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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람의 조선여행 상세페이지

인문/사회/역사 역사

조선사람의 조선여행

규장각 교양총서 7

구매종이책 정가25,000
전자책 정가18,800(25%)
판매가18,800

책 소개

<조선사람의 조선여행> 길과 산과 바다와 하늘에 펼쳐진 조선의 삶
만난고초와 쾌락과 처절함이 함께했던 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을 중심으로 한 전문가들이
별자리 여행에서부터 온천여행과 득음을 위한 여정까지
식민지 시기의 ‘소풍’부터 식민지 지식인의 ‘경성 산책’까지
오백 년 조선, 한말 사람들의 여행기를 세부적으로 복원했다

규장각 교양총서 제7권 기획의도

이 책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서 펴내는 총서의 일곱 번째 권이다. 지난 3년여 간 바깥 풍경을 보여주는 창문처럼 몇 가지 개념이나 범주를 통해 조선의 역사를 드러내려 했던 기획이 벌써 일곱 번째 매듭을 짓게 되었다. 그중 두 번째 시리즈는 ‘여행’이라는 창을 통해 조선시대를 들여다보려 했는데, ‘조선 사람의 세계여행’과 ‘세상 사람의 조선여행’에 이어 이번 책에선 조선인들이 주체가 되어 우리 땅을 돌아본 기록들을 들여다본다.
『조선 사람의 조선여행』은 조선인들이 자신의 강토를 다니면서 경험한 이야기다. 비록 ‘여행’을 앞세웠지만, 여기서 다뤄지는 이야기는 즐거운 마음으로 다른 고장을 돌아보는 일상적 여행 범주에 들지 않는 이야기도 여럿 있다. 방 안에 앉아서 그림과 글로 다른 곳을 여행하는 와유臥遊와 나라로부터 죄를 얻어 가족과 직업으로부터 벗어나 먼 곳에 처해졌던 유배, 그리고 지방 행정을 정찰하러 가는 암행어사의 길도 여행길로 보았다. 지금껏 익숙한 때나 장소와는 다른 시공간을 경험하는 것으로 여행을 넓게 정의하고, 이를 통해 과거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 여행이 벌어진 시대의 역사를 돌아보며, 나아가서는 오늘날 우리 삶에 도움이 될 만한 지혜를 얻는 것을 목표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저 독자들은 이 책에서, 익숙한 시간과 공간을 경험하던 사람들이 새로운 시공간으로 진입해 경험하는 일들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과 생각을 하나하나씩 알게 되는 새로운 여행 경험을 할 것이다. 나아가 책을 덮는 순간 조선 사람의 여행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대할 수 있는 조그마한 지혜를 얻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조선 사람의 조선여행』의 구성과 내용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는 열세 가지다. 첫 이야기들은 시대적인 색채가 그리 강하게 배어 있지 않는 주제들이다. 발로 직접 뛰거나 걷진 않았지만 그림과 글로써 간접 여행하는 와유를 다룬 ‘누워서 노니는 여행’, 온천여행이라지만 치료를 위한 고통과 더불어 사실은 아버지의 정치적 시험 무대였던 ‘사도세자의 온천여행’, 옛사람들의 별자리와 별에 대한 기원은 어떤 의미를 지녔는가를 파헤쳐본 ‘조선 사람의 별자리 여행’, 조선에서 사회적 관습과 법을 넘어서면서까지 떠났던 ‘조선 여성들의 산수유람’, 예인들의 수련과 득음의 과정을 조명한 ‘조선 사람의 음악여행’ 등이 그것이다.
이 책의 중반을 향해 달려가면 양반 남성들, 특히 관직생활이 펼쳐졌던 길을 따라가는 여행기가 펼쳐진다. ‘암행어사 길’은 어사 출도처럼 낭만적 측면만 부각되어온 길이 실은 고난의 길이자 출세의 길이기도 했다는 뜻밖의 사실을 드러내며, 과거 합격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무관武官 노상추의 과거길은 길 위의 고단한 삶으로 그려진다. 반면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경상북도 성주로 유배를 간 이문건을 통해서는 유배길이 우리가 그렸던 죽음을 겨우 비껴간 험난한 인생길만이 아닌, 지방 관리들의 배려 속에서 즐거운 유람을 떠났던 길이었음을 알게 된다.
이야기의 후반부로 접어들면서 이 책은 19세기 말 이후로 시대를 옮겨간다. ‘장돌림과 장삿길’에서는 오늘날의 폭력조직과도 닮았던 보부상단의 뒷이야기와 더불어 고단한 장돌뱅이 장사꾼의 장사여행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망국의 울분을 단군의 실재를 증명하는 백두산 여행으로 극복하려 했던 최남선의 이야기도 근대 역사의 중요한 한 장을 들여다보게 한다. 일제강점기의 수학여행은 그 말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수학여행’의 추억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이런 여행이 일제의 교육정책의 하나로 등장한 여행 문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 서울에서 소설가 박태원이 경험하고 기록한 도시화의 모습과 도시생활의 단면을 ‘소설가 구보씨의 경성 나들이’에서 볼 수 있다.

각 장별 주요 내용
1장 ‘와유’는 상상의 여행길이다. 와유라는 말은 송宋나라의 종병宗炳이라는 사람이 늙고 병들면 명산을 두루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노년에 누워서 보기 위하여 유람했던 곳을 모두 그림으로 그려 방에 걸어두었다는 『송사宋史』 「종병전宗炳傳」의 일화에 연원을 두고 있다. 도연명陶淵明의 은거를 꿈꾸는 사람은 「귀거래도歸去來圖」를 걸어놓았고, 왕유王維와 같은 별서別墅를 꾸미고 살고자 하면 「망천도輞川圖」를 걸어놓았으며, 왕희지王羲之처럼 곡수曲水에 술잔을 띄워 시를 짓고 싶으면 난정蘭亭을 그린 그림을 구해 완상하였다. 이익은 그림이 상상력을 촉발하는 매개물이라 하였다.
물론 와유의 매개물로 그림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선 선비들은 와유의 개념을 더욱 확장하여 그림 외에도 산수를 유람한 기행문을 읽으면서 와유를 했고 놀이판에 전국의 명승지를 그려놓고 와유를 했으며, 돌로 만든 인공 산, 곧 석가산石假山을 만들어두고 와유를 했다. 이것도 어려우면 집 이름을 통해 먼 바다와 강을 끌어들이는 와유의 방식도 택하였다.
집에 인공의 산 가산假山을 만들어놓는 것은 와유의 대표적 형태다. 조선 초기 석가산으로는 채수蔡壽의 집에 있던 것이 가장 교묘했던 듯하다. 채수의 석가산은 높이가 5척이고 둘레가 7척이며 폭포는 2척 남짓이고 나무는 4~5촌이었다. 사람 키만 한 높이의 석가산에 손바닥만 한 조그만 나무를 심었다. 특히 대통을 이용해 물길을 땅속으로 끌어와서 갑자기 연못 한가운데 있는 석가산 꼭대기에서 폭포가 되어 떨어지게 하였다. 이렇게 사람들이 석가산을 만든 이유를 대면서 채수는 사람이 늙으면 직접 산을 오를 근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깊은 산중에서 짐승들로부터 다칠 위험이 없다는 점도 내세웠다. 더욱 중요한 점은, 석가산은 그림과 달리 작지만 산을 직접 체험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림이 줄 수 없는 생동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비록 가산이 작지만 상상력으로써 큰 산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 채수는 가산 앞에서 시를 짓고 즐기노라면 자신의 마음이 그곳과 어우러져 태산이 크고 가산이 작다는 것도, 못이 작고 바다가 크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옛사람의 위트와 익살과 자족의 정신이 어우러진 와유는 우리를 상상의 달콤한 세계로 끌어당기는 듯하다.

2장 ‘온천행’는 사도세자의 정치적 시험대였다. 사도세자의 온행은 단순히 다리에 난 창질을 치료하는 목적에 그치지 않았다. 영조는 왕세자 행차시에 얼마나 많은 백성이 몰려들어 구경했는지 궁금해하면서, 사도세자에 대한 민심의 향배를 알고 싶어했다. (…)한 차례 소동 끝에 한강을 건넌 왕세자 일행은 과천으로 향했다. 사도세자는 “농사철에 부득이 수레를 움직이게 되었으니 벼를 상하게 할까 염려된다. 선상군先廂軍과 후상군後廂軍은 대열을 짓지 말고 길 하나로 행군하도록 하라. 그리고 관광 나온 백성들도 길 좌우에 가지런히 서서 밭둑 사이를 짓밟지 않도록 알리는 게 좋겠다”고 명령하였다. 이에 많은 백성이 사도세자의 성덕을 감축하며 우레와 같은 환호성을 질렀다. (…) 영조는 사도세자 온행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보고받고 있었다. 사도세자가 온천에 목욕하러 가서 돌아오기까지의 크고 작은 모든 일을 도신道臣(관찰사)으로 하여금 장계로 알리도록 하명한 것이다. 영조는 특히 민간을 침학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온행시 사도세자를 맞이하러 온 관광 백성의 숫자가 많았는지 자주 물었다. 당시 사도세자의 행차는 왕조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와 바람을 확인하는 장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영조의 질문에 사도세자의 선행을 알리는 관료들의 보고가 이어졌다.
군병들이 조심하지 않아 말이 전토를 함부로 밟아서 농부와 아이들이 농사를 망쳐 막막해하자 사도세자가 콩 한 섬을 지급하라고 했다는 보고, 한 늙은이가 떡을 팔려다가 진중의 병마에게 차여 떡을 모두 망치게 되자 사도세자가 팥 한 섬을 주었다는 내용, 한 노파가 병들어 누워 여러 날 밥을 먹지 못했다는 말을 전해 들은 사도세자가 쌀 몇 말과 돈 몇 꿰미를 주자 사도세자의 밝은 덕을 군병과 백성들이 다투어 칭송하였다는 보고, 산과 들에 가득한 아낙네와 아이들이 사도세자를 둘러싸고 가까이 다가와 사랑하고 떠받드는 것이 마치 아기가 엄마를 보는 것보다 더했으며, 심지어 무엄한 줄 모르고 손으로 옷자락을 잡는 이도 있었다는 보고, 모두 영조가 듣고 싶어했던 내용들이었다.

3장 ‘밤하늘 여행’은 시와 과학의 하모니였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밤하늘 별자리는 필수교양이었다. 술 한 잔 걸치고 시 한수 지을 때 쏟아지는 별들은 상상력을 이끌어가는 길이 되었다. 동아시아 별자리에 대한 관념은 서양의 것과 몇 가지 점에서 크게 다르다. 우선 현대 서양의 별자리가 88개인 것과 달리 동아시아의 별자리는 300여 개나 되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동아시아의 별자리는 서양에 비해 그 수가 월등히 많다. 밤하늘에서 인간이
맨눈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별은 대략 2000개 내외인데, 별자리의 수가 많다면 한 별자리를 구성하는 별들의 개수가 적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동아시아의 별자리는 한 개의 별로 이루어진 것이 여러 개 있다. 또한 두 개 혹은 세 개로 이루어진 별자리도 많다. 드물게 수십 개의 별로 구성된 별자리도 있다. 북방칠수 가운데 실室근처에 있는 우림군羽林軍이라는 별자리는 45개의 별로 구성되었고, 남방칠수 가운데 진軫 근처에 있는 기부器府라는 별자리는 32개의 별로 구성되었다.
동아시아의 별자리 관념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밝은 별이라고 해서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자인 히파르코스가 여섯 단계의 등급으로 항성의 밝기를 구분했는데, 이후 계속해서 별의 밝기 등급을 중요하게 취급했다. 하나의 별자리를 구성하는 여러 별 중에서 밝은 별들은 따로 의미 있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오리온자리의 밝은 별인 베텔기우스나 리겔, 처녀자리의 스피카, 쌍둥이자리의 카스토르와 폴룩스 등이 그런 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는 하나의 별자리를 구성하는 여러 별 가운데서 밝은 별이라고 하여 특별히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다. 밝은 별이 그 별자리의 기준 별이 되지도 않으며, 맨눈으로는 희미하여 주변의 별들과 잘 구별하기도 힘든 별
하나를 별자리로 삼기도 했다.
동아시아 별자리 중에는 감옥天獄, 외양간天牢, 변소厠, 똥屎 같이 비속한 것들이 있다는 점도 서양의 별자리 관념과 구별된다. 서양의 별자리가 주로 신화로부터 유래하여 그 이름들이 기원한 곳을 알 수 있는 것과도 대조된다. 나아가 서양의 별자리는 신화에 등장하는 신이나 인간, 동물들을 생생하게 이미지화할 수 있는 데 반하여, 동아시아의 별자리는 이름이 붙어 있을 뿐 실제로 별자리가 나타내는 인물이나 사물을 그림으로 그리는 일은 거의 없다.

4장 ‘여성들의 산수유람’은 신천지와의 마주침이었다. 조선 후기 제주에 살던 기생 만덕萬德(1739~1812)은 상업으로 큰돈을 벌었다. 제주에 흉년이 들었을 때 그녀는 자신의 재산을 던져 1천명 백성을 구할 정도의 거부였다. 이 공로로 정조 임금이 그녀에게 소원을 묻자 만덕은 “금강산 유람”이라고 답했다. 그만큼 조선 여성들에게는 “집을 떠나”서 낯선 곳을 여행한다는 것이 꿈만 같은 일이었던 것이다. 안동 하회에 살던 연안 이씨(1737~1815)는 나이 예순다섯이 되어서야 충청 부여로 여행을 떠나게 됐다. 부여현감을 하는 맏아들에게 다니러가는 길이었다. 생전 처음 집을 떠나보는 그녀에겐 말 채찍질 소리의 위풍당당함도 여행의 흥취를 돋우는 것이었다. 가마에서 주렴을 들어 원근의 풍경에 빠져드니 40년 체증이 내려앉았다. 가는 도중 옥성에 들러서는 30년만에 동생을 만나 반백의 두 노인이 붙잡고 울기도 했다. 의유당 남씨意幽堂南氏는 신대손申大孫의 부인으로 남편이 함흥판관에 부임하자 따라가서 머물게 되었다. 함흥에서 살게 된 남씨는 이곳저곳 구경하고 싶은 욕구로 몸살을 앓은 듯하다. ‘가고 싶다’ ‘보고 싶다’를 판관인 남편에게 요청하고 거절당하는 것을 반복한다. 더구나 관청의 기생들이 꼭 봐야할 장관이라고 입이 닳도록 칭찬하는 동해의 일출, 오십 리 거리가 마음에 걸리긴 하나 보고 싶은 일출 때문에 남편과 몇 번이고 실랑이를 벌인다. 급기야 내 마음의 병 고쳐준다고 생각하라는 등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진 끝에 일출을 보러가게 되었다. 이랬으니 그녀의 눈에 일출은 얼마나 장관이었을까? 그녀가 「동명일기」 속에 “소 혀처럼 드리워 물속에 풍덩 빠지는 듯 싶더라”고 남긴 일출 묘사는 문학사에 길이 남은 작품이 되었다.

5장 ‘명인명창의 여행길’은 목에서 피 나고 배 붓던 길이었다. 조선시대의 음악가들은 홀로 속세와 거리를 두며 고독한 음악 연마의 길을 걷기 위해, 훌륭한 스승을 찾아 나서기 위해, 좋은 음악인들과 음악을 나누기 위해, 음악으로 시름을 달래기 위해, 혹은 연주 무대를 위한 목적으로 전국 각지를 떠돌며 음악활동을 펼쳤다. 19세기 가곡계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안민영(1816~?) 가집歌集 『금옥총부金玉叢部』는 음악과 관련된 그의 생활과 여행 노정을 담고 있다. 대원군은 안민영의 음악후원자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이후 안민영은 조선 왕실과 밀착된 활동을 펼치는데, 특히 대원군 가家와의 유착 관계가 형성되어 이후 지방에서의 음악활동은 그의 후원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이때 안민영은 전국 각지를 다니며 지방의 여러 예인과 어울리면서 의욕적인 음악활동을 펼쳤고, 전국에 있는 음악인들의 상황을 파악해 서울로 불러올리기도 하며 음악인들과의 교류를 이룰 수 있도록 했다. 반면 고종대의 충청남도 사람 이동백李東白(1863~?)은 뼈를 깎는 고행길 같이 전국을 떠돌았다. 열아홉, 스무 살이 되었을 무렵 이동백은 산속에 들어가 움집을 짓고 밤에 혼자 공부도 하면서 소리를 향한 열정을 불태웠다. 밤중에는 짐승 우는 소리가 들리는, 그런 곳이었다. 이십대 중반에 접어들어서는 충청도 땅을 떠나 경기도로 올라와 이곳저곳을 방랑하다가 1900년, 그의 나이 서른여덟에 다시 경상도 진주로 내려가 3년간 이곡사里谷寺 옥천암玉泉庵에 머물며 옥천대사에게 두 달가량 염불 공부도 배우고 소리를 연마했다. 염불도 훌륭한 소리였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처음은 탁하고 쉰 목이지만, 부르고 또 부르면 차츰차츰 실낱같이 목소리가 열리게 되었다.”

6장 ‘금강산 여행’은 거대한 자연과 인간의 만남이다. 금강산의 명성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다만 불교를 배척했던 조선의 선비들이 유학적인 명분을 부여하면서 금강산의 의미가 새롭게 각색되었다. 동시에 오랜 역사 과정에서 명승 중의 명승으로 각인된 금강산으로의 여행은 지속되었다. 이름 높은 선비들이 호연지기를 기르고, 마음을 닦기 위해 평생 한번은 오르고자 하는 산이 되었다. (…) 금강산 기행문이나 기행시와 마찬가지로 금강산 그림은 한 장소를 담는 한 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많게는 수십 점, 수십 면에 이르는 대작大作이 되곤 했다. 현존하는 전통 회화 가운데 금강산과 관련된 작품들은 유난히 대작이 많은데, 이는 금강산으로의 여행에 참여한 뒤 그림으로 그려 소장했던 인사들이 대부분 지체가 높은 선비이거나 관료였다는 사실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때로는 국왕이 화원을 파견하여 그려오라고 명하기도 했는데, 조선 초의 세조와 조선 후기의 정조가 바로 그런 명을 내렸다. 금강산 여행은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완성시킨 배경이 되어주기도 했고, 조선 후기의 다채로운 화풍을 이끌어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7장 ‘노상추의 과거길’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노상추는 선산 출신의 무신이었다. 그는 12년 동안 여러 차례 응시한 끝에 1780년(정조 4) 무과에 합격한 인물로 지방에서 상경하여 과거시험을 치르고 합격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서러운 실패를 반복해야 하는 일인가를 몸소 보여준 전형적인 인물이다. 1771년에 경험한 두 번째 시험은 10월 9일에 시행된 정과였다. 노상추는 이때도 여러 친구와 함께 상경했다. 출발이 늦어 시일이 촉박했는데, 급히 움직여 시험 직전에 서울에 도착했다. 성적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빴다. 훈련원 터에서의 실기시험에서 동행한 정청지만 초방初榜에 이름을 올리는 데 성공하고 노상추를 비롯해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실패했다. 노상추는 1776년에도 상경하여 한 번 더 시험을 봤지만 이 또한 뜻한 대로 되지 않았다. 그의 과거행은 정조가 즉위하면서 본격화되었다. 1776년 가을에는 무과 식년시에 응했다. 문과는 고령, 무과는 김해가 시험 장소였다. 선산에서 김해까지 가는 거리는 멀었다. 7월 21일에 집을 떠나 8월12일에 돌아왔다. 시험은 무예 실기, 정해진 책을 읽는 강서講書 등으로 치러졌다. 무예시험은 문제없이 통과했으나, 강서시험에서 합격선을 넘지 못했다. 강서시험은 『장감將鑑』 『대학大學』 『삼략三略』 『경국대전』 등 네 책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 과제였다. 『장감』은 「양호전羊祜傳」에서 조粗를 얻고, 『대학』은 “시에 이르길, ‘은나라가 민중의 마음을 잃지 않았을 때詩云殷之未喪師”로 된 본문 읽기에서 조를 얻었으나, 『삼략』에서는 불통不通을 받았다. 강서에서의 성적 평가는 과목마다 통通, 조粗, 약略, 불통不通 네 등급으로 나눠 매겼다. 합격하려면 네 과목을 통틀어 적어도 3조 1통이 되어야 했다. 하나라도 불통을 받으면 불합격이었다. 하지만 노상추는 『삼략』에서 실패해 이를 이룰 수 없었다. 탈락이 결정되었기에 『경국대전』 시험은 보지도 못했다. 『삼략』에서 불통을 받은 것은 정보 부족이 한 원인이었다. 원래 식년시에서는 『오자吳子』로 강서하도록 했으나 영조 대에 수교를 내려 『삼략』으로 바꾸었다. 『오자』나 『삼략』 모두 ‘무경칠서武經七書’에 속했지만 이 무렵 『오자』는 강서에서 배제되어 있었다. 노상추는 강서 대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오자』만 준비했다가 서울에 도착해서야 소식을 듣고는 『삼략』으로 부랴부랴 바꿔 준비했다. 강서시험을 치르기 전 밤에 겨우 두 번 읽고 시험에 응했으니 낙방할 수밖에 없었다. 합격 문턱 일보 직전에서의 좌절이었다. 생각해보면 안타깝고 어이없는 일이었다. 그 스스로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노상추는 그 억울함을 “한스럽고 한스럽다”고 적었다. 노상추가 무과에 합격한 것은 그의 나이 서른다섯 살 때였다. 시험 준비에 나선 지 12년 만이었다. 그간에 들인 노력과 비용, 애타게 졸인 마음, 굴욕감, 한스러움이 한꺼번에 씻겨가는 보상이 합격으로부터 이루어졌다.

8장 ‘암행어사 길’은 고통과 쾌락이 엇갈린 길이었다. 조선시대 암행어사의 길은 출발점과 목적지를 잇는 평면상의 단순한 선이 아니고 명예와 고난, 이상과 현실, 성실과 기만이 엇갈리는 길이었다. 국왕의 측근 중에서 비밀리에 선발된 관원이 임금의 명령을 직접 수행하는 영광의 길이었으며, 따라서 출셋길로 줄달음쳐나가는 데 빠뜨릴 수 없는 화려한 길이었다. 반면에 그 영광과 명예의 길에서도 본분을 망각하고 추악한 탐욕을 행한 암행어사 또한 드물지 않았다. 지체 높은 관리로서 좀처럼 겪어보기 어려운 육체적 고난의 길이었던 동시에, 제대로 된 관리라면 사회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마음의 고통이 한층 더 강렬해야 마땅한 길이었다. 남의 눈을 속이면서 걸어야 했던 암행暗行부터가 그렇듯이, 이상과 현실이 어긋날 때 어사는 자신과 지배질서를 합리화하면서 걸어야 했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나서서 백성을 속여야만 하는 길이었다.

9장 ‘유배길’은 절망만이 있는 고통의 길은 아니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을사사화에 휘말려 경상도 성주에 유배된 묵재默齋 이문건李文楗(1494~1567)은 9월 17일 서울에서 출발해 11일간의 유배길 여행 끝에 그달 28일 유배지에 다다랐다. 그런데 압송관 최세홍은 유배길 여행에 필요한 여러 물품까지 요구했다. 이를 부비채浮費債라고 하는데, 이문건은 최세홍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하고 내주었다. 그러면서 그의 요구가 너무 많아 충족시킬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유배인은 자신의 유배길 비용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던 터에 설상가상으로 압송관의 여행 경비까지 일부 짊어져야 했던 것이다. 압송관은 유배인을 호송해 일정을 함께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실제로는 유배인은 유배인대로 압송관은 압송관대로 길을 갔다. 정치적으로 유배길에 오른 사대부 죄인들은 도망갈 염려가 별로 없었기에 어느 정도 자율적인 노정이 보장됐던 것이다. 유배인의 유배길 여행은 흔히 사극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온몸이 오랏줄로 묶여 끌려가거나 함거에 실려가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사대부는 말을 타고 노비를 거느리며 가는 모습이었고, 죄인의 처지라는 것만 의식하지 않으면 일반 여행객과 다름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이문건도 압송관과 동행하지 않고 노비를 데리고 홀로 괴산에 이르렀고 압송관은 이틀 뒤에야 도착했던 것이다. 최세홍은 괴산에 이른 후 술에 취해 찾아와 술주정을 하는 바람에 이문건이 상당한 곤란을 겪었다. 그러나 압송관을 박대하지못하고 아랫사람들에게 잘 접대할 것을 당부했다. 그가 유배인의 처지임을 환기시켜주는 사건이었다.

10장 ‘장돌림과 장삿길’은 돌고 돌았던 길 위의 삶을 잘 보여준다. ‘장돌림과 장삿길’에서는 오늘날의 폭력조직과도 닮았던 보부상단의 뒷이야기와 더불어 고단한 장돌뱅이 장사꾼의 장사여행 길을 함께 걸을 수 있다. 가령 물장수로 유명한 함경도 북청에 19세기 말~20세기 들어 부상 조직이 생겨났는데, 자료를 보면 한말에 보부상 조직이 정치세력화하면서 지가紙價를 받아 챙기는 관행을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 즉, 공사원公事員과 장무원掌務員이란 자들은 중앙의 정치권력과 결탁되어 무소불위의 폭력을 휘둘렀는데, 규장각에 소장된 자료에 따르면 1903년 정구갑이란 상인은 “부상負商에 가입하라”는 권유를 뿌리치다가 관련 조직으로부터 두들겨 맞아 40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정구갑에게 폭력을 행사했던 이들은 말하자면 ‘조직’에의 가입을 강권하는 ‘행동대원’들이었고, 그들의 무모한 행동이 폭행치사에 따른 종신형으로 귀결되기도 했던 것이다. 즉 보부상 조직은 상거래의 질서를 확립하고 상품 유통의 확대와 시장의 발달을 견인한 것만이 아니었고, “길 위의 고단한 삶”과는 거리가 멀었던 이들도 존재했던 것이다.

11장 ‘백두산 근참기’는 신성하고 장구한 여정이었다. 최남선의 백두산여행기도 근대 역사의 중요한 한 장면을 보여준다. 1920년대에 최남선은 단군의 실재성과 역사성을 증명하는 역사 연구에 몰두하던 중이었다. 그 이유는 단군을 부정하고 한국 고대사를 왜곡하는 일본 역사학자들의 논리에 반박하기 위해서였다. 「단군론」은 바로 이 일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한국 고대사의 경우 문헌 자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는 국토 순례를 통해 우리 국토에 남아 있는 고대의 흔적을 찾아 나섰고 이를 통해 얻은 민속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단군 연구를 진전시켜나갔다. 그가 1924년에 금강산을, 1925년에는 백암산과 변산, 무등산, 조계산 등 지리산 기행을 한 것도 국토 곳곳에 감추어져 있는 고대의 흔적을 찾기 위한 것이었으며, 마침내는 1926년 백두산으로 발을 내딛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최남선의 유명한 ‘불함문화론’이 탄생한다.

12장 ‘일제강점기의 수학여행’은 흥분에서 시작해 비통함으로 마감된다. ‘일제강점기의 수학여행은 그 말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수학여행’의 추억을 일깨워주는 동시에, 이런 여행이 일제의 교육정책의 하나로 등장한 여행 문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19세기 후반 철도의 발달과 제국주의의 확장으로 ‘투어리즘tourism’이 탄생했다. 서구에서 시작된 투어리즘은 ‘문명국 국민’의 기분을 향유하는 식민지 여행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는데, 이처럼 단체여행을 학교 수업의 연장선상으로 도입한 형태가 일본이 발명한 수학여행이었다. 즉, 개항 이후 인천, 부산 등지에 일본인이 이주해오면서 수학여행도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평양으로 3일간 수학여행을 하려면 총독부 하급 관리 월봉의 절반을 들여야 했고, 흔히 갔던 만주수학여행은 2개월 이상의 월봉을 요구했다. 더욱이 일제 지배하의 식민지 조선을 돌아보는 수학여행에는 단연히 식민성의 기제가 작동하고 있었을 수밖에 없다. 1920년경 식민지 조선에서 학생들의 눈에 비친 조선의 자화상은 벌거벗은 산, 움막에서 이루어지는 고단한 민중의 삶, 그에 대한 연민의 시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가령 개성 인삼공장을 가면 이를 자본주의 시대에 걸맞도록 상품화한 일본의 공로를 목격해야 했고, 미개한 조선을 개발시켜준 당사자가 일본인임을 인식해야 했다. 따라서 여행을 떠난다는 기쁨도 잠시, 식민지 학생으로서의 수학여행은 그저 즐거울 수만은 없었다. 그들은 여행지에서 망국의 현실을 자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조선의 땅이건만 조선인이 주인이 아닌 현실이었다. 그러면서도 황학동은, 패배감에 침잠하는 것이 아니라 심기일전하여 조선인으로서 분발해야 한다고 결심하고 있다. 망국의 현실을 짊어져야 했던 일제강점기 소년들의 슬픈 자화상이다.

13장 ‘구보씨의 경성 산책’은 행복 찾기다. 경성 토박이인 박태원은 일본 유학 시절을 제외하고는 줄곧 경성에서 생활하면서 식민지 수도 경성의 모습을 자신의 소설에 담았다.『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은 소설가 구보가 1934년의 어느 여름날 정오경 집을 나서 청계천변에서 종로와 서울역을 거쳐 다시 종로로 돌아와 친구를 만난 후 밤늦게 집에 돌아오기까지의 하루 동안 겪은 일을 작가 특유의 문체와 기법을 통해 서술한 작품이다.열두 시간여 동안 약 10킬로미터의 거리를 걷고 또 5.7킬로미터의 거리를 노면전차를 이용해 이동하면서 도시의 풍속을 그리는 한편 카페나 다방의 풍경을 묘사한 이 작품에서 흥미로운 것은 소설에서 묘사되는 것이 대부분 조선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일본인에 대한 묘사가 없다는 사실은 이 소설에서 주로 그려지고 있는 경성의 모습이 조선인들이 거주하던 청계천 북쪽에 국한되어 있다는 사실과 관련 있다. ‘직업을 갖지 않은’ 소설가 구보의 행복 찾기라는 주제로 수렴되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이 ‘행복 찾기’라는 과제를 찾게 되는 공간이 백화점과 백화점 식당이라는 설정은 의미심장하다. 1910년대의 무단통치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3·1 운동을 경험하면서 조선총독부가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한 후 1920년대 식민지 수도 경성의 도시문화는 상업주의적 색채로 넘치는데, 그 첨단에 서 있던 것이 일본 자본으로 세워진 백화점이었다


저자 프로필


저자 소개

편자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규장각은 조선의 22대왕 정조가 즉위한 해(1776)에 처음으로 도서관이자 왕립학술기관으로 만들어져 135년간 기록문화와 지식의 보고寶庫로서 그 역할을 다해왔다. 그러나 1910년 왕조의 멸망으로 폐지된 이후 그저 고문헌 도서관으로서만 수십여 년을 지탱해왔다. 이후 199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으로서 자료 정리와 연구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창설 230년이 되는 지난 2006년에 규장각은 한국문화연구소와의 통합을 통해 학술 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국보 지정 고서적, 의궤와 같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 유산, 그 외에도 고문서·고지도 등 다양한 기록물을 보유하고 있어서 아카이브 전체가 하나의 국가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문헌에 담긴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그동안 한국학 전문가들이 모여 최고 수준의 학술연구에 매진해왔다. 최근에는 지역학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 한국학의 세계화, 그리고 전문 연구자에 국한되지 않는 시민과 함께하는 한국학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학술지 『한국문화』『규장각』『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등을 펴내고 있으며 <한국학 자료총서>(총3권) <한국학 연구총서>(총18권) <한국학 모노그래프>(총40권) 등을 펴냈다.

기획 - 전용운

목차

규장각 교양총서를 발간하며
머리글 _ 즐거움의 지혜를 얻는, 조선으로의 시간여행

1장 누워서 떠나는 여행의 즐거움
- 옛사람들이 남긴 와유의 기록들 | 이종묵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2장 정치적 시험의 장이 된 왕세자의 온천여행
- 조선 왕가의 치병기 | 김호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교수

3장 별자리를 좇아서 거닌 옛사람들의 시, 노래, 과학
- 조선 사람의 밤하늘 여행 | 전용훈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4장 깊은 규방에서 나와 신천지를 마주하다
- 조선 여성들의 산수유람 | 이숙인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원

5장 "목에서 피가 나고 배가 붓던" 여행길
- 명인 명창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송지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

6장 붓 한 자루 쥐고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다
- 금강산 여행, 화폭에 담기다 | 박은순 덕성여대 미술사학과 교수

7장 서른네 살, 12년의 고행 끝에 본 가문의 영광
- 영남 양반 노상추가 떠난 과거길 | 정호훈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교수

8장 착잡한 고통과 짜릿한 쾌락이 엇갈린 길
- 1822년 평안남도 암행어사 박내겸의 암행길 | 오수창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9장 감시 속에서 즐긴 유배인의 여행길
- 이문건의 유배길과 해인사 유람 | 김경숙 조선대 사학과 교수

10장 돌고 돌았던 순회상인의 길 위에 펼쳐진 삶
- 장돌림과 장삿길에 대한 오해와 진실 | 조영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11장 머리에 천지를 이고 몸에 천하를 두르다
- 최남선의 『백두산근참기』를 따라가다 | 윤대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12장 흥분과 기대가 의분과 비통함이 된 까닭
- 일제강점기에 떠난 수학여행 | 윤소영 독립기념과 연구원

13장 소설가 구보씨의 행복 찾기
-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 나타난 1930년대 서울 | 서재길 국민대 국문과 교수

참고문헌 및 더 읽어볼 책들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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