위험한 음모를 조사하는 조사위원회의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경찰청장과 갈등을 빚으면서 다음 해에 위원 직을 사퇴하기에 이른다. 그는 문필 활동에서 제약을 받았지만, 고등법원 법률고문관 직은 그대로 고수한다. 호프만은 선동가 혐의를 받은 사람들을 위해 소견서를 제출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자유주의 운동을 선동했다는 혐의로 수감된 체조 창시자 얀(Friedrich Ludwig Jahn)의 석방을 요구한 일이었다. 체제에 반대하는 자들에 대한 더 가혹한 처벌을 주장하면서 선동가들의 박해에 앞장섰던 경찰청장 캄프츠는 이에 대해 극히 불만이었다. 그러던 중에 호프만은 1822년 경찰청장 캄프츠를 풍자하는 내용을 담은 동화소설 ≪벼룩 대왕(Meister Floh)≫을 썼다가 작품이 압류되고 호프만에 대해서는 징계 심사가 진행된다. 이러한 와중에 이중생활을 하며 펼친 창작에의 열정은 건강에 무리를 가져왔고 척수 결핵으로 점차 마비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호프만은 결국 1822년 6월 25일 46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호프만의 문학 활동은 크게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칼로풍의 환상집≫(1805∼1815년 집필, 1814∼1815년 출간)
2) ≪밤의 풍경들≫(1814∼1817년 집필, 1816∼1817년 출간), ≪악마의 묘약≫(1814∼1816년 집필, 1815∼1816년 출간)
3) ≪세라피온의 형제들≫(1815∼1821년 집필, 1819∼1821년 출간), ≪클라인 자케스≫(1818년 집필, 1919년 출간)
4) ≪수코양이 무르의 인생관≫(1819∼1821년 집필 및 출간),≪브람빌라 공주≫(1820년 집필, 1821년 출간), ≪벼룩 대왕≫(1821∼1822년 집필, 1822년 출간)

호프만의 작품 경향을 보면, 이미 초기의 ≪칼로풍의 환상집≫은 예술가에 관한 이야기 외에도 동화 한 편, 밤의 작품 한 편 등 호프만의 전체 작품에서 나타나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아울러 이 작품집에서는 틀 구조, 분석적 전개, 상호 텍스트성, 아이러니, 풍자와 유머 등 호프만의 글쓰기 방식이 모두 발견된다. 그러나 초기에는 사회 속 예술가의 문제가 전면에 부각됐다면,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일반적인 문제, 즉 사회에서의 개인과 특히 시적인 심성을 가진 사람들의 역할과 견해에 관한 문제들이 문학적으로 형상화된다. 세계관의 측면에서 보면, 초기 작품들은 삶과 외적 현실에 대해 다른 현실, 즉 내면의 삶이나 예술을 이원론적으로 대립시키는 경향을 보인다. 이에 비해 후기 작품에서는 두 세계의 균형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전체적으로 호프만이 주목한 것은 바로 존재의 이중성, 외적 현실과 내면세계 사이의 긴장관계다. 이것은 특히 ≪모래 사나이≫, ≪브람빌라 공주≫, ≪악마의 묘약≫에서 잘 드러난다.
예술가 상과 관련, 초기 작품 <기사 글루크>에 등장하는 예술가(크라이슬러)가 추구하는 예술은 수용자의 이해에는 전혀 가치를 두지 않고 수용자 대중에 영합하는 것은 오락으로 평가절하된다. 하지만 ‘광기’의 조짐을 보이는 이러한 예술은 ≪모래 사나이≫에서는 예술가의 고립을 초래하며 시민사회로부터도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게 된다. 호프만은 대중에게 외면당하는 예술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셰익스피어를 모범으로 삼아 ‘생동감’과 긴장을 추구하는 실험적 글쓰기를 추구하는데, 이는 특히 ≪악마의 묘약≫, ≪밤의 풍경들≫에 실린 작품들, 그리고 ≪수코양이 무르의 인생관≫ 등에 잘 드러나 있다. 특히 호프만이 죽기 전 3년 동안에 걸쳐 몰두했던 작품 ≪수코양이 무르의 인생관≫는 호프만의 예술가 인생을 결산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수코양이 무르를 1인칭 화자로 등장시켜 자신의 인생 역정을 이야기하는 형태로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는 연대기적으로 수코양이의 자서전과 불완전하게 전해진 낭만주의 예술가 악장 요하네스 크라이슬러의 전기가 병렬적으로 제시되는데, 교양소설의 요소들과 모티브에 대한 패러디 내지 풍자를 담고 있을 뿐 아니라 두 인물의 전기가 내용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상호 텍스트성’을 보여주는 현대적인 서사 기법이 동원되고 있다. 따라서 1960년대 이후 호프만의 생동감 넘치는 혁신적인 글쓰기가 ‘현대성’의 기준에서 새로운 평가와 주목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호프만은 이미 당대의 대중에게 널리 읽히는 인기 작가였다. 특히 무명 시절에 출간했던 ≪칼로풍의 환상집≫은 독자들은 물론 비평가들에게서도 대단한 호응을 거두었으며, 이후 작품들에 대해서도 독자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영국에서는 특히 ≪악마의 묘약≫과 같은 호프만의 괴기스러운 글쓰기가 흥미를 끌었다. 1820년대 유럽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던 작가 월터 스콧은 자신의 위상이 흔들리는 것을 우려해 호프만의 글쓰기 방식에 반대하는 기고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독일에서 호프만은 특히 고전주의자들에게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는데, 고전주의의 대가 괴테는 호프만의 천재성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반시민적, 병적인 요소’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아이헨도르프나 장 파울도 호프만의 작품에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으며, 후에 하이네가 호프만의 작품을 ‘스무 권으로 된 끔찍한 비명’이라고 평한 것도 괴테의 지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프만은 프랑스에서는 이미 당대에 호프만 전집이 출간되는 등 ‘호프만식’ 환상적 글쓰기에 대한 열풍이 일어났으며, 발자크에서 보들레르에 이르기까지 많은 작가들의 인정을 받았다. 이어 호프만은 프랑스를 거쳐 러시아에도 전파되어 도스토옙스키, 푸시킨, 고골 등의 세계적인 작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호프만의 인기가 당대에 그리고 후대에도 지속된 데는 그의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음악 작품들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바그너는 ≪세라피온의 형제들≫에서 이야기를 이끌어내어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를 작곡했으며, 자크 오펜바흐의 오페라 <호프만의 이야기>는 호프만의 작품 주인공들의 운명을 소재로 하고 있다. 또 차이콥스키는 호프만의 동화 <호두까기 인형과 생쥐 왕>을 기초로 <호두까기 인형>을 작곡했으며, 파울 힌데미트는 호프만의 <스퀴데리 양>에서 이야기를 빌리고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카르디야크(Cardillac)>를 만들었다.

역자 - 권혁준
권혁준은 서울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독문학을 공부하고, 독일 쾰른에서 독문학, 영문학, 철학을 전공한 후 프란츠 카프카 연구로 독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한양대, 이화여대, 동덕여대에서 근현대 독문학, 독일문화 및 유럽문화, 독일영화사 등을 강의하고 있으며, 역서로는 헤닝 만켈의 범죄추리소설 ≪다섯 번째 여자≫와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테라피≫ 등 다수가 있다.

목차

모래 사나이
나타나엘이 로타르에게
클라라가 나타나엘에게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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