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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강 위에는 모래가 흐른다 상세페이지

BL 소설 e북 역사/시대물

마른 강 위에는 모래가 흐른다

소장단권판매가2,800
전권정가8,400
판매가8,400
마른 강 위에는 모래가 흐른다 표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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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른 강 위에는 모래가 흐른다 3권 (완결)
    마른 강 위에는 모래가 흐른다 3권 (완결)
    • 등록일 2017.06.08.
    • 글자수 약 9.1만 자
    • 2,800

  • 마른 강 위에는 모래가 흐른다 2권
    마른 강 위에는 모래가 흐른다 2권
    • 등록일 2017.06.08.
    • 글자수 약 12.2만 자
    • 2,800

  • 마른 강 위에는 모래가 흐른다 1권
    마른 강 위에는 모래가 흐른다 1권
    • 등록일 2017.06.08.
    • 글자수 약 11.1만 자
    • 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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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강 위에는 모래가 흐른다작품 소개

<마른 강 위에는 모래가 흐른다> 서양시대물, 오메가버스, 6공일수, 모럴리스공수, 계약결혼, 막장물, 열등감, 개아가공, 후회공, 다정공, 냉철공, 의사공, 깡패공, 복흑공, 능욕공, 능글공, 츤데레공, 절륜공, 무심수, 얌전수, 순종수(순정 X, 순종 O), 밝힘수, 임신수


알파인 가윈과 계약 결혼한 오메가 사일러스는
모종의 불행한 사고 이후 10년 동안 배우자에게 미움을 받으며 지낸다.
더 이상 외로움을 견디기 힘들어져 그에게 안아 달라 애원하지만…….

“알파의 손길이 그립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봐. 불쾌하군.
네가 길거리를 헤매다 무슨 일을 당하건 내 알 바 아니다.”

결국 사일러스는 온기를 줄 사람을 찾아 살롱을 떠돌기 시작하고,
그의 외도는 여러 알파들과의 깊은 관계로 이어진다.

“말 그대로 발정 난 암캐 꼴이군. 그저 쑤셔만 주면 좋아 자지러지는…….”
“네. 맞아요. 많이 하니까 섹스가 더 좋아지고 흥분도 되고 하네요.”

가윈은 홧김에 허락한 외도로 인해 자신의 입지가 흔들리자 당혹해 한다.
그러나 수습하기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으니…….

“제 생각엔 썩 좋은 생각 같진 않아 보이는데요.”
“이건 네,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저는 지금 이 상황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빼앗기고 싶지 않아요.”

외로움을 채우고자 알파를 찾는 사일러스,
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며 증오하는 가윈,
그리고 사일러스를 둘러싼 사회 각계의 여섯 알파들.
모래알처럼 버석하게 메마른 이들의 관계가 향하는 곳은……?


출판사 서평

[본문 발췌]
0. 사일러스

그날따라 가윈의 식사 시간이 유독 길었다. 사일러스는 문밖에 서서 한 시간 넘게 기다렸다. 명목상으로나마 주인의 배우자이니 괜찮으신가요, 의자라도 내올까요, 하는 빈말이라도 건넬 법한데 아무도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 않았다.
저택의 고용인들은 사일러스를 유령처럼 대했다. 어느 쪽으로 보나 그것이 이득이었다. 거의 10년에 가깝도록 주인에게 지독히 미움받는 썩은 동아줄을 무심결에라도 쥐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지?’
‘어제 별채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고용인들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분주히 교환했다. 별채 뒷방에서 두문불출하던 썩은 동아줄이 몇 년 만에 저택 한가운데에서 고개를 빳빳이 들고 주인을 기다리고 있으니 궁금증이 일지 않을 리가.
사일러스가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시선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모른 척 문 앞에 서서 얌전히 가윈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늦은 오전, 화려하게 차려지는 평범한 상류층식 아침 식사와 달리 가윈은 좀 더 이른 시간에 아침을 드는 편이었다. 검소한 성품이라기보다는 오전 시간을 번잡하게 보내는 것을 질색해서였다. 허기만 가실 정도면 되는지라 식탁 위에 오른 음식은 몇 개 되지 않았다. 간단한 샐러드와 수프, 빵, 소시지 정도로 보통 길어 봐야 30분이면 식사를 끝냈다.
그러나 오늘 가윈은 평소답지 않은 변덕을 부렸다. 일반 귀족식 정찬을 내어 오라 명한 것이다. 주방에 손질된 재료가 많지 않은지라 결국 아침은 약식 정찬으로 제공되었으나, 식사를 준비하고 먹고 마무리하는 데는 거의 두 시간이나 걸렸다. 사일러스는 식당을 오가는 화려한 트레이를 힐끔거리며 문 앞에서 가윈이 답을 주기를 기다렸다.

가윈은 더부룩한 위장에 인상을 찌푸리며 입가심으로 내온 차를 마셨다.
“그는 아직도 있나?”
식사 시중을 들던 이가 바깥 하인과 속닥거리더니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계속 그 자리에서 서서 기다리는 것이, 꼭 주인님을 뵈어야 돌아갈 생각인 것 같다고…….”
“쯧.”
가윈은 짜증스럽게 혀를 찼다. 간밤에 있었던 해괴망측했던 사건이 떠오른 탓이다.
사일러스를 완전히 잊고 지내다가도 간혹 뱃속이 끓어오르는 분노가 일 때가 있었다. 지난밤이 그랬다. 가윈은 별채의 사일러스를 찾아 비겁한 화풀이를 저지르려던 참이었다. 그러나 어제의 사일러스는 평소와 사뭇 달랐다. 이전까지는 움츠러든 채 미안하다 웅얼거리는 게 다였던 오메가는 마치 정신이 나간 것처럼 가윈에게 달라붙었다. 그 꼴에 소름이 돋아 별채에서 황급히 벗어났던 것이 바로 어젯밤 일이었다. 무엇에라도 홀린 듯 이상한 밤이었다.
거기다 대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사일러스는 이른 아침나절부터 가윈을 보겠다며 야단이었다. 그야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사일러스는 가윈을 두려워할뿐더러 태생이 얌전하고 소심하여 어지간해서는 제 의사를 표하는 일이 없었다.
그를 찾지 않은 몇 달 사이 사람이 완전히 바뀌어 버린 듯했다. 마치 독기라도 품은 것처럼.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그를 끈질기게 기다리는 것인지 궁금할 지경이다.
“들여보내.”
시중인이 나가 말을 전하자마자 곧장 문이 열렸다.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맥없는 성격을 대변하기라도 하는 듯 사일러스는 발소리조차 희끄무레 조심스러웠다.
가윈은 차를 마시며 신문을 뒤적거렸다. 일단 들이기는 했으나, 막상 대화는커녕 꼴도 보기 싫다는 심중이 확연히 드러나는 모양새라 사일러스는 잠시간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저…….”
사일러스는 유독 가윈 앞에서 주눅이 들어 말을 더듬었다. 처음에는 이토록 심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매번 강렬한 미움 섞인 페로몬을 받으니 언제부턴가 턱이 달달 떨리고 혀가 꼬였다.
“무슨 일이야? 시간 없으니 용건만 말하고 나가도록 해.”
“그……. 저, 정말 다른 사람도 괘, 괜찮은가요?”
“뭐?”
가윈은 고개를 들었다. 앞뒤 내용을 모두 생략하고 이야기하니, 도무지 사일러스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하는 법도 잊었나? 대체 무슨 뜻이야?”
“어제, 어제 말씀하셨던…….”
“어제?”
“네, 네…….”
간밤의 기억이 떠오르자 눈썹이 하늘 높이 솟아올랐다.
“어제 네가 수치도 잊고 창기처럼 알몸으로 매달렸을 적을 말하는 것인지?”
수치심에 사일러스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가윈은 간혹 사일러스를 찾아 관계를 맺었다. 애정 따위 바랄 수 없는,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 교합이었다. 성욕을 해결하고자 하는 행위는 아니었다. 닿기조차 싫어 사일러스를 엎어 둔 채 아래만 꺼내 거칠게 쑤석이는 것이 다였다. 가윈은 아픔에 덜덜 떠는 뒤통수를 싸늘히 내려다보며 씨물을 토해 냈다. 아이 또한 바라지 않았으므로, 체내에 사정하는 일 또한 없었다.
가윈이 이토록 미워하는 사일러스와 섹스하는 까닭은 사일러스가 고통스럽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불임 딱지를 붙여 배태할 수 없는 오메가라며 손가락질 받길 원했고…… 이 짐승보다도 못한 섹스에서 비참함과 죄책감을 느끼길 바랐다.
가윈은 사일러스의 고독을 조롱했다.
“어제처럼 구역질 나도록 옷이라도 벗고 박아 달라 애원하려고?”
“…….”
사일러스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폭언과 냉대에는 아주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으나, 가끔은 그도 아팠다. 사랑받기를 포기한 지는 오래다. 사랑을 포기하자 가윈의 잔인한 언사가 주는 아픔은 한결 덜했다. 밤마다 베갯잇을 눈물로 적시는 일도 사라졌다. 주는 대로 먹고, 어두워지면 침대에 몸을 뉘어 잠들었다. 어쩌면 이렇게 그대로, 조용히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여린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이는 것처럼 슬픔과 수치에도 담담해질 날이 올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아픔에 무던해지자 단단해진 살 위로 외로움이 차올랐다.
세상에 홀로 존재한다는 감각이 선연할 때면 따뜻한 체온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다. 이제 그를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사랑이나 희망 따위가 아니었다. 혼자라는 외로움이었다. 도무지 현실을 바로 서서 볼 수가 없었다. 숨 막히는 고독이 발목을 잡아 그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사일러스는 사람의 체온이 그리웠다. 고용인들은 최소한의 시중만 들어 주는 것이 다였으니 온기를 나눠 줄 이는 우습게도 가윈뿐이었다. 어찌나 사람이 그리웠던지.
사일러스는 술에 취해 거칠게 아래를 벌리는 가윈에게 매달려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했다.
-이, 이렇게 뒤, 뒤로 하는 건 싫어요. 앞으로 하, 하고 시, 싶어요.
언제나 몸을 웅크린 채 숨만 죽이고 있던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가윈은 웃었다. 즐거움이나 기쁨에서 비롯된 웃음은 아니었다.
-이게 무슨 소린지.
-제, 제 얼굴이 보기 싫으시면 오, 옷이라도 벗어 주세요. 제발, 제발요.
바짓자락을 움켜쥐는 손길에 가윈은 구역질 난다는 듯 몸을 털어 냈다. 명백한 거절이었다.
-죄송해요. 당신이 저를 조,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과 이 관계에서 큰 기쁨을 못 느낀다는 것도 추, 충분히 알고 있지만…….
그러나 포기할 수 없었다. 사일러스는 옷을 벗어 던지며 애걸했다. 저도 오메가이니, 페로몬이라도 내어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사일러스는 몇 년 전부터 페로몬을 한 방울도 낼 수 없어 그조차도 시도할 수 없었다.
-잘 알고 있다니 다행이야. 너와 하는 섹스는 내게 어떤 기쁨도 주지 못해. 무엇보다 즐거움을 위해서라면 사창가의 창기와 섹스하는 것이 훨씬 생산적이지. 교태 하나 제대로 부리지 못하고 제대로 된 페로몬도 못 내는 오메가라니, 당신의 고루한 표정을 보면 세우는 것조차 어려워 뒤로 삽입하는 건데, 이게 문제가 되나? 그래?
흠결 있는 오메가, 10년 가까이 들어온 말이라 사일러스에게는 상처조차 되지 못하는 단어였다.
-교태라도 부린다면 저를 견디고 안아 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제가, 제가 잘 알지는 못하지만, 부디 조금만 설명해 주신다면 노력할게요. 한 번만 안아 주시면 안 될까요? 맨살과 닿고 싶어요…….
가윈은 구역질이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입맛까지 떨어지는군.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 나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줄 생각이 없어.
여지조차 남기지 않는 거부에 사일러스는 올려 떴던 눈을 얌전히 내리깔았다. 가윈은 그 꼴을 보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앞으로 한동안 당신을 찾는 일은 없을 거야. 발정 난 암캐처럼 구는 널 생각하니 오른 적도 없는 열이 다 식는 기분이군. 수치를 잊었어? 발정이 나 알파의 손길이 그립다면 다른 사람을 찾아봐. 불쾌하군.
가윈은 그대로 침실을 떠났다. 사일러스는 거칠게 닫히는 문을 속모를 눈으로 오랫동안 응시했다. 그리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밤새 가윈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던 탓이다.
“어제……. 어제 당신 말씀이, 발정이 났다면 다른 알파를 찾아보라고 하셨던…….”
가윈은 헛웃음 쳤다.
“허…….”
이걸 이야기하려고 아침나절 내내 본채로 와서 나를 기다렸다고?
“정말 발정이라도 난 거야? 말 그대로 발정이 났으면 암캐처럼 집이라도 나가 아무 수캐나 잡고 흘레붙으면 되는 것을 굳이 내게 묻는 연유가 무엇이지?”
“다, 당신께 허락은 받아야 하, 하니까.”
“너와 내가 무슨 관계인데? 허울뿐인 부부? 배우자? 이름뿐이라도 나는 너와 부부란 말로 엮이는 것조차 진저리가 나. 내가 너와 무슨 관계라도 되는 것처럼 묻지 마. 내 집안에 들어앉은 발정 난 암캐가 무엇과 굴러먹든 알 바 아니야. 그래, 네가 길거리를 헤매다 무슨 일을 당하건 내 알 바 아니지.”
사일러스는 말없이 가윈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그의 말이 진실인지, 허락이라고 생각해도 되는지 고심하는 표정이었다.
“정신 나간 소리로 아침나절을 망칠 생각이었다면 성공했군. 꺼져.”
가윈은 그 같잖은 모양새가 눈에 거슬려 축객령을 내렸다. 사일러스는 감사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돌려 나갔다.
과거 (1)

사일러스와 가윈, 처음부터 이들의 관계가 최악이었던 건 아니다. 어리석은 가윈의 미움과 원망, 사일러스의 길 잃은 자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먼 과거의 인연이 있다.
그의 이름은 앤슬리 아너스.
가윈의 소꿉친구이자 지금은 죽어 땅에 묻힌 그의 옛 연인이다.

***

앤슬리와 가윈은 어릴 적부터 교류가 있는 사이였다.
사실 할아버지 대의 인연이 없었더라면, 둘의 인연이 닿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가윈은 방계 혈족이라도 상류 가문 중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집안 출신이었고, 앤슬리는 귀족이라고 한들 평범하디평범한 집안의 차남에 불과하였으므로. 더욱이 앤슬리는 태생이 병약하여 집 밖은커녕 침대 밖으로 나오는 일조차 거의 없었다. 밖에서 목마를 타며 나무막대를 휘두르는 것을 즐겼던 가윈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앤슬리 집안의 저택에 방문했던 날, 가윈은 병약한 차남을 소개받았다. 둘이 동갑이라는 시답잖은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둘의 성정은 판이하였으므로, 이들이 잘 어울릴 수 있으리란 예상은 아무도 하지 못했다. 앤슬리와 가윈을 소개해 준 어른들조차 두 꼬마가 사이좋게 놀고 있는 모습을 보았을 때는 깜짝 놀랄 정도였다.
의외로 둘은 잘 맞았다. 어린 앤슬리와 가윈은 금세 친해져 작별 인사를 할 때쯤 되어서는 꼭 다음에 다시 만나자며 손가락을 걸었다.
서로의 어떤 면에서 매력을 느꼈을지는 모를 일이나, 둘은 제법 좋은 소꿉친구가 되었다. 사고뭉치에 장난꾸러기 공자였던 가윈은 허약한 앤슬리를 통해 배려를 배웠고, 갓난아기 시절부터 부모님과 시중인, 의사 외에는 사람을 많이 만난 적 없어 낯가림이 심하던 앤슬리는 가윈과 교류하며 사교성을 길렀다.
어린 시절부터 이어진 우정이 풋정으로 변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어른들이 그들의 우정을 예상하지 못했듯, 둘이 필요 이상으로 가까워질 것이라는 사실 또한 전혀 예견하지 못했다. 아니, 애초에 상류 계급의 통념상 둘이 특별한 관계로 발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떠올리지 못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앤슬리는 베타였다.
우아한 페로몬을 향수처럼 감싸고 다니는 것을 기본 소양으로 여기는 고상한 특권 계층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인종이었다. 흔히 말하길, 귀족의 푸른 피란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을 의미했다. 강렬하고 매력적인 페로몬을 가진 알파, 오메가는 예로부터 숭배의 대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베타는 좋은 혼인 상대가 아니었다. 애당초 혼인 시장에서 완전히 배제되는 ‘급 낮은’ 부류였다. 상대를 홀리는 매력적인 향도 나지 않았을뿐더러, 베타와의 결합에서는 알파나 오메가를 낳을 확률이 확연히 줄어들기 때문이었다.
물론 알파와 오메가 부모 사이에서도 돌연변이처럼 느닷없이 베타 자식이 태어날 수도 있는 법이었다. 앤슬리가 그랬다. 부모, 형제, 조부모, 사촌이 죄 알파와 오메가였는데, 유독 앤슬리만 다리 밑에서 주워 온 듯 형질이 다른 베타였다. 의사는 앤슬리의 몸이 약한 탓에 태내에서 페로몬 샘이 충분히 발달하지 못해 베타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하고 추측했다.
사실 앤슬리 같은 존재는 어느 집안에든 간혹 튀어나오기 마련이었다. 이들은 반편이 취급을 받긴 했으나 귀족은 귀족이었다. 이런 ‘잘못 태어난 베타’들은 보통 후사를 볼 필요가 없는 재취 자리에나 들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니 베타 앤슬리와 전도유망한 알파 가윈의 교제란 결코 축복받을 수 없었다. 앤슬리는 베타, 심지어 남성 베타였다. 아이를 품을 태 자체가 없는 몸이다. 보수적인 가풍을 가진 가윈의 집안에서 절대 허락할 리 없는 관계였다.
차차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앤슬리는 가윈과 미래를 함께하기 어려울 것이란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아무리 바깥 물정을 모른다 해도 눈과 귀가 있는 이상, 베타에 대한 공공연한 차별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하지만 가윈은 굳건했다. 어린 알파는 연인이 약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수백 번, 수천 번씩 절절한 사랑을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는 함께할 것이고 자신은 절대 신의를 저버리지 않겠다며 맹세했다. 앤슬리는 가윈의 고백에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종내엔 저 또한 가윈을 누구보다 믿고 따르겠다며 이 뜨거운 사랑에 화답했다.
둘은 조심스레 사랑을 키워 나갔다.

첫 번째 시련이 찾아온 때는 가윈과 앤슬리가 열일곱이 되던 해였다. 예정된 시련이었다. 가윈의 백부이자 가문의 수장인 그렉이 둘의 관계를 눈치챈 것이다. 그는 가윈을 불러 앤슬리와 결별할 것을 명했다.
그렉은 조카인 가윈을 친아들만큼이나 아꼈다. 후계자 경합을 위해 자식들을 엄하게 키워서인지 친자식에게나 줄 애정을 조카에게 쏟아부었던 터다. 그는 개인 사업 일부를 뚝 떼어 물려주고 싶어 할 정도로 가윈을 좋아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는 조카가 비실거리는 데다 후사조차 낳을 수 없는 베타와 미래를 약속하다니, 견딜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렉은 강경한 태도로 교제를 반대했고, 가윈은 온 힘을 다해 백부에게 반항했다. 사랑에 눈이 먼 어린 알파는 자신은 앤슬리가 아니면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라며 가주 집무실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욱하는 성질이 있긴 했으나 집안 어른들 앞에서는 고분고분했던 가윈이다. 그렉은 조카의 반항 어린 태도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렉이 보기에 가윈은 어디 내놓아도 남부럽지 않을 옹골찬 알파였다. 그런데 고작 비루먹은 베타와 붙어먹는 꼴이라니!
-좋은 혼처를 잡아 결혼시키고, 남부럽지 않은 사업가로 키울 생각을 했건만!
그렉은 크게 노해 가윈을 방에 가뒀다. 창문에는 못질을 하고 문 앞에는 경비를 세웠다. 그리고 시간마다 조카를 찾아가 윽박지르기도 하고 살살 달래며 회유하기도 했다.
가윈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백부의 말에 따박따박 말대답했다. 마지막엔 물과 음식까지 거부하며 단식 투쟁까지 벌일 정도였다.
-……내가 졌다, 가윈.
자식 이기는 부모 없고, 조카 이기는 백부 없었다. 그렉은 침통하게 패배를 선언했다. 말라 가는 조카를 두고 볼 수 없었다.
-앤슬리! 우리 교제를 허락받았어!
가윈은 뛸 듯이 기뻐하며 앤슬리에게 달려가 그들 사랑의 승전보를 알렸다.
그러나 완전한 승리는 아니었다. 그렉은 그의 연애를 묵인해 주었을 뿐, 혼인을 허락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렉은 가문 안팎에서 수십 년을 구른 노련한 정치가이자 사업가였다. 그는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가윈의 손에 쥔 것들이 많아지기를, 그리고 누리고 있는 특권을 도저히 버릴 수 없을 만큼 충분히 속물다워지기를 기다렸다.
풋내기 알파인 가윈이 백부의 시커먼 속내를 알 리 없었다. 그는 그렉이 준 유예 기간 동안 앤슬리와 꿀 같은 연애를 즐겼다.

성인식을 치르고 차차 나이가 들어 가며 가윈은 더욱더 많은 권리를 누리게 되었다. 부모에게서 독립해 저택을 소유하게 되었고, 백부인 그렉에게서 작은 사업 하나를 물려받았다. 작은 일부터 시작해 조금씩 감각을 키워 가라는 뜻에서였다.
그렉은 가윈이 이대로 일을 잘 이끌어 간다면 몇 년 안에 주요한 사업 하나를 더 넘겨주고, 은퇴 후에는 자신이 이끄는 사업 전반을 모두 가윈에게 물려주기로 약속했다.
백부가 이리 바람을 넣어 놓았으니, 자연스레 가윈은 백부의 사업을 제 것처럼 생각했다. 먼 훗날 성공한 사업가가 된 본인의 모습을 그리며 열성적으로 일을 배웠다. 물론 그의 청사진 안에는 여전히 밝게 웃고 있는 그의 연인, 앤슬리가 있었다.
잠자코 숨죽이고 있던 그렉이 다시 한번 마수를 뻗친 것은 이즈음이었다.
어느 날, 그렉은 자기 옆에서 장부를 정리하고 있던 조카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자고로 가정이 있어야 제대로 된 알파가 되는 법이지. 알파가 집안을 다스리는 법을 보면 그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단다.
가윈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렇습니까?
-너도 일가를 이루어야 할 나이가 되지 않았느냐.
-뭐, 저도 곧 결혼해야 할 나이긴 하죠.
-난 네가 늦지 않게 결혼을 했으면 좋겠다.
-저는 당장 이번 달에라도 결혼할 수 있습니다, 백부. 미래를 약속한 상대가 있으니까요.
그렉은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그러나 네가 말하는 그이와는 안 되지. 베타는 안 돼.
백부의 날카로운 대답에 그제야 가윈은 서류를 보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백부님, 저는 앤슬리가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저는 앤슬리여야만 행복할 수 있어요.
-자고로 상류층 알파는 좋은 오메가를 만나 멀쩡한 자식을 보아야만 신용을 받고 권위를 표할 수 있다. 가윈, 너도 이제 철이 들 때가 되지 않았느냐. 주변에서 너와 그 베타 사이를 반대하니 오기가 생겨 반항하는 것은―
-더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그렉의 호통에 가윈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의자가 거칠게 뒤로 밀려 쓰러졌다.
-먼저 가 보겠습니다, 백부. 남은 서류는 제 집에서 마저 처리한 후 내일 아침까지 하인을 통해 보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보고 있던 장부를 낚아챈 후 빠르게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이전처럼 물불 못 가리고 길길이 날뛰지는 않았다. 요 몇 년간 백부에게 일을 배우며 부쩍 눈치가 늘어난 덕이었다.
……혹은 이전보다 속물적으로 변했거나.
‘무작정 날뛰기엔 이젠 내가 물려줄 것들이 아쉽거든. 암, 가윈. 사랑에 완전히 눈이 멀어 행동할 때는 지났고말고. 훌륭한 알파라면 현실도 직시해야 하는 법이다.’
그렉은 희끗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사랑 따위에 연연하는 가윈이 한심스럽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이전보다 나아진 태도에 흡족한 마음 또한 들었다.

***

-결혼, 결혼, 그놈의 결혼!
비단 그렉의 재촉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혼담에 대한 압박이 커졌다. 상류층 인사의 결혼 적령기는 10대 후반에서 20대 초중반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막 22세가 된 가윈에게는 그야말로 중매가 매시간, 매분, 매초마다 물밀듯 몰려들었다.
잘생긴 용모에 건강한 신체, 훌륭한 가문, 충분한 재산. 후계권에서는 동떨어져 있는 것이 흠이었지만, 도리어 그 덕에 더욱 안정적인 면이 있었다. 가주의 직계 자식들은 치열하게 후계권을 두고 다투고 있으니 어느 한쪽에 배팅해야 했다.
하지만 동시에 가주가 뒷배를 보아주는 가윈은?
벌써 미래가 창창했다. 가윈은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적령기 오메가를 자식으로 가진 부모들은 눈에 불을 켜고 그의 저택으로 중매서와 초상화를 보냈다. 집사가 말하길, ‘이때 날아왔던 서신들만 해도 엄청나서 나무 장작을 살 필요가 없었다.’고 회상할 정도였다.
앤슬리는 여전히 병약했다. 외출이라고는 가윈의 저택에 방문하는 것뿐이었으므로 바깥소식에는 귀가 어두웠다. 가윈으로서는 다행이었다. 불티나게 날아오는 청혼서를 재빠르게 태워 버리는 것만으로도 앤슬리에게 사실을 숨길 수 있었으므로.
가윈에게 혼담이 쇄도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앤슬리는 슬픔과 죄책감에 숨이 막혀 기절해 버릴지도 몰랐다.

가윈이 앤슬리 모르게 중매서를 처리하고, 주변의 맞선 권유를 거절하는 것에 진저리가 날 때쯤 그렉이 다시 한번 혼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가윈,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하지 않을 테냐?
-전 앤슬리와 혼인할 테니 무슨 일이 있어도 결혼한다는 쪽에 더 가깝겠지요.
가윈이 퉁명스레 답했다. 결혼의 ‘결’ 자만 들어도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심지어 연인인 앤슬리에게는 아무것도 밝힐 수 없으니, 갑갑증만 더해 갔다.
-베타는 아무 소용이 없어, 가윈. 아이가 있어야 해. 네 재산을 물려줄, 피 섞인 알파가 필요하지. 자고로 명망 있는 가문의 어엿한 알파라면 당연히 그리해야 한다. 후사가 없다면 가정을 꾸리는 의미가 없고, 남들 보기에도 좋지 않아.
-아이는 방계에서 입양하면 됩니다. 불임 부부는 그래 오지 않았습니까? 패트릭 숙부도 그랬고요.
-그것과는 다르지 않으냐. 그 집안은 상대가 좋았다. 더군다나 베타는…… 심지어 남자 베타는 아예 타고나길 배태할 수 없는 몸이잖나.
-저는 이 주제로 더는 백부와 입씨름하기 싫습니다. 이미 우리 관계를 인정해 주셨던 것이 몇 년 전 일입니다. 계속 번복하는 이유가 무엇이신지요!
가윈은 책상을 내리쳤다.
-네가 그사이 철이 들 것으로 생각했다, 가윈.
-저는 충분히 철이 들었습니다!
-아니, 너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 알파가 되었다면 한발 물러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다! 자식을 낳지 않으면 네게 내 재산 한 푼, 명성 단 한 줌도 물려주지 않겠다! 아직 나는 상속 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았어, 가윈! 네가 그 비루먹은 베타와 붙어먹는 꼴을 볼 바엔 길거리 거지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고 말지!
-백부님!
백부의 강경한 태도에 가윈은 기함했다.
그렉에게 미리 상속받은 지분의 사업은 순항을 이루고 있었으나 규모가 작았다. 더군다나 그렉이 가진 사업체의 하위 산업에 속했으므로 백부의 조력 없이는 번창하기는커녕 말아먹기에 십상이었다. 그렉은 가윈을 길거리에 내앉히겠다는 노골적인 위협을 들이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렉 백부……!
-가윈, 한 사람분의 일은 곧잘 해내는 것을 보아 나이는 먹을 만큼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영 아닌 모양이구나. 이만 나가 보아라. 그리고 조금 더 시일이 지나 머리가 식었을 때쯤 다시 보자꾸나. 내 따로 기별을 줄 테니 그때까지 무엇이 옳은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명백한 축객령이었다. 가윈은 집무실에서 내쫓기듯 끌려 나왔다.
이후로 가윈은 한동안 그렉을 만날 수 없었다. 세를 확장하고 있던 가윈의 사업은 그렉의 압박에 연일 최악에 최악을 갱신했다. 항의조차 할 수 없었다. 그렉은 연말 일정으로 바쁘다는 이유를 들어 가윈의 방문을 거절했다.
가윈은 매몰찬 백부의 태도에 배신감을 느꼈다. 매사 그를 아끼며 지지해 주던 그렉이었기에 분노는 더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나날이 엉망이 되어 가는 장부를 확인할 때마다 백부에 대한 분노, 혹은 배신감은 금방 사그라들었다.
분노가 사그라든 자리에는 불안이 차올랐다. 그렉의 말마따나 흥분이 가라앉고 머리가 차가워질수록 백부의 노호가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네게 내 재산 한 푼, 명성 단 한 줌도 물려주지 않겠다! 아직 나는 상속 서류에 도장을 찍지 않았어, 가윈! 네가 그 비루먹은 베타와 붙어먹는 꼴을 볼 바엔 길거리 거지에게 전 재산을 물려주고 말지!
‘만약 그렇게 된다면…… 아니, 그럴 리는 없지만…….’
가윈은 서재 안에 틀어박혔다. 그는 여전히 앤슬리를 열렬히 사랑했으나, 미래에 움켜쥐게 될 부와 명예 또한 놓고 싶지 않았다. 그렉의 말을 곱씹을수록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사랑에 눈이 먼 어린 알파 가윈과 냉정한 사업가 가윈이 공존했기 때문이다. 둘은 팽팽히 대립했다.
가윈의 머릿속, 사랑에 눈먼 로맨티시스트가 말했다.
‘중요한 것은 앤슬리지, 부와 명예가 아니야. 너는 앤슬리에게 온 마음을 바치기로 약속했어. 지금도 그 맹세는 여전하잖아? 그렉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사랑을 선택해!’
그러자 그렉이 키워 낸 탐욕스러운 사업가 가윈이 반박했다.
‘그래서 야반도주라도 할 셈이야? 사랑이 다가 아니야. 그만한 금전이 있어야 행복이 성립해. 너 또한 일하며 돈을 불리는 데 재미를 붙여 가고 있었잖아? 어째서 네게 주어진 축복을 걷어차는 거야?’
‘앤슬리를 버리기라도 하라고?’
‘사랑하는 그를 위해서라면 유산은 더더욱 포기해서는 안 돼. 앤슬리는 값비싼 보약과 극진한 보살핌 없이는 하루도 못 가 쓰러지고 말걸. 그리고 돈이 없으면 앤슬리를 어떻게 돌볼 건데? 그리고 너 또한 안락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버릴 수 있어? 아니, 아무리 사랑한다 할지라도 몰려오는 현실의 파도 앞에선 영원히 행복할 수 없을 거야. 솔직히 알고 있잖아. 이제는 사랑만 볼 수 없어. 현실 또한 직시해야 해. 백부의 말대로 너는 이제 성인이야. 어른스럽게 판단해야 한다고.’
고민의 나날이었다. 가윈의 머릿속에서는 매일같이 어리석은 사랑꾼 알파와 속물적인 사업가가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어찌나 고민이 많은지 밤잠조차 못 이뤄 낯빛이 시커멓게 죽었다. 앤슬리마저 가윈의 건강을 걱정할 정도였다.
그때마다 가윈은 연인에게 고민을 털어놓으며 도움을 청하고 싶었으나, 가까스로 약한 마음을 다잡고 부드럽게 웃음 지어 보이는 것이었다.
-아니, 괜찮아. 요즘 일이 많아서 그래. 너도 알잖아? 연말에는 일이 많아지는 걸. 요즘 이런저런 숫자 때문에 골머리를 썩였더니 그런가 봐.

***

보름 만에 그렉에게서 기별이 왔다.
[가윈, 이제 이야기를 나눌 준비가 되었으리라 믿는다.]
가윈은 백부의 연락을 받고 전날 밤을 꼬박 새워 고민했으나, 여전히 어떠한 결정도 내리지 못했다.
-가윈, 안색이 많이 상했구나.
몇 주 만에 보는 백부는 무척 안타까운 표정으로 조카를 포옹했다. 일그러진 얼굴로 가윈을 내쫓던 마지막 만남은 없던 일인 양, 다시 인자한 큰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는 조카의 양어깨를 부여잡았다.
-너도 고민이 많았겠지만 나 또한 많은 생각을 했단다. 네게 말이 너무 심했어……. 네 얼굴이 이리도 상한 모습을 보니 영, 속이 좋지 않아.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 주신다면 제 사랑과 미래 모두를 축복해 주실 수 없으신지요?
가윈은 백부의 측은지심에 기대 보고자 희망에 찬 눈길로 그렉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렉은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다. 네 미래를 위해서라면 그럴 수 없다.
-그렉 백부, 이건 제게 너무 어려운 선택입니다…….
가윈은 힘없이 뒤로 물러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행복을 위해서는 사랑도, 명예도 모두 필요했다.
-가윈, 나도 네가 이리도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기쁘지만은 않구나. 너는 내가 가장 아끼는 조카다. 어쩌면 내 친아들보다 더 아낄 수도 있겠지. 그만큼 나는 네가 흠결 하나 없는 완벽한 인생을 살았으면 한다. 그러니 그 베타와의 관계를 용납할 수가 없어.
-그러나 저는 앤슬리가 있어야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네 꼴을 보니 알겠구나. 고작 사랑 따위에 마음을 빼앗겨 이런 모습을……. 가슴이 미어지는구나.
그렉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이 한 발짝 물러난다는 듯, 은근한 목소리로 가윈을 꾀었다.
-가윈. 그 베타와의 교제를 허락해 주겠다.
-결혼이 아니면 의미가 없습니다, 백부.
-결혼은, 조건이 있어.
-그것이 무엇입니까?
-네 피가 섞인 알파를 낳아 주기만 한다면, 네게 약속한 것들을 모두 물려주겠다. 그리고 네 연인과의 결혼을 기쁜 마음으로 축복해 주마.
베타 남성인 앤슬리가 아이를 낳는다니, 어불성설이었다.
-백부님의 말씀이 앤슬리와 재산,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것이 아니면 대체 무엇입니까? 제 귀에는 별다를 바 없이 들립니다. 앤슬리는 베타이고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몸입니다. 그런데 아이를 가져야만 우리 둘의 관계를 인정해 주신다니, 돌덩이를 심어 열매를 맺으란 말도 이보다 덜 황당할 지경입니다. 결국 앤슬리를 영원히 인정해 주시지 않는다는 의미 아닙니까?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야.
그렉은 손을 내저으며 가윈으로서는 솔깃할 수밖에 없는 제안들을 내세웠다.
-첫 혼인은 오메가와 하라는 뜻이다. 누구든 오메가 배우자를 맞이해 그 사이에서 아이를 본다면 이혼을 허락해 주마. 적어도 네 자식이 사생아는 되지 않아야 하지 않겠느냐. 식은 비밀리에 치러 주마. 상대는 누구라도 좋다. ……아니, 그래도 작위는 가지고 있는 편이 좋겠구나. 그래야 쓸 만한 피가 나올 테니…….
-…….
-너는 그저 네 피를 이은 후계 알파 하나만 만들면 된다. 결혼이 은밀했던 만큼 이혼 또한 은밀하게 진행해 주마. 이후로는 조용히 베타와 결혼 생활을 즐기도록 해라. 네 자식을 키우고 싶지 않다면 내게 맡겨도 좋아. 그때쯤엔 아마 내 후계자도 정해져 있을 테니 나도 제법 적적하겠지. 늘그막에 조카 손주 하나 키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테니.
원래의 가윈이었다면 수락할 리 없는 조건이었으나…….
-어찌 되었건 네게도 흠결이 되는 일이니 네 혼인과 파혼은 주위에 최대한 알리지 않도록 하마. 너 또한 네 베타가 이 사실을 알기를 원하지 않을 테고, 나 또한 부끄러운 집안 사정을 널리 퍼뜨리고 싶지 않아. 아이만 낳으면 된다, 가윈. 그것만 하면 너는 네 베타와 행복할 수 있다. 내가 네 뒷배가 되어 주마.
같은 내용을 반복하여 살살 꾀어내는 뱀 같은 수법을 쓰니, 마음이 흔들리고 있던 가윈으로서는 넘어갈 수밖에.
-……정말 약속하시는 것이지요?


저자 프로필

황해우

2020.05.26.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이상한 사람들의 이상한 연애를 씁니다.


저자 소개

황해우

목차

0. 사일러스
과거 (1)
1 .바스티안
2. 클라우스
과거 (2)
3. 대런
4. 제이크
과거 (3)
5. 케일런
과거 (4)
6. 케일런
7. 가윈
종장. 사일러스

외전 1. 변화
외전 2. 선물
외전 3. IF, 가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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