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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상세페이지

인문/사회/역사 역사

징비록

유성룡이 보고 겪은 참혹한 임진왜란
소장종이책 정가13,800
전자책 정가40%8,280
판매가8,280

징비록작품 소개

<징비록>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국방.군사.정치.외교.민사작전 등 모든 분야에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 대신 유성룡이 쓴 임진왜란 기록이다. 조선에서 간행된 이후 일본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해 새로이 간행했고, 중국 역시 임진왜란 전사의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일찍이 영어판까지 나온 국제적으로 공인된 역사 기록이기도 하다.

시인 김기택은 <징비록> 안에 깃든 원작자의 마음을 오롯이 되살리되 누구나 쉽게 읽고 공감할 수 있도록 편안한 문체로 다듬었다. 또한 일평생 전쟁사 연구에 몸을 바친 임홍빈 전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민족군사실 선임연구원의 해설도 본문과 긴밀히 맞물려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해설은 전쟁의 중요한 일지와 연대기 그리고 조선, 일본, 명나라의 전력과 무장의 실제를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를 통해 풀어냈다.

마지막으로 미술작가 이부록은 한국과 일본의 임진왜란 전문 전사 박물관 역할을 하고 있는 국립진주박물관과 일본 오사카박물관의 전문자료를 섭렵하고, 임진왜란과 관련한 일본 측 군기물(반다큐멘터리, 반소설류)에 등장한 미술 형상을 참고해 이 책에서 새로운 형상을 제시했다.


출판사 서평

본관은 풍산이고, 자는 이현, 호는 서애다. 16세에 향시에 급제했고 25세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한 뒤, 여러 자리를 거쳐 1590년 우의정에 올랐다. 왜란에 대비해 형조정랑 권율과 정읍 현감 이순신을 각각 의주 목사와 전라도 좌수사에 천거했으며, 조선의 기존 방어체제인 제승방략 대신 진관제도를 주장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도체찰사로 임명되어 군무를 총괄했다. 영의정이 되어 피난을 떠난 선조를 수행했으나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다. 평안도 도체찰사로서 명나라 장수 이여송과 함께 평양성을 수복한 뒤 충청·경상·전라 3도의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했으며, 뛰어난 외교적 역량으로 명과 왜의 조선분할 획책을 저지했다. 신분이 아닌 전문성과 실무능력을 중시한 인재채용 정책을 주장했으며, 백성들을 위해 면천법.작미법 등의 각종 민생 개혁정책을 만들었다. 1598년 북인의 탄핵을 받아 삭탈관직당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저술과 학문에 몰두했다. 1604년 다시 풍원부원군에 복직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1607년 6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전쟁 후에 집필한 『징비록』『서애집』『신종록』『영모록』『운암잡기』등이 전해진다.


저자 프로필

류성룡

  • 국적 대한민국
  • 출생-사망 1542년 - 1607년

2016.10.20.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시인 김기택이 오늘의 한국어로 새롭게 다듬어 쓴 《징비록》
일본도 중국도 탐낸 임진왜란의 기록을 말한다!

《징비록》은 지금의 한국 사회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당시 국방·군사·정치·외교·민사 등 모든 분야에서 막중한 임무를 수행한 대신 유성룡이 쓴 임진왜란 기록이다. 이 책은 조선에서 간행된 이후 일본에서도 그 가치를 인정해 새로이 간행했고, 중국 역시 임진왜란 전사의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일찍이 영어판까지 나온 국제적으로 공인된 역사 기록이다.
책 이름에서 “징비”라는 말은 《시경》 <소비편小毖篇>에 나오는 “내가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유성룡이 쓴 서문 가운데 “지난날을 생각할 때마다 황송하고 부끄러워 몸 둘 곳을 모르겠다”라는 문장과 맥이 닿는다. 다시 말해 이 책은 다시는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유성룡이 후대에 남긴 글이다. 위정자들의 무책임하고 안이한 대처로 수많은 백성들이 어떻게 고통을 받았는지, 그리고 나라의 운명이 상국이자 대국인 명나라에 맡겨진 사이에 나라의 체모가 어떻게 무너지는지 절절히 이야기한다. 당시 조선은 군사작전권마저 명나라에 사실상 넘긴 상황에서 침략자를 마음 놓고 응징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서는 한강을 기점으로 조선을 분할통치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구원병을 보낸 또다른 전쟁 당사자인 명나라에서는 이 기회에 조선을 완전히 식민통치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백성은 “차마 제 자식을 잡아먹지 못해, 서로 자식을 바꾸어 잡아먹었다”는 기록이 전해질 정도로 비참한 생활을 이어갔다.
누구보다 전쟁의 참상을 절감한 유성룡은 전쟁을 막지 못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자신의 힘으로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상황에 대해서도 크게 절망했다. 정유재란 이후 완전히 조정에서 물러난 유성룡은 고향인 경상도 의성에 들어앉은 채 지난 7년 전쟁의 기록과 기억을 정리해 생생하게 되살린다. 정직한 태도로 조선 조정의 분란과 무능을 기록했고, 중앙정부의 지원 없이 싸운 이순신과 의병의 활약에 온당한 존경을 보냈다. 또한 굴욕적인 외교의 실상을 고백하고, 백성의 고통에 같이 아파했다.
임진년에 시작돼 7년간 이어진 전쟁의 실상은 이렇게 유성룡의 손을 통해 다큐멘터리 겸 르포르타주 《징비록》으로 태어난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유성룡의 수고는 헛된 것이 되고 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병자호란이라는 굴욕을 통해 조선은 다시 한 번 짓밟힌다. 그리고 이는 오늘날로부터 불과 100여 년 전 일어난 한일강제병합이라는 사건을 통해 또다시 반복된다. 지금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 역시 그때의 과오를 답습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징비록》이라는 거울을 통해 비춰봐야 할 때다.
“징懲-지난 일을 뉘우치고, 비毖-후세를 위해 앞으로의 교훈을 찾는, 록錄-뼈아픈 역사의 기록”이라는, 고전 속의 사전적 의미를 훨씬 뛰어넘은 함의로 《징비록》을 찬찬히 톺아봐야 할 것이다.

목차

글을 열며_우리의 부끄러운 곳을 비춰주는 거울

유성룡의 <머리말>
1장 전쟁 전의 조선과 일본
2장 일본의 침략
3장 거듭되는 패배와 피난
4장 명나라의 구원병
5장 이순신과 의병의 활약
6장 강화 협상의 결렬
7장 일본의 두 번째 침략
8장 7년 만에 끝난 전쟁
녹후잡기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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