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북촌마을, 부산 흰여울 전망대에서 제주 돌집까지
일상에서 만나는 어울림과 연결의 건축 미학
한국의 도시는 전통과 현대가 공존한다. 경복궁과 남대문 같은 전통 건축이 건재하고 동대문 디자인플라자나 리움 미술관처럼 세계적인 건축가들의 현대적 작품도 있다. 최근에는 새로운 지식과 감각으로 무장한 젊은 건축가의 활약이 돋보인다.
역사와 시간을 간직한 의미 있는 건축, 과거의 유산을 새로운 상상력으로 복원한 개성 있는 건축, 삶의 조건으로서 주거 공간에 대한 고민을 풀어낸 작품, 작은 방 하나, 계단 한 층에도 빛과 바람과 자연을 담으려는 건축 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이들은 독특한 개성과 열정으로 우리 도시를 빛나게 한다. 여기 우리 일상 공간에서 만날 수 있는 아름답고 개성 넘치는 건축들을 소개한다.
3인의 건축가와 함께하는
건축과 공간, 삶과 관계에 관한 통찰
????말을 거는 건축????은 3인 건축가와 함께하는 한국 현대 건축 기행이다. 이들의 ‘낯설게 보기’는 쉽게 지나쳤던 삶의 공간을 재해석하면서 새롭게 우리의 감성을 자극한다. 공간, 삶, 경계, 관계, 개성, 사회 등 그 주제 또한 관심 영역만큼이나 폭넓다.
이 책이 더욱 특별하게 읽히는 지점은, 이들이 기꺼이 함께하되 각자의 관점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독특한 이력만큼이나 생각이 다른 3인이 자기만의 눈으로 건축을 바라보고 그 안에 깃든 의미를 통찰한다.
리모델링한 제주 돌집을 살피면서 한 사람이 전통과 현대라는 이질적 요소의 결합에 주목했다면, 다른 한 사람은 건물의 빈티지한 감성에 주목하고, 다른 한 사람은 동선과 시선을 나누는 공간 디자인을 다루는 식이다. 서로의 시선이 자유롭게 만나고 교차하면서 보여주는 독특한 무늬와 울림은 이 책이 선사하는 특별한 재미다.
전국에서 찾은 30개의 개성 있는 건축물
150여 장의 컬러사진과 함께 수록
이 책에는 모두 30개의 아름답고 개성 있는 건축물이 등장한다. 해외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건축물이 아니다. 마을버스를 타고 찾아갈 수 있는 이웃 같은 건물들이다. 서울만 해도 이런 건축물이 많다. 북촌마을 입구는 벽을 허물고 새롭게 단장했으며 서소문 성지 역사 박물관은 지하에 멋진 기하학적인 전시 공간을 숨겨두고 있다. 서울 세종로에 있는 도시건축 전시관은 랜드스케이프(Landscape, 대지와 건물을 하나의 표면으로 통합하려는 건축 경향) 방식으로 지어져 시민들에게 여유 공간을 선사하고 있다. 이들은 겉보기에도 아름답지만 건축학적으로도 매우 의미가 깊다.
이 밖에도 전국 각지에는 숨은 보석처럼 빛나는 건축물이 많다. 필진들은 직접 현장을 찾아 그곳에서 느낀 감동을 150여 컷의 생생한 컬러 사진과 함께 담아냈다. 전문가들의 세심한 안내와 함께, 벽돌 하나하나가 마치 씨앗처럼 대지에서 솟아나는 건축, 거대한 곡선으로 구성한 아름다운 건축, 지하에 펼쳐지는 장엄한 공간의 건축 등을 둘러보며 흥미로운 건축 여행을 즐겨보자.
건축에 관한 철학적 접근
일상과 삶을 낯설게 보기
서울 잠원동에는 폭이 1.5미터의 협소 주택이 있다. 대지의 물리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건축가가 차용한 전략은 무엇일까? 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건축에서 구현되는 공간과 시간성을 이해하게 된다.
전라남도 여수에는 바다를 닮은 아름다운 건축물이 있다. 벽돌로 하나하나 쌓아 올린 이 건물 앞에서 필자는 부분과 전체, 모나드(Monad)라는 존재론적 질문과 마주한다. 그들은 또한 우리에게 묻는다. 좋은 건축이란 무엇인가? 건축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넓은 평수의 아파트와 자연을 압도하는 과시적 인공물에 길들여진 우리에게 이러한 질문은 낯설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다. 3인의 건축가와 함께하다 보면 어느새 자기만의 답을 찾을 수 있다.
건축은 단순히 집을 짓는 일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건축은 그 자체로 우리의 삶을 반영한다. 그러기에 훌륭한 건축을 이해하는 일은 바로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필자의 지적은 곱씹어볼 만하다. “소중한 건축은 항상 거기에 있었다. 다만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았을 뿐이다.”
본문 중에서
지상에서 시작하여 지하 입구로 이어졌다가 다시 지상으로 오르는 동선은 한정된 체험적 공간을 제공하는 여느 기념관과 달리 기억의 연속성을 추구한다. 관람객들은 기념관 내 다양한 애도와 추모의 공간을 지나며 과거의 역사가 오늘날에 되살아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21세기 한국형 추모공간이라 할 수 있다.
-정태종, <추모의 공간>
매스에서 면으로 구성된 부분은 따뜻한 색감의 석재와 목재를 썼고, 선으로 구성된 프레임 부분은 견고한 철재로 마감하면서 차가움과 따뜻함이 어우러진다. 여기에 ‘시간’이라는 요소를 덧붙임으로써 장소성을 환기시키는 한편 스스로 아름다운 어촌 시골 마을의 일부가 되었다.
-엄준식, <기억 그리고 일상적 풍경>
굴피집은 우리나라 산간 지방 가옥 형태로 두꺼운 나무껍질로 지붕을 얹은 것이 특징이다. 비가 새지 않을까 걱정이 되지만 습한 날에는 나무껍질이 팽창하여 틈을 막아준다고 한다. 다만 건조한 날이면 방안에서 나무껍질이 쪼그라들어 그 틈으로 눈부신 하늘이 보인다. 실제로 이를 체험했을 때의 경이로움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다섯 그루 나무’에서 본 하늘도 그때와 닮아 있었다.
-안대환, <틈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풍경>
건축물 설계는 맞춤옷을 만드는 것과 비슷하다. 사람마다 신체 유형과 사이즈, 선호도가 다르듯이 건물이 지어질 땅 또한 생김새나 주변의 모습, 그리고 그에 따른 기억이 다르다. 그렇기에 건축을 할 때는 대지는 물론 주변 풍경도 고려해야 한다. 그리고 ‘장소의 기억’도 중요하다. 이는 그 안에서 살아갈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감응적 요소이기에 공간 재생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중요한 전략이다.
-엄준식, <프라이버시와 어울림의 배치>
파동벽은 구불구불한 벽체 틈으로 바다를 받아들이면서도 한편 스스로 바다를 상징한다. 그 모습이 마치 진남관(鎭南館)의 기둥을 떠올리게 한다. 누구든 그 앞에 서면 바다를 느낄 수 있다. 도시인에게는 드문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파동벽은 근린 생활 건축물에서 유니크할 용기가 중요한 가치라는 점을 충분히 보여준다.
-안대환, <남과 달라질 용기>
여수 파동벽은 벽돌이 모여서 만든 파도이다. 명석한 건축 재료인 벽돌은 하나씩 일일이 쌓아야 한다. 멀리서 보면 파동벽의 벽돌이 보이지 않는다. 집 전체가 파도라는 하나의 형태로 인식될 뿐이다. 그러나 그 작은 물방울들의 아름다운 속삭임은 여전히 존재한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들리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정태종, <도시 한복판에서 바다를 만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이 건축물에서 비워진 곳이 새로움으로 가득 차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기존 건물인 국세청 별관을 철거하고 새롭게 서울 도시건축 전시관이 들어서면서 길 건너 시청 쪽에서 바라보는 정동길은 무척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냈다. 그동안 가려졌던 정동길의 속살이 이제는 투명하게 다 보인다.
-정태종 <포용과 배려의 보이드>
흰여울 전망대는 집의 형태를 하고 있다. 집안에서 바다를 본다는 개념이다. 집을 떠나온 여행자로서 일회적으로 열린 바다를 보는 것이 아니라, 거주자로서 일상 공간인 집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바다를 본다. 마치 여행자에게 자신의 집으로 이 바다를 끌고 가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안대환, <집의 의미: 여행의 끝>
회색 매스는 단지 통과하는 장소로 머무를 수 있는 벤치가 없다. 대신 반대편 육지를 볼 수 있는 하부 레벨로 이어지는 계단이 있다. 이는 육지로 돌아가는 것을 상징하는 듯하다. 한편 청록색 매스에는 벤치가 있고, 오직 바다만 조망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데, 이는 볼 수 있으나 갈 수 없는 지점으로서의 바다를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결국 이 전망대는 바다와 육지 사이에서 우리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것 같다. 아마도 그것은 관계와 경계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엄준식, <바다와 육지의 경계를 만든 전망대>
얇디얇은 집에서는 독특하게 구성된 공간마다 서로 다른 속도로 시간이 흐른다. 조용히 앉아서 커피를 마시는 시공간에서의 속도, 급히 잊은 물건을 찾으러 위층으로 올라가는 시공간에서의 속도가 다르다. 이런 장소에서 오래 지내면 어떤 변화가 생길까 궁금하다. 하나의 축이 없으니 좁고 긴 통로에 선 것처럼 답답하고 초조해질까? 아니, 오히려 매 순간 시간을 의식하면서 그 소중함을 깨닫고 하루하루 충실히 보내게 될까?
-안대환, <압축과 단절: 효과적인 감각적 시간의 체험>
여기에는 ‘의도된 불편함’이 있다. 우선 과거 대지에 분산되어 배치되었던 다양한 용도의 매스들을 제거하고, 자연과 소통하는 중심 공간을 기준으로 두 개의 영역으로 구분했다. 그리고 볍씨처럼 뿌려져 있던 기존 시설들의 추억을 물리적 경계 없이 확장 가능한 분절된 매스로 표현했다. 이로써 매스 사이로 자연을 관입시키면서 아이들이 자연과 접촉하는 기회를 늘렸고, 그 사이 공간을 확장의 공간이자, 미래를 위한 여유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엄준식, <의도된 불편함의 가치>
한 줌의 흙으로 빚은 벽돌이 나무가 되고 건축이 되었다. 씨앗 한 알은 튼튼한 나무 밑동도, 하늘로 뻗는 나무줄기도 될 수 있다. 단단한 벽돌이 식물성을 모사했다는 점은 아이러니하다. 빈 대지에 갈라진 틈새를 만들고 결국에는 뚫고 나오는 봄날의 새싹처럼 세상에 나온 건물은 이제 쑥쑥 크기만 하면 될 듯하다.
-정태종, <출현: 대지에서 건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