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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 나타난 계시들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체험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봄 상세페이지

종교 종교일반 ,   종교 기독교(개신교)

창세기에 나타난 계시들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체험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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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 나타난 계시들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체험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봄작품 소개

<창세기에 나타난 계시들 -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체험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봄>

<<서문>>

1954년 10월부터 위트니스 리 형제님은 세 달 동안 생명 훈련을 인도했다. 이 훈련의 한 수업에서 그는 성경에 있는 생명의 노선을 살펴보았다. 이 연구의 첫째 부분과 둘째 부분의 메시지들은 각각 〈창세기에 나타난 계시들 ― 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갈망과 목적을 봄〉과 〈창세기에 나타난 계시들 ― 사람의 타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봄〉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창세기 연구의 셋째 부분의 자료들을 편집하여 모은 것이다.

<<본문 내용중>>

제1장
하나님의 부름의 의의

이러한 일련의 메시지들에서 우리는 창세기에 나타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요셉의 체험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살펴볼 것이다. 내 속에는 모든 성도가 기도하고 주님과 교통하며 이러한 생명의 말씀을 묵상하기를 바라는 무거운 부담이 있다.

주님의 말씀 안에서 생명의 빛을 받는 길은 영적 소화를 통한 것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필요한 것은 문자에 속한 교리가 아니라 생명의 빛이다. 생명의 빛은 주님의 말씀 안에 담겨 있지만,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의 영 안에서 소화하지 않는다면, 그분의 말씀은 단지 우리의 생각 안에 있는 문자와 지식이 될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의 영 안에서 소화함으로써만 진리가 우리 존재 안에서 참된 생명의 빛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렇게 되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는 성도들은 이러한 메시지들의 교통에서 보고 깨달은 것을 기도로 가져가야 한다. 그들은 주님 앞에서 묵상하고 주님과 교통함으로, 이러한 교통을 그들의 영 안으로 동화시킬 수 있다.

진리가 사람 속에서 빛이 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먼저 사람의 지적인 이해와 기억을 통과해야 한다. 우리가 메시지를 읽을 때 취하는 첫 번째 단계는 우리의 생각으로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이다. 때로 우리는 기억을 못 할 수 있으므로 기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화하려면 우리의 생각을 사용하여 이해하고 기억하고 기록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진리를 소화하려면, 우리는 반드시 말씀이 우리의 생각을 통과하여 우리의 영에 이르게 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한다. 우리가 묵상할 때, 우리가 이해한 것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인 우리의 영에 이른다. 우리는 감동을 받을 때, 그 감동을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한 재료로 사용하여 기도로 바꾸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진리는 우리의 영 안에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한 재료가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가 이해한 진리는 우리의 영 안으로 소화된다. 그럴 때 우리는 진리에서 생명 공급을 받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우리는 창세기의 첫째 주요 부분은 하나님의 갈망과 목적을 계시한다고 말했다(창세기에 나타난 계시들 ― 창조를 통해 하나님의 갈망과 목적을 봄 참조). 메시지를 읽은 후에 우리는 읽은 것을 묵상하기 위해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우리가 묵상하는 것은 우리의 기억이나 기록에 근거를 둘 수 있다. 어떤 자매는 그녀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그분의 형상을 갖고, 그분을 위해 다스리기 위해 그분의 생명의 통치권을 갖도록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갈망과 목적을 묵상할 수 있다. 그 자매가 각 중점을 천천히 묵상해 나갈 때, 그녀는 이해한 진리를 그녀 안에 새기실 기회를 성령께 드린다. 그러면 그 자매의 영은 쉽게 감동될 수 있고, 그 자매는 자신이 하나님의 목적에 포함되었지만, 아직도 그분의 형상으로 그분을 표현할 수 없고 그분의 통치권으로 그분을 위해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그 결과 그 자매는 슬픈 느낌을 가질 것이고 기도할 갈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그 자매는 자신의 이런 내적 느낌에 따라 즉시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 형식이나 단어에 초점을 맞추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기도는 일부는 말로, 일부는 우리의 내적 느낌으로 할 수 있다. 어떤 것은 말해 낼 수 있지만, 어떤 것은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 깊은 곳에서 주님과 교통하고 있다. 마치 느낌과 기도가 함께하는 것 같다.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과 교통할 때 우리는 자신이 황폐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자백해야 한다. 한 면으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를 용서해 주시고 깨끗하게 해 주시기를 구하고, 다른 한 면으로 하나님께 우리를 방문하시고 은혜를 공급하셔서,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더 갖고 그분의 권위를 더 알게 하시기를 구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묵상하고 기도하고 교통함으로 진리의 이 주요 부분이 우리의 조성이 되고 우리의 존재 깊은 곳에 이를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으로 교리를 암기할 필요가 없다. 그보다 무언가가 일상생활에서 끊임없이 우리 존재 깊은 곳을 만져, 하나님을 표현하고 그분을 위해 다스려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킬 것이다. 이러한 빛이 우리 안에서 깊고 주관적으로 비출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진리의 빛 안에서 살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더 이상 단지 빛만이 아니라 우리의 공급을 위한 양식일 것이다. 우리가 매일 빛 비춤받고 공급받을 때, 우리는 생명 안에 자랄 것이다.

여기에 또 하나의 예가 있다. 사람의 네 가지 타락에 관한 창세기의 두 번째 주요 부분(창세기에 나타난 계시들―사람의 타락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봄 참조)을 읽은 후에, 우리는 묵상하고 기도하고 교통함으로 그것을 소화해야 한다. 우리는 아침에 기도할 때, 이러한 네 가지 타락에 대해 묵상할 수 있다. 첫 번째 타락은 사람이 자신의 영을 사용하지 않고, 하나님께 여쭈는 대신 자신이 머리의 권위를 취한 결과였다. 두 번째 타락은 사람이 사상과 의견을 지닌 혼으로 생활한 결과였다. 세 번째 타락은 사람이 육체 안에 살고 육체의 정욕에 빠진 결과였다. 네 번째 타락은 사람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집단적으로 일어나 하나님을 대적한 결과였다. 이러한 각 중점들을 묵상함으로 어떤 형제는 성령께 그를 비추시고, 그에게 질문하시고, 그를 점검하실 기회를 드릴 것이다. 아마도 속에서 한 음성이 그 형제에게 물을 것이다. ‘오늘 너의 행동과 품행과 행위와 일은 너의 영에서 나온 것이었느냐, 아니면 너의 혼에서 나온 것이었느냐? 너는 아직도 혼에 의해 살고 있느냐, 아니면 영에 의해 살고 있느냐? 너는 네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고 있느냐, 아니면 하나님에 의해 살고 있느냐? 주님을 위한 너의 일은 네가 자신의 의지로 행하는 것이냐?’ 이러한 말들이 그 형제를 비추고 점검할 것이다. 속에 있는 음성은 물을 것이다. ‘너는 오늘 너의 육체의 정욕에 빠졌느냐? 너는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있느냐, 아니면 그분께 불순종하고 반역하고 있느냐?’ 이러한 질문들은 단지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또한 그의 영 안에서 비추며 그의 실지 상태를 점검하는 빛이다.

우리의 참된 상태가 하나님의 말씀의 빛 가운데 폭로될 때, 우리는 심히 슬픔을 느끼고, 자백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 것이다. 우리는 심지어 통곡하며 주님께 용서를 구할 것이다. 우리가 묵상하고 기도하고 교통함으로 우리가 읽은 것은 기본적인 빛 비춤이 되고, 그 후에는 우리의 존재 안으로 조성된다. 그러면 빛이 우리의 생활과 행함을 비출 것이고, 우리는 머리의 권위를 취하는 것, 자기 의지로 행하는 것, 육체를 따라 행하는 것, 바벨탑을 쌓는 것, 반역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것이다. 우리는 속에서 빛 비춤을 받을 것이다. 성령께서 이러한 항목들에 관해 우리를 비추어 주신 후, 그것들은 우리 속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읽은 말씀들이 우리에게 참된 도움을 줄 것이다.

성경이나 영적인 책을 읽든 메시지를 듣든, 우리는 보고 듣고 이해한 것을 묵상하고 기도하고 교통함으로 주님께 가져갈 시간을 찾아야 한다. 모든 성도들이 이 문제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것은 지극히 큰 축복을 가져올 것이다. 나는 우리 모두가 이것을 실행한다면, 많은 사람이 살아 있는 방식으로 생명의 빛 가운데서 생활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창세기의 주요 세 부분

창세기는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첫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것이고(창 1:1-2:25), 두 번째 부분은 사람의 타락에 관한 것이며(3:1-11:32), 세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부름에 관한 것이다(12:1-50:26). 우리에게 통찰력이 있다면 우리는 성령께서 창세기를 쓰도록 창세기 기자(記者)를 감동시키실 때, 본질적이고 내재적이고 영적인 의도를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 번 읽고 묵상하여 그분의 영께서 지속적으로 우리를 비추시도록 허락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의 내재적인 의미를 만지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는 기껏해야 표면에 있는 것들만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의 시작이 창조에 관한 것, 즉 각각의 날에 무엇이 만들어졌는지에 관해 볼 것이고, 또 남자와 여자가 창조되었다는 것에 관해 볼 것이다. 다음에 우리는 아담이 하나님께서 금하신 명령을 범한 것, 노아가 홍수에서 구원받은 것,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은 것,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을 볼 것이다. 그런 후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이 야곱을 낳고 야곱이 많은 아들들을 낳은 것과, 야곱과 그의 자손이 이집트로 내려간 것과, 결국 요셉이 입관된 것을 볼 것이다. 창세기의 시작은 창조에 대해 말하고, 그 끝은 이집트에서 입관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 같다. 표면적으로는 이것이 창세기에 기록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통찰력이 있다면, 우리는 창세기에서 영광스럽고 귀한 진리들을 발견할 것이다.

창세기의 첫째 부분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목적을 보여 주고,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기 위한 그분의 절차를 보여 준다.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신 것은 단지 외적인 일이다. 우리는 창조에 있어서 내재적이고 핵심적인 요점을 보아야 한다. 창세기 1장과 2장을 쓰도록 감동시키신 성령은 단지 하나님께서 하늘들과 땅을 창조하신 것을 보여 주기를 원하셨는가? 그러한 조망은 피상적이다. 우리에게 통찰력이 있다면, 영광스러우신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목적이 있다는 것을 볼 것이다. 그것은 그분의 영광스러운 형상과 통치권을 갖고 그분을 위해 다스림으로써 그분을 안식하실 수 있게 하는, 그분과 같은 한 무리의 영광스러운 사람들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 1장이다. 그런 후 하나님은 하나의 비유를 사용하셔서, 그분께서 어떻게 생명을 절차로 삼아 그분의 목적을 이루실지를 기술하셨다. 이것이 창세기 2장이다. 우리가 1장과 2장에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목적과 놀라운 절차를 볼 수 있다면, 우리는 더 깊은 수준에서 읽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의 두 번째 부분은 사람의 타락이라는 비극적인 과정을 보여 준다. 첫 번째 부분에서 하나님께는 창조된 사람에 관한 영광스러운 목적과, 그분의 목적을 수행하는 놀라운 절차가 있었다. 그러나 사람은 거듭거듭 타락하여 치료할 수 없는 지점에까지 이르러, 하나님의 구출을 받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조된 사람을 버리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시고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므로, 비록 사람이 타락했을지라도 그분의 원래의 목적을 철회하실 수 없었다. 비록 사람의 타락이 좌절하게 하는 요인이 되었지만, 하나님은 사람에 관한 그분의 목적을 포기하실 수 없었다. 그러므로 그분은 돌이켜 사람을 부르셨다.

창세기의 세 번째 부분은 하나님의 부름에 관한 것이다. 성경의 이 긴 부분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이라는 네 사람을 다룬다. 이 네 사람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부름의 의의(意義)를 말해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부름을 살펴볼 때, 이 네 사람의 이야기를 살펴보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이 네 사람의 체험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살펴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의 의의

새로운 시작

하나님의 부름의 첫째 의의는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해 새로운 시작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해 두 시작을 가지셨다는 것을 계시한다. 하나의 시작은 창조였고, 다른 하나의 시작은 그분의 부름이었다(창 1:26, 12:1-3).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새로운 시작을 가지셨다. 그것은 그분의 목적과 절차가 사람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과 절차에서 이탈했다. 사람은 하나님을 완전히 버릴 때까지 타락을 거듭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을 갖지 않으실 수 없었다. 이 새로운 시작이 하나님의 부름이었다.

하나님의 부름은 그분의 창조보다 더 높은 시작이다. 성경을 읽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창세기 1장과 2장에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이는데, 그것은 거기에서 하나님의 창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창세기 11장과 12장에는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부름을 보는 사람들은 극소수이다. 1장과 2장은 하나님의 창조라는 시작을 다루고, 11장과 12장은 하나님의 부름이라는 시작을 다룬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름은 그분의 창조보다 더 높다.

우리는 하나님께 창조된 사람들인가, 아니면 하나님께 부름받은 사람들인가? 우리에게 있어서 창조되는 것이 더 중요한가, 부름받는 것이 더 중요한가? 주님께 경배할 때 우리는 그분의 부름에 대해 얼마나 많이 그분을 찬양하는가? 각각의 믿는 이들이 부름받은 이들이다. 히브리서 3장 1절은 “하늘에 속한 부름을 함께 받은 거룩한 형제님들”이라고 말하고, 에베소서 4장 1절은 “여러분은 부름을 받았으니 그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십시오.”라고 말한다. 우리는 부름받은 이들이다. 하나님의 부름은 그분께서 타락한 인류에 대해 새로운 시작을 가지시는 것이다.

족속의 전이

하나님의 부름의 둘째 의의는 족속의 전이(轉移)이다. 하나님의 원래의 목적과 절차는 창조된 족속과 함께했지만, 아브라함이 부름받았을 때 하나님의 목적과 절차는 부름받은 족속에게로 옮겨졌다. 따라서 족속의 전이가 있었다. 창세기 1장 1절부터 11장 32절까지에서는 창조된 아담 족속이 하나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2장 1절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은 다른 족속에게로 전환하셨고, 부름받은 아브라함 족속이 그분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한 족속의 전이는 성경에서 커다란 전환이다.

창조된 아담 족속을 버리심

창조된 사람은 아담의 족속이다. 하나님은 아담 족속에 대해, 그분의 생명을 절차 삼아 달성하고 성취하고자 하시는 목적이 있으셨다. 그러나 사람의 네 단계의 타락 때문에, 창조된 아담 족속은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 족속을 버리셨다. 창세기 11장 10절에서부터 시작해서, 성경에서 아담을 언급하는 것은 항상 달콤하지 않다. 예를 들어, 로마서 5장 12절은 “그러므로 한 사람(아담)을 통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라고 말하고, 고린도전서 15장 22절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들은 하나님께서 아담 족속을 버리신 것을 보여 주는 것으로서, 긍정적인 것이 아니다.

부름받은 아브라함 족속을 선택하심

창조된 아담 족속을 버리신 후에 하나님은 전환하시어 아담 족속에게서 나온 한 사람을 선택하시어 새로운 머리, 새로운 시작이 되게 하셨다. 이 사람이 아브라함이었다. 아브라함은 창조된 족속의 머리가 아니라 부름받은 족속의 머리이다.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인데, 히브리어로 ‘높여진 아버지’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를 의미하는 아브라함으로 바꾸셨다(창 17:5). 아브라함은 원래 높여진 아버지였지만, 하나님은 그가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가 되기를 원하셨다. 아브라함은 아버지였다.

성경에서 ‘아버지’는 ‘시작’, ‘기원’을 함축하는 근원을 가리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새로운 머리, 새로운 시작, 새로운 기원으로 만드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실 때, 아담을 인류의 아버지, 인류의 첫 번째 조상과 기원으로 만드셨다. 따라서 아담이 아담 족속의 머리이다. 아담과 그의 자손이 거듭해서 타락했으므로, 하나님은 아담 족속을 버리지 않으실 수 없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새로운 아버지, 새로운 근원이 되게 하셨다. 이때부터 하나님의 목적은 아브라함이라는 부름받은 족속에게로 옮겨졌다. 사람의 타락 때문에 하나님은 창조된 족속에 대한 그분의 목적에 도달하지 못하셨지만, 부름받은 족속에 대해서는 그분의 구속을 통해 그분의 영원한 목적에 도달하실 것이다.

창세기 12장 1절부터 성경의 끝까지,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이 하나님의 초점이다. 구약은 아브라함의 땅에 속한 육신적인 자손에 관해 말하지만, 신약은 아브라함의 하늘에 속한 영적인 자손에 관해 말한다. 이러한 하늘에 속한 영적인 자손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믿음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하늘에 속한 영적인 자손들이다(갈 3:7). 따라서 성경은 아브라함 족속과 함께 크게 전환한다.

생명의 전이

우리가 하나님의 빛 비춤을 받는다면, 아브라함에게서 족속의 전이만 있었던 것이 아님을 볼 것이다. 족속의 전이는 사실상 생명의 전이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달성하시기 위해 족속의 전이가 필요하셨고, 그분의 목적을 달성하는 유일한 길은 생명을 통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도는 아담의 옛 창조의 생명에서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생명으로 생명의 전이를 얻으시는 것이었다. 신약의 믿는 이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것은 아담의 생명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옮겨지는 거듭남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담이 옛 창조의 머리였고, 아브라함은 부름받은 이들의 첫 번째 조상이었다고 말한다. 이것이 옳지만,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우리는 아담에게 속하고 또한 아브라함에게 속한다. 우리는 아담의 일부이고, 또한 아브라함의 일부이다. 원래 우리는 아담 족속에게 속했다. 그러나 구원받을 때 우리는 부름받은 족속의 일부가 되었다. 그 영적 의미에 의하면 족속의 전이는 생명의 전이이다. 원래 우리는 아담의 생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실 때 그분은 우리를 아담의 생명에서 그분의 생명 안으로 옮기셨다. 이것은 족속의 전이이자 또한 생명의 전이이다.

우리가 생명의 관점에서 족속의 전이를 살펴본다면, 그러한 전이가 한 번의 단계로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족속의 전이나 생명의 전이는 아브라함에게서부터 시작되었고, 야곱이 이스라엘로 변화되기 전까지는 성취되지 않았다.

아브라함에게서

아브라함에게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아담 족속을 버리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을 본다. 이것은 족속의 전이였지만, 이 전이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으로 완성되지 않았다. 새로운 족속의 상태는 즉시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은 아브라함이 아직도 자신 안에 아담 족속의 상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다마스쿠스 사람 엘리에셀이 자신의 상속자가 되기를 원했다(창 15:2-3). 후에 이집트 사람인 하갈이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이라는 아들을 낳아 주었다(창 16:15). 그런 후 사라도 아브라함에게 이삭이라는 아들을 낳아 주었다(창 17:15-19, 21:1-3). 이 셋, 곧 엘리에셀과 이스마엘과 이삭은 어떤 족속에 속했는가? 아브라함의 몸에서 나오지 않은 엘리에셀은 아담 족속에 속했다.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다. 따라서 이스마엘도 옛 창조물에 속한 아담 족속에 속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스마엘이 아브라함 족속에 속한 것 같다. 그러나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이 자신의 육체를 사용하여 태어나게 한 아들이다. 아브라함에게는 아직도 아담의 생명이 있었으므로, 그에게서 산출된 것 역시 아담 족속에 속한 것이었다.

이것은 왜 하나님께서 엘리에셀도 이스마엘도 원하지 않으셨는지를 계시해 준다. 아브라함의 원래의 의도는 그가 낳지 않은 엘리에셀을 의지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은 엘리에셀을 거절하셨다(창 15:4). 아브라함은 후에 자기 육체의 힘을 따라 이스마엘을 낳았지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내 사라의 말을 듣고 이스마엘을 쫓아내라고 하셨다(창 21:9-12). 엘리에셀과 이스마엘은 둘 다 아담의 생명으로 산출되었고 아담 족속에게 속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들을 거절하셨다. 아브라함의 아들 중에서 하나님은 이삭만을 기쁘게 받아들이셨다. 그것은 이삭만이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태어나 부름받은 족속에게 속했기 때문이었다(창 17:15-19, 18:10-14).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시기 전에 그가 늙고 실패할 때까지 기다리셨는가? 로마서 4장 19절은 “그(아브라함)가 거의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이 이미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도 죽은 것 같다는 것을 알고”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 원하신 때 아브라함은 이미 죽었고 사라도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이삭을 낳기 전에 그들의 몸이 죽은 것같이 되기를 기다리셨는가? 이삭의 산출은 족속의 전이를 위한 것이었다. 이 절에서 죽음이 언급된 것은 아브라함이 아담의 생명에서 끊어질 수 있으려면 아담의 생명이 죽어야만 했다는 것을 함축한다. 만약 아브라함과 사라 안에 있는 아담의 생명이 죽지 않는다면 그들이 산출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아담에게서 나오는 것, 곧 이스마엘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브라함과 사라가 죽어 아브라함이 자신을 죽은 것으로 여길 때까지는 이삭이 산출될 수 없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둘 다 죽었는데, 어떻게 이삭이 산출될 수 있었는가? 창세기 18장 14절에서 하나님은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둘 다 죽었지만,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삭을 산출하셨다. 이것은 족속의 전이, 즉 생명의 전이이다.

이때에 아브라함이 낳은 것은 또 다른 이스마엘이 아니라 이삭이었다. 부름받은 족속에 의하면 아브라함에게는 오직 한 아들 이삭이 있었다(창 22:2, 12). 이스마엘은 아담의 생명이 죽기 전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은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났지만 여전히 아담 족속에 속했다. 아담 족속의 생명이 죽는 것을 상징하는 아브라함과 사라의 육체에 속한 힘이 고갈되기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오셔서 이삭이 태어남으로 또 다른 족속이 산출되는 일이 이루어질 수 없었다.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간 것(창 12:1-5)은 족속의 전이의 시작이었다. 이삭이 태어나기(창 21:1-3) 전까지는 생명의 전이가 없었다. 이삭의 출생은 부름받은 족속의 산출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창 21:12). 이것은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사람이 다 아브라함의 족속이 아니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이삭에게서 나는 사람만이 아브라함의 족속에 속한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지만, 족속의 전이는 완성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후에 아브라함은 여전히 아브라함의 족속에 속하지 않고 아담 족속에 속한 아들들을 여럿 낳았기 때문이다(창 25:1-2).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은 것은 일시적인 결말에 불과했다. 그것은 족속의 전이가 완전히 성취된 것이 아니었다.

이삭에게서

족속의 전이는 이삭에게서도 완전히 성취되지 않았다. 그의 아내는 에서와 야곱이라는 쌍둥이를 낳았다(창 25:21-26). 하나님께서 미워하신 에서(말 1:2-3, 롬 9:13)는 아담의 생명 안에 머물렀고 아담 족속에 속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야곱만이 아브라함 족속에 속했다. 족속의 전이는 야곱에게서 성취되었다.

야곱에게서

처음에 야곱은 속이는 사람이었다(창 27:35-36). 그는 또한 상당히 천연적이었다. 그가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고 하나님의 이스라엘(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왕자’를 의미함―창 32:27-28)이 된 후, 족속의 전이가 성취되었다. 그때부터 그의 자손들은 야곱의 열두 지파라고 불리지 않고 이스라엘 열두 지파라고 불렸다(창 49:28). 이스라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러나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불리지 않고 이스라엘의 자손이라 불렸는데, 그것은 이스라엘에게서 전이가 완전히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부름받은 족속은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이삭을 거쳐, 이스라엘에게서 완성되었다. 아담의 생명에서의 완전한 전이는 이스라엘에게 있었다. 아브라함의 족속에 속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자손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중에서 이름이 바뀐 사람은 누구인가? 아브람의 이름은 아브라함으로 바뀌었고, 야곱의 이름은 이스라엘로 바뀌었지만, 이삭의 이름은 바뀌지 않았다. 아브람은 왜 그의 이름을 바꾸어야 했는가? 아브람은 아담 족속에게서 부름받아 나왔으므로 이름을 바꾸는 전환이 필요했다. 그의 이름은 그가 전환을 가진 때인 할례를 받을 때 바뀌었다(창 17:5, 10). 왜 야곱은 이름을 바꾸어야 했는가? 야곱은 타고난 그대로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심으로써 영적인 사람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그에게는 이름을 바꾸는 전환이 필요했다. 야곱의 이름은 그가 전환될 때 바뀌었다(창 32:27-28). 이삭은 이름이 바뀌는 것이 필요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났기 때문이었다(창 18:10-14). 그는 아브라함 안에서 부름받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삭은 세상에 속하지도 않았고, 타고난 그대로의 사람에 속하지도 않았다. 이삭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전환이나 이름을 바꾸는 것이 필요 없었다.

믿는 이들에게서

우리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 관한 이러한 교통을 교리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교통을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 족속의 전이는 생명의 전이이다. 따라서 이것은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원래 우리에게는 옛 창조의 생명인 아담의 생명만 있었는데, 그 생명은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아무 쓸모나 위치나 몫이 없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때, 그분은 우리에게 다른 생명, 다른 시작을 주셨다. 이 생명은 하나님께서 오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생명이고 그리스도의 생명이다(비교 창 18:14, 요 1:14, 17). 이 생명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믿는 이들에게서 생명의 전이는 그들의 거듭남으로 시작된다(창 3:3, 5). 우리는 거듭날 때부터 아담의 생명에서 나와 그리스도의 생명 안으로 옮겨진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자라고 십자가의 일을 체험할수록,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아담의 생명에서 더욱더 나와 옮겨진다. 즉 육체는 죽을 것이고, 옛 창조의 생명도 죽을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베어 내는 영적 할례를 체험할 것이다(갈 5:24, 골 2:11). 우리는 또한 은혜를 알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오심을 알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형상을 이룰 것이고, 생명의 전이가 우리에게서 마무리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 아담의 생명의 흔적이 더 이상 없으리라는 뜻이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갓 할례 받은 아브라함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에서와 야곱을 낳은 이삭과 같을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타고난 그대로였던 야곱과 같을 것이다. 우리 몸의 구속이 이루어질 때 생명의 전이가 우리 안에서 완성될 것이다. 그때 우리는 새로운 족속이 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같을 것이고(요일 3:2), 그리스도의 공동 왕들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의 만족과 안식을 위해, 하나님을 위해 다스릴 것이다(계 20:4-6, 22:5).

아담 족속의 창조된 생명은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에 무능하므로 하나님의 목적과는 무관하다. 오직 새 창조의 생명만이 하나님의 마음의 만족을 위해 그분의 갈망을 이룰 수 있고 그분의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창조된 아담 족속을 버리시고 부름받은 아브라함 족속을 선택하셨다. 또한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아담의 생명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옮기시기 위해 운행하고 계신다.


저자 프로필


저자 소개

[위트니스 리]
1905년에 중국 북부에서 태어나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자라났다. 19세 때에 그는 그리스도께 완전히 사로잡혀, 즉시 그의 일생을 복음 전파를 위해 헌신했다. 그의 봉사의 초기에 그는 유명한 설교자, 교사, 저술가인 워치만 니를 만났다. 위트니스 리는 워치만 니의 지도 아래 그와 함께 일했다.
1943년에 워치만 니는 위트니스 리에게 상해 복음서원이라는 그의 출판 사업의 책임을 맡겼다. 1949년, 공산당이 점령하기 전에 위트니스 리는 워치만 니와 그의 다른 동역자들에 의해 대만으로 보내어져 일했으며, 대만에 있는 교회들은 중국 본토에서 새로 피난 온 단 350여 명의 성도들에서 5년 내에 20,000명으로 성장했다. 1962년에 위트니스 리는 미국으로 가야 한다는 주님의 인도를 느끼고 캘리포니아에 정착했다. 미국에서 섬긴 35년간 그는 주중 집회들과 주말 특별 집회에서 칠팔천여 메시지를 전했다.
그가 전한 말씀들 중 많은 것들이 400여 개 이상의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중 많은 책들이 14개 이상의 언어들로 번역되었다. 그의 공식적인 마지막 특별 집회는 91세 때인 1997년 2월에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목표는 편협한 종파주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확신을 굽히지 않았고, 믿는 이들은 이러한 확신에 반응하여 단순히 그들의 지방에 있는 교회로서 모이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러시아와 많은 동구 국가들에도 새로운 교회들이 세워졌으며, 미국에서는 기독교 방송을 통해 그의 메시지들을 들을 수 있다.그는 2014년 4월 29일에 미국 국회 펜실베니아 출신 하원 의원인 조셉 R. 피츠(Joseph R. Pitts) 의원에 의해 "중국어권을 초월하는 그의 지대한 영향력"으로 존경을 받았다.

목차

목차

서문

1. 하나님의 부름의 의의

2. 하나님의 부름의 배경과 기원

3. 부름받은 이들이 삼일 하나님을 체험함

4. 아브라함의 체험 ― 부름받음(1)

5. 아브라함의 체험 ― 부름받음(2)

6. 아브라함의 체험 ― 믿음으로 생활함(1)

7. 아브라함의 체험 ― 믿음으로 생활함(2)

8. 아브라함의 체험 ― 믿음으로 생활함(3)

9. 아브라함의 체험 ― 은혜를 앎(1)

10. 아브라함의 체험 ― 은혜를 앎(2)

11. 아브라함의 체험 ― 하나님과 교통함(1)

12. 아브라함의 체험 ― 하나님과 교통함(2)

13. 아브라함의 체험 ― 하나님과 교통함(3)

14. 이삭의 체험 ― 은혜를 상속받고 안식하고 누림

15. 부름받은 이의 전진

16. 야곱의 체험 ― 선택받고 다루어짐

17. 야곱의 체험 ― 파쇄됨

18. 야곱의 체험 ― 성숙하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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