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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훈 동시선집 상세페이지

권오훈 동시선집작품 소개

<권오훈 동시선집> 1975년 ≪월간문학≫ 동시 부문 신인상에 당선하고 한정동아동문학상, 우리나라 좋은 동시 문학상, 김영일아동문학상 등을 받은 권오훈의 대표작 선집이다. 이 책에는 <고드랫돌 넘기는 할아버지>, <미움> 등 시인이 고른 대표 동시 100여 편이 수록되어 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한국동시문학선집’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11명의 동시인과 시공을 초월해 명작으로 살아남을 그들의 대표작 선집이다.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아동문학연구센터 공동 기획으로 4인의 기획위원이 작가를 선정했다. 작가가 직접 자신의 대표작을 고르고 자기소개를 썼다. 깊은 시선으로 그려진 작가 초상화가 곁들여졌다. 삽화를 없애고 텍스트만 제시, 전 연령층이 즐기는 동심의 문학이라는 동시의 본질을 추구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편저자가 작품을 선정하고 작가 소개를 집필했으며,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다.



저자 소개

저자 - 권오훈
1937년 강릉시 오죽헌 마을(당시 경포면 죽헌리)에서 태어났다. 오죽헌은 강릉 시내에서 북쪽으로 약 4킬로미터의 거리에 있으며, 이율곡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이율곡 선생이 태어난 몽룡실(夢龍室)과 율곡 선생의 영정을 모신 어제각은 우리 집과는 50미터쯤 떨어져 있었다. 오죽헌 마을은 안동 권씨의 집성촌으로, 몽룡실 옆 일대에 오죽대가 무성하게 자라서 오죽헌이라는 마을 이름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몽룡실·어제각은 이율곡 선생의 외손인 권씨(종손)가 관리했는데 성역화가 되면서부터 국가가 관리하게 되었다.
1940년 47세로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며 그때 내 나이가 네 살이었다. 죽음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나이였다. 고모의 말에 따르면 내가 철부지여서 장삿날에 동네 사람들이 모인 것이 그저 좋아 머리와 허리에 새끼를 매고 막대기 짚고 어이어이 곡을 흉내 내면서 놀았다고 한다.
난 이복 삼 형제의 막둥이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너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사진 한 장 없어서 아버지의 얼굴도 모르고 자랐다. 아버지가 상처하고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에 어머니와 재혼하여 큰형과 나는 나이 차이가 많은 이복형제다. 하여 집안의 실권은 큰형과 형수님이 잡고 있었고, 또한 이복형제여서 어릴 땐 큰형과 형수를 몹시 무서워하며 자랐다. 후실인 어머니는 안방에서 골방으로 밀려났고 틈틈이 삯바느질하며 작은형과 나를 사랑으로 키웠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비교적 부유한 축에 속했으나 이복형제의 막내여서 정신적으로는 가난했고 천하고 서럽게 자랐다.
어렸을 때부터 오죽헌 마을에서 자라다 보니 몽룡실 앞마당은 우리 또래들의 놀이터였다. 어제각 옆 흙담에 올라가 놀다가 무너뜨려서 야단을 맞기도 했다. 그 앞 마리질(말이 다니던 길) 공터 또한 우리들이 항시 모여 노는 곳이었다.
6·25 전쟁 때도 이곳 마리질에서 우리 또래들은 짚으로 만든 공인 짚볼을 차고 놀았다. 그러다가 건너편 마을(지변리)로 인민군 패잔병들이 내려오는 바람에 우리 가족은 총소리를 뒤로하고 강릉 시내 쪽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1944년 일제 식민 통치 하일 때 경포국민학교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1학년이 되었고, 2학년이 되어 해방을 맞았다. 강릉사범병설중학교 1학년을 다닐 때 6·25전쟁이 발발했다. 이때만 해도 문학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살기에만 급급했을 뿐이다. 경포국민학교 4학년 때인가 학교 운동장 옆 미루나무 밭 언덕에서 학급 아이들이 글짓기를 했는데 내가 쓴 글을 담임선생님이 읽고 잘 썼다는 칭찬 한 번 받은 기억이 남아 있긴 하다. 그 시절만 해도 해방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또 시골이어서 읽을 만한 책이 별로 없었다. 거기다가 가정환경이 별로 좋지 않은 나는 책을 마음대로 구입해서 읽을 만한 여건도 되지 못했다. 사범학교 졸업할 때까지 학교에서 집에 오면, 사는 곳이 시골인지라 소를 먹이러 가지 않으면 땔감을 하려고 먼 산까지 찾아가서 나무를 해 지게에 지고서 어스름이 드는 저녁에야 돌아오고는 했다. 하여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어서 소 먹일 때, 소뿔에다가 고삐를 8자로 감아서 산에나 들에다가 풀어 놓아 풀을 뜯게 하고 풀밭이나 땅바닥에다 책을 펼쳐 놓고 엎드려서 밀린 숙제를 하기도 하고, 땔감을 해 지게에 지고 오면서도 틈틈이 영어 단어를 외우고는 했던 기억이 난다. 내가 다닌 강릉사범병설중학교는 오죽헌 마을에서 약 4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이 등하굣길에 책을 들고 걸으면서 역사나 기타 암기 과목을 공부하기도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강릉사범학교에 가서야 문학에 대해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지만 적극적으로 매달리지는 않았다.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강원도였던 울진군의 노음초등학교로 첫 발령을 받았다. 경제적으로 다소 여유가 생기면서 문학 서적을 구입, 이에 심취하기 시작했다. 소설집과 시집을 닥치는 대로 읽고 누구의 지도도 받지 않은 채 나름대로 시를 쓰고는 했다. 교사 발령 후 1년간 교직 생활을 하다가 입대하게 되었다. 1년간 복무 뒤 제대하여 삼척군 근덕면 근덕초등학교로 복직했다. 명주군과 삼척군 등지를 전전하며 교사 생활을 하면서 이따금 교육지인 ≪새교실≫, ≪교육자료≫의 교원문원 면에다 <산까치>, <동심>, <내 이렇게 위하다가> 같은 성인 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산계초등학교를 끝으로 11년의 시골 교직 생활을 마무리하고 아무 연고도 없이 무작정 상경했다. 서울에서 자리를 잡기란 쉽지가 않았다. 현실은 냉혹하기만 했다. 청량리역 대합실 긴 의자에서 나흘을 자며 전전하다가 서울에 먼저 올라온 교우를 찾아가 거처를 정하면서부터 일자리를 구하러 다녔다. 종내 일자리는 구하지 못했다. 마침 서울시교육위원회에서 실시하는 산휴대치교사(産休代置敎師) 채용 시험이 있어 응시, 합격했다. 서울 송천초등학교에 근무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성북구 미아리 산동네에 단칸방 전세를 얻은 뒤에야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후 어느 날 우연히 교육지인 ≪새교실≫ 교원문원란에 동시 추천 제도가 있음을 보고 <쬐그만 봄바람>이라는 동시를 장난삼아 써서 보냈는데, 추천에 붙었다. 1973년이었다. 추천이 된 동시를 가지고 아동문학가인 엄기원 선배님을 찾아가 아동문학에 대한 조언을 받았다. 선배님이 박화목 선생님을 소개해 주었다. 이때부터 문학의 길로 들어서고자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1년 동안 매주 동시를 한두 편 써 가지고 박화목 선생님의 지도를 받았다.
그 무렵 시간이 나면 서점마다 들러서 동시집이란 동시집은 죄다 샀으며(그때는 서점에 동시집이 한두 권밖에 없었다) 많은 동시를 찾아 읽고, 쓰고는 했다.
그러다가 197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를 응모했다. 나중에 작품평을 보니 내 것이 최종 심사까지 올라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해 ≪월간문학≫에 다시 응모를 했는데 여기에 당선되어 문단에 들어섰다. 당선작은 <고드랫돌 넘기는 할아버지>로, 어릴 때 작은댁 할아버지가 밤낮없이 좋은 왕골자리를 매면서도 정작 당신은 꺼칠꺼칠한 짚자리를 깔고 앉아 가난을 이겨내며 고드랫돌을 넘기던 그 모습을 표현했다. 당선이 된 후 1년은 동시를 한 편도 발표하지 못했다. 당선이라는 막중한 책임감이라고나 할까 중압감이라고 할까, 거기에 눌려서 선뜻 발표를 못 하다가 간신히 용기를 내어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 작품에 대한 평이 좋아 비로소 자신감을 갖게 된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렇게 문단에 들어선 지 40년이 되었다. 그동안 참으로 수없이 동시를 썼고 지면에다 많은 동시를 발표했다. 문단 생활을 하면서 거둔 큰 보람이라면 많은 문학 선배·동료·후배들을 만난 일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윤석중, 이원수, 김영일, 어효선, 박화목, 박홍근, 석용원 선생님은 한국 아동문단의 거목들로 내가 존경하는 분들이었다. 이런 분들과 같은 시대에 함께 문학 활동을 하고 한자리에서 담소도 나눈 일은 나 개인으로서 엄청난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동시를 쓰면서, 전래동요를 동시에다가 접목하는 시도도 해 보았고, 남달리 짧게 쓰고자 노력도 해 보았고, 남보다 뛰어난 동시를 쓰고자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 결과는 미미하지만 혼신을 다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사실 쓰고서 며칠이 지난 다음에 다시 읽어 보면 탐탁지가 않아 버리는 일도 다반사였다. 노력만큼 결과가 좋지 않은 것은 내 능력과 재능이 부족한 탓이라고 믿는다. 써 놓고 보면 그 동시가 대체적으로 초등학교 고학년 수준에 맞는 감이 들고는 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쓴 동시지만 어린이(저학년) 눈높이에 맞지 않는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그만큼 아직도 동시 쓰기에 어려움을 겪는다. 앞으로 여생에서 이 어려움을 극복해 나갈 것이고 항시 새로 출발한다는 각오로 더 좋은 동시를 쓰고자 부단히 노력할 것을 다짐해 본다.

목차

시인의 말

1부 꽃 꽃 꽃

첫머리 동시
진달래꽃
꽃, 꽃, 꽃
집오리
아침 갈매기
제비꽃
가로수
꽃과 벌 나비
나비야,
나비
목련꽃

종달새
종달새 2
까치
까치집
웃음이란 그 꽃은
민들레꽃
봄 오는 들판에서
호박꽃과 벌
쬐그만 봄바람
햇살과 민들레
하얀 목련꽃
어미 민들레

2부 종이배를 접는 아이

종이배를 접는 아이
아침 해
아침 해 2
한글이라는 꽃
유리창
1
11
빗방울
강 메아리
분수
이슬방울
병아리
바람과 해오라기
미움
무지개
망원경
등온선
둥지
둥근달
달무리

시험 시간
반가상의 웃음
말이 없어도

3부 아기 물새

아기 물새
풀벌레 우는 밤
잠 안 오는 밤
어머니
아빠의 자전거
아기 염소
아기 새
아기 배꼽
시계의 초침 소리
수정궁을 그리는 아이
섬 아침
서울의 달
서로 어울려야
새 연잎들
산골짜기에서

빈 교실에는
바람 부는 저녁
물방앗간
물놀이하는 아이들
노을
노을 길
노을이 든 강
나사돌리개
개펄에서

4부 조롱박 교실

조롱박 교실
풀씨와 소라 껍데기
톱니바퀴
토끼
타조
종이 새
참새 한 마리
쪽지 편지
옹달샘 속에
여름밤
석류
삽사리
산골 풍경
사랑이 초록빛처럼
사랑이라는 것
사랑으로 메워 봐
붓 씻기

노래 귀로 걸러내면
민들레와 꾀꼬리
물새가 여는 아침
달빛은 고양이
늙은 삽사리
겨울 참새들

5부 아버지의 바다

아버지의 바다
고드랫돌 넘기는 할아버지
바다에서 온 아이
눈 오는 저녁
기도하면
괄호는 사랑의 자리
꼬빡연
홍시
함박눈
팽이
피뢰침
프리즘
풍향계
풍선
타향에서
체온계의 이야기
엄마의 꿈나무
엄마의 가지치기
불꽃놀이
무궁화
밤하늘
밤바다
바위
댕이네
산타 아이

권오훈은
지은이 연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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