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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삼국지 상세페이지

인문/사회/역사 역사

역사 삼국지

군웅할거에서 통일전쟁까지 184~280
소장종이책 정가43,000
전자책 정가30%30,100
판매가30,100

역사 삼국지작품 소개

<역사 삼국지> 지도와 사서로 읽는 삼국 전쟁사

위진남북조시대 국내 최고 권위자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 최진열 박사의 10년 노작!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와 진수의 정사『삼국지』를 넘어
가장 완전한 삼국지

국내 역사학자가 쓴 본격 삼국지 역사서이자 지도와 사서(史書)로 읽는 삼국 전쟁사. 군웅할거에서 삼국정립, 서진의 통일전쟁에 이르기까지, 난세에 답한 영웅들의 모든 이야기가 펼쳐진다. 저자 최진열 박사는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관련 국내 최고 권위자로 오랜 세월 삼국지 시대의 역사에 관해 연구했다. 저자는 진수의 정사『삼국지』뿐만 아니라, 『후한서』, 『자치통감』, 『진서』 등 그 시대를 다루는 거의 모든 사료를 분석하고 종합하여, 가장 객관적인 시각에서 통사 삼국지를 새롭게 구성하였다.
이 책 『역사 삼국지』는 삼국지의 시대적 배경을 이루는 지리와 지형, 인구와 경제, 군사 및 행정 제도 등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며, 삼국지의 극적 장면들을 구성하는 주요 전투와 군웅의 전략을 약 200개의 지도로 상세히 밝혔다. 국내에 출간된 삼국지 관련 도서 중 학문적 권위와 지식의 깊이, 인물과 역사 비평의 측면에서 가장 완성도가 높은 책이며, 모든 사료를 망라하여 집대성한 삼국지 역사의 최고 걸작이다.


출판사 서평

소설 삼국지와 정사 삼국지
후한 제국이 붕괴하면서 군웅이 할거하고, 위, 촉, 오 삼국이 정립하며 쟁투하는 스토리를 담은 ‘삼국지’는 오랫동안 동아시아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어떤 이들은 화려한 전투 장면과 극적인 이야기들 속에서 흥분과 감동을 느끼고, 또 어떤 이들은 각기 다양한 특질을 지닌 영웅들의 모험과 전략을 평가하며 그 속에서 인생사와 경영의 지혜를 얻고자 한다. 삼국지가 배경으로 하는 역사는 약 100년의 짧은 기간이지만, 수많은 방식으로 다양하게 변주되고 음미되는 동아시아 문화의 풍요로운 보고(寶庫)와도 같다.
한편으로 삼국지는 숱한 역사가들과 작가, 대중이 “현재의 관점과 지식으로 과거의 사건을 재단하고 평가한” 대표적인 예다. 그런 점에서 나관중의 소설 『삼국지연의』와 진수의 정사 『삼국지』는 주요한 비교 대상이었다. 이를테면 정사를 기준으로 소설의 어떤 부분들이 허구인지 또는 작가의 천재적 상상력이 가미되었는지를 판별해왔다. 그렇다면 정사 『삼국지』는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 책일까? 답은 ‘아니오’이다. 진수의 『삼국지』 역시 객관적인 태도로 역사를 기록했다고 보기 어렵다.

진수의 『삼국지』- 찬탈자들의 정치학 교본
진수(233~297년)는 본래 촉나라 사람이었지만 본격적인 관직 생활은 삼국을 최종적으로 통일한 진나라에서 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위나라와 (위나라를 계승한) 진나라에 우호적으로 역사를 썼다. 진수는 위나라 또는 조조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유리한 사실은 부각하고 불리한 사실은 축소하거나 누락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서술했고, 때때로 사실 자체를 왜곡하기도 했다. 예컨대 소설 삼국지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적벽대전을 진수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삼국지』에서 분량의 반 이상을 차지하는 후한 말 군웅할거시대 이야기는 차라리 『후한서』의 기록이 더 정확하고 자료도 풍부하다.
오히려 『삼국지』는 역사를 이용하여 당시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문제를 잘 해결한 책이었다. 위진남북조시대에는 주로 ‘선양(禪讓)’이라는 방식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일이 많았다. 선양은 황제의 자리를 자발적으로 물려준다는 의미지만 사실상 권력 찬탈이나 마찬가지였다. 조조의 아들 조비는 후한의 헌제로부터 황제의 자리를 빼앗았고,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은 위나라 마지막 황제 조환을 위협해 황제의 자리를 빼앗았다. 『삼국지』는 신생 왕조 개창자들이 찬탈의 오명을 피하고 개창의 정당성을 내세울 수 있게 도와준 여러 장치를 마련해준 책이었다. 진수는 『삼국지』에서 새 왕조의 창업자, 즉 찬탈자의 정당성을 강조하는 한편 그의 비리와 부정을 누락하거나 달리 기록하는 서사를 완성도 있게 선보였다. 후한과 위나라, 위나라와 진나라 사이의 왕조 교체, 즉 찬탈의 역사를 긍정하는 진수의 교묘한 필법은 그러한 역사를 ‘정상 역사’의 범주로 끌어올리는 힘이 있었다. 이렇게 『삼국지』는 위진남북조와 수당 시대에 이르기까지 찬탈자들이 애용하는 유력한 지침서가 되었다.

조조 - 역경을 헤쳐나간 뛰어난 지휘관
아무런 어려움도 겪지 않은 영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조조는 숱한 전쟁을 치르는 동안 8할의 승률을 기록할 정도로 뛰어난 지휘관이었고, 그에 걸맞게 『삼국지』에서 그는 대체로 승승장구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 때문인지 많은 독자들은 조조를 완성형 영웅으로 이해하면서 그가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었는지 알지 못한다. 특히 조조가 독자적인 군벌로서 첫발을 내딛었던 연주 지배 시기에 말이다. 그는 황건적과 흑산적, 공손찬, 원술 등과 싸워야 했고, 여포에게 본거지를 빼앗기는 시련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필요하다면 냉혹하고 무자비한 방식을 마다하지 않았고, 성장통을 잘 이겨냈다. 조조는 가장 일찍부터 치열하게 역경을 헤쳐나간 군웅 가운데 하나였고, 차근차근 경쟁자들을 탈락시키며 천하통일을 향해 나아갔다.
조조는 군사적 재능의 측면에서 대단히 뛰어난 지휘관이었다. 전투에서 조조의 승률은 8할이었다. 삼국지의 군웅 가운데 누가 가장 전장에서 강했을까? 승률로 따져보면 1위가 손견, 2위가 손책으로 이 호랑이 같은 아버지와 아들은 9할의 승률을 자랑한다. 3위가 바로 조조였다. 특히 조조는 유비에게 가장 많은 패배를 안겨줬다. 조조는 중요한 전투가 있을 때마다 수도에서의 행정은 순욱에게 맡기고 자신은 대개 전장을 지휘했다. 그는 전쟁터에 부하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지휘하는 스타일이었다. 스스로 지략이 뛰어나고 훌륭한 지휘관이었기 때문에 조조는 한고조 유방처럼 여러 장군에 의존하지 않았다. 그러나 조조는 장군과 참모들의 의견에 기꺼이 귀를 기울였고, 그들이 제시하는 전략을 신중하게 따랐으며, 여러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알았다. 이러한 조조의 능력은 천하통일을 위한 기본 바탕이 되었다.

조조의 전략적 관점 - 방어보다 공격
조조는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북쪽의 원소, 동쪽의 도겸, 남쪽의 원술, 서쪽의 여포 등 언제라도 적이 침공해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의 전략적 관점은 수도를 소극적으로 방어하기보다는 주변 지역을 공격적으로 정복하는 것이었다. 허(허창)로 천도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수도 허의 주변은 높은 산지가 없고 평지가 많아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 아니었다. 조조가 주목한 것은 경제력이었다. 그는 천도를 단행한 196년에 둔전제를 실시했는데, 양민들을 모집해 그들로 하여금 허 일대에서 둔전을 경작하게 했다. 둔전은 원래 변경에 주둔한 군사들이 현지에서 농사를 지어 직접 군량을 충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변경이 아니라 수도 인근에서, 병사들이 아니라 백성들이 농사를 짓게 했다. 그리고 수리 시설을 확충해 토지를 관개했고 그 결과 곡식 100만 석을 얻었다. 또한 운하망을 구축하여 군량 수송을 용이하게 했다. 훗날 촉나라를 정복한 위나라의 장군 등애는 당시 조조가 둔전을 실시하여 곡식을 저축한 덕분에 이를 토대로 사방을 제압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즉 조조는 둔전제를 통해 기존의 경제력에 추가적인 군량 생산을 가능케 하고 군량 수송 부담을 줄임으로써 화북을 통일하기 위한 물질적인 토대를 갖추었던 것이다.

조조는 어떻게 화북을 통일했는가? - 선택과 집중
조조가 화북을 통일한 결정적인 계기는 원소와 대결한 관도 전투(200년)였다. 사료의 호구수를 분석해볼 때 원소는 최대 1,200만 명, 조조는 700만 명의 인구를 다스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실제 조조가 지배한 지역의 인구는 훨씬 적었다. 초창기 조조가 통치한 사예와 연주 일대는 전란으로 인구 유출이 극심한 지역했기 때문이다. 수도 낙양과 그 주변인 사예(우리나라의 경기도에 해당된다)는 동탁과 반동탁연합군의 전쟁터가 되었고,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한 후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 게다가 초창기에 조조는 원소의 부하나 다름없는 지위였다. 그러나 가족을 인질로 보내라는 원소의 요구를 거절하고 헌제를 허로 데려옴으로써 조조는 그야말로 원소와 맞서는 경쟁 군벌로 재탄생했다.
당시 원소는 최강의 기병대를 거느렸던 공손찬을 꺾고 기주, 청주, 병주, 유주 등 4주를 지배했는데, 조조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밖에 없는 우세한 구도였다. 조조와 원소가 싸운 관도는 지리적으로 원소군이 황하를 건넌 후 허(조조의 수도)로 곧장 진격하기 위한 길목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원소군은 병력의 압도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보급선을 방어하지 못해 참패하고 말았다. 조조는 유능한 모사들의 조언을 중시했던 반면, 원소는 참모들의 진언을 따르지 않았고 악수만 두다가 질 수 없는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던 것이다.
조조는 원소나 유표보다 적은 인구를 지배하는 불리함을 선택과 집중으로 해결했다. 사예와 연주, 예주 일대에 둔전을 설치하고 중앙정부가 직접 관리하여 재정수입을 늘렸다. 또한 사가(士家)라고 불리는 세습군인을 편성하여 일정 수 이상의 병력을 준비했다. 조조는 부족한 인력과 경제력을 최대한 집중하여 군사력 확충에 노력했다. 물론 운도 따랐다. 원소와 유표 등 강력한 경쟁자들이 조조를 공격함에 있어 실기하거나 소극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조조는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따라 전쟁에서 승리하는 한편, 원소의 우유부단함, 유표의 현상유지 정책 등의 외교적 호재 덕분에 불리한 여건을 딛고 화북 최후의 승자가 될 수 있었다.

적벽대전 이후 - 손권의 북벌 실패와 유비의 재기
화북을 통일한 기세를 몰아 남쪽의 형주와 장강 유역까지 정복하려 한 조조의 시도는 유비와 손권이 손을 잡고 싸운 그 유명한 적벽대전(208년)에서 패배함으로써 좌절되었다. 진수의 『삼국지』에서 적벽대전과 관련된 기록은 전체의 0.1%도 되지 않는다. 진수가 적벽대전의 중요성을 몰랐을 리는 없다. 아마도 조조가 당한 가장 치욕적인 패배가 적벽대전이었기 때문에, 진수는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극도로 축소하여 기록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설 삼국지를 쓴 후대의 나관중과 여러 작가들은 적벽대전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차렸고, 적은 양의 사료일지언정 정사를 바탕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살붙여 역사적 비중을 되살려냈다.
적벽대전은 조조, 유비, 손권 모두에게 심대한 영향을 끼쳤다. 손권은 적벽에서 조조의 진격을 저지하여 오나라를 멸망의 위기에서 구했다. 뿐만 아니라 달아나는 조조를 추격하며 조조의 남정을 곧바로 손권 자신의 북벌로 전환시키고자 했다. 손권의 위나라 침공은 3개 방면으로 이루어졌는데 특히 손권은 장강 이북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인 합비성을 공격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오나라가 합비를 점령하면 헌제와 조정이 있던 위나라 수도 허나 조조가 주둔했던 업까지 산이 거의 없고 호수와 강만 있는 거대한 화북평원을 파죽지세로 진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비성은 함락되지 않았고 손권의 북벌은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실패하고 말았다.
반면 유비는 곧장 서쪽과 남쪽으로 진격했고 장강 이남의 4개 군(장사, 영릉, 무릉, 계양)을 점령하여 실리를 취했다. 손권이 북벌의 교두보를 확보하느라 1년의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유비는 1달도 되지 않아 알짜배기 강남 4군을 점령하여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다. 정처 없이 떠돌던 유비에게 적벽대전은 기사회생의 기회가 되었다. 유비는 형주의 상당 부분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몇 년 후에는 유장이 다스리던 익주 내부의 분열을 이용해 익주까지 점령해버렸고(214년), 손권보다 더 큰 땅과 많은 인구를 다스리는 광대한 군벌로 성장했다. 이렇게 하여 위, 촉, 오 세 나라에 의해 천하가 삼분되는 “삼국정립”이 이루어졌다.

조조는 왜 손권을 주로 공격했나? - 광무제 모델
조조는 적벽대전 이후에도 오나라를 정복하기 위한 시도를 계속했다. 왜 조조는 유비가 아닌 손권만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일까? 아마 조조는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의 천하통일 방식을 답습한 듯하다. 광무제는 동쪽의 군웅을 먼저 멸망시켜 장강 하류를 정복한 후,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 장강 상류인 익주를 공략하는 전략을 택했다. 광무제는 장안에서 남하해 한중군을 거쳐 익주로 진격하는 방식 대신 형주에서 장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공격 노선을 택했다. 비록 지리적으로는 멀지만 군사의 이동이나 물자의 수송에 더 유리한 경로였다. 조조는 광무제처럼 동쪽의 손권을 멸망시키면 익주의 유비를 쉽게 공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조조에게 적벽대전은 트라우마로 작동해 전략상의 변화를 가져왔다. 원래 조조의 공격로는 장강 중류에서 배를 띄워 장강을 따라 오나라로 쳐들어가는 루트였다. 통계적으로 보면 화북 정권이 장강 하류의 강남 정권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방식이 이 공격로였다. 장강은 북방 군대의 진격을 막는 자연적인 보호막 역할도 하지만, 북방 세력이 일단 형주를 장악하면 장강을 따라 남하할 수 있으므로 진격에 편한 교통로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벽에서 패한 이후 조조는 회수 이남에서 장강 하류를 바로 공격하는 루트를 택했다. 조조는 적벽에서 패배한 원인이 위나라 수군이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므로 장강 하류를 직접 공격하는 것이 육군 중심의 위나라 군대에 더 적합한 방식이라고 판단했다. 조조의 뒤를 이은 아들 조비와 손자 조예도 이 공격로를 따랐다. 결국 조조의 오나라 정벌 시도는 손권의 필사적인 항전으로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교착상태에 빠졌고 여기서 상대적으로 이득을 본 것은 유비였다.

유비의 한중 공략과 관우의 북벌
익주(파촉)를 손에 넣은 유비는 조조 땅이었던 한중군을 결연히 공격하여 점령했다(219년). 생전 처음으로 조조를 이겼을 뿐만 아니라 ‘한중왕’으로 즉위한 유비는 인생의 절정기를 지나고 있었다. 유비는 단순히 익주에 웅거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실제로 천하를 통일할 계획과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유비의 천하통일 루트는 자신의 선조이자 한나라를 창업한 고조 유방의 행적을 따른 것이었다. 유방도 항우와 맞설 때 한중, 파, 촉 3군을 근거지로 했으며 한왕(漢王)에 봉해졌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의 ‘한’ 자도 한중군을 흐르는 한수(漢水)에서 유래한 것이었고, 유비가 취임한 ‘한중왕’도 글자만 다를 뿐 사실상 ‘한왕’이나 마찬가지였다. 한중에서 험준한 진령산맥만 넘으면 곧바로 관중으로 진출할 수 있었으므로, 유비는 자신도 선조처럼 다시 중원을 제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다. 또한 유방의 행적을 모방함으로써 한나라의 뒤를 잇는다는 정통성도 주장할 수 있었다.
제갈량은 한고조의 천하통일 루트를 모델 삼아 융중대에서 유비에게 익주와 형주에서 동시에 북벌을 추진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즉 유비가 이끄는 주력군이 익주에서 관중(장안)으로, 또 한 명의 상장(당연히 관우다)이 형주에서 낙양으로 동시에 진격하는 전략이었다. 따라서 유비의 한중 점령은 단독 작전이 아니라 관우의 북벌과 동시에 추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관우는 한 해 전인 218년에 이미 북벌을 진행해 번성과 양양에 주둔한 조인과 싸우고 있었다. 219년 장안에서 한중군으로 진격하던 조조가 양평관에서 막히자 회군하여 낙양으로 돌아온 것도 관우군의 기세가 만만찮았기 때문이다. 조조는 한중에서 유비와 대치하고 있는 사이 관우가 양양과 번성을 점령한 후 낙양이나 허로 진격하는 것을 두려워해 회군한 것이다. 실제 관우의 북진에 맞춰 수도 허 인근의 여러 지방에서 조조를 배신하고 관우에 내응하려 했고 관우의 위엄이 중원에까지 널리 떨치고 있었다. 조조는 관우의 북진에 놀라 수도를 허에서 더 북쪽으로 옮기려고 했을 정도였다.
유비가 한중 점령을 넘어 북벌의 의지를 보인 것은 장비와 마초를 보내 무도군을 공격한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무도군은 험난한 진령산맥을 우회하여 한중에서 관중으로 쳐들어가는 길목으로, 군사와 물자를 수송할 때 반드시 지나야 하는 평탄한 지형이었다. 그러나 장비의 군대가 무도군을 점령하지 못하고 후퇴하면서 북벌의 시도가 막혔다. 결과적으로 한중군을 점령한 후 유비가 성도로 돌아온 것은 전략상의 착오였다. 형주에서 북진하여 번성을 포위하고 있던 관우는 유비처럼 철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관우는 고립되었고 그 결과는 관우의 죽음과 형주의 상실이었다.
유비는 평생 동안 확고한 지역 기반을 갖지 못하고 쫓겨 다니다가 형주와 익주를 차지하고 한중왕에 올라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했으나 곧바로 곤두박질쳤다. 유비는 관우의 복수를 위해 오나라를 상대로 무리한 전쟁을 일으켰다가 이릉 전투(222년)에서 손권에게 참패했고 다음 해 백제성에서 불행하게 죽었다.
유비가 죽은 후에도 제갈량은 수차례 관중으로 진격하여 위나라를 침공하는 북벌을 감행했다. 그러나 형주를 잃어버린 상태에서는 제갈량 자신이 계획한 융중대 전략의 토대 자체가 허물어졌으므로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았다. 하지만 제갈량은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는 격언을 충실히 지켰다. 덕분에 제갈량이 죽은 후 촉나라는 20여 년을 더 존속할 수 있었다. 촉군의 용맹에 놀란 위나라가 감히 공격할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다.

장강 - 천혜의 방패이자 적군을 실어나르는 교통로
손권은 조조와 유비 모두에게 결정적인 순간에 일격을 가했다. 적벽에서는 조조의 군대를 물리쳐 조조의 천하통일 야망을 무산시켰다. 또한 유비로부터 형주를 빼앗고 2인자인 관우를 죽임으로써 유비의 북벌 계획에 큰 타격을 주었다. 두 사람이 천하를 차지할 수 있는 기회를 손권이 날려버린 것이다. 그는 조조와 유비의 천하통일 시도를 막는 동시에 자신의 기반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손권은 형주를 점령함으로써 조조의 공격을 막아내기 좋은 자연의 방어벽인 장강도 확보하게 된다.
오나라는 수전과 방어에는 능했지만 북벌을 할 만한 공격력은 갖추지 못했다. 손권은 여러 차례 직접 북벌을 지휘했다. 그러나 11회의 전투 가운데 단 1차례만 성공했고 그나마도 214년 환성 점령이었으니 전적치고는 초라했다. 위나라와 오나라는 국경선 부근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했지만 위나라가 촉나라를 멸망시키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지리적 관점에서 보면, 장강 하류를 근거지로 둔 정권이나 왕조가 자신의 권역을 지키기 위해서는 중요한 요충지인 장강 상류(익주)와 중류(형주)를 지켜야 했다. 특히 장강 중류, 즉 형주에서 배를 타고 하류로 진격하면 장강은 군대의 진격을 막는 장애물에서 자연적인 교통로로 변한다. 그러니 장강 하류에 있던 세력은 장강 중류를 지배해야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더 확실한 안전보장을 위해서는 장강 상류까지 확보하거나 최소한 그곳을 지배한 세력과 동맹을 맺어야 했다. 263년에 촉나라가 멸망하자 장강 상류는 위나라와 그 뒤를 이은 진나라의 손에 들어갔다. 280년에 진나라가 마침내 형주에서 오나라 10만 대군을 격파하자 오나라는 적벽대전 전야와 같은 위기에 봉착했다. 그러나 그때 오나라에는 주유나 여몽 같은 명장이 없었다. 진나라는 결과적으로 장강 상류인 익주와 장강 중류인 형주에서 오나라를 공격하여 멸망시키는 데 성공했다. 서진의 강동 정복전은 이후에도 이 장강을 교통로로 이용하여 남방 정권을 정복하는 모범적인 사례가 된다. 훗날 수양제의 대운하와 몽골제국시대 강남에서 북경까지 연결한 경항대운하가 만들어지고 나서야 장강 하류를 바로 공격하는 방식으로 공격로의 변화가 일어났다.

남방을 압도한 북방의 경제력과 군사력
삼국지에서 촉나라의 유비나 오나라의 손권이 위나라의 조조를 꺾고 천하를 통일했을 가능성은 없었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우선 위, 촉, 오, 삼국의 국력을 비교해보면 화북에 자리한 위나라가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사료를 토대로 추산해보면, 위나라의 인구는 약 443만 명, 촉나라는 90~94만 명, 오나라는 230~240만 명으로 추정된다. 위나라의 인구는 촉과 오의 인구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 전근대에는 인구수가 경제력과 군사력의 척도였으므로 위나라의 국력이 나머지 두 나라를 합친 것보다 강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사료를 통해 추정한 병력 규모도 촉나라가 10만 명, 오나라가 23만 명, 위나라가 50만 명 정도였다. 또한 당시만 하더라도 농토로 개발된 지역은 대부분 위나라 영토에 있었다. 이처럼 인구, 경제, 군사력 측면에서 위나라는 촉과 오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당시 위나라에서 국고를 충당하고 사방의 이민족을 제압할 경제력을 제공하는 지역은 연주, 예주, 사주, 기주였다. 이 4개 주는 천하의 복심(腹心), 즉 경제적 핵심이라고 불렸으며 국가 재정에 기여하고 다른 변경 지역의 군사비를 충당했다. 조조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촉나라와 국경을 마주한 관중 지역과 오나라와 대치한 회남 일대에 방비를 목적으로 둔전을 대규모로 개발하여 경제력을 발전시켰다.
촉나라가 지배한 파촉, 즉 익주도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역이었다. 제갈량이 융중대에서 익주를 ‘천부(天府)’, 즉 하늘의 창고라고 칭할 정도로 익주는 인구가 많고 물산이 풍부한 곳이었다. 드넓은 사천분지는 곡창지대였고 소금, 비단, 철광석 등이 풍부하게 생산되었다. 파촉은 험준한 산맥에 둘러싸여 있어 외침에 안전해 야심 없고 험한 교통로를 지켜 지방 정권의 지배자로 만족하는 사람에게는 낙원이었다. 오나라는 장강을 중심으로 둔전과 주요 곡창지대가 발전했고, 장강 중류의 무창 조선소에서는 군사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큰 군함을 건조했다. 오나라가 망할 때 서진이 접수한 배가 5,000여 척이었다고 하니 오나라의 선박 건조 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준다.
파촉과 강동에서 발원한 정권이 중국을 통일한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통계적으로 보면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파촉의 왕조와 지방정권이 관중을 정복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킨 적은 꽤 있었다. 한고조 유방의 관중 정복, 제갈량의 5차례 북벌, 강유의 북벌 11회, 동진 사마훈의 북벌 3회, 오대십국시대 전촉의 북진 3회, 후촉의 관중 공격 3회, 청말 남대순의 북벌 등이다. 그러나 단 한 차례만 성공했을 뿐이다. 반면 관중 세력이 파촉을 공격한 횟수는 모두 25회이고 그 가운데 11회 성공했다. 21세기 시점에서 보면 제갈량의 융중대는 통계적으로 실현 가능성이 없는 전략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파촉에서 관중을 공격한 사례는 단 한 차례에 불과했고, 그것도 유방의 성공 사례였다. 그와 반대로 전국시대 진혜왕이 관중에서 파촉을 점령한 예도 있었다. 따라서 다시 상황에서는 유비가 관중을 정복할 가능성과 조조의 공격으로 익주가 점령될 가능성 모두 100%였다.
강동 정권이 북벌하여 중국을 통일한 예도 한 차례에 불과하다. 1356년 주원장이 남경을 점령한 후 이곳을 근거지로 삼아 강남을 평정하고 북벌을 감행하여 몽골인들을 쫓아내고 명나라를 세운 예다. 근현대 시대까지 포함하면 광둥의 국민당 정권이 군벌들을 제거하고 명목상 중국을 통일한 장제스의 국민혁명 사례도 있다. 반대로 북방 세력이 남방 세력을 정복한 사례는 6번 있었다. 즉 전근대 시대에는 대부분의 경우 북방 세력이 남방을 정복하고 중국을 통일했다. 게다가 주원장과 장제스의 경우는 남방이 경제적으로 많이 개발된 이후의 일이었다.


저자 소개

지은이 최진열
서울대학교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동국대, 동덕여대, 경인교대 등지에서 강의했으며 현재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연구교수로 있다. 중국 고중세사와 유목국가, 동서 문화 교류, 한국 고대사, 한중 관계사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와 독서에 열중하고 있다.
저서로 『북위황제 순행과 호한사회』(2011), 『발해 국호 연구』(2015), 『효문제의 ‘한화’정책과 낙양 호인사회』(2016), 『중국 북조 지방통치 연구』(2019) 등이 있으며, 이 가운데 『효문제의 ‘한화’정책과 낙양 호인사회』는 2017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로 선정되었다. 그 밖에 『대륙에 서다: 2천 년 중국 역사 속으로 뛰어든 한
국인들』(2010), 『마주 보는 세계사 교실 2』(2008) 등의 대중 교양서를 썼다. 앞의 책은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뒤의 책은 2008년 대한출판문화협회 올해의 청소년도서로 선정되었다. 또한 「한초 군국제와 지방통치책」(2004), 「후한시대 내군 군병의 존재와 운용」(2022), 「삼국시대 천하관념과 그 현실적 변용」(1999), 「『삼국지』의 연대·지명의 오류: 후한말 손책·손권 정권의 기록, 적벽대전과 제갈량의 마지막 북벌 기록을 중심으로」(2019) 등 7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목차

책을 펴내며
서장: 정사 삼국지와 소설 삼국지를 넘어서

1장 삼국지의 무대
2장 후한 붕괴의 정치사
3장 동탁, 천하를 찢어놓다
4장 군웅할거시대가 열리다
5장 최강 군벌의 혈투: 원소와 공손찬
6장 황하 이남 군웅의 혼전
7장 조조, 헌제를 끼고 천하를 호령하다
8장 하북의 원소와 하남의 조조, 자웅을 가리다
9장 손책과 손권, 강동을 지배하다
10장 적벽대전과 유비의 기사회생
11장 대기만성 유비, 드디어 인생 역전
12장 관우와 함께 퇴장한 영웅들
13장 조조의 죽음과 위나라의 건국
14장 실리보다 의리를 택한 유비의 비참한 최후
15장 삼국시대 정치
16장 삼국시대 경제와 지리
17장 삼국시대 전쟁사 1: 제갈량의 북벌
18장 삼국시대 전쟁사 2: 중원 왕조의 파촉·강남 정복
19장 서진의 통일과 자멸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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