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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여성의 일생 상세페이지

책 소개

<조선 여성의 일생> “우리는 조선시대 여성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가?
혹 안다 하여도 그것이 과연 실상에 부합하는 앎인가?”


역사, 그 절반은 여성의 몫이었다. 하지만 기록의 역사나 기억의 역사에서는 그 몫이 제대로 조명되지 못했다. 조선의 여성은 단군신화의 웅녀처럼 ‘참을 인忍’ 하나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고구려 신화 속의 유화 부인처럼 자식을 성공시킨 어머니를 꿈꾸며, 백제 사람 도미의 아내처럼 일편단심 남편을 사랑하는 여인이었다. 알다시피 조선시대 여성에 관한 지식과 정보의 대부분은 남성들에 의해 구성되고 전달되었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내처럼 나를 돕는 존재거나 기녀처럼 내 사랑의 판타지를 투사할 존재거나, ‘공식적인’ 조선 여성에는 남성의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이 책은 기록 밖으로 밀려나 기억 저 편에 존재했던 여성들, 그 일상을 새로운 상상으로 일구어낸다. 남성들의 유흥에 동원된 기녀에서 최고 지성의 저술가에 이르기까지, 생존과 생활의 노동으로부터 한 치도 벗어나지 못했던 보통 여성에서 화가·음악가로 예술의 경지를 개척한 전문가에 이르기까지. 유교적인 가족 의례를 주체적으로 실천한 여성에서 그 가족 문화를 벗어나 새로운 삶을 개척한 불교승에 이르기까지…… 저자들은 이 다양한 여성들이 가졌을 법한 아픔과 고통, 그녀들이 누렸을 법한 기쁨과 성취감에 주목했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쉬지 않고 일하되 일한 티 내기 없기. 절로 산으로 떼 지어 몰려다니며 놀기 없기. 기쁘거나 슬프거나 섭섭하거나 노여워도 겉으로 내색하기 없기. 두 번 이상 시집가기 없기. 알아도 아는 척하기 없기. 있어도 없는 듯 자기 주장하기 없기. 할 말 많아도 말하기 없기. 질투하기 없기. 책 펴놓고 공부하기 없기…… 조선의 아버지들은 딸들에게 이러한 주문을 했다. 양반집 마님의 행장이나 선비 집 아내의 제문 등에는 이렇게 살다 간 여성을 기리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면 텍스트가 말하지 ‘않은’ 것 또는 말하지 ‘않으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하지 말라!’든가 ‘하기 없기!’라는 금지 용법은 ‘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 언설이다. 실제로 밥 짓고 베 짜는 일 모르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여자들이 많다는 세태가 고발되기도 하고, 돈 좀 모은 여자들의 기세등등한 태도와 그에 눌린 남자들의 각성이 촉구되기도 했다. 또 왕의 조정에서는 ‘꽃이 피었네’ ‘부처가 오셨네’ 하면서 강으로 산으로 몰려다니는 여자들로 골치를 앓기도 했다. 이처럼 자기 욕망과 이해에 충실하여 남자들을 긴장시킨 부류의 여성들도 있었다. 여성의 행위를 금지하는 언설과 여성의 세태를 우려하는 담론은 조선시대 여성들의 사실(혹은 진실)이 하나가 아님을 말해주는 지표이다.
조선 사회 여성들의 진실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고자 할 때, 복수성·다양성의 개념은 의미 있는 매개가 된다. 예나 지금이나 놀고 싶은 욕구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규방이라는 곳은 여성 유폐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여성만의 독자적인 공간이기도 했다. 한 패의 여성들은 외출과 노출, 놀이의 금제禁制에 반항하듯 규방 밖에서 보란 듯 놀이를 즐겼다. 그녀들은 광대를 앞세워 흥을 돋우며 시끌벅적하게 거리를 활보했고, 구경거리가 떴다 하면 몸종을 앞세운 사족 여성들이 누구보다 먼저 달려 나갔다. 규방 밖의 놀이가 체제 대항적인 의미를 지녔다면, 규방 안의 놀이는 체제 순응적이거나 체제를 비껴간 형태의 놀이였다. 규방 안의 여성들은 티 내지 않고 깨가 쏟아지도록 소곤소곤 노는 방식이었다. 어디 우리가 상상이나 했던가?
이 여성들이 없었다면 ‘조선은 로맨스 없는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남성 문사文士들에 의하면 기생은 사랑을 먹고 사는 ‘특별한’ 존재이다. 하지만 기생의 입장에서 본 기생의 진실은 사랑을 팔고 사는 직업인에 가깝다. 그녀들은 남성들의 판타지를 충족시켜야 하는 직업상의 의무로 남성 손님의 취향과 요구를 반영한 사랑노래를 주로 불렀다. 기생이란 동경이나 연민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전근대를 살다간 힘없는 민중의 한 부류일 뿐이다. 또 기생을 통해 성애와 신분 상승 사이에서 갈등했던 조선 양반의 이중적 모습을 읽어내기도 했다.

규중을 지배한 유일한 문자, 한글
조선시대에 한글은 여성의 문자였다. 여성들은 한글 세계에서 놀아야지 한문세계로 넘어오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편지를 보낼 때 발신자나 수신자 중 어느 한쪽이라도 여성일 경우 모두 한글이 공식 문자가 되었다. 여성들은 한문을 알아도 한글을 써야 하고, 한문으로 된 책을 읽고자 해도 한글로 된 책을 읽어야 하는 언어적인 차별을 당해야만 했다. 왕실을 중심으로 한 여성들의 교양을 위하여 수많은 책들이 한글 전용으로 번역되었다. 50책이 넘는 『조야회통朝野會通』 『조야기문朝野奇聞』 『조야첨재朝野簽載』 『정사기람正史紀覽』 등의 역사서를 비롯해 한시선, 한문소설 등이 하나씩 한글로 옮겨졌다. 왕실 여성의 견문을 넓히기 위해 중국 여행기인 한글본 연행록도 궁중으로 들어왔다.
김호연재의 『호연재유고浩然齋遺稿』 등 여성들이 남긴 시집을 보면 오직 한글로만 표기되어 있다. 한시 원문조차 한글로만 표기되고 어려운 단어만 간혹 한글로 간략한 주석을 달아놓았다. 남성조차 여성과 함께 한시를 향유하고자 할 때는 한문보다 한글을 우선시했다. 한글로 번역된 여성의 시집에는 원문이 잘못 필사되거나 음이 잘못 표기된 경우가 상당수 발견된다는 점을 볼 때, 한글로 된 문집을 읽는 이들이 한문 원문 자체에는 큰 관심이 없었고, 그저 한시를 우리말로 한번 읊조리고 다시 그 풀이를 읊조리는 방식으로 향유되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한시의 한글 번역본을 읽으면서 조선후기에 이르러 점점 한시가 대중적인 장르가 되면서 한시 짓는 일에 가담하는 여성이 많아졌다. 또 한시를 활용해 퍼즐을 즐기는 놀이책도 많이 등장했다. 『규방미담』은 여성이 놀이로서 한시를 즐길 수 있게 만든 일종의 오락서다. 『규방미담』에는 「귀문도龜文圖」와 「직금도織金圖」와 같은 선기도璇璣圖를 여러 종 삽입하고 있다. 빙글빙글 돌려서 읽는다 하여 선기도라고 한다.(본문 참조)

글 잘 쓰거나 학문 잘하는 게 수치였던 시대, 문필을 날렸던 여성들
김운이라는 여성이 있었다. 18세기의 대문호 김창협의 딸이다. 대학자인 아버지와 삼촌들로부터 ‘학자’로 대접받던 이 여성은 아버지에게 자기 묘지명을 지어달라 부탁한다. “달리 이름을 후세에 남길 방법이 없는 여성의 몸이니, 아버지보다 먼저 죽어서 아버지의 묘지명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더 나은 일일 것”이라면서 말이다. 기록의 주체로 활동하는 일과 자신을 드러내는 일이 원천적으로 봉쇄된 상황에서 때로 자기 이름 남기기에 대한 욕망은 이토록 처절했다.
강정일당과 임윤지당 같은 인물도 이름에 대한 욕망을 드러냈다. 둘 다 조선의 여성 성리학자로 꼽을 만한데, 강정일당은 “아무리 여성이라도 무슨 일인가 이룰 수 있다면 성인聖人에 도달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남편에게 주장한다. 그녀는 남편의 ‘엄한’ 스승 노릇을 하며 학자로서의 삶을 살다 갔다.
하지만 ‘천재’ 여성들이 이름 드러내길 좋아했던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알려질까 두려워하고 위협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남들이 집안을 비난할까 의식했기 때문이다. 서영수합이 그런 경우로, 그녀는 저 유명한 홍석주·홍길주·홍현주 삼형제의 어머니였다. 시재가 남달라 종종 시를 지었고, 자식들이 편집·인쇄해서 책으로 나왔다. 그런데 그녀는 시를 짓게 된 것이 “남편의 강요에 의해서였고, 시를 짓게 되더라도 입으로 읊어 응했을 뿐 붓을 들어 기록하는 일은 절대로 하려 하지 않았다”고 밝혀놓았다. 여성의 문필이 금기시되던 당시 당당히 내놓는 것은 부덕不德이었기에 감춘 것이다.
한편 선조대의 이옥봉이란 여성은 빼어난 글 솜씨 때문에 결국 남편에게 버림받고 만다. 이옥봉은 16세기 후반 옥천군수를 지낸 이봉의 서녀로 태어나 워낙 뛰어난 재주로 부친을 여러 차례 놀라게 했다. 이옥봉은 서얼 처지의 신분을 인식하고 자기에겐 제대로 된 혼처가 없을 것을 알아 남명 조식의 제자인 조원이란 인물의 소실로 들어갈 것을 자청했다. 이옥봉이 그의 소실을 자청한 이유는 조원의 문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원 정도라면 자신의 시재詩才를 충분히 인정해줄 것이라 생각했다. 남편을 스스로 선택한 것은 파격 중의 파격이다. 그런 남편이었기에 이옥봉은 조원을 많이 사랑했다. 그런데 어느 날 이웃 아낙이 찾아와 자기 남편의 누명을 벗겨줄 소장訴狀을 써달라고 부탁한다. 이옥봉은 시 한 수를 써서 소장 대신 제출했고, 이를 본 현감은 누명임을 알고 그 아낙의 남편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있은 뒤 조원은 시로써 송사를 해결하려 했으니, 다음에는 조정의 일까지 간섭하지 않겠냐는 이유로 그녀를 버렸다.
송시열과 그 제자들이 5만원권의 신사임당을 만들었다
16세기 노론계의 영수였던 송시열은 조선이란 나라의 기틀을 다잡은 인물로 추앙받곤 한다. 하지만 그가 만든 나라는 여성에겐 경직된 사회 그 자체였고, 그가 만든 이데올로기는 후대까지 뿌리 깊게 지배한다. 이 책에선 그 희생자의 대표적인 예로 신사임당을 꼽는다.
중국에서 명성을 떨쳤던 소세양이란 시인이 신사임당 그림에 시를 집어넣은 것만 봐도 당대 사임당의 그림 솜씨가 얼마나 인정받았는지 알 수 있다. “꽃다운 그 마음 신과 함께 열렸나니, 묘한 생각 맑은 자취 따라잡기 어려워라(사임당 그림에 대한 소세양의 시).” 조선전기의 정사룡이나 이이의 스승으로 알려진 어숙권 역시 화가 사임당의 능력을 인정하고 부각시켰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신사임당 그림에 대한 평가가 정통 유학파를 자처했던 송시열과 같은 이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는 점이다.
송시열의 반격, 혹은 ‘신사임당 만들기’ 프로젝트는 곧 조선 사대부사회를 지배한다. 송시열 역시 사임당 그림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사임당의 그림이 완전한 전문가의 솜씨여서 여자의 작품 같지가 않다고 했다. 글이든 그림이든 여자의 것은 아마추어 수준에 머물러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면 여자의 본래 임무를 방기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송시열은 소세양 등의 시에서 “묘한 자취” 등의 표현을 문제삼으며 부인의 그림에 외간남자가 ‘무례하기 짝이 없는’ 짓을 했다고 비판한다.
이러한 송시열의 언급 이후 사임당은 송시열의 문인인 18세기 노론 계열의 인사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담론화되었다. 그녀의 그림에 대해 언급한 이들은 김진규(1709), 신정하(1711), 송상기(1713) 등이다.
김진규는 최초로 사임당의 그림을 『시경』의 「초충」과 연결지었다. “고대 성모聖母들의 가르침을 잇고 있으니 여사女士의 일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사임당의 그림들은 『시경』 및 고대 성인들의 가르침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진실’이 만들어졌다. 송상기는 더 나아간다. “부인의 정숙한 덕과 아름다운 행실은 지금껏 이야기하는 이들이 부녀 중의 으뜸이라고 일컫기도 하는데, 하물며 율곡 선생을 아들로 둔 것임에랴.” 이것은 해석하면 “율곡이 없으면 곧 신사임당도 없다”는 것이다. 이외에 김창흡, 조귀명, 신경 등 사임당 그림에 대한 담론의 생산과 유통은 율곡을 추숭한 노론 계열 학인들에 의해 폐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징검다리를 밟아가듯 하나하나 증거를 제시하며 복원하고 있다. 신사임당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정말 놀랍기 그지없다.

효녀와 열녀? “평생 시집식구 속물근성 감당하기 어려웠다” 고백
『자경편自警篇』을 저술하기도 했던 사대부 부인인 김호연재가 아들에게 자신의 속내를 털어놓은 것을 보면 사회적으로 드러나지 않았던 조선 여성의 속마음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평생 나 홀로 속물스런 구석 없어, 너희 댁과는 기쁘지 못한 일이 많았다 / 눈썹을 낮추고 조심하여 수고를 감내했으나, 부지중 창자 속에 불길이 솟곤 했다.” 즉 평생 시집식구 속물근성을 감당하기 힘들었다는 조선 여성의 고백인 것이다. 사실 김호연재보다는 밀가루 반죽 덜어내듯이 허벅지를 베어내 병석의 남편에게 먹이고, 남의 손이 닿은 자신의 가슴을 도려내고 손목을 자르는 열녀 이야기가 우리에겐 더 친숙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에 실린 조선의 대표적인 화가 허련의 「채씨 효행도」라는 그림을 볼 필요가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유의 그림이 숱하게 그려졌다. 이 책에 실린 그림(31쪽)은 허련 가문 대대로 전해오는 것인데, 거기에 증손자가 쓴 제題를 보면 이런 그림이 조선 여성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알 수 있다. 일부를 인용하면 이렇다. “혹자가 물었다. ‘효열이 그림으로 그릴 수 있는 것인가?’ … 가장이나 읍지에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오랜 세월 전해져 사라지지 않을 터인데, 어찌 다시 그림으로 그릴 필요가 있겠는가.’ ‘부인네들과 어린 아들을 위해서이니 집안의 정치는 언제나 부인네들과 아이들에게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정말로 우리의 부인들과 아이들이 아침저녁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그 모습을 보며 아무개 고모가 몸소 부엌일을 하고 자신으로 대신해줄 것을 하늘에 기도하고 가진 재물을 다 내주고 남편의 죽음을 뒤따랐다고 되뇌며 안타까움과 격앙을 보여 사람의 선한 감정을 자극시켜준다면 이 그림이 갖는 의미를 어찌 간과할 수 있겠는가.” 즉 조선의 남성 화가들이 효행도를 그렸던 이유는 여성들에게 그런 실천의 지침을 마련해주기 이한 것이었다.
여성이 할 일을 지침으로 남겼던 여러 학자들 가운데 이덕무의 『여사서언해』는 조선의 보편적인 남성의 사고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 대목을 보자. “일하지 않는 편안함은 몸에 상처를 입히는 예리한 칼과 같은 것이다. 비록 그 칼날이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심청전』에 나오는 곽씨 부인은 남편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삯바느질에 빨래, 염색, 출장요리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손톱 발톱 잦아지게 품을 팔아서 돈을 모은다. 그리고 돈을 모은 뒤에는 ‘이자놀이’를 해서 돈을 불려 제사를 모시고 남편을 먹이고 입힌다.
가끔은 이런 데 대한 불만을 품은 여성의 탄식이 터져나오곤 했다. 가령 「여자탄식가」라는 글에선 너무 힘들었던 삶을 토로한 여성의 심정이 잘 드러난다. “…가는 허리 부러지고 열 손가락 다 파여서 (…) / 여자몸이 죄가 되어 유구무언 말 못하고 / 구곡간장 타는 불을 속치부만 하자 하니 / 사사이 생각하니 그 아니 분할손가.”

떼 지어 몰려다닌 여성들, 불사와 음사
조선은 나라를 세우면서 규방 여성에 대해 길을 나다니는 것, 얼굴을 내놓는 것에 대해 제재를 가하는 일을 급속히 추진했다. 원래 조선 초기의 양반 여성들은 평교자를 타고 다녔다. 사방이 트인 가마였다. 하지만 곧 3품 이상의 정실부인은 평교자를 탈 수 없도록 규정했다. 가마의 사면을 부축하는 종들과 옷깃을 스치고 어깨를 비비게 되어, 흉허물 없이 가까워진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때 평교자를 금하는 논의에서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는데, 즉 태종 때 3품 이상의 정처가 아닌 경우는 평교자 대신 말을 타도록 했다는 점이다. 오히려 여성에게 의도치 않게 자유로움을 준 것이다. 더욱이 다른 한편에서는 걸어다니는 여성들이 있어 문제가 되었다. 평교자를 타지 말라는 조치가 내려오자 사대부의 아내나 사족의 딸들은 길을 걸어다녔다. 이는 평교자를 타지 말라고 했지 걸어 다니지 말라는 말은 없었으니 여성의 입장에선 잘못된 일도 아니었다. 국가에서 ‘천한 사람들, 특히 남성’과 접촉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이 오히려 스스로 길을 활보하도록 만들었다.
특히 조선 여성의 자유로움은 불교 행사와 관련해서 살펴볼 수 있다. 태종 4년부터 부녀자의 절 출입을 엄금하는 조처가 내려진다. 하지만 부녀자가 사찰에 출입하는 일은 조선시대 내내 완전히 차단되지 못했다. 세종 16년에는 양주에 있는 회암사가 수리를 위한 불회를 열어 사대부의 아내, 여승, 부녀자들이 서로 구경하고자 몰려들어 또 하나의 사건이 되었다. 이때 3명의 중이 무애희無??를 시작하자 부녀자들이 시주라면서 옷을 벗어주어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일에 대해 왕은 대부분 “부녀자들이 사리를 모르고 그랬다”는 식으로 처벌을 피했다. 불가피할 경우라도 곤장 형벌을 내린 뒤 속전을 거두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유교가 지배하는 사회 곧, 유교라는 질서와 규범에 맞게 살아가는 것이 문명화된 징표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여성들은 불교를 믿으며 불교식 제사를 지내고, 불교 행사를 만들고 참여했다. 실록에는 여성에 대한 규제 조항을 둘러싸고 조정에서 벌어진 숱한 논의가 담겨 있다. 이는 곧 그 규제가 쉽게 관철되지 않았음을 입증한다.

‘기녀’와 ‘규수’에 가려진 노동하는 여성들
조선시대 여성 관련 자료에서 가장 많이 발견하는 것은 노동하는 여성들이고, 어떤 경우에는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이었다. 노비들을 거느린 양반 여성에서부터 가난한 선비의 아내에 이르기까지 하루 종일 일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길쌈, 바느질, 염색, 이자놀이, 출장요리, 농사일 등 안 하는 게 없었다. 그래도 먹고살기는 쉽지 않았다. 남편들이 돈을 벌어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김춘택金春澤(1670~1717)은 제주도에 귀양 가서 해녀를 만나 문답을 나눈 뒤에 이를 「잠녀설潛女說」이라는 글로 남겼다. 해녀는 전복 따는 일의 어려움을 묻는 김춘택에게 전복 따는 일도 어렵지만 그보다는 전복을 사는 일이 더 어렵다고 이야기한다. 해녀는 전복을 따서 세금으로 공납하고, 부족한 공납을 충당하기 위해 다시 전복을 사들여야 하는 기막힌 사정을 이야기한다. 부패한 공납제도의 폐해를 짊어진 것도 ‘적어도 절반은’ 여성들이었다.
이렇게 남편과 자식들을 먹여 살리고, 경제활동을 하는 여성들의 모습은 다름 아닌 ‘생계부양자’이며, 나아가 국가경제의 근간을 생산하는 노동 주체였다. 그럼에도 조선시대 여성들의 경제활동은 가려지고 평가절하되어왔다.

규중에서도 깨가 쏟아지게 노는 방법
시모임이나 노래 감상 등은 조선시대 여성들의 대표적 놀이다. 그러나 이것은 교양과 취미를 바탕으로 즐길 수 있는 것이고, 투호처럼 던지는 놀이는 일정한 수준의 운동능력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학습 없이 방 안에서 그냥 할 수 있는 규방의 놀이 문화도 있었다. <규문수지여행도閨門須知旅行圖>나 <종정도從政圖>라는 놀이판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둘은 마치 윷놀이와 같이 방식으로 진행하는 놀이이다. <규문수지여행도>는 인현왕후의 유품이 남아 있는데, 이 놀이판에는 당대 여성들에게 요구되던 덕성의 종류, 본받을 만한 여성의 이름과 닮지 말아야 하는 여성의 이름이 적혀 있다. 그중 눈에 띄는 부정적 이름으로는 정난정(鄭蘭貞, ?~?)이 있다. 그녀는 윤원형(尹元衡, ?~1565)의 첩이었다가 본처를 쫓아내고 스스로 정실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인현왕후 본인도 장희빈(?~1701)에 의해 폐비가 되었다가 훗날 다시 왕비로 복귀했던 여성임을 생각해보면, 그녀의 말이 정난정 이름 위에 놓였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궁금하다. <종정도>는 벼슬의 높고 낮음을 응용하여 만든 놀이로, 부녀자 및 남자 아이들의 놀이였다.

박제가의 방에 13살짜리 기생을 넣어준 박지원- 이것이 기생의 현실
“무정할손 저 낭군아 홍안박명 어이 하리 / 속절없다 이별이야 남은 간장 다 녹는다 / 언제나 우리 낭군 다시 만나 이생 인연 이어볼까”
이 시는 미국 버클리대학에 소장된 『염요艶謠』라는 책에 나오는 시다. 노랫말만 보면 애끓는 한 여인의 정한이 가득하다. 헌데 이 작품이 쓰여진 곳은 규중의 깊은 곳이 아니다. 당시 서울에서 온 관리들의 이별 잔치에 공주 기생들이 대거 불려갔다. 관리들은 기생을 모아놓고 백일장을 벌였는데, 이별을 주제로 하여 시조 가사를 짓게 하고는, 선비들의 과거시험처럼 기생 작품에 등수까지 매겼다. 위의 인용은 최우등으로 뽑힌 기생 형산옥의 가사의 뒷부분이다. 과연 이런 상황을 알고도 시에 몰입할 수 있을까. <사랑 타령일랑 집어치워라> 편을 집필한 정병설 교수는 “황진이의 시조도 이런 백일장에서 지은 시조처럼 공개된 장소에서 불린 노래일 가능성이 높다. 감정을 내밀히 드러낸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빼어난 말솜씨를 과시한 것이다”라고 지적한다. 어떤 시조가? 바로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 베어다가”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조를 두고 한 말이다. 정 교수는 기생은 결코 사랑만 찾는 사람들이 아니었다고 힘주어 역설한다. 조선후기 서울 기방의 풍속을 보면 처음 손님 앞에 나온 기생들은 혹독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여성이 가장 부끄러워하는 곳을 여러 남자에게 보이게 했는데 그런 상황에 익숙해지도록 반복해서 시켰다. 손목 한번 잡혀도 정절을 잃은 것으로 간주되는 조선사회에서 이는 “스스로를 짐승으로 여기기에” 충분한 조건이다. 심지어 연암 박지원조차 안의 현감으로 있는 자신을 찾아온 벗 박제가에게 열세 살짜리 기생을 데리고 자게 했다.

안채 접근금지와 안방물림의 전통
조선시대 남녀 역할 구분은 주거 공간의 분리라는 형태로도 나타나는데, 전통 가옥에서의 사랑채와 안채가 바로 그것이다. 전통 가옥에서는 가장이 거처하는 사랑채와 주부의 영역인 안채를 중심으로 남녀 주거 공간을 분리하여 일상적 왕래를 엄격히 통제했다. 심지어 남편조차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여 대낮이 아닌 어두운 밤에 협문을 통해 안채로 드나들곤 했다. 그런가 하면 사랑채를 방문한 외부 방문객이 안채를 들여다볼 수 없도록 중문 앞에 ‘내외담’을 설치해두기도 했다.
여성전용 공간으로서 안채의 핵심은 ‘안방’이다. 그리고 안방의 주인은 주부권을 보유하고 있는 안주인, 이른바 ‘안방마님’이다. 그러나 기혼 여성이 안방을 차지하기까지는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지역에 따라 두 가지 유형이 나타나고 있다. 첫째는 시어머니가 숨을 거두고 나서 안방을 물려받는 것이고, 둘째는 며느리가 아들을 낳은 후 물려주는 경우다. 전자는 ‘사후양도형’이라고 하여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으며, 후자는 영남지역에서 주로 나타나는 이른바 ‘안방물림’이다.
‘안방물림’을 하기 위해서는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댁 식구들의 눈치를 살피면서 고단한 일상을 감내해야 하는데, 이후 아들을 출산함으로써 시어머니로부터 주부권을 물려받게 된다. 이로써 며느리는 안살림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보유한 주부로서의 확고한 지위에 오르는 것이다


저자 프로필


저자 소개

편자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규장각은 조선의 22대왕 정조가 즉위한 해(1776)에 처음으로 도서관이자 왕립학술기관으로 만들어져 135년간 기록문화와 지식의 보고寶庫로서 그 역할을 다해왔다. 그러나 1910년 왕조의 멸망으로 폐지된 이후 그저 고문헌 도서관으로서만 수십여 년을 지탱해왔다. 이후 199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으로서 자료 정리와 연구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창설 230년이 되는 지난 2006년에 규장각은 한국문화연구소와의 통합을 통해 학술 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국보 지정 고서적, 의궤와 같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 유산, 그 외에도 고문서·고지도 등 다양한 기록물을 보유하고 있어서 아카이브 전체가 하나의 국가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문헌에 담긴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그동안 한국학 전문가들이 모여 최고 수준의 학술연구에 매진해왔다. 최근에는 지역학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 한국학의 세계화, 그리고 전문 연구자에 국한되지 않는 시민과 함께하는 한국학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학술지 『한국문화』『규장각』『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등을 펴내고 있으며 <한국학 자료총서>(총3권) <한국학 연구총서>(총18권) <한국학 모노그래프>(총40권) 등을 펴냈다.

기획 - 이숙인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저서 『동아시아 고대의 여성사상』, 역서 『여사서』 『列女傳—중국 고대의 106 여인 이야기』 외 다수.

목차

제1부 조선 여성의 재발견
1장 사라진 목소리를 찾아서
- 조선 여성의 삶, 다시 보고 다시 읽기 | 박무영·연세대 국문과 교수

2장 화가와 현모, 그 불편한 동거
- 신사임당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이숙인·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3장 고통을 발판 삼아 피어난 지성
- 조선 여성 지성인들의 계보 | 이혜순·이화여대 국문과 명예교수

4장 숨은 일꾼, 조선 여성들의 노동 현장
- 베 짜기에서 삯바느질, 이자놀이에서 출장요리까지 | 김경미·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5장 사랑 타령일랑 집어치워라
- 기생의 삶, 그 냉혹한 현실 | 정병설·서울대 국문과 교수

6장 금하고자 하나 금할 수 없었다
- 여성을 통제한 결과로 나타난 아이러니 | 정지영·이화여대 여성학과 교수

제2부 조선 여성, 그 삶의 현장
7장 여성에게 가족이란 무엇이었나
- 상식과 다른 조선의 혼인과 제사 규칙 | 김미영·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8장 여학교는 없었다, 그러나 교육은 중요했다
- 가문의 영광을 비추는 거울 만들기 | 한희숙·숙명여대 사학과 교수

9장 규중을 지배한 유일한 문자
- 번역소설에서 게임북까지, 여성의 문자생활과 한글 | 이종묵·서울대 국문과 교수

10장 믿음의 힘으로 유교적 획일화에 맞서다
- 조선 여성의 신앙생활: 불교를 중심으로 | 조은수·서울대 철학과 교수

11장 조선 여성들의 로맨스
- 문학 속의 사랑과 규범: 밀회에서 열녀의 탄생까지 | 서지영·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12장 조선 여성 예술가의 탄생
- 시와 노래로 승화된 영혼 | 송지원·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13장 여성의 눈으로 읽는 여성들의 놀이
- 깨가 쏟아지는 규중의 취미생활 | 조혜란·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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