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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용운의 나의 님 : 다시 만날 가장 뜨거운 날 상세페이지

에세이/시 에세이

한용운의 나의 님 : 다시 만날 가장 뜨거운 날

소장종이책 정가14,000
전자책 정가30%9,800
판매가9,800
한용운의 나의 님 : 다시 만날 가장 뜨거운 날 표지 이미지

한용운의 나의 님 : 다시 만날 가장 뜨거운 날작품 소개

<한용운의 나의 님 : 다시 만날 가장 뜨거운 날> ‘책 한 권의 운명은 저자보다 더 위대하다’라는 말이 있다. 시대를 움직인 책은 당대를 뛰어넘어 이후 역사의 시금석이자 버팀목으로 자리한다. 이에 이다북스는 우리 시대를 새롭게 들여다보는 숨어 있는 명저를 ‘이다의 이유’로 출간한다. ‘이다의 이유 10’ 『한용운의 나의 님』은 시인이자 독립운동가, 종교인으로서 한용운의 생생한 목소리를 모았다.


저자 프로필

한용운

  • 국적 대한민국
  • 출생-사망 1879년 8월 29일 - 1944년 6월 29일
  • 경력 1927년 경성지회 회장
    1927년 신간회 중앙 집중 위원
    1923년 조선민립대학기성회 상무 위원
  • 데뷔 1926년 시집 [님의 침묵]
  • 수상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2017.05.24.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한용운 저

승려·시인·독립운동가. 1879년 8월 29일 충남 홍성군에서 몰락한 양반 출신의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정옥(貞玉), 아명은 유천이며, 용운은 법명, 호적상이름이자 본명은 한정옥이다. 6세 향리의 사숙에서 한문을 배웠고, 9세 『서상기西廂記』를 독파하고, 『통감』『서경』 등을 통달하여 총명한 어린이라는 말을 들었다. 당시 풍습이 그러함에 따라 14세 향리에서 천안 전씨全氏 전정숙과 일찍 혼인하였으나, 집을 나가 떠돌고 출가하기를 반복했다. 가출하여서는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했고, 고향 홍성을 떠나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서적을 탐독했다. 21세에 강원도 인제군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였고, 이때를 전후해서 세계여행을 계획하였다.

1894년 동학군에 가담하여 투쟁하다 실패했다. 1896년 설악산 오세암에 은거, 수년 간 불경을 공부하는 한편 근대적 교양서적을 읽어 서양의 근대사상을 접했다. 1904년(26세) 설악산 백담사에 들어가 불목하니 노릇을 하다가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27세 백담사에서 김연곡사金蓮谷師에게서 득도. 백담사에서 전영제사全泳濟師에 의하여 수계受戒. 백담사에서 이학암사李鶴庵師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 등을 수료. 29세 강원도 건봉사에서 수선안거(최초의 禪수업)를 성취하였다.

30세 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사徐月華師에게 『화엄경』을 수학하였고 4월, 일본의 시모노세키, 교토, 도쿄, 닛고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하였다. 도쿄 조동종 대학에서 불교와 서양 철학을 청강하였으며, 10월, 건봉사 이학암사에서 『반야경』과 『화엄경』을 수료하였다. 31세에 강원도 표훈사 불교 강사에 취임하였고 1910년(32세) 『조선불교유신론』을 백담사에서 탈고, 1911년(33세) 박한·진진웅·김종래·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 동래 범어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하고 한일불교동맹 조약 체결을 분쇄하였다. 1913년(35세) 불교강연회 총재에 취임하였고 『조선불교유신론』을 불교서관에서 발행하였다.

1914년(36세) 『불교대전』을 범어사에서 발행하고 1917년(39세) 『정선강의 채근담』을 신문관에서 발행하였고 항일 투사로 활동을 시작했다. 12월 3일 밤 10시쯤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의정돈석擬情頓釋이 되어 진리를 깨치고, 오도송을 남겼다. 1918년 청년계몽운동지 [유심]지를 창간했다. 1919년(41세) 3.1운동을 주도,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의 자구 수정을 하고 공약삼장을 첨가하였다. 1923(45세)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하였고, 민립대학 설립 운동을 지원하는 강연을 하였다.1924년 불교청년회 회장, 총재를 역임하였다.

1925년(47세) 오세암에서 『님의 침묵』을 탈고하엿다. 1927년(49세) 1월 신간회를 발기하였으며, 5월 신간회 중앙집행위원 겸 경성지회장에 뽑혔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민중대회를 개최하였다. 1931년(53세) 월간 [불교]지를 인수하였고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었으며, 1932년(53세) 조선불교 대표인물 투표에서 최고득점으로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한용운 422표, 방한암 18표, 박한영 13표, 김태흡 8표, 이혼성 6표, 백용성 4표, 송종헌 3표, 백성욱 3표, 3표 이하는 생략. 불교지 93호에 발표됨). 1933(54세) 유숙원씨와 재혼하였고, 이때를 전후하여 『유마힐소설경』을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벽산 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몇 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었으며, 이때 총독부 돌집을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으로 짓도록 하였다.

1940년(62세) 『불교』지 2월호에 『유마힐소설경』 연재를 시작하였고, 1943년(65세) 조선인 학병의 출정을 반대하였다. 1944년(66세) 6.29 심우장에서 영양실조로 입적하였으며 유해는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한 후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한용운은 불자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였고, 민중에게 독립의 필요성을 설파하는 등 사회 참여가 활발했던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3·1운동에 가담하고 독립선언서를 공개하여 낭독하는 등의 활동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간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시집 『님의 침묵』을 출판하여 저항문학에 앞장섰는데, 기존의 시조 형식을 깬 산문시 형태를 취했으며, 향토적 정서가 묻어나는 언어와 서민적인 시어 활용으로 민중정신을 반영했다. 독립을 향한 열망, 자연 등을 ‘님’으로 표현했고,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화법으로 검열을 피하기도 했다.

조일동 편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후 여러 출판사에 몸담았으며, 현재 이다북스에서 출판 기획을 맡고 있다. 에세이집 『마흔의 봄』을 썼으며, 『나혜석의 고백』 『나운규의 말』 등을 엮었다.

목차

들어가는 글

(1장) 조선 독립에 바친다
조선 독립의 서(書) / 한용운 취조서

(2장) 조선 청년에게
조선과 조선인의 번민 / 내가 믿는 불교 / 가갸날에 대하여 / 여성의 자각이 인류의 해방 요소 /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야기 / 검소함과 간결함 / 조선 청년에게 / 내게 만일 청춘이 다시 온다면

(3장)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남모르는 나의 아들 / 소작농민의 각오 / 정신부터 수양해야 / 나는 왜 중이 되었나 / 모든 것이 불성(佛性)으로 돌아간다 / 조선은 어디로 가나 / 재일·재만 동포 문제와 국제주의 / 용감한 사람이 되어라 / 한용운 씨와 석가를 말함 / 평생 못 잊을 상처 / 조선 민족은 어디로 가야 하나

(4장) 역경에서 순경으로
봄 / 역경과 순경 / 반성 / 우교 / 망양보뢰 / 욕조 문답 / 심우장에서 참선하는 한용운 씨를 찾아가 / 만고에 거룩한 석가의 정신 / 독서삼매경 / 명사십리

(부록)
《조선불교유신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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