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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오 크뢰거 상세페이지

토니오 크뢰거작품 소개

<토니오 크뢰거> ≪토니오 크뢰거≫는 토마스 만이 28세 때 발표한 중편소설로 정신을 본질로 하고 있으면서 삶에 대해 끊임없는 동경을 하는 토니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속편이라 할 수 있으며, 죽지 않고 살아서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하노의 고백’ 이라고도 일컬을 수 있는 토마스 만적 ‘젊은 베르터의 고뇌’다.


출판사 서평

독일 작가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의 중편소설이다. 토마스 만의 문학 인생을 다섯 단계로 나눌 때, 제1기인 1903년에 나왔다. 이때 그는 ‘예술성과 시민성의 갈등’으로 고뇌하고 있었다.

‘문학은 결코 천직(天職)이 아니라 저주’라고 하는 섬뜩한 표현이 들어 있는 중편소설 ≪토니오 크뢰거≫는 토마스 만(1875∼1955)이 28세 때 발표한 작품이다. 이미 25∼26세 때 불후의 장편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로 세상을 놀라게 한 터여서 ≪토니오 크뢰거≫는 세인들의 지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잘 알다시피 토마스 만은 괴테를 좋아했고 자기 문학의 모범으로 삼았다. 그래서 괴테가 ≪젊은 베르터의 고뇌≫에서 베르터를 죽이고 바이마르로 떠나가서 그곳에서 고전주의의 중심인물로 되었던 것처럼, 토마스 만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에서 3, 4세대 토마스 부덴브로크와 하노 부덴브로크를 파멸시킴으로써 예술가적 위기를 극복하고 재충전의 전기로 삼으려고 했다. 그리하여 나온 그 작품이 ≪토니오 크뢰거≫였다.
토마스 만은 ≪토니오 크뢰거≫를 ‘나의 베르터’라고 표현했다. 그는 ≪토니오 크뢰거≫의 성립에 관해, 그 구상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쓰고 있던 시기에 했으며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뤼베크를 경유한 덴마크 여행에서 받은 인상을 작품에 반영했다고 말한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통해 죽음의 극복을 시도했다고 한다면 ≪토니오 크뢰거≫를 통해 삶에 대한 긍정을 시도했다. 즉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에서 삶의 세계에 있으면서도 죽음(정신)에 대하여 거부할 수 없는 하노의 이야기를 했다면, 이번에는 ≪토니오 크뢰거≫에서 정신을 본질로 하고 있으면서 삶에 대해 끊임없는 동경을 하는 토니오의 이야기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토니오는 그 자신의 ‘순수하지 못한 양심’으로 고뇌하는 작가이자, 예술에 전념하기 위해 일상적 삶을 회피하면서도 삶에서의 도피를 배반으로 느끼는 예술가다. 그에게 문학은 ‘결코 직업이 아니라 저주’다. 토니오는 “언어란 인간의 감정을 해방시켜 준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의 감정을 차갑게 만들어 얼음 위에 올려놓는 도구 아닐까요?”라고 말한다. 토니오에게 예술가란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이다. 그래서 그는 “감정이란, 따뜻하고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란, 언제나 진부하고 쓸데없는 것일 수밖에 없어요. 예술적인 것은 오로지 우리들의 타락한 신경 조직, 가식적인 신경 조직에서 비롯되는 불안·초조감과 차디찬 황홀경일 따름입니다. 우리 예술가들은 일상의 인간적인 것에서 벗어나 비인간적인 것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고, 또 이상하게도 인간적인 것과는 동떨어져 아예 관계 자체를 맺지 않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고 읊조린다.
이 작품은 어떤 의미에서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의 속편이라 할 수 있으며, 죽지 않고 살아서 예술가의 길을 걷고 있는 ‘하노의 고백’ 이라고도 일컬을 수 있는 토마스 만적 ‘젊은 베르터의 고뇌’다. 건실하고도 경건한 북독일 시민이었던 아버지의 가업과 정신을 계승하지 못하고 어머니로부터 예술가 기질을 물려받은 토니오 크뢰거는 남쪽 지방 뮌헨으로 내려와 타락과 온갖 모험을 일삼는다. 그러나 그는 남독일 사람들의 예술가인 척하는 태도와 냉혹성보다도 북쪽 자기 고향 사람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인생을 그리워하고 사랑하게 된다.


저자 프로필

토마스 만 Thomas Mann

  • 국적 독일
  • 출생-사망 1875년 6월 6일 - 1955년 8월 12일
  • 학력 뮌헨공과대학교
  • 경력 1938년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초빙교수
  • 데뷔 1894년 소설 '전락'
  • 수상 1929년 노벨 문학상

2014.10.30.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저자 - 토마스 만(Thomas Mann, 1875∼1955)
유명한 문예이론가 루카치는 세계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 한 사람을 들라는 질문에 바로 토마스 만을 꼽았다. 그의 작품 속에는 인생에 대한 단면적인 묘사가 아닌 세계와 인생의 총체성이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토마스 만의 작품은 간결한 문장으로 끝나는 법이 좀체 없으며, 글 자체가 건조체이고 만연체인데다가 내용 또한 언제나 이중적 의미를 띤다. 어렵다 하더라도 재미라도 있으면 많은 독자층을 보유하겠지만, 아쉽게도 그것 또한 전혀 그렇지 못하다. 그의 해박한 지식에 보통의 독자는 기가 눌리고 만다.

독일 고전주의의 괴테에 비견되는 20세기 독일문학의 대표주자인 토마스 만은 1875년 6월 독일 북부의 한자동맹 소속 도시 뤼베크의 부유한 집안에서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으며(세계적인 작가 하인리히 만이 바로 그의 형이다), 1955년 8월 스위스 취리히 근교에서 타계했다. 뤼베크의 참정의원을 지낸 아버지로부터는 냉철한 사고와 도덕적인 기질을 이어받았고, 독일인과 브라질인의 혼혈인 어머니로부터는 감각적이고 분방한 예술가 기질을 물려받았다. 이것이 바로 ‘시민성’과 ‘예술성’으로 일컬어지는 그의 이원성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는 니체가 말하는 아폴로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모순을 안고 태어났던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가 사망한 후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가족은 뮌헨으로 이주했다. 토마스 만은 여기서 잠시 보험회사 견습사원으로 지내다가 뮌헨 대학에서 청강하면서 문학의 길을 준비하게 된다.
청년 시절 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준 것은 쇼펜하우어, 바그너, 니체였다. 여기에 대해 토마스 만 스스로도 ≪한 비정치인의 고찰≫에서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나 자신의 정신적·예술적인 교양의 기초를 자문할 때, 내가 거명하지 않을 수 없는 세 이름, 강렬한 빛을 발산하며 독일의 하늘에 나타난, 영원히 결합된 정신의 3연성(連星)- 단지 친밀한 독일적 사건이 아니라 유럽적 사건을 나타내는 그 이름은 쇼펜하우어, 니체, 바그너인 것이다.”
그리고 토마스 만이 문학 활동을 시작한 1890년대 중엽에 자연주의는 이미 위기에 빠졌고, 반합리주의적 문예사조인 신낭만주의, 인상주의, 상징주의가 득세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문화사 및 문학사적 견지에서 볼 때, 토마스 만은 19세기의 전통적 문화 체제를 부인하고 새로운 혁신을 지향하는 20세기 문화의 발판인 ‘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토마스 만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본질을 한마디로 얘기하자면, 생과 예술의 갈등이며 이원성의 문제다. 다만 삶과 정신, 자연과 정신, 관능과 지성, 개체성과 일반성 등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원성의 갈등과 그 극복 방식이 토마스 만의 전 작품에서 상이하게 나타날 뿐이다. 또한 토마스 만은 열세 권의 전집이 말해 주듯 엄청난 양의 작품을 썼기 때문에 그의 생애를 추적해 그의 전 작품을 논한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만의 작품세계를 알아보기 위해서 토마스 만 연구자들은 그의 창작 시기를 다음과 같이 크게 세 단계, 또는 다섯 단계로 나누기도 한다.

세 단계:
① 초창기 작품 시기: 갈등의 고뇌(≪토니오 크뢰거≫,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② 조화·모색 시기: 적극적인 생의 긍정(≪마의 산≫, <마리오와 마술사>)
③ 성숙의 노년기: 신화와 전설 세계로의 몰두(≪요제프와 그 형제들≫, ≪파우스트 박사≫)

다섯 단계:
① 1893∼1914년: 예술성과 시민성의 갈등
② 1914∼1925년: 위기와 새로운 출발
③ 1926∼1942년: 인간성의 이념
④ 1943∼1950년: 파우스트 시대
⑤ 1951∼1955년: 에로틱과 예술의 사회적 의무

다섯 단계로 나누었을 때, 각 단계의 대표적 장편소설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1901), ≪마의 산≫(1924), ≪요제프와 그 형제들≫(1943), ≪파우스트 박사≫(1947),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회상의 제1부≫(1954)라고 볼 수 있다.

토마스 만이 문학 활동을 시작할 시기는 자연주의의 쇠퇴와 더불어 비합리적 물결이 쇄도하는 세기 전환기이며, 따라서 ‘세기말의 종말 감정’과 ‘몰락감’이 당시의 어두운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데카당스’라는 말로 집약되는 토마스 만 초기의 예술적 경향에는 예외 없이 삶과 죽음의 문제가 드러난다. 세기말의 암울한 데카당스적 분위기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토마스 만은 1882년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후 학창 시절에 대한 토마스 만의 추억은 좋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권위적인 학교 운영자의 매너리즘을 비판했으며, 그들의 정신과 훈육, 수업 방법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했다.
1891년 토마스 만이 16세 되던 해 아버지가 사망하고 가업인 곡물상마저 파산해 버리자 어머니 율리아는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마흔도 채 넘지 않은 나이였지만, 어머니는 재혼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아이들 곁에서 살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가 죽고 옛집이 사라진 뒤로 점점 더 답답하게 느껴진 협소한 뤼베크가 아니라 보다 탁 트인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살고 싶어 했다. 이듬해 어머니 율리아는 뮌헨으로 떠났고, 토마스 만은 고등학교를 마치기 위해 뤼베크에 혼자 남았다.
17세의 토마스 만은 학교 생활에 어느 정도 적극성을 보였다. 여러 과목 중에서도 그는 음악과 문학을 특히 좋아했고, 시대사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토마스 만에게 학교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수업 시간에는 마지못해 끝까지 앉아 있었지만, 저녁 시간의 대부분은 오페라 극장에서 보냈다. 고향도시 뤼베크의 오페라 극장에서 알게 된 리하르트 바그너 예술과의 만남은 토마스 만 인생에서 예술적 주요 사건이었다. 또한 이 시절에 ≪봄의 폭풍≫이라는 교지를 창간하여 시와 비평문을 기고했다. 당시 그의 문학적 우상은 하인리히 하이네였다.
1894년 3월 토마스 만의 학창 시절은 끝났다. 그는 고등학교 졸업을 포기하고 가족이 있는 예술의 도시 뮌헨으로 이주하게 되며 ‘죽음’의 세계라고 표현한 바 있는 ‘문학’의 세계에 마침내 발을 들여놓게 된다(토마스 만은 그 후 40년 가까이 뮌헨에서 살았다). 토마스 만은 몇 년 뒤인 1901년 2월 13일 형 하인리히 만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문학은 죽음’이라고 표현한 바 있다. ≪토니오 크뢰거≫에도 ‘문학은 결코 천직(天職)이 아니라 저주다’라는 표현이 나타난다. 그해에 1894년에 썼던 최초의 단편 <타락>을 ≪사회≫지(誌)에 발표한다.
1895년 7월 토마스 만은 당시 형 하인리히 만이 체류하던 이탈리아로 최초의 외국여행을 시도했다. 10월에 다시 뮌헨으로 돌아와 뮌헨 공과대학에서 역사, 미술사, 문학사 등을 청강하며 1년 뒤인 1896년 말 ≪짐플리치시무스≫지에 실린 단편 <행복에의 의지>를 탈고했다.
1896년 10월 토마스 만은 다시 이탈리아로 떠났는데, 우선 베니스에 들른 후 로마를 거쳐 나폴리를 여행했고 마지막에 로마에서 형 하인리히와 재회했다. 이때 토마스 만은 베를린의 피셔 출판사에서 발행하는 한 잡지에 단편 <키 작은 프리데만 씨>를 보냈다. 잡지사에서는 그 소설을 수락했을 뿐만 아니라, 그가 보관하고 있는 다른 소설들 모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토마스 만은 <환멸>, <어릿광대>, <토비아스 민더니켈> 등의 작품을 보내 주었는데, 출판인 사무엘 피셔는 이 소설들에 무척 만족해했고 이제는 장편소설을 쓰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토마스 만에게 권유했다. 그래서 토마스 만은 최초의 장편소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01년 10월 ‘한 가문의 몰락’이라는 부제가 붙은 두 권짜리 장편소설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 초판이 나왔다.
1903년에는 중편 ≪토니오 크뢰거≫를 발표했으며, 비슷한 시기에 역시 시민성과 예술성을 주제로 한 <트리스탄>을 내놨다. 이 작품은 토마스 만의 아이러니 수법이 특히 잘 드러나 있는 대표적 단편이다.
1905년 2월에 뮌헨 대학 수학 교수인 프링스하임의 딸 카티아 프링스하임과 결혼하고, 그해 11월에 장녀 에리카 만이 출생한다. 1909년에는 독일의 어느 소공국을 무대로 하는 중편 ≪대공전하≫를 발표하여, 고독한 예술가적 존재를 사랑과 결혼에 의하여 삶의 세계와 손을 잡게 한다. 1911년 5월 휴양지에서 존경해 오던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의 서거 소식을 접한 것을 경험으로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쓰기 시작하여 이듬해 발표한다. 이것은 토마스 만의 초기 작품 중 가장 긴 단편소설로서 여기서 토마스 만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예술가에게 비판을 가하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빌헬름 시대’ 독일의 군인정신 및 프로이센적 도덕주의가 지니고 있는 위험성과, 아울러 제1차 세계대전 직전 독일 사회의 분위기와 경직된 도덕규범에 대해서도 비판하고 있다.
1915년 보수적 견해를 피력하는 에세이적 논설문 <프리드리히와 대동맹>을 발표했고, 이어 ≪한 비정치인의 고찰≫의 집필에 들어가 이 작업에 꼬박 2년간 몰두했다. 600쪽이 넘는 대단한 분량의 저작이 1918년 10월에 완성되었다. 프랑스적 민주주의나 문명 개념을 독일의 문화 개념과 대립적인 관점에서 서술한 방대한 저작 ≪한 비정치인의 고찰≫은 토마스 만의 사상의 한 전환점이자 작가 생활의 요약인 동시에 과거와의 작별이었다. 이 저작이 나오기 전까지 토마스 만은 현실의 사건들과는 동떨어진 예술가였으나, 이제는 여러 면에서 그는 유명한 정치적 저널리스트였다. 비록 자신은 정치와의 관계를 완전히 부정했지만. 이로써 진보적 사고를 지녔던 형과 본격적으로 불화하기 시작했다.
1922년 소설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 어린 시절의 책≫을 출간했고, 보수적 정치관을 지양하는 연설문 <독일 공화국에 대하여>라는 강연을 하면서 독일 청년층에 민주주의 지지를 호소한다.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문화사절 자격으로 국외로 강연 여행을 다니는데, 이때 형 하인리히와 벌이던 형제 논쟁이 그 해결점을 찾게 된다. 1924년, 전쟁으로 집필이 중단되었던 대작 ≪마의 산≫이 출간된다.
1929년 스웨덴 한림원은 ≪부덴브로크 가의 사람들≫에 대해 노벨 문학상을 수여했다. 토마스 만은 ≪마의 산≫이 없었으면 노벨상을 받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듬해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비판한 단편 <마리오와 마술사>를 출간했다. 이탈리아의 어느 해수욕장에서 일어난 우발적 살인사건 이야기가 소재다.
괴테 서거 100주년인 1932년에 즈음하여 토마스 만은 <시민시대의 대표자로서의 괴테>, <작가로서의 괴테>라는 강연을 하면서 인류애의 고귀함을 역설한다. 이듬해 1월 히틀러가 독일 수상이 되자, 뮌헨 대학에서 <리하르트 바그너의 고뇌와 위대성>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한 후 국외로 강연 여행을 떠나 그대로 망명한다. 스위스 취리히 호반에 거처를 정한 후, 당분간 정치적 활동을 자제했기 때문에 이로 인해 다른 망명 문학가들의 오해를 받기도 했다. 나치 정권에 대한 토마스 만의 첫 공개적 반박은 1935년 4월 니스에서 개최된 ‘지식인연합위원회’ 회의 석상에서 발표한 <유럽이여, 경계하라!>였다. 연이어 이듬해 6월에는 부다페스트에서 <인문학과 휴머니즘>이라는 제목으로 ‘자유의 살해자에 대한 비판과 강건한 민주주의의 필연성’, 즉 진보에 대한 능동적 옹호가 필연적인 이유를 강도 높게 피력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토마스 만은 히틀러 타도를 위해 영국 BBC 라디오 방송에서 제안한 <독일 청취자 여러분!>이라는 제목의 논평을 4년 6개월 동안 매월 한 번 정도 방송하며, 독일 국민들에게 히틀러 정권의 비민주성과 비인간성을 호소했다.
1944년 토마스 만은 미국 시민권을 획득하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선거의 참모 역할을 하게 되며 루스벨트는 그해 11월 대통령에 당선된다. 1945년과 1946년 사이에 토마스 만은 사방에서 요청해 오는 사회적 의무와 강연으로 완전히 지쳐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 그는 아도르노와 토론 및 논의를 계속 진행했는데, 왜냐하면 당시 그는 소설 ≪파우스트 박사≫의 한 부분, 즉 순수 음악적인 성격의 장을 집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1947년 초 ≪파우스트 박사≫가 완성된다. 이 작품은 작곡가의 삶을 서술함과 동시에 음악적 창조의 본질을 다뤘다. 토마스 만은 ≪파우스트 박사≫를 가리켜 지난한 노력과 엄청난 고통의 대가를 치른 가장 험난한 책이라고 했으며, 또 그가 가장 사랑한 책이었다고 했다. 이어서 1948년 여름에는 ≪파우스트 박사의 성립≫이라는 연대기를 쓰기 시작했다. ‘소설의 소설’이라는 부제를 지닌 이 책을 그는 단 3개월 만에 탈고했다. 이 연대기는 ≪파우스트 박사≫의 생성 과정 및 계획, 형상화에 대해 보고하는 일기다. 물론 소설에 대한 보고가 연대기의 모든 것은 아니다. 거기에는 토마스 만의 가족과 친구들에 관한 언급이 들어 있다.
만년의 대표작으로는 ≪선택된 인간≫(1951)이 있다. ‘착한 죄인’ 설화의 아이러니적 해석이자 중세에 성립된 오이디푸스 동기의 기독교적 판본의 패러디, 즉 중세문학의 패러디다. 토마스 만은 “모든 의미에서 이 ≪선택된 인간≫이 나의 후기 작품”이라고 칭했다.
≪선택된 인간≫ 발표 직후 그는 ≪사기꾼 펠릭스 크룰의 고백≫을 다시 집필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토마스 만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이지만 몇 가지 특이한 점을 지니고 있다. 집필 기간이 무려 50년이라는 점과 자서전적인 고백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토마스 만이 남긴 마지막 작품이자 미완성 작품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특히 중요한 것은, 토마스 만의 다른 모든 작품이 주도면밀한 가공에 따라 완결되어 출간된 데 반해, 이 작품은 세 번이나 미완의 단편으로 남아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1922년 <어린 시절의 책>, 두 번째는 1937년 암스테르담에서 펴낸 확대판, 세 번째는 1954년 <회상의 제 1부>가 그것이다.

지금까지 토마스 만의 작품 세계를 그의 삶의 행적을 따라 추적해 보았다. 작품의 수가 워낙 많아서 나름대로 꼭 필요한 작품들만 선별했지만, 그것의 수도 만만치 않다. 아무튼 토마스 만 초기 작품에서 나타나는 ‘삶과 정신, 생과 예술의 갈등’은 ‘삶에 대한 친근함과 휴머니즘’으로, 나아가 ‘예술의 사회적 의무’로 승화된다.
토마스 만은 독일 문화에 깊숙이 뿌리박은 가장 독일적인 작가이면서도 미국으로 망명했고, 전후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서도 분단된 독일의 어느 한쪽을 택하지 않고 스위스에 안식처를 정하고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국외 망명을 두고 독일을 배반했다고 보는 시각은 커다란 잘못이다. 괴테처럼 세계주의를 표방한 그는 실러 서거 150주년 강연에서 세계의 평화와 독일의 통일을 진심으로 염원했고, 그것이 생의 마지막 강연이 되었던 것이다.

역자 - 윤순식
윤순식은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인문대학 독문과 및 대학원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공군사관학교에서 독일어 교수를 지냈고, 독일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했다. 박사 후 연수(Post-doc) 과정으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현대 독문학을 연구했다. 한양대학교 연구교수를 역임하고 오랫동안 서울대학교에서 강의했다.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교양학부 초빙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는 <토마스 만의 소설 “마(魔)의 산(山)”에 나타난 반어성(反語性) 고찰(考察)>, <“부덴브로크 일가”에 나타난 아이러니 연구>, <작품 내재적 해석학으로서의 독어독문학>, <현대 독일어권 문학에 나타난 병의 담론>, <상상력과 현대사회에 대한 다층적 해석>, <병과 문학> 등 다수가 있다.
저서에는 ≪아이러니≫(한국학술정보), ≪토마스 만≫(살림출판사)이 있으며, ≪전설의 스토리텔러 토마스 만≫(공저, 서울대 출판부), 역서로는 ≪교양≫(공역), ≪정신병리학 총론≫(공역), ≪역사의 지배자≫, ≪작약등(芍藥燈)≫, ≪아이 사랑도 기술이다≫, ≪마의 산≫, ≪변신≫, ≪괴테, 토마스 만, 니체의 명언들≫, ≪로스할데≫,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등 다수가 있다.

목차

토니오 크뢰거

해설
지은이에 대해
옮긴이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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