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증발을 선택한 사람들
그들의 슬픔과 외로움을 추적한 5년간의 일본 탐사보고서
1989년 도쿄 주식시장의 급락을 시작으로 부동산 가격의 폭락, 경기 침체, 디플레이션이 이어지면서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의 늪에 빠져버렸다. 이후 일본에서는 매년 1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증발’하고 있다. 그중 8만 5,000명 정도가 스스로 사라진 사람들이다. 체면 손상과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일본 사람들은 빚, 파산, 이혼, 실직, 낙방 같은 각종 실패에서 오는 수치심과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아무 말 없이 집을 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길을 택한다. 그리고 그들은 신분을 숨긴 채 도쿄의 슬럼 지역인 산야나 오사카의 가마가사키 등으로 숨어든다.
프랑스 저널리스트 레나 모제와 그녀의 남편이자 사진작가 스테판 르멜은 2008년 우연히 증발하는 일본인들에 대해 알게 되고, 이 이야기에 끌려 일본으로 날아간다. 그리고 5년 동안 도쿄, 오사카, 도요타, 후쿠시마 등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자발적 실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사연과 그 이면을 심층 취재한다. 이 추적 탐사가 드러내는 것은 파괴된 인간, 그리고 그들을 방기하고 착취하는 일본 사회의 민낯이다.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살아가는 개인의 서사와 그들을 낳은 시대의 초상이 겹쳐지며 직조해낸 비극적 드라마는, 절망과 고통 가운데서도 지속되는 생의 근원적 진실을 환기한다. 더욱이 과거 일본에서 일어났던 사회 문화적 현상들이 일정한 시차를 두고 되풀이되는 한국 사회에서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첨예할 수밖에 없다. 체면과 경쟁이 중요하고 실패한 개인들의 재기를 뒷받침해주는 사회안전망이 부실한 우리에게, ‘인간 증발’은 현재 또는 미래가 투영된 문제적 현상이다.
자발적 실종자,
얼음장 같은 현실을 등지고 증발한 사람들
2011년 원전 사고가 발생한 이후, 후쿠시마에서 방사능에 오염된 흙과 먼지를 포대에 담아 한곳에 모아두는 일을 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1년치 방사능 허용치의 여덟 배가 넘는 그곳에서 방사능에 그대로 노출된 채 작업을 하고 있다. 후쿠시마에서 이처럼 위험한 작업을 하고 있는 이들은 대부분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즉 모두에게 잊힌 존재이자 스스로 과거를 지우고 사회의 그림자가 된 사람들이다. 이들은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을까.
세계 3위의 경제 대국, 일본의 수도 도쿄 안에 침묵이 가득하고 사회 규범이 통하지 않는 유령 같은 세계가 존재한다. 에도시대에는 범죄자들을 처형했던 곳이며 도살장으로 사용되다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인력시장이 섰던 곳, ‘산야山谷’다. 산야는 일본 정부가 지도에서 일부러 지명을 삭제한 곳이며 택시 기사들조차 손님을 태우고 가기를 꺼리는 불길한 곳이다. 산업과 무역의 중심지 오사카에도 ‘가마가사키釜ケ崎’라는 산야와 비슷한 곳이 있다. 이곳에 과거를 지우고 스스로 사라진 사람들이 모여든다. 이들 도시에는 정상적인 삶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들은 왜 산야, 혹은 가마가사키로 올 수밖에 없었는가.
“더 이상 어머니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제게 모든 것을 주었지만 전 어머니를 돌볼 수 없었습니다.” 1990년대 중반의 어느 봄날 새벽, 유이치는 저렴한 모텔을 알아본 후 병든 어머니를 그곳에 버리고 그대로 달아났다. 쓰레기 채집과 막일을 전전하다가 산야의 이 작은 모텔을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그는 2층의 사무실과 투숙객들 사이에서 사는 현재의 삶이 편하다. 산야의 주민 중 몇 명이나 야반도주해서 왔는지, 가명을 사용하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정부의 지원도 전혀 받지 못하고 자급자족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고 별로 관심도 없다. 여기서는 모두가 철저한 무관심 속에서 죽어갈 것이다. – 본문 85쪽
얼음장처럼 가혹한 현실 앞에 ‘증발’한 사람의 운명은 둘 중 하나다. 비명횡사하거나 영영 잊히거나. 다른 길은 없다. 일본에서는 1년에 3만 3,000명, 하루 90명 정도의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 외의 사람들은 사회의 그늘, 산야로 흘러든다. 골목마다 쓰레기가 널려 있고 지린내와 술 냄새가 진동하는 산야에서 증발한 사람들은 과거와 함께 희망을 지우고 하루하루 살아간다. 저마다 다른 아픔과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대부분은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온, 혹은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이다. 사회의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져 무서울 것 없는 일용직 노동자들이 비양심적인 고용인과 위험한 거래를 한다. 그리고 그곳에 야쿠자가 있다. 야쿠자는 절망에 빠져 사는 사람들을 이용해 돈을 번다. 증발한 사람들은 그렇게 죽음의 땅, 후쿠시마로 흘러 들어간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일본의 슬픈 민낯
거대한 압력솥과 같은 사회
저자들에 따르면 일본 사회는 하나의 거대한 압력솥과도 같다. 마치 약한 불 위에 올려져 조금씩 끓는 압력솥 같은 사회에서 일본인들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그러다 압력을 견딜 수 없을 정도가 되면 수증기처럼 증발해버리는 것이다. 빚이나 진학 실패, 이혼과 같은 실패 때문에 증발하기도 하지만 가장 많은 경우가 실직 때문이다. 오랫동안 회사를 위해서 자신을 포기하고 희생해온 직장인들에게 해고는 참을 수 없는 수치심을 안겨준다. 지난 시간을 모두 부정당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집에도 알리지 않고 평소처럼 출근하는 척 증발하는 경우가 많다. 실패를 용인하지 못하는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에서 그들은 어디에도 기댈 곳을 찾을 수 없다.
일본을 대표하는 기업, 도요타의 예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도요타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도시가 되었으며, 회사의 내부 규칙인 도요타 코드가 도시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 전체를 지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손은 주머니 속에 넣으면 안 되고 집과 직장 사이를 차로 이동할 때도 개선할 점은 무엇인지 살펴 보고서를 작성해야 한다. 휴대폰은 낮이고 밤이고 켜놔야 하고 화장실에 갈 때도 상사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손을 씻을 때도 차례를 기다려야 한다. 집에서도 생산성을 높일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 그렇게 일본인들은 자신을 회사에 끼워맞추고 있다. 적은 인력으로 최대한 빠르게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 한다. 이런 회사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면 ‘지옥의 캠프’라고 불리는 재교육 프로그램이 기다리고 있다. 재교육의 목표는 ‘부족한 점이 많은 직원들을 질서와 순종의 바른 길로 다시 인도하는 것’이다. 군대처럼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읽기와 말하기, 쓰기, 생각하기를 새로 배운다. 다시 말해 회사가 정한 규칙에 복종하는 표준적인 인간을 만드는 게 이곳의 목적이다. 이 재교육 프로그램을 포기하거나 거부한다면 그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해고’뿐이다.
그에게는 마지막 시험이 남아 있다. 자기비판. 신고는 옷을 홀딱 벗고 자신의 잘못과 단점을 고백해야 한다. 심사위원 세 명이 무덤덤한 표정으로 책상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 신고가 자기비판을 시작한다. “이번 연수를 받으면서 그 동안 제가 얼마나 편협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오만함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능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았지만 자만했습니다.”
“더 크게!”
신고가 목소리를 높인다.
“좀 더 크게!” – 본문 109쪽
‘증발’에는 일본인 특유의 정서가 깔려 있다. 오래됐으나 아직까지도 일본을 비교적 정확히 이해하는 책으로 인정받고 있는 《국화와 칼》에서 루스 베네딕트는 일본인들이 독특한 부채 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보았다. 저자들은 여전히 베네딕트의 통찰이 유효하다고 보고 있다. 일본인들은 넓은 의미에서 윗사람(조상, 부모, 교수, 심지어 일왕)에게 빚을 지고 있다는 감정을 가지고 있다. 이 빚을 갚는 것은 체면과 관련된 문제다. 즉 이 빚을 갚지 못하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에게 빚을 지지 않으려 애쓴다. 그렇기 때문에 사고를 당해도 다른 사람에게 빚을 질까 두려워서 소극적으로 행동한다.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스스로를 자책하게 만든다. 결국 예의를 지키고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증발이나 자살을 선택한다. 루스 베네딕트는 이런 현상을 보고 《국화와 칼》에서 ‘일본인들은 실패, 수치심, 매정한 거절을 견디는 힘이 약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타인보다는 자기 자신을 괴롭힌다’고 썼다.
일본적인 너무나 일본적인,
그러나 이미 우리 곁에 당도한 이야기
이 책은 푸른 눈의 이방인이 일본 각지의 그늘진 뒷골목을 5년이나 돌아다니며 관찰해 써내려간 일본에 관한 탐사보고서다. 불가촉천민으로 살다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야반도주를 선택한 일가족부터 자발적 실종자들의 야반도주를 돕는 사람, 그들의 이야기로 드라마를 찍은 감독, 대학 입시에 실패하고 사고를 쳐 교도소를 다녀온 후 가족의 부담이 되기 싫어 스무 살의 젊은 나이에 산야에 흘러든 청년, 주식에 손을 댔다가 큰 손해를 보고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교사, 아들을 버리고 도쿄의 유흥가에 흘러든 여자, 병든 어머니를 모텔에 버리고 도망친 남자, 도요타 시로 일하러 온 남미의 이주 노동자, 자식이 북한에 납치되었다고 10년 넘게 믿고 있는 가족, 증발한 사람들을 찾는 탐정, 어머니의 매질을 피해 열두 살에 가출하여 평생을 죽은 사람처럼 살아온 남자, 잘난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고자 빚을 지고 시골로 흘러들었으나 결국 가족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 자살 명소 도진보 절벽에서 구조의 손길을 내미는 일을 하는 퇴직 경찰, 은퇴한 야쿠자, 야쿠자로 살다가 2년 만에 도망쳐 집으로 돌아온 남자…….
증발한 사람들이 머무는 곳과 그들이 무슨 일을 하며 삶을 이어가는지 기구한 사연들이 소설보다 더 드라마틱하게 펼쳐진다. 방대한 인터뷰와 심층 취재를 토대로 일본인 특유의 정서와 일본의 심각한 사회 문제를 다루고 있다. 히끼코모리나 코스프레처럼 일본에서 일어났던 사회문화적 현상들이 일정 시간을 두고 우리나라에서도 나타났다는 점, 일본의 경제·사회 현실이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 등을 돌이켜보면, 일본의 이 고통스러운 이야기가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어쩌면 이미 우리 곁에 당도한 그림자가 아닌지 주위를 돌아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