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디 접속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강제 새로 고침(Ctrl + F5)이나 브라우저 캐시 삭제를 진행해주세요.
계속해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리디 접속 테스트를 통해 원인을 파악하고 대응 방법을 안내드리겠습니다.
테스트 페이지로 이동하기

호란일기 상세페이지

호란일기작품 소개

<호란일기> 조선시대 전쟁사를 보면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임진왜란이고, 또 하나는 병자호란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 공격을 준비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전국 통일을 이룬 인물이다. 그만큼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본은 조선에 명나라를 공격할 때 길을 내달라고 요구했다. 일본은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경고를 수없이 했지만 명나라를 황제의 나라로 떠받들던 조선의 집권층은 이를 무시한 채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다. 결국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순식간에 한양이 함락되고 말았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선조는 일찌감치 한양을 버리고 몽진을 떠났다. 그리고 풍전등화 같은 조선을 구한 것은 이순신, 권율 등 뛰어난 장수와 의병, 그리고 명나라 군이었다. 하지만 선조는 의병들의 활약을 축소해야만 땅바닥으로 곤두박질된 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고, 결국 명나라의 큰 도움으로 다시 일어났다며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재확립했다. 전쟁 준비 미비로 혹독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왕권 강화라는 명분 다지기에 주력했을 뿐이었다.

청나라 군이 한양 땅까지 밀려오기 직전에야 급보를 받은 인조는 부랴부랴 강화도로 들어갈 것을 결정했지만 이미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몸을 피했다.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항전을 계속하지만 기어이 청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인조는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었고, 삼배구고두(세 번 절하고 아홉 번 조아린다는 뜻)를 하며 머리를 조아렸다. 그 뒤 많은 신하하와 왕자들이 인질로 붙잡혀 가게 되었고, 50만 명의 백성이 심양 땅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조선은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해마다 청나라에 엄청난 조공을 바치는 한편, 대청 황제의 공덕을 기리는 삼전도비(대청황제공덕비)를 세워야 했다.

남한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로서 외침을 당하면, 강화도와 남한산성에서 임금과 세자를 비롯한 집권층이 고수방어를 하고 있으면 전국 수령방백이 보유하고 있는 군대가 근왕병이 되어 적군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했다. 그만큼 남한산성은 한양도성으로 가는데 반드시 거쳐야 할 주요 길목으로서 북한산성과 더불어 서울을 남북으로 지키는 산성 중의 하나로, 삼국시대부터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만한 중요한 지역이라 할 수 있는 천혜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인조가 청나라 황제에게 무릎을 꿇은 것은 남한산성이 함락되어서가 아니었다. 식량 부족과 강화도 함락 등으로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었을 뿐이었다.

『호란일기』주변국의 변화에는 일절 신경을 쓰지 않은 채 전쟁 준비에 소홀했던 조선이 얼마나 큰 고통을 겪어야만 했는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남한산성에 갇힌 백성과 군사들이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리며 전쟁의 불안과 공포에 떠는 모습이며 청나라와 끝까지 싸워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척화파와 하루빨리 청나라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주화파의 다툼 등을 생중계하듯 생생하게 기록했다.
우리는『호란일기』를 통해 추진력이나 결단력이 없는 우유부단한 정치인이 나라를 다스리면 국민 모두 위험에 빠진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모두 국가 안보는 뒷전으로 하고 명분 찾기와 경제문제만 따지다가 수백만이 죽고 온 백성이 위기에 처했다.

어린이라도 슬픔을 알아야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이 생긴다. 분노도 알아야 분노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그런 것처럼 부끄러운 역사도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우리의 역사다. 그것이 『호란일기』가 세상에 나온 이유다. 슬픔이나 분노를 알아야 극복할 수 있는 힘이 생기듯이 부끄러운 역사도 알고 있어야 역사의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을 힘이 생기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의 안보가 무너졌을 때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았다는 것도 잊지 않기를 바라서이다.

어린이들은『호란일기』를 읽으면서 어떤 나라든지 경제 · 사회복지 보다 국가 안보를 더 중요시하게 여기지만, 특히 강대국에 휩싸인 우리나라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국가 안보가 중요한 나라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어떻게 해야 안보를 튼튼히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바로 경제력, 군사력, 문화적 힘을 길러 강대국들이 감히 우리 대한민국을 넘볼 수 없는 강한 나라로 키우는 것이다. 그래서 율곡 이이가 선조에게 “나라가 태평하니 군대와 식량이 준비되지 않아 적이 침범해 와도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10만의 대군을 길러 외적의 침략에 대비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왜 했을까를 항상 기억하기를 바란다. 『호란일기』에 수록된 사진 또한 눈여겨볼만하다. 남한산성 지킴이 이종화 작가와 내셔널트러스트의 이수용 이사의 작품성 높은 사진은 군사 요충지였던 남한산성의 현장을 생생하게 볼 수 있도록 꾸며졌다.


저자 프로필


저자 소개

저자 - 나만갑
이 책을 기록한 나만갑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에 태어났습니다. 1613년(광해군 5)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1618년 선조의 계비(광해군의 계모)가 서궁에 유폐되자 고향 영주로 내려가 독서로 세월을 보내다가, 1623년 반정으로 인조가 들어서자 순릉참봉이 되었습니다. 그뒤,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거쳐 교리가 되었지만 김류가 남이공을 등용하자 이를 반대하다 강동현감으로 좌천당했습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강화로 들어갔다가 이듬해 환도하여 병조정랑·수찬·지평을 역임하고, 1635년(인조 13) 형조참의로 시정을 논하다가 파직당했습니다.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에 들어가 공조참의로 양향사를 겸하여 성내의 양식을 관장하였습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무고를 당해 남해로 귀양갔다가 1639년에 풀려나 영주로 돌아가서 3년 후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저서에 『병자록』외 『구포집』이 있습니다.

편자 - 김종윤
한국외국어대학교를 졸업했으며 시인으로 활동 중입니다. 현재 어린이를 위한 출판사 자유시성사를 운영 중이며 많은 글을 썼습니다.

그림 - 김예진

목차

추천사
병자호란을 왜 잊어서는 안 될까요?
전쟁의 기운이 조선 땅을 휩쓸다
병자호란이 터지다
강화도에서 있었던 일
글을 엮으며


리뷰

구매자 별점

0.0

점수비율
  • 5
  • 4
  • 3
  • 2
  • 1

0명이 평가함

리뷰 작성 영역

이 책을 평가해주세요!

내가 남긴 별점 0.0

별로예요

그저 그래요

보통이에요

좋아요

최고예요

별점 취소

구매자 표시 기준은 무엇인가요?

'구매자' 표시는 리디에서 유료도서 결제 후 다운로드 하시거나 리디셀렉트 도서를 다운로드하신 경우에만 표시됩니다.

무료 도서 (프로모션 등으로 무료로 전환된 도서 포함)
'구매자'로 표시되지 않습니다.
시리즈 도서 내 무료 도서
'구매자’로 표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같은 시리즈의 유료 도서를 결제한 뒤 리뷰를 수정하거나 재등록하면 '구매자'로 표시됩니다.
영구 삭제
도서를 영구 삭제해도 ‘구매자’ 표시는 남아있습니다.
결제 취소
‘구매자’ 표시가 자동으로 사라집니다.

이 책과 함께 구매한 책


이 책과 함께 둘러본 책



본문 끝 최상단으로 돌아가기

spinner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