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붓다, 일어서다 상세페이지

종교 불교

붓다, 일어서다

21세기 한국과 불교의 커뮤니케이션
소장종이책 정가13,000
전자책 정가30%9,100
판매가9,100

붓다, 일어서다작품 소개

<붓다, 일어서다> 나이 든 사람들이 무사무탈을 비는 종교, 수능 날 〈9시 뉴스〉 첫 화면에 나오는 종교, 이따금 “00사 분쟁”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종교……변색된 불교의 몇 가지 이름 가운데 하나다. 오랜 세월 불교와 함께 호흡해온 이 땅이지만 정작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은 불교와 그리 친하지 못하다. 소통하려는 노력도 보기 드물다. 어쩌면 오늘날의 불교는 21세기 한국 사회 곳곳에서 여론을 형성하고 있는 대다수 사람들과 젊은 세대에게 그저 고색창연한 유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만나게 될 한국 최고의 선승들이 던지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 불교는 본래 산중의 화두로 머무는 종교가 아니었다. 기복 신앙의 모체도 아니다. 불교를 “산중수행”에 “기복 신앙의 특성”을 가진 종교쯤으로 이해한다면 이는 절대적인 오해이다. 붓다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어긋나는 탓이다. 이 책은 “붓다의 진정한 가르침은 무엇인가?”, “불교는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획득하는가?” 하는 물음을 안고 저자가 오랫동안 천착해온 생각의 결과물을 글로 정리한 것이다. 따라서 독자들이 개인과 사회, 정치와 경제, 과거와 미래 등 목전의 고민거리들을 불교라는 매개체를 통해 조용히 성찰하는 데 도움을 준다. 비단 그것만이 아니다. 이 책은 개인의 성찰을 자극하고 독려하는 것 외에 진정한 “소통”의 열망을 노래한다. 불교를 오해하고 있는 불자들, 그리고 불교를 전혀 몰라서 생각의 물꼬를 트지 못하는 사람들과! 이 책의 울림이 오묘하며 깊고, 때로 서늘하다고 느끼는 근거이다. 저자는 또 대한민국의 불자들에게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에 아무런 불교적 시각을 갖추지 못하면서 당신은 과연 자신을 불자라고 할 수 있을까?” 하고. 그러면서 이제는 불교가 ‘산중의 금불상’ 앞에 절하며 기복을 갈망하는 데서 벗어나 십우도의 마지막처럼 “시장”으로 내려갈 것을 강조한다. 부처 본연의 가르침을 따라서. 이 책은 세상을 초연하게 보는 데 익숙한 불교인들에게는 급속도로 변화해가는 세상을 불교의 시각에서 바라보게 해주고, 또 불교를 낯설게 여기거나 고루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에겐 붓다의 가르침이 “지금 여기서” 생생한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깨달음을 경험하게 해준다. 종교인은 물론,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모든 독자에게 이 책을 권한다.


21세기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불교

아놀드 토인비는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으로 새로운 문명이 열릴 것으로 전망했다. 너무 많이 회자된 명제라 식상한 말이 되었지만, 그 의미를 온전히 성찰한 사람도 드물다. 세계 문명의 흥망성쇠를 평생 연구한 토인비는 왜 그런 결론에 이르렀을까? 사실 2012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대다수는 서양 문명의 세례를 받으면서 자랐다. 그 터전을 ‘근대 사회’라고 부르든 ‘자본주의 체제’라고 말하든 서양 중심의 문명이 지난 300여 년에 걸쳐 지구촌을 지배한 건 분명한 사실이다. 그리고 그 문명의 배경에는 기독교가 있다. 토인비조차 ‘불교와 기독교의 만남’이 중요하다고 말한 것은 이렇듯 지구촌의 문명의 기저가 된 기독교와 오랜 세월 동양의 정신 ? 문화를 일궈온 불교가 소통해야만 새로운 역사의 지평이 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암묵적으로 받아들이는 탓이다. 그만큼 지구촌에는 동서양의 만남이 중요하고, 그것을 상징하는 기독교와 불교의 커뮤니케이션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실제로 서양 문화의 중심축이던 기독교는 종래의 배타주의에서 다원주의로, 교리 중심주의에서 깨달음 중심주의로 변화하고 성숙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이 나라에서만 편협한 기독교 근본주의가 여전히 활개치고 있을 따름이다). 그래서 저자는 이제 불교도 낡은 종교라는 오명을 벗어던지고 이 땅의 전통문화를 살리는 일은 물론, 세계적 흐름에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불교의 세계관을 하루 빨리 정립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21세기와 불교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착상은 별로 새롭지 않다. 불교는 이미 서구에서도 명상과 심리치료에 적극 활용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의 본령은 과연 “심리치료”나 “수행” 혹은 “개인의 각성”에 있는 것일까?


붓다에게 “당신의 역할”을 묻다

불교는 이제까지 지구촌 사람들의 정서적 불안과 정신 장애를 해결하는 심리치료제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심신이 지친 사람들은 곧잘 산 중 사찰을 찾아가거나 미리 예약을 한 뒤 템플스테이를 떠난다. 사람들의 어지러운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 좋은 일임에 틀림없다. 실제로 붓다의 가르침 역시 고통을 넘어서는 데 있으므로 심리치료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면 그 또한 불교의 적절한 역할이라 하겠다. 하지만 불교가 21세기에 할 수 있는 일은 심리치료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리 되어서도 안 된다. 불교는 이제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 여기의” 사람들에게 구체적인 물음을 던지고 구체적인 답을 주어야 한다. 새로운 각도에서 또 전혀 고답적이지 않은 발상 아래서 정치와 경제, 사회, 인권 문제를 바라보아야 하고, 그것들을 조망하고 비판할 수 있는 건강하고 공정한 시각을 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한국의 불교는 여전히 대다수 국민에게 “산중 종교” 또는 “기복 종교”로 각인되어 있다. 미국과 유럽의 자본주의에 견주어볼 때 훨씬 더 치열하고 야만적인 경쟁 체제에 놓인 대한민국에서 말이다. 어쩌면 계층 간의 위화감, 서로에게 묻어나는 적대감이 너무 큰 탓에 종교(종교인)가 일찌감치 겁을 집어먹고 산사山寺로 혹은 대리석 성전으로 도망을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이 책에서 살펴보겠지만-불교의 고갱이인 제법무아(諸法無我)는 사실 현대인의 정신적 장애는 물론 사회적인 위기를 넘어서는 데에 매우 효과적인 가르침을 담고 있다. 불교는 원래 “산중 종교”가 아니라 “시장의 종교”였기 때문이다.


사회적 담론을 만들어가는 불교

이 책의 1부는 산중문답으로 구성되었다. ‘깊은 산 50년 선승은 뭘 권할까?’는 제목 그대로 저자가 한국의 깊은 산에서 50년 안팎 참선에 전념해온 일곱 명의 고승들을 찾아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물은 뒤 정리한 글들이다. 살불살조(殺佛殺祖)는 〈임제록〉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의 대표적 선승 임제는 “안으로나 밖으로나 만나는 것은 바로 죽여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며……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야만 비로소 해탈하여 어떤 물건에도 구애받지 않고 꿰뚫어 해탈하여 자유자재하게 된다”고 선언했다. 매우 통렬한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2부는 ‘심리치료를 넘어 불교의 뜻’을 묻는 글들을 모은 것이다. 회두토면(灰頭土面)은 머리에 재를, 얼굴에 흙먼지를 뒤집어 쓴 모습을 이른다. 바로 누구든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혼자 수행할 게 아니라 세속의 중생과 더불어 깨달음의 길을 걸어가라는 뜻이다. 2부는 그런 가르침을 담았다. 따라서 1부의 산중문답에서 세속으로 내려와 흙먼지와 재를 덮어쓰며 살고 있는 세상 사람들의 일상에서 붓다의 가르침을 찾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쟁점이 되었던 일들, 앞으로도 우리 삶의 질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시사 문제들을 불교적 시각에서 조명한 글들이다. 3부는 ‘해탈 다음에 왜 시장이라 했을까?’는 물음에 그 뜻을 성찰하고 답한 글들이다. 기실 그 물음은 십우도의 마지막 단계인 입전수수(入廛垂手)를 이른다. 십우도(十牛圖)는 선의 입문부터 해탈에 이르는 과정을 동자(童子)나 스님이 소를 찾는 것에 비유해서 묘사한 선종화(禪宗畵)다. 심우(尋牛), 견적(見跡), 견우(見牛), 득우(得牛), 목우(牧牛), 기우귀가(騎牛歸家), 망우존인(忘牛存人), 인우구망(人牛俱忘), 반본환원(返本還源)에 이어 마지막이 입전수수다. 해탈에 이른 뒤 시장으로 들어가 손을 내밀라는 가르침은 21세기의 우리에게 큰 감동을 준다. 현대인이 살아가는 구체적 생활의 시대적 과제와 정면으로 마주치라는 가르침인 탓이다.


출판사 서평

<본문 중에서>

스님께 세속의 사람들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길은 무엇인가를 물었다. 산문에 홀로 들어온 스님들과 달리 한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등바등 가족들의 생계를 꾸려가며 살 수밖에 없는 사람들과 스님이 얻은 깨달음을 조금이라도 나누고 싶어서였다.
“부처님께 와서 기도하는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갑갑한 일이 있을 때 친구에게 하소연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후련해지고 풀리지요. 하물며 부처님 앞에서 자신이 부닥친 문제를 털어놓고 이야기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다만 그 때에도 자신을 도와줄 부처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은 알고 있을 필요가 있어요. 좀 더 분명하게 말하면, 기도 들어줄 어떤 부처도 없습니다. 그런 부처가 있다면 대자대비하신 데 이미 기도하기 전에 다 들어주지 않겠습니까?”
어떤가. ‘부처님’을 ‘하나님’으로 바꿔도 통하는 이야기 아닐까?
적명 스님은 이어 기도하는 것도 좋지만 더 중요한 게 있다고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스님의 뜻은 간명했다. 기도보다는 스스로 부처가 되라고 권고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불교는 기독교의 전통과 확연히 대비된다.
“밖에서 찾는 것은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습니다. 안에서 찾아야지요. 제가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가장 권하고 싶은 게 참선입니다. 한꺼번에 많은 시간동안 참선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꾸준히 하는 참선입니다. 일상생활에 쫓기는 분들이 오랜 시간 참선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 하루 10분 내지 20분이라도 날마다 하겠다는 결심이 중요합니다. 자신의 일상생활 가운데 근원적 해탈을 위한 시간을 정해놓고 지속적으로 참선을 하면 자신의 생각이 열려 간다는 사실을 곧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몸 건강을 위해 보건체조를 하지 않던가요? 날마다 참선을 해 나간다면 바로 그것이 정신적 보건체조이겠지요.”
스님에게 산문으로 출가하지 않고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묻자 싱긋이 웃었다.
“머리를 깎고 안 깎고는 중요하지 않아요. 핵심은 스스로 부처를 이루는 데 있습니다. 일체 모든 게 미망임을 알고 놓아버리세요. 뭔가 밖에 들을 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 중심을 잡지 못했다는 고백에 지나지 않습니다.”
스님은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지녀야 할 미덕은 소유욕을 버리는 데 있다고 단언했다. 소유욕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실체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비롯하고 그것이 숱한 갈등을 빚는다고 강조했다.
“모든 게 실체가 없음(제법무아)을 꿰뚫으면 집착이 없어져 머물지 않게 됩니다. 그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으면 그것이 곧 무념입니다”
적명스님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선방으로 돌아갔다. 기기암 선방에서 맑은 입정소리가 오래오래 울렸다.
_ 본문 중에서


미국 월스트리트에 몰아친 ‘금융 허리케인’이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세계적 금융기관들이 줄지어 파산하자, 미국은 7000억 달러를 ‘구제 금융’으로 쏟아 부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유럽과 아시아의 금융시장이 요동치는 가운데 실물 경제에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래서일까. 더러는 경제가 어려워가는 상황에 불교가 ‘종교 편향’ 문제로 지나치게 정부를 물고 늘어진다고 눈 흘긴다. 심지어 종단 내부에서도 그런 목소리들이 솔솔 흘러나온다.
(…) 국민 통합은 결코 관념적 요구가 아니다. 부익부빈익빈을 심화시켜갈 이명박 정권의 경제정책을 바로 잡지 않는 한 국민 통합은커녕 경제 살리기도 불가능하다. 기실 이명박의 경제 살리기는 처음부터 잘못 짚었다. 지난 10년 동안 수출 대기업은 죽기는커녕 해마다 엄청난 순이익을 올렸기 때문이다. ‘경제 살리기’가 절실한 사람들은 비정규직을 비롯한 대다수 노동자, 농민, 영세자영업자, 중소기업이었다. 그럼에도 보라. 경제를 살리겠다는 대통령은 취임 뒤 줄곧 부익부빈익빈 정책을 추진해왔다. 대통령과 장관의 종부세가 한 해에 수 천만 원 줄어드는 감세정책을 제 손으로 강행했다. 바로 그것이 사회 분열 아니던가. 바로 그것이 탐욕 아니던가. 불교가 ‘경제 제대로 살리기’를 이참에 적극 주창하길 제안한다. 비단 다가올 범불교도대회만이 아니다. 국민 대다수와 소수 기득권층 사이에 점점 더 벌어지고 있는 분열을 치유하고 국민을 통합해가는 데 불교가 적극 나서야 옳다. 경제 살리기에 몰입해도 부족할 판국에 이명박 정권은 촛불시민 수사에 여전히 눈 빨갛다. 진정한 화합과 통합, 경제 제대로 살리기를 불교가 선구할 때다.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을 벅벅이 보여줄 때다.
_ 본문 중에서


결국 이명박 대통령은 공안정국을 더 강화하기 위해 ‘검찰 서열’을 무시하고 천 씨를 검찰총장으로 발탁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문화방송 피디와 인터넷 논객 수사도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가장 큰 문제는 용산 철거민 참사를 바라보는 자세다.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 용산 참사에서 살아남은 철거민들까지 살천스레 사법처리한 서울중앙지검장을 높이 평가했다는 기사를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옳은가. 찬찬히 짚어볼 일이다. 졸지에 가장을 잃은 철거민 유족까지 사법처리한 검찰 책임자, 천성관 서울중앙지검장은 그동안 떳떳하지 못한 돈으로 호화생활을 해온 사실이 드러났다. 바로 그런 생활을 누리던 검사가 철거민들의 피맺힌 죽음과 눈물을 과연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까. 굳이 물어볼 필요가 없을 터다. 더 큰 문제는 이명박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국정을 어떤 가치로 펴가고 있는지 또렷하게 드러났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권위주의적 사고나 부자 중심의 정책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의 천 씨에 대한 높은 평가에서 우리는 그의 ‘생명 경시’를 간파할 수 있다. 실제로 대통령은 용산 참사 앞에서 지금 이 순간까지 어떤 사과도 하지 않았다. 그가 천 씨를 검찰총장으로 발탁한 이유가 역설이지만 왜 사과하지 않고 있는지를 입증해준다. 이명박 정권의 1년 6개월을 톺아보면 생명에 대한 경시 정책을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정책도, 공공부문의 구조조정을 독려하는 모습도 그 보기다. 사회보장제도가 미약한 나라에서 노동자를 위협하는 법안과 정책을 무람없이 강행하는 밑절미엔 생명에 대한 경시가 깔려있다. 이른바 ‘4대강 정비 사업’도 마찬가지다. 토목사업으로 환경을 파괴함으로써 숱한 생명체의 생존을 위협할 수밖에 없다. 바로 그렇기에 불교인들에게 주어진 시대적 과제는 더 크다. 불교는 생명의 소중함을 어떤 종교보다 더 중시한다. 이명박 정부가 펴나가는 정책들은 불교의 가치와 정면으로 위배된다. 생명을 존중하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통령이 눈 뜰 수 있도록 끊임없는 문제 제기가 절실하다. 대한민국의 최고 의사결정권을 지닌 정치인이 ‘무명’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면 그만의 불행이 아니다. 국가적 어려움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_ 본문 중에서


“일본은 다신주의 국가여서 집집마다 섬기는 신이 있다고 한다. 그래서 기독교의 하나님도 수많은 신들 중 하나로 생각해서 잘 믿지 않는다고 한다. 너무 물질주의가 발달돼 하나님이 들어갈 자리가 없다고 한다.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야 복음이 잘 들어갈 수 있다. 이번을 계기로 이런 것에서부터 돌이키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교회의 대표적 목사가 한 말이다.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언급한 “이번을 계기로”는 지진이다. 결국 지진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 일어난 벌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조용기의 처남인 김성광 목사는 “일본에 재난이 많은데 그 이유가 죄”때문이라고 살천스레 말했다. “하나님이 ‘요것 봐라’는 마음으로 일본을 치고 흔드는 것”이라는 말은 듣기 섬뜩하다. “우상의 수가 800만이 넘고, 1억이 넘는 국민이 갖가지 우상에 절하기 때문”이라는 대목에선 편견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들을 보며 한국 기독교에 돌을 던진다면 속단이다. 한국 기독교에는 그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예수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살아 숨 쉬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예수살기’라는 모임이 있다. 예수살기는 2008년 3월 창립선언문에서 “교회는 성장주의와 물량주의에 빠져 반사회적, 반역사적, 반민주적인 길을 가고 있으며, 결국은 교회 내 윤리는 실종되어가고 있다”고 공언했다. 결코 쉽지 않은 선언이다. 인용한 대목에서 ‘교회’대신 ‘절’로 바꿔 다시 찬찬히 읽어볼 일이다.
예수 모임은 “기독교는 예수를 믿는 종교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내 삶의 모든 것이 예수를 중심으로 재구성되고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하나님께서 활동하시는 역사적 현장을 유기하고 예수를 따르는 삶을 개인화해버렸다. 역사를 외면하고 단지 종교 영역 안에 갇혀버린 기독교, 삶을 간과하고 단지 말의 잔치로 숨어버린 기독교는 지금 극심한 신뢰의 위기를 겪고 있다. 이제 더 이상 물러설 데가 없이 추락해버린 한국교회 모습은 어느 누구의 책임이라기보다 예수의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한 우리들의 허물임을 고백하며 회개하는 심정으로 예수 살기의 새로운 운동으로 나아가고자 한다”고 다짐을 밝혔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기독교’에 ‘불교’를, ‘예수’에 ‘붓다’를, ‘교회’에 ‘절’을 대입해보라. 오해 없기 바란다. 나는 지금 예수살기 모임을 빗대 불교의 오늘을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다만, 밖으로 기독교를 비판하며 정작 불교 안에 있는 문제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현실에 성찰을 촉구하고 싶을 뿐이다. 불교인이라면, 붓다의 가르침을 믿는다면, 새삼 말할 나위 없이 붓다의 길을 걸어야 마땅하다. 우리는 그 길이 무엇인지 다 알고 있다. 참선만이 불교의 고갱이가 아니다. 붓다는 평생에 걸쳐 탐·진·치, 삼독으로부터 벗어나라고 가르쳤다. 그 가르침으로 21세기를 살면 어떻게 살아야 옳을까, 바로 그것이 오늘의 불교인들이 진정으로 고심해야 할 화두 아닐까.
_ 본문 중에서


저자 프로필

손석춘

  • 국적 대한민국
  • 출생 1960년 1월 17일
  • 학력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언론학 박사
    고려대학교 대학원 정치학 석사
    연세대학교 철학 학사
  • 경력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
    2006년 한겨례신문 논설위원실 논설위원
    2003년 방송위원회 보도교양 제1심의위원회 위원
    2002년 한겨례신문 편집국 부장
    1991년 한겨례신문 기자
    1987년 동아일보 기자
    1984년 한국경제신문 기자
  • 수상 2005년 안종필 자유언론상

2014.12.12.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손석춘

저자 손석춘은 한겨레 논설위원과 언론개혁시민연대 공동대표, 복지국가와진보대통합시민회의 상임공동대표,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원장과 이사장을 역임했다. 언론학 박사로 현재는 건국대 커뮤니케이션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신문 읽기의 혁명1, 2권』과『새로운 바보를 기다리며』, 장편소설『아름다운 집』,『유령의 사랑』,『마흔아홉 통의 편지』를 발표했다. 민주언론상, 통일언론상, 한국언론상, 한국기자상, 안종필자유언론상을 수상했다.

목차

지은이의 말_이건희는 행복할까?
여는 글_21세기와 불교의 커뮤니케이션

1부 깊은 산 50년 선승은 뭘 권할까? -살불살조殺佛殺祖
1. 소유욕에 집착하는 이유를 짚어라
2. 무한경쟁으로 살 게 아니라 무한향상을
3. 얻는 것 못잖게 버리면 좋은 걸 왜 모르나
4. 어찌 죽일 게 부처나 조사만인가.
5. 욕망 채울수록 병은 깊어간다
6. 모든 걸 놓아라. 그래야 보인다.
7. 모든 사람을 부처로 대하라

2부. 심리치료를 넘어 불교의 뜻은? -회두토면灰頭土面
1. 붓다가 될 권리
2. 아름다운 절로 가는 길
3. 세속의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
4. 살인과 포화 앞의 슬기
5. 재산을 모두 호수에 버린 경지
6. 신문과 방송의 정견(正見)
7. 모든 기득권 툴툴 턴 붓다
8. 불교 개혁 어디까지 왔나?
9. 인터넷 시대 불교의 길

3부. 해탈 다음에 왜 시장이라 했을까? -입전수수入廛垂手
1. 십우도의 끝이 시장인 까닭
2. 탐욕의 경제와 불교적 대안
3. 참 잘 사는 길
4. 우리는 왜 ‘천년의 미소’를 잃었을까?
5. 불교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6. ‘선진국’의 뜻과 불교 싱크탱크
7. 오늘 한국 불교의 화두는?
8. 누가 이건희에게 ‘보시’를 가르칠까?
9. 붓다처럼

닫는 글_붓다가 일어선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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