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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로 본 조선 상세페이지

사물로 본 조선작품 소개

<사물로 본 조선> 조선 사람들의 애환과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는 사물들,
조선 사람들은 왜 자신을 둘러싼 사물에 관심을 가졌을까?

사회상을 담아내는 그릇으로서의 사물을 탐구하다
옛 물건 하나하나에 담긴 인간 삶의 풍경과 상징, 욕망
조선의 사물을 둘러싼 신화와 전설, 철학적 사유를 탐색하다


사물事物은 일과 물건을 함께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은 원래 하늘과 땅처럼 우리의 환경을 구성하는 존재로부터 제도, 예법, 규범,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각종 도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대상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물에 대한 지식들을 모은 책이 곧 사전事典인데, 조선에서는 국가가 주도해 『증보문헌비고』와 같이 방대한 사전을 편찬하기도 했다. 사실 학자들 가운데서도 『지봉유설』이나 『성호사설』과 같은 책을 편찬한 이가 적지 않았으니, 조선시대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물에 대해 상당한 관심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원래 이러한 문헌들을 오늘날의 현실에 맞춰서 계승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 기획되었다.
그렇지만 과거의 성과를 이어받는다는 생각을 현실에서 구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우선 조선의 유서들을 잠시 펼쳐봐도 알 수 있듯이, 이들 문헌에서 다룬 대상은 한 권의 책으로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수가 많다. 또한 다양한 지식을 담아내는 백과사전들이 우리 주변에 이미 존재하고 있으니, 최대한 많은 지식을 일정한 틀에 맞춰 제시하는 것은 불필요한 작업이 되고 말았다. 그런 까닭에 오늘날에도 여전히 눈길을 줄 만
한, 그러면서도 조선 사람들의 애환과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을 만한 사물로 범위를 좁히고, 그 사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찾아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_머리글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열쇠
규장각 교양총서의 열한 번째 주제는 ‘사물로 본 조선’이다. 이 책은 주변 ‘사물’을 통해 조선 사회와 사람들의 생활상을 살펴보고 사물에 담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사물은 자연 환경에서부터 제도, 예법, 규범 및 일상에서 볼 수 있는 각종 도구에 이르는 넓은 의미를 포괄한다. 조선시대에 사물에 관한 해설서 등이 출간되기도 했으니, 조선 사람들은 자기 주변의 사물들에 대해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던 듯하다. 이 책은 많은 사물 가운데 조선인들의 삶과 애환,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을 법한 사물로 범위를 좁혔다. 우리가 사는 집에서부터 읽는 책, 농업과 수차, 감옥과 형구, 전쟁에 필요한 무기, 의복, 과거시험과 함께한 물건들, 다양한 우리 전통 악기, 점치는 도구, 태극기의 탄생, 생활에 꼭 필요한 전기 그리고 이들 사물의 기원을 근본적이고도 총체적으로 다루는 글들을 통해 조선의 생활상을 속속들이 살펴본다. 흔히 우리가 익숙하다고 여기는 사물들조차 어떤 역사와 이야기를 품고 있는지, 왜 오늘날 이런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를 아는 경우는 드물다. 더욱이 사물의 역사 하나하나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은 실정이다. 이 책은 역사를 보는 또 하나의 창을 ‘사물’로 열어 보일 것이다.

각 장의 내용

오늘날 집은 가장 사적인 공간이다. 그러나 아파트를 중심으로 하는 현대의 집 문화와 달리, 조선시대의 ‘집’은 문화를 담는 그릇으로서 넓은 범위의 생활공간 자체를 의미했다. 조선사회는 같은 성씨끼리 마을을 꾸리는 씨족사회였다. 주 생계수단인 벼농사는 서로 간의 협력을 요했고, 이를 위해서는 같은 혈연으로 맺어진 친족관계가 효율적이었다. 조선시대 주택인 한옥은 대부분 여러 채의 건물이 모여서 하나의 집을 이루었다. 경제력에 따라 조금씩 달랐지만 중심이 되는 살림채는 방과 마루, 부엌이 하나의 채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 공간이었다. 온돌, 마루, 부엌 등을 하나의 건물 안에 넣다보니 자연스레 규모가 커지면서 각 방이 길게 한 줄로 늘어서는 일자집이 되었는데 아무리 커봐야 7칸을 넘지 않았다. 대개는 5~6칸을 넘어서면 중간에 꺾이는 ㄱ자, ㄴ자, ㄷ자, ㅁ자 집처럼 안마당을 둘러싸는 형태로 발전했다. 이러한 꺾음집 형태는 우리나라의 특징으로, 일본, 중국과 큰 차이를 보인다. 중국은 안마당을 둘러싼 네 번에 각각 건물이 들어선 별동형 주택이, 일본은 밭 전자 모양의 뚱뚱한 일자집을 하나의 지붕이 덮는 집이 일반적이다.
또한 우리 주택의 특징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온돌이다. 온돌은 방 한쪽에 구들을 놓고 그 위를 침대나 벤치처럼 사용하는 부분 온돌인 ‘캉’에서 유래했는데, 이는 선사시대 움집과 삼국시대의 집터에서도 발견된다. 온돌이 한반도 전역에 보급된 것은 17세기 들어서의 일로 추정된다. 한반도 주택에서만 발견되는 온돌은 그 유무가 한국의 주택을 결정하는 확정적 근거다. 이뿐만 아니라 온돌의 출현은 각 단위 공간 사이의 연결을 촉발해 한국 주택의 근본을 뒤바꿔놓았다. 주로 살림채 안에 방, 마루, 부엌의 배열 혹은 마당과 채의 배열에 따라 여러 모양의 집으로 나타났다. 우리 주택 대다수는 방과 마루가 한 줄로 쭉 들어서는 홑집 형태를 하고 있는데 함경도, 강원도 및 경상북도 일부는 방이 두 줄로 들어가는 양통집의 형태를 띤다. 이처럼 조선시대에 제 모습을 갖춘 한옥과 온돌은 우리나라 주택 형식을 홑집 연결형으로 변화시켰고 한국인 주거 문화 전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특히 온돌은 온수 파이프를 이용해 바닥 난방을 하는 오늘날 아파트의 난방 방식에 그대로 남아 있다.

조선시대 최대의 농업 백과사전인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박지원의 『과농소초』에서는 수차水車를 사용하지 않는 조선의 비효율적인 농업 현실을 개탄했다. 사실상 ‘무자위’는 조선시대의 양수기로 잘못 알려져 있으며, 실제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수차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에서 들여온 통차로 추정된다. 물론 조선시대에 수차를 도입하려는 노력이 없진 않았다. 고려에서 조선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사용하던 ‘번차’나 일본의 ‘통차’를 들여오자는 주장이 계속 제기됐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시험 사용까지 해봤지만 별 효과가 없었고 금방 고장나버렸던 것이다. 이전까지의 시도가 일본과 중국의 것을 모방해 그대로 들여오자는 것이었다면 18세기 영·정조대에 이르러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수차를 다룬 서적이 수입되고, 연구와 지식들이 축적되면서 도입에 대한 주장은 더 거세진다.
한편 수차의 실용화를 둘러싼 견해차가 있었는데, 수차의 보급을 주장한 이가 대다수이긴 했지만 그 효율성에 의문을 품는 이도 많았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의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유학자들은 수차 같은 인위적 기구가 자신들의 수리관에 어긋난다며 반대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수차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어 ‘수리학’이라는 학문이 생기는가 하면 유생 하백원은 중국의 서적을 통해 전통 수차와 서양식 수차를 꼼꼼히 분석해 수차 설계도인 「자승차도해」를 남겼다. 하지만 이는 결국 실용화의 빛을 보지 못하는 운명에 처한다.

감옥은 살면서 누구나가 경험하게 되는 공간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겠지만, 어쨌든 사회의 그늘진 공간이면서 격리된 곳인 감옥이 조선시대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당시에는 감옥이란 부르지 않고 ‘옥’이라 했다. 또 오늘날처럼 죄인을 감옥에 가둬두는 징역형이 없었으며, 다만 형벌이 확정되지 않은 미결수들을 수감하던 곳이었다. 감옥제도는 세종대에 본격적으로 정비되어 모든 고을에 옥을 설치하도록 했으며 표준 감옥 지침서를 반포하고, 옥내 죄수들의 수감 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 등이 이뤄졌다. 대표적인 감옥은 한양에 설치되었던 전옥서다. 구금을 전담하는 관청이었던 만큼 소속 관리와 아전을 여러 명 두어 죄수를 관리하게 했다. 남자와 여자를 나누어 구금했고, 감옥의 구체적인 모습은 군현 단위마다 조금씩 달랐다.
감옥에서의 대우가 아무리 좋다 해도 감옥은 누구든 가고 싶어하지 않는 고통의 장소였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옥중오고獄中五苦’라 하여 감옥에서 죄수들이 겪는 다섯 가지 고통을 열거했다. 춥고 배고픈 고통, 질병의 고통, 오래 갇혀 있는 고통, 형틀의 고통, 토색질당하는 고통이 그것이다. 토색질은 죄수들이 옥졸과 고참 죄수들로부터 겪는 경제적 압박으로, 가장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신참 죄수가 들어오면 고참 죄수들과 옥졸들은 서로 짜고 신고식이라는 명목으로 가혹행위를 가해 신참의 돈을 뜯어내는 등의 악행을 벌였다. 신참 죄수 박해득 사망사건은 당시 감옥에서 자행되던 토색질이 얼마나 심한 것이었는지를 보여준다. 형구는 신체형을 가할 때 사용하는 형장, 고문 도구와 죄인의 목에 씌우는 기다란 칼인 가枷, 손에 채우는 일종의 수갑인 추杻 등이 있었다. 또한 전옥서에서 사형 집행을 담당했던 사형집행인을 ‘행형쇄장’이라고 칭했는데, 옥당 1명을 두었고 주로 사형수 가운데 선발했으며 죽을 때까지 그 역할을 수행해야만 했다.

과거급제는 모든 조선 양반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양반 집안의 자손이라면 과거는 숙명과도 같이 어깨에 걸머져야 할 짐이었다. 문제는 과거 합격의 문이 아주 좁다는 것이었다. 조선조 500여 년 동안 문과에 급제한 사람은 1만4600여 명으로 연평균 30명 정도에 불과했고, 좀더 많이 뽑는 생원·진사 합격자도 평균 100명에 못 미쳤다. 어쨌든 이처럼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이루지 못할 꿈이었지만, 이들의 바람만큼은 온갖 물건에 담겨 오늘날까지 전해져오고 있다. 먼저 사대부의 복된 일생을 상상화로 그린 평생도가 있었고 오자등과, 오자출신, 오자장원 등의 글귀를 자수로 놓기도 했다. 가령 오자등과는 다섯 명의 아들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은 것이다. 이밖에 등용문을 모티브로 파도를 뚫고 하늘로 치솟는 잉어를 그린 ‘약리도’를 사대부들이 쓰는 벼루나 연적, 필통, 그릇 등에 문양으로 새기기도 했으며, 껍질이 딱딱한 갑각류(‘갑’ 자)라고 새우를 새기는 등 입신양명의 꿈, 과거급제에 대한 소망을 사물에 담았다.
과거급제에 이를 수 있는 길은 오직 공부뿐이었다. 과거는 유교 경전과 역사, 문장에 대한 이해를 기초로 했기에 어려서부터 경서, 역사서, 문장서 등의 책을 읽고 글 짓는 공부를 해야 하는 만만치 않은 시험이었다. 하지만 무작정 책을 읽는다 해서 이 많은 내용을 익히기는 어려웠을 터, 그리하여 등장한 것이 학습용 도구였다. 책을 읽은 횟수를 세는 ‘서산’, 경서를 외우고 해석하는 시험에 대비하기 위한 ‘경서통’ 등이 있었다. 또한 책에서 문장을 뽑아 ‘초집’이라는 선집을 만들어 활용했는데 이는 주로 과거에 합격한 선인들의 답안을 모은 것으로, 말하자면 모범 답안을 뽑아 반복적으로 읽고 공부한 것이었다. 시험 날짜가 다가오면 유생들은 과거시험장까지 길고 긴 여행을 떠나기 위해 행장을 꾸렸다. 이때 꼭 챙겨야 하는 물건이 붓, 벼루, 먹과 같은 문방구였다. 또한 오늘날과는 다르게 답안을 작성할 답안지(시지)를 반드시 개인이 챙겨가야 했다. 이렇듯 과거급제를 위한 조선 사람들의 노력과 바람은 생활용품과 과거 수험서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 홍패, 백패 등의 합격증은 집안의 굉장한 영광으로, 후손들이 신줏단지 모시듯 선조의 유물을 지켰다.

조선 사람들은 액운을 떨치고 길한 운세를 기원하고자 무구巫具를 사용했다. 조선의 민속 종교에서는 무당이 무구를 매개물로 복을 기원하는 의식을 행했다. 먼저 신을 불러들이기 위한 청신구請神具가 필요하다. 이때 방울이 대표적인 무구로, 방울 소리를 신의 소리로 여기기도 했다. 방울의 모양과 개수는 지방에 따라 다양한 형태를 띠었다. 신을 불렀으면 본격적으로 운세를 점치기 위한 점구占具가 필요하다. 많은 학자가 점복에 관심을 보였는데 정약용은 『역학서언』 『복서통의』 등의 점서를 저술하기도 했다. 쌀을 던져 그 개수로 점을 치는 척미점, 동전을 던져 숫자나 흩어진 모양으로 점치는 척전점, ‘오방신장기’에서 하나를 택해 그 색에 따라 운세를 파악하는 깃발점 등이 있다.
점친 결과가 좋지 않으면 제액예방구로 이를 쫓거나 예방했다. 대표적으로 부적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 도교가 들어오면서 함께 온 것으로 보인다. 집에 붙여놓거나 태워서 먹기도 했다. 또한 복숭아나무와 버드나무가 의례 도구로 쓰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복 가운데 특히 길운과 재화를 벌어들이는 재수와 재복, 수명장수를 바라는 명복을 기원했다. 부채는 대표적인 기복구祈福具였다. 오방신장기나 바라가 사용되기도 했고, 수노인도를 새겨 넣기도 했다. 좀더 적극적으로 무속 의례인 굿을 하기도 했다.

우리 악기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먼저 재료에 따라 분류하자면 ‘8음’으로 나눌 수 있는데, 즉 금(쇠붙이), 돌, 사(실), 죽(대나무), 포(바가지), 토(흙), 혁(가죽), 목(나무)이다. 이와 같은 재료로 만든 악기 중 일반적으로 많이 연주되는 가야금, 거문고, 대금, 피리, 해금, 장구, 그리고 생황이 있다. 우선 가야금은 거문고와 함께 우리 현악기를 대표한다. 거문고가 북쪽의 고구려 땅에서 발생해 북방 민족의 기상을 잘 담아내는 묵직한 악기라면, 가야금은 남쪽인 가야 땅의 정서를 대변한다. ‘가야금’은 가야의 금이라는 뜻으로 우리 땅에 원래 ‘고’라고 하는 가야금과 유사한 악기가 있었다. 가야금은 가실왕이 만들고 악사 우륵이 열두 곡의 음악을 지어 신라로 악기와 음악을 가지고 온 뒤 신라의 대악이 되었다. 이러한 가야금이 우리 음악사에서 개량된 것은 19세기 후반 ‘산조’가 등장하면서부터다. ‘백악지장’, 즉 백 가지 악기 중 으뜸이라는 찬사를 받는 거문고는 고구려의 왕산악이 만든 악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서는 가야금의 중국 악기 모방설이 제기되지도 하지만, 어원으로 풀어보면 거문고는 가맛고의 변음이며, 가맛고는 고구려를 의미하는 ‘?’과 고가 합성된 ‘고구려의 금’이라는 뜻이라고 볼 수 있다.
해금은 포부가 큰 악기로, 단 두 줄로 무한대의 영역을 넘나드는 다채로운 표현을 해낸다. 대단한 잠재력을 지닌 해금은 어디에도 빠짐없이 편성되는 악기계의 감초다. 또한 8음, 주역 8괘, 8풍을 모두 담고 있는 악기이니 포부가 가장 큰 악기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대금은 천지의 원성을 간직한 악기다. 그 역사는 신라시대 『삼국사기』의 만파식적 설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고려사』에는 13개의 구멍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으로 피리는 자그마한 몸체로 꿋꿋하고 힘 있는 소리를 내는 악기이며 사계절의 다채로움을 담고 있다. 향피리, 당피리, 세피리의 세 가지 종류가 있고 풀잎으로 연주하는 초적도 있다. 세피리를 제외하고 향피리는 향필률, 당피리는 당필률로 『악학궤범』에 등장한다. 당피리는 향피리에 비해 길이가 짧고 굵으며 음색도 어두운 편이다. 세피리는 가장 가늘다. 삼국시대부터 연주되기 시작한 생황은 ‘박’에 열일곱 개의 구멍을 뚫어놓고, 거기에 길이가 각각 다른 대나무 관대를 꽂아 열여섯 가지 음을 내도록 만든 악기로, 여러 음을 동시에 낸다. 생황의 몸체인 박에 꽂힌 관대의 수에 따라 화생, 소생, 우생 등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생황은 제작 과정이 까다롭기에 그 과정의 어려움에 대한 기록이 많이 전한다.

이외에도 나무에 글자를 새겨 만든 책판을 통한 조선시대 서적 간행과 그 방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단순히 지식, 정보를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시대의 멋과 유행을 담아냈던 조선시대 책의 이야기와 전쟁 시 필요한 무기를 조선에서는 어떻게 관리하고 개발해왔는지에 대한 이야기, 조선시대의 의복은 단순히 옷을 입고 몸을 가리는 의미를 넘어 신분, 성별, 개인의 기호에 따라 다양한 옷을 입었는데, 이에 반영되어 있는 조선 사람들의 욕망이나 고민을 읽을 수 있다. 또한 오늘날의 국기를 누가, 왜, 어떤 과정을 통해 제작했으며 과거에는 어떤 역할을 했는지, 태극기가 담아내는 전통과 문화, 역사의 흔적을 살펴본다. 전기 없이는 살 수 없는 현대에 전기가 들어오기 전 사람들의 삶과 처음 전기가 도입되었을 때의 반응을 살피고, 전기가 조선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알아본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사람들이 사물마다 품고 있는 기원에 기울인 관심의 방식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으로 총 열두 가지 주제의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저자 프로필


저자 소개

편자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규장각은 조선의 22대왕 정조가 즉위한 해(1776)에 처음으로 도서관이자 왕립학술기관으로 만들어져 135년간 기록문화와 지식의 보고寶庫로서 그 역할을 다해왔다. 그러나 1910년 왕조의 멸망으로 폐지된 이후 그저 고문헌 도서관으로서만 수십여 년을 지탱해왔다. 이후 199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으로서 자료 정리와 연구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창설 230년이 되는 지난 2006년에 규장각은 한국문화연구소와의 통합을 통해 학술 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국보 지정 고서적, 의궤와 같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 유산, 그 외에도 고문서·고지도 등 다양한 기록물을 보유하고 있어서 아카이브 전체가 하나의 국가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문헌에 담긴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그동안 한국학 전문가들이 모여 최고 수준의 학술연구에 매진해왔다. 최근에는 지역학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 한국학의 세계화, 그리고 전문 연구자에 국한되지 않는 시민과 함께하는 한국학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학술지 『한국문화』『규장각』『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등을 펴내고 있으며 <한국학 자료총서>(총3권) <한국학 연구총서>(총18권) <한국학 모노그래프>(총40권) 등을 펴냈다.

기획 - 황재문

목차

규장각 교양총서를 발간하며
머리글|조선의 사물에서 듣는 옛사람들의 이야기

1장 건축, 조선의 일상을 담는 그릇
_한옥의 역사와 전통 | 전봉희·서울대 건축학과 교수
2장 책판에 새겨진 유구한 세월, 활자와 이미지의 향연
_서적 간행의 도구와 방법들 | 조계영·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3장 책상머리 맡에서 만들어진 수차, 그 숱한 노력과 실패의 역사
_수차와 벼농사 | 문중양·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4장 지옥의 풍경, 옥獄에서 펼쳐진 고통의 낱낱
_조선의 감옥과 형구 | 심재우·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문학부 교수
5장 전통 무기, 전투력의 극대화를 구현하다
_전근대 한국의 무기 | 노영구·국방대 군사전력학부 교수
6장 옷과 꾸밈에 투영된 사대부들의 욕망
_조선의 복식과 장신구 | 조희진·안동대 민속학과 강사
7장 문양 하나, 도상 하나가 담은 반평생 과거급제의 꿈
_조선 사람의 과거와 함께했던 물건들 | 박현순·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8장 역사의 소리를 품은 악기들, 마음을 움직이다
_조선의 악기 | 송지원·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
9장 무구巫具, 액운을 떨치고 길한 운세를 기원하다
_조선의 기복 도구 | 최진아·한국학중앙연구원 문화와종교연구소 객원연구원
10장 국기의 탄생, 태극기에 담긴 상징과 저항의 역사들
_태극기의 기원과 역사적 맥락 | 목수현·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11장 소리·빛·속도, 조선의 앞길을 밝히다
_전기·전화·철도로 달라진 구한말 서울의 일상 | 윤대원·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12장 만물의 기원, 그리고 도구의 기원
_사물의 기원을 탐색한 조선의 전통 | 황재문·규장각한국학연구원 교수

참고문헌 및 더 읽어볼 책들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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