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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의 조선여행 상세페이지

세상 사람의 조선여행작품 소개

<세상 사람의 조선여행> 그들은 왜 조선을 찾아왔는가
그들의 여행엔 어떤 숨은 목적이 있었을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던 외국인들의 조선 및 식민지근대 탐방기를
철저한 사료 검토와 풍부한 상상력으로 되살렸다

청나라 사행들이 벌인 조선에서의 은사냥
정묘호란이 끝나고 기어코 한양 상행을 감행한 일본 사행
36명 네덜란드인이 펼친 조선에서의 혹독한 생존기
좌파 작가 잭 런던은 왜 한국인을 보고 살인충동을 느꼈나
유럽 몰락 귀족에게 기회의 땅이 된 대한제국
일본 문화재학 대부가 조선 고적조사를 벌인 진짜 이유

규장각 교양총서 6 『세상 사람의 조선여행』…조선 땅 밟은 외국인 여행기록 유형별 망라

규장각 교양총서 제6권 『세상 사람의 조선여행』이 출간되었다. 이번 책은 조선초기부터 근대시기까지 조선을 다녀간 이방인들의 여행을 다루고 있다. 세종 시기 명나라 칙사들부터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사행과 같은 국가간 사신 왕래들부터 하멜로 대표되는 표류, 학술조사 차 배를 타고 건너온 학자들의 여행까지 다양한 형태의 여행기록을 전문가들의 꼼꼼한 사료검토와 풍부한 상상력 및 관련된 도판으로 입체적으로 다루었다.
이방인들에게 조선과 식민지 근대는 어떤 나라였을까? 그들은 무슨 목적으로 조선에 와서 무엇을 보고 느꼈으며, 그들의 기록엔 우리의 어떤 모습이 그려져 있을까? 이번 『세상 사람의 조선여행』에서는 바로 그러한 것들을 살펴보고자 했다.
조선시대에는 이웃 나라 일본과 중국인조차 함부로 들어와 사는 것이 금지되었고, 합법적으로 우리 땅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의 범위도 제한되어 있었지만, 조선에 왔다 간 흔적을 남긴 사람들이 꽤 있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외교와 문화 전파의 통로이기도 했던 중국의 칙사와 일본 통신사가 대표적이다. 『조선왕조실록』을 꼼꼼히 독해하여 명나라와 청나라 칙사들의 유형과 방문 행태, 그리고 조선 측의 접대 방식을 통시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중화 체제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면, 임진왜란 직후에 굳이 한양에 입성하겠다는 일본 사신 일행에 대해 책임지고 접대하는 모습에서 과거의 적국에 대해서도 예를 다하는 조선의 문화를 발견하게 된다.

“이날 부산에는 새벽부터 비가 내리더니 낮이 되자 조금 갰다고 한다. 정홍명이 선온을 받들고 일본 사신들이 묵고 있던 객관客館으로 들어가니, 객사의 상관(정사)과 부관(부사)이 대문 밖에서 동쪽으로 향해 서 있고, 동래부사는 서쪽을 향하여 서 있다가 몸을 굽혀 공경히 맞았다. 선위사가 정문으로 들어가 선온을 탁자 위에 올려놓고 동쪽 가까이에서 서쪽을 향해 서니, 객사들이 네 번 절을 하고 차례로 올라가 예를 갖추어 마시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기생의 음악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고 한다. 이때의 모습을 정홍명은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아홉 잔을 든 뒤에 중배례中杯禮를 하여 서서 마셨는데, 이때 부관 평지광(스기무라 우네메)이 선온宣?인 자소주紫燒酒를 마시며 잔을 완전히 비우더니 취하여 정신을 못 차리고 붙들려 나갔고, 현방(겐포)도 취하여 차분한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본문 중에서)

조선이라는 ‘엘도라도’에 은 사냥 오기 위해 막대한 뇌물까지 바쳤던 청 환관들
무엇보다 조선을 가장 많이 다녀간 이들은 중국 사신들이었다. 학계에서는 1392년부터 1634년까지 명이 사신을 파견했던 횟수를 188회라고 추산하며, 청은 많이 잡아 245회 칙사를 파견했다. 그들은 당연히 국왕을 만나 외교업무만 보고 떠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들은 조선 땅을 여행했으며, 거기엔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1625년(인조 3) 인조 책봉을 위해 왔던 환관 왕민정王敏政은 조선에 오기 위해 명의 실권자 위충현魏忠賢에게 막대한 은화를 뇌물로 바치고 온 자였다. 그는 조선에서 13만 냥을 긁어갔다. 1634년 왕세자 책봉을 위해 왔던 노유녕盧維寧 또한 수만 냥을 챙겨갔다. 은에 눈이 멀어 조선에 왔던 당시의 칙사들이 변변한 기행문이나 시문집을 남겼을 리 없다. 17세기 초 30여 년 동안 조선에 왔던 명의 사신들은 명목은 칙사였지만 사실상 한 밑천 잡기 위해 조선에 들어온 ‘강도’나 다름없었다. 그들에게 조선은 그저 은이 넘쳐나는 일종의 ‘엘도라도’였던 셈이다.” (본문 중에서)

이러한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교류의 반대편에는 임진왜란처럼 적대적인 전쟁 상황에서 조선을 찾은 이방인의 모습이 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군대로 티베트, 미얀마군까지 조선에 들어왔음을 알 수는 있으되 그들이 무엇을 보고 느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고, 적국의 군인 신분으로 조선 땅을 밟아 귀화한 김충선을 비롯한 일본인들에 대해서는 단편적인 이야기를 확인할 따름이지만, 그 행간에서 성리학적 화이론으로 묶인 동아시아 삼국 간의 전쟁이 갖는 복잡한 면모를 맛보게 된다.

“여기 전주를 떠나가면서 가는 도중의 벽촌에서 남녀를 불문하고 죽이고 있는 참상은 차마 두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8월 28일] … 일본에서 온갖 상인들이 왔는데, 그 중에 사람을 사고 파는 자도 있어서 본진의 뒤에 따라다니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서 줄로 목을 묶어 모아서 앞으로 몰고 가는데, 잘 걸어가지 못하면 뒤에서 지팡이로 몰아붙여 두들겨 패는 모습은 지옥의 아방阿防이라는 사자가 죄인을 잡들이는 것도 이와 같을 것이다 하고 생각될 정도이다. [11월 19일]” (본문 중에서, 임진왜란을 종군한 케이넨의 『일일기日日記』 중)

일반인들과 함께 생활했던 선교사들의 기록은 훨씬 세밀하고, 지배층에 대한 반감 훨씬 커
17세기 이후에는 중국과 일본 이외의 이방인도 눈에 띈다. 방문 목적이 아닌 풍랑으로 인한 표류로 조선 땅을 밟게 된 하멜 일행이 대표적이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선원인 하멜 일행은 이를테면 조선인 최부 일행이 제주 바다를 못 넘어가고 중국 연안 방향으로 떠내려간 것과 반대로, 일본 나가사키를 향해 항해하다가 폭풍우에 휘말려 제주도로 떠내려왔다. 최부 일행이 왜구의 혐의를 벗고 한양으로 돌아오기까지 반년이 걸린 데 비해, 하멜 일행은 조선 정부의 감독과 관리를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가기까지 13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고, 또한 최부 일행은 전원이 생존하여 귀향했으나 하멜 일행은 절반 정도만 귀향했다는 점이 다르다. 하멜은 비교적 객관적으로 조선인들의 삶을 기록으로 남겼다. 아래는 본문에 나오는 몇몇 대목을 정리한 내용이다.

“·살인자: 살인당한 사람의 온몸을 식초와 더럽고 악취 나는 물로 씻은 후, 그 물을 깔때기로 살인자의 목에 붓고, 그 물이 가득 찬 뒤에는 곤봉을 가지고 배를 쳐 터뜨림.
·조선인들은 단지 12개의 국가만 알고 있으며, 우리를 남만국南蠻國으로 부름. 담배를 남만국에서 왔다고 생각하여 남빤코이nampancoij라 부르는데, 지금은 담배를 많이 피워 네댓 살 되는 아이들도 피움.
·방바닥의 아래에는 오븐 같은 것이 있는데, 겨울에는 날마다 불을 때어 따뜻하게 함.
·기생 등과 함께 놀기를 좋아하는 고관들은 사찰을 이용하며, 그래서 사찰이 도량보다는 매음굴이나 술집으로 이용되기도 함.
·그들은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여관이나 숙소는 알지 못하며, 여행하다가 날이 저물면 아무 집이나 들어가 자기가 먹을 만큼 쌀을 내놓으면 그 집주인은 즉시 그 쌀로 밥을 지어 반찬과 함께 차려 내놓음.
·그들이 마음은 여자처럼 여리다. 박연이 알려준 사실에 따르면, 청나라 군대가 침략했을 때 숲속에서 목매달아 죽은 사람이 적군에게 살해당한 수보다 많았다고 한다. 이는 자살하는 것이 부끄러움이 아니며 어쩔 수 없는 상황 때문에 그렇게 했다고 함.” (본문 중에서)

19세기 중엽 천주학이 금지된 조선에 죽을 각오로 몰래 들어온 프랑스 선교사들이 남긴 기록에서 우리는 자신과 다른 문화권에 비교적 오랫동안 머물면서 그 사회의 속살을 만난 이방인이 가질 수 있는 다층적인 시각을 엿볼 수 있다. 유럽 중심적인 시각에서 조선의 정치제도와 문화는 비판의 대상이었지만, 따뜻한 가족 사랑과 이웃의 정을 보여주는 이교도의 생활 풍습은 기독교도인 유럽인으로서 당혹스러운 자기 성찰의 계기였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일반적인 유럽인들이 보지 못하던 것들을 보기도 했다. 서양의 상인들이나 탐험가, 군인들은 유럽에서 간행된 책에 실려 있는 조선에 관한 내용만 알고 있거나, 잠시 조선을 들러서 겉으로 보이는 것들만 구경한 사람들이었다. 이에 비해서 선교사들은 처지가 사뭇 달랐다. 길게는 20년 넘게 조선에서 살면서 별별 것들을 다 목격했던 것이다. 그래서 조선 사람의 생활에 관한 것도 무척 잘 알고 있었고, 또 조선에서 벌어지는 정치적인 일이나 사회적인 일들도 비교적 소상하게 들은 적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잠깐 조선을 다녀간 서양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상세한 정보들을 가지고 있었다.” (본문 중에서)

1884년 조선이 세계 각국에 문호를 개방해 서양인의 입국과 거주가 허가된 뒤로는 다양한 직업을 가진 이방인들이 조선을 방문했다. 외교관은 물론이고 성직자, 기자, 기업인, 의사, 군인, 학자, 여행가, 사진가, 상인들이 저마다의 이유를 품고 서로 다른 깊이로 조선 사람과 문화를 만났다. 더욱이 일본에 강제병합된 후에는 조선으로 이주한 일본인은 물론이고 학생이나 문인, 지식인들이 앞다투어 조선을 다녀갔고, 식민 통치를 위한 각종 조사와 연구를 수행하고자 방문하기도 했다. 이렇듯 개항 이후부터 식민지 시기까지 조선을 다녀간 외국인은 상당수였고, 이들이 남긴 기록물 또한 방대하다. 백과사전류, 동양학서지, 여행안내서, 지도첩, 한국 방문자들의 전기, 선교활동, 선교문학 등 종류 또한 다양하다.

다양한 배경과 여행 목적 지닌 사람들의 기록 선별
이 책에서는 개항 이후 조선에 온 이방인 중에서 이사벨라 비숍여사처럼 일찍이 알려진 인물을 제외하고 다양한 배경과 여행 목적을 지닌 사람들의 이야기와 기록을 선별했다. 조선 정부가 채용한 최초의 서양인이자 거주가 허용된 최초의 서양인인 독일 사람 묄렌도르프의 사례를 통해 19세기 유럽을 강타한 동양학 열풍의 배경을 알게 된다. 동양 식민지와 주변부 국가는 중심부 엘리트들에게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하는, 부와 명예와 출세를 보장하는 기회의 땅이었던 것이다.

그의 제안에 따라 다양한 개화사업들이 입안·추진되었고, 이 사업들은 그의 지인들에게 불하되었다. 1883년 그와 친분이 있던 이화양행怡和洋行의 거빈스Gubbins에게 상해-인천·부산 간 월 2회의 정기항로권을 부여하고, 상무총판商務總辦 진수당陳樹棠 에게 청국에 유리한 초상국윤선왕래합약장정招商局輪船往來合約章程을 체결하여 상해-인천 간 월 1회의 정기 운항권을 부여했다. 이후 독일계 세창양행世昌洋行과 윤선임조조약輪船賃租條約을 체결하여, 정부 조세를 운송하는 권한을 허여했다. 나아가 그의 지인인 독일인 메르텐스A. Maertens를 고용하여 잠상공사蠶桑公司를 설립했고, 독일인 크니플러Kniffler를 초빙하여 연초 재배를 시도하였으며, 독일계 미국인 로제바움J. Rosenbaum을 고용하여 성냥, 유리, 도자기공장 등을 설립하려 했으나 그가 퇴직하자 모두 해고되었다. 이밖에도 그가 해관총세무사로 재직할 당시 총 해관원 32명 중 10명이 독일인이었다. (본문 중에서)

1880년대부터 약 30년간 조선에 들어온 외국인들이 남긴 100권이 넘는 박물지적 저서 중 대표격은 카를로 로제티의 저서 『꼬레아 꼬레아니』이다. 그는 1902년 불과 8개월간 주한 이탈리아 총영사로 근무했을 뿐인데 수백 쪽에 달하는 한국 종합안내서를 발간했다. 이 『꼬레아 꼬레아니』를 통해 구본신참舊本新參의 근대화를 시도하려 했던 대한제국 정부가 남긴 여러 면모를, 그러나 오늘날 없어져 볼 수 없는 대한제국 수도 서울의 풍경을 읽어볼 수 있다.

“1902년 겨울 로제티가 서울에 들어왔을 때는 이 모든 숨 가쁜 변화가 일단락된 뒤였다. 그와 가리아쪼의 카메라를 기다린 것은 넓고 깨끗한 데다 전차까지 다니는 대로, 경운궁 안의 양관洋館과 그 주변의 외국 공관, 서양식 호텔과 철도역, 외국인을 위한 관광지로 개방된 옛 궁궐들, 전차를 타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교외郊外 지역, 이미 서양 문물에 익숙해진 사람들이었다. 로제티도 당대 유럽인 특유의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지만 그는 성실하고 치밀한 기록자였기에, 이들 변화를 충실히 담을 수 있었다. 그 덕에 『꼬레아 꼬레아니』는 1902년의 대한제국은 단지 ‘망해가는 나라’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동양의 전통과 서구 문화를 자기 방식으로 조화시키면서 근대화를 모색하는 나라였다는 사실을, 그 어느 저작보다 생생히 증언하는 귀중한 책이 되었다.” (본문 중에서)

한 마리당 10엔 주겠다”하자 결혼식 하객과 신랑까지 나서서 북새통
우리 땅에서 멸종하고 탈취된 식물과 동물의 종류와 모양 그리고 그들과 얽혀 산 조선의 풍습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는 것은 스웨덴 동물학자 스텐 베리만의 『한국의 야생동물지』에서다. 식민지와 미개발된 지역의 자연을 자신들이 기록하고 남겨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조선총독부의 협조를 받아 관찰활동과 조사 연구를 수행하고, 수백 가지의 동식물 표본과 박제를 가지고 간 베리만의 활동은 제국주의적 박물학 연구의 생생한 사례다.

“하늘다람쥐는 베리만을 가장 기분 좋게 만든 동물이었다. 그는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에 넓은 피부막이 있는 은회색의 살아 있는 하늘다람쥐를 구입하기 위해 1935년 12월 만주와의 국경지역을 방문했을 때 마리당 10엔에 사겠다고 약속을 했고, 이에 많은 마을 사람들이, 심지어 결혼식에 참석했던 하객과 신랑까지 나서 하늘다람쥐를 잡아왔다. 10엔은 당시 그 지역 남자의 20일 임금에 해당되는 금액이었다. 결국 베리만은 열두 마리를 구입했는데, 이듬해 스웨덴으로 돌아갈 때 두 마리를 데리고 가 1년 넘게 집에서 애완동물로 키웠다.” (본문 중에서)

문화유산도 마찬가지다. 열다섯 권으로 이뤄진 방대한 문화유산 조사보고서인 『조선고적도보』를 남긴 일본의 건축사학자 세키노 다다시의 활동은 더욱 체계적이고 방대하다. 이 보고서는 1902년부터 1934년까지 30여 년에 걸쳐 조선 여행과 답사를 기록하는 성실한 조사의 결과이며 6300여 장의 사진을 실은 귀중한 자료의 보고寶庫이지만, “이 문화를 일구고 가꾼 사람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지 않은 사진 (…) 다만 다스리게 된 땅의 ‘물건’을 재고 기록한 엄정한, 그렇지만 차가운 눈이 있을 따름”이라는 탄식이 절로 나올 만하다.

“다시 『조선고적도보』를 들여다본다. 처음에는 이렇게 많은 사진을 모아놓은 것, 이제는 볼 수 없는 풍경을 그리운 눈으로 들여다본다. 그러나 건축의 공포, 결구 등 세부 사진이나, 언덕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석탑 등을 보노라면 여기에 등장하지 않는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조선고적도보』의 주인공은 대부분 유적과 유물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사람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이 어떤 의미에서 이뤄지는 것인지도 모른 채 무덤의 흙을 파내고 있는 인부들이거나 비석 옆에 수줍게 서 있는 아이들로, 이 사람들은 유적의 크기를 알게 해주는 척도로 쓰였을 따름이다. 그러고 보면 고유섭이 세키노의 책을 ‘고물등록대장’ 같다고 한 까닭을 알 만하다.” (본문 중에서)

진보작가 잭 런던 “한국인들을 죽이고 싶은 욕구와 자살하고 싶은 욕구”에서 갈등
19세기 말 조선에 들어온 모든 서양인이 공유하던, 나아가 조선을 비롯한 중국, 일본의 개화지식인들까지 적극 동참한 시대정신은 다름 아닌 사회진화론이다. 잭 런던처럼 당대 체제에 가장 비판적인 지식인의 여행기에서 약소민족에 대한 연민은커녕 강자의 경멸어린 시선을 목격하게 되면, 보편적이고 과학적인 법칙의 차원으로 끌어올려진 뿌리 깊은 유럽 중심주의의 영향력을 새삼 확인하게 된다. 사회진화론은 나라를 잃어버린 한국의 ‘전통문화’에 주목하거나 그것을 근대화와 대조시키는 인식 틀에서도 작용한다.

“백인 여행자가 처음으로 한국에 체류할 경우 처음 몇 주 동안은 기분 좋은 것과는 영 거리가 멀다. 만약 그가 예민한 사람이라면 두 가지 강력한 욕구 사이에서 씨름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낼 것이다. 하나는 한국인들을 죽이고 싶은 욕구이며, 또 하나는 자살하고 싶은 욕구다. 개인적으로 나라면 첫번째 선택을 했을 것이다.” 도대체 한국이 얼마나 엉망이었길래 살인충동까지 느끼게 되는 것일까? 기본적인 공공시설이나 장비, 물자 따위가 엉망인 것도 심각한 문제이기는 했다. 서울을 떠나 북경으로 이어지는 길은 명색이 황제의 사신이 다니던 왕도王道임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우스꽝스런 웅덩이의 연속이었다. 여정은 끊임없이 지체되었다. 한국에서는 장비 하나 하나가 다 문제를 일으켜서 “말이 다섯 마리면 20개의 편자가 필요하고, 20개의 편자는 20개의 문제를 일으”켰다. 그러나 그에게 살인충동까지 일으킨 가장 큰 골치거리는 그런 물질적인 조건들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견딜 수 없이 나약하고 게으르며 도둑질 잘하고 약자에게 강한 한국인의 심성, 또 그러면서도 불필요하게 호기심 많은 한국인들의 태도였다.” (본문 중에서)

강제병합 직후에 조선을 방문한 독일인 노르베르트 베버 신부는 일제의 동화 정책으로 말살되어가는 한국의 전통문화를 보존할 의도에서 글을 쓰고 다시 방문하여 무성영화까지 촬영했다. 베버 신부의 이러한 선의와 열정은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애도이긴 하지만, 식민지란 우승열패의 귀결일 뿐이라고 설파하는 제국주의적 논리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은 아니었다.

“부산에서도 비가 강하기 오기 때문에 우리는 기다려야 했다. 배가 태풍 때문에 떠나갈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비가 한국의 밝은 색깔의 그림처럼 된 추억까지 말살하지는 못한다. 대한 만세! 한국이여 만년 살아라!를 이별의 인사로 이렇게 크게 외치고 싶지만, 정작 그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제 이 민족은 국가를 잃었다. 아마 그것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침묵으로 순정한 한국 사람들에게 손을 젓는다. 아마도 같은 국민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자기 나라 지배자들의 통치 아래에서보다는 다른 나라의 지배 아래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마치 한 민족을 무덤에 옮겨놓은 장례식 행렬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본문 중에서, 부산항을 떠나는 베버 신부의 감회)

벽안의 폭력성에 가슴을 가려야 했던 조선 아낙네
이방인의 눈으로 조선을 관찰하는 행위는 글뿐만 아니라 그림과 지도, 사진 같은 시각 자료에 잘 구현되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는 그 사례로 일본과 중국에서 그린 조선 지도와 구한말부터 식민지 시기까지 발행된 여행 기념 사진엽서를 다뤘다. 줄기에 매달린 오이 형상에서 근대의 정교한 지도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일본이 그린 조선 모습의 변천을 쫓아가다보면 조선이 동아시아와 세계 전체라는 상상적 공간 속에서 부여받은 위치와 의미를 드러내는 심상지리의 역사를 알게 된다. 또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의 풍속과 산하, 도시의 모습을 담은 사진엽서는 기록과 시선이 교차하는 이미지를 보여줄 뿐 아니라 그것이 대중적으로 향유·소유되며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메커니즘을 알려준다. 사진엽서는 그 탄생과 활용부터 조선을 미개한 사회로 보거나 호기심의 대상으로 보는 이방인의 시선 아니면 지배와 통치의 성과를 선전하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역사적 맥락과 무관한 방식으로 피사체가 선택되거나 배제되고 때로는 연출이 작용하기도 하는 사진엽서 속의 사진은 그야말로 근대 초 조선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공장 같은 매체였다.

“조선풍속으로 완상된 또 다른 주제는 젖을 내놓은 여인의 모습이다. 짧은 저고리 때문에 가슴을 동여매는 천을 치마와 함께 입었던 1900년대까지, 하층민 여성들이 물동이를 한 손으로 받쳐 이거나 아이에게 젖을 물리느라 가슴이 살짝 노출되는 것은 상황에 따라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조선에 들어와 사진을 찍는 외국인들은 이 모습에 비상한 관심을 가졌다. 함흥 옥치상점에서 발행한 사진을 보자. 지붕을 얹은 공동 우물가에 물 긷고자 나온 세 명의 각기 다른 나이의 여성은 물동이를 인 채 카메라 쪽을 향해 서 있다. 맨발로 홑겹의 흰 저고리 치마를 입은 차림새를 보면 여름이다. 가운데 있는 젊은 여성은 물동이를 한 손으로 이어 어쩔 수 없이 가슴이 노출되자 다른 팔로 가슴을 가린다.” (본문 중에서)


저자 프로필


저자 소개

저자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규장각은 조선의 22대왕 정조가 즉위한 해(1776)에 처음으로 도서관이자 왕립학술기관으로 만들어져 135년간 기록문화와 지식의 보고寶庫로서 그 역할을 다해왔다. 그러나 1910년 왕조의 멸망으로 폐지된 이후 그저 고문헌 도서관으로서만 수십여 년을 지탱해왔다. 이후 199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으로서 자료 정리와 연구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창설 230년이 되는 지난 2006년에 규장각은 한국문화연구소와의 통합을 통해 학술 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국보 지정 고서적, 의궤와 같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 유산, 그 외에도 고문서·고지도 등 다양한 기록물을 보유하고 있어서 아카이브 전체가 하나의 국가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문헌에 담긴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그동안 한국학 전문가들이 모여 최고 수준의 학술연구에 매진해왔다. 최근에는 지역학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 한국학의 세계화, 그리고 전문 연구자에 국한되지 않는 시민과 함께하는 한국학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학술지 『한국문화』『규장각』『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등을 펴내고 있으며 <한국학 자료총서>(총3권) <한국학 연구총서>(총18권) <한국학 모노그래프>(총40권) 등을 펴냈다.

기획 - 김수진

목차

규장각 교양총서를 발간하며
머리글 | 조선을 만난 세상 사람들의 시선과 기록

1장 권력과 자존심과 탐학의 여행길
- 중국 칙사들의 조선 사행 | 한명기·명지대 교수

2장 정묘호란이 끝나자마자 조선에 와서 상경한 일본인들
- 17세기 초 일본 관료들이 본 조선 | 정성일 광주여대 교수

3장 군인, 신부, 포로, 조선 땅에 발을 내딛다
- 귀화인 김충선과 천만리의 조선 생활 | 황재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4장 36명 네덜란드인의 조선 생존기
- 하멜 일행의 표류기 | 정호훈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5장 줄기에 매달린 오이 형상에서 근대의 정교한 지도까지
- 이웃 나라가 그려낸 조선의 이미지 | 오상학 제주대 교수

6장 프랑스 이방인의 조선 관찰기
- 극동지역에 파견된 선교사 이야기 | 조현범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연구원

7장 "나는 한국에서 살인충동을 느꼈다"
- 좌파 작가 잭 런던이 본 대한제국의 몰락 | 조형근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8장 유럽 몰락 귀족이 조선 관료가 된 까닭
- 묄렌도르프, 조선에서 참판이 되다 | 김현숙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

9장 이탈리아인의 독특한 오리엔탈리즘
- 로제티의 『꼬레아 꼬레아니』가 담아낸 서울 | 전우용 전 서울대 병원역사문화센터 교수

10장 나라를 잃어버린 조선에 대한 인상비평
- 사진과 영상물로 남긴 베버 신부의 조선 여행 기록 | 김태웅 서울대 교수

11장 일본 문화재학 대부의 "시선視線의 정치학"
- 세키노 다다시의 조선고적 조사 | 목수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학술연구교수

12장 스웨덴 동물학자의 조선생물 탐사기
- 스텐 베리만의 탐험과 수집의 여행 | 문만용 한국과학기술원 연구교수

13장 사각형 종이 속에 담긴 욕망의 이미지
- 100년 전 사진엽서로 읽는 조선이란 나라 | 김수진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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