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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문가의 일생 상세페이지

인문/사회/역사 역사

조선 전문가의 일생

규장각 교양총서 4
소장종이책 정가23,000
전자책 정가25%17,300
판매가17,300

조선 전문가의 일생작품 소개

<조선 전문가의 일생>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전문직은 무엇인가
전문가가 되는 방법은 무엇이며 무슨 일을 했는가
조선시대 전문가들의 내밀한 삶은 어떠했는가

훈장부터 일수쟁이까지 조선의 사회·문화·경제를 지탱한 전문가들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화려한 도판과 희귀 자료로 만나보는 장인들의 삶, 그 경이로움


조선은 신분제 사회였다. 왕과 양반이 정치적 주도 세력으로 활동했다면 나머지 대다수 사람들은 사회 전 영역에서, 양지에서 혹은 음지에서 자신에게 부과된 일을 하며 살았다. 사람을 가르치는 일로부터 집을 짓는 일까지,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일로부터 사람의 마음에 위안을 주는 일까지, 이들이 평생 일구어간 일은 다양했다. 이들에게 부과된 것은 ‘신분’이면서 ‘직업’이고, ‘일’이면서 ‘삶’이었다.
조선의 전문가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자신만의 전문 영역에 대해 글로, 기호로, 혹은 작품으로 평생 자취를 남겼다. 혹 그 스스로가 직접 기록할 수 없는 경우라면 관련 분야의 기록들이 이들의 삶을 대신 드러내주었다. 이 책에서 조선 전문가의 일생에 대해 탐색해보고자 한 것은 다양한 직종에 종사하면서 조선을 살 만한 곳으로 윤기 낸 사람들의 전문가로서의 삶을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전문가가 되기 위한 피나는 노력, 굉장히 세분화된 업무의 시스템부터, 전문가들 사이의 경쟁, 각 직업의 사회적 위상을 만나볼 수 있다. 특히 훈장, 의원, 승려 등 몇몇 직종은 우리의 고정관념을 벗어나는 실체를 드러내주고 있어 주목된다.

“입으로 밭갈이하는 무리”
너무나 불우했던 군사부일체 사회의 버팀목


‘조선조 교사와 훈장의 삶’에서는 군사부일체 사회의 버팀목이었지만 불우한 삶을 살았던 조선시대 선생들의 현실을 묘사했다. 군사부일체란 스승은 임금과 아버지의 위치와 같다는 유교사회의 이념이다. 헌데 19세기 대구 지역의 한 훈장의 일화는 이 말을 무색케 한다. 그는 밀린 1년치의 삭료를 받으러 제자의 집에 찾아갔다가 아비 되는 여 첨지 등에게 곤욕을 치렀다. “이 양반이 물정 모르는군. 천 리 행상으로도 빈 채찍으로만 돌아오고 일 년 머슴을 살고도 빈손으로 가는 터에 생원 문자가 그 값이 얼마기에 갑오년의 모립毛笠 값이요?”라는 모욕을 듣고 돈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절박한 사정을 관아에 호소해야 했다.
조선조 훈장들은 스스로를 ‘설경舌耕’이라고 불렀다. 입으로 밭갈이하는 무리라는 자조의 넋두리다. 각 향교에 파견된 교수관은 종6품의 문관직으로 매우 높은 직급이었으나 실상은 사람들이 기피하는 춥고 배고픈 직임이었다. 특히 서당 훈장은 피폐한 생활을 해야 했고 조선후기 몰락 양반들이 몰려들면서 ‘교직은 가장 천한 직업[至賤至任]’이라는 말까지 들어야했다.
필자 정순우 교수는 이렇게 된 이유를 관학육성책의 연속된 실패와 제도적 시스템 및 행정체계에 대한 조정 신료들의 무지함에서 찾고 있다. 태조 때부터 한말까지 조선의 ‘선생 만들기’의 실패과정이 낱낱이 드러나면서 조선사회의 모순적인 구조가 밝혀지며, 떠돌이 ‘유랑 훈장’의 실례 등 우리가 알지 못했던 훈장들의 상과 씁쓸함을 느끼게 하는 대목들도 숱하게 등장한다.

왕의 소유에서 전문가 소유로 발전해간 천문역산
역서易書 팔아서 생계유지


‘조선의 천문 역산가’에서는 ‘하늘의 메시지’를 별자리를 통해 해독하는 전문직 ‘천문학’ 관원들의 구체적인 구성과 임무를 다루었다. 사계절의 변화에 민감한 농경사회에서 천문과 역은 매우 중요했으며 삼국시대부터 정부 내에 그것을 전담하는 전문직이 제도화되었다. 그 기원은 사마천의 『사기』 「천문서」인데 일월오성의 운행과 궤도 등에 대한 천문학 상수와 계산치들을 정리해놓았다. ‘천상天床’이라는 별자리를 불길한 별인 객성이 스치면 황제의 신변에 위험한 일이 일어날 것을 말해준다는 식이다. 하늘의 메시지를 읽는 천문은 제왕학의 일부였고, 조정 내의 천문역산가는 왕을 대신해서 일월오성의 운행을 계산해 역서를 간행·반포하는 정부 내 전문가 집단이었다.
조선의 관상감은 직제상 30여 명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제 인원은 130명이 넘는 거대조직이었다. 상위는 녹봉을 받았지만, 하위직 관원들은 먹고살기에도 빠듯했다. 관상감의 천문학 부서 관원들이 일상적으로 맡았던 중요 업무는 역서 편찬과 간행, 천변재이의 관측과 보고, 일월식의 예보와 구식례救蝕禮 등이었다. 쉽게 말해 정부에서 매년 배포하는 ‘달력’을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했다. 오늘날의 달력은 간단하지만, 이때의 일과력日課曆은 1년 동안의 날짜와 길흉을 주 내용으로 담은 두툼한 책이었다. 그래서 만드는 데 꼬박 1년의 시간이 소요됐다. 조선전기에 5000부 남짓 찍었던 역서는 정조대에 오면 29만책, 고종대인 1867년에는 35만책을 간행했다. 이 중 고위층과 관아에 배포된 것은 15%를 넘지 않았다. 나머지는 관상감에서 ‘독자적’으로 처리했다. 즉 판매용이었던 것이다. 관원들은 지위에 상응하게 역서를 지급받았고, 이를 개인적으로 판매해서 생계에 보탰다. 인쇄 부수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부수를 인쇄해야하는지 머리를 맞댄 논의도 벌어졌다. 조선후기 역서의 간행 부수가 많아진 이유다. 사적으로 이득을 챙기는 자도 생겨났다. 이는 제왕학의 일부였던 절대지식 천문학이 왕의 독점으로부터 벗어나 전문지식 집단에 속하게 된 것이기도 하다. 필자 문중양 교수는 조선전기부터 후기까지 관상감 천문학 부서의 업무와 구체적인 제도적 구성, 조선후기에 이르러 진짜 전문 천문역산가들이 출현하게 된 계기 등을 상세하게 짚어보고 있다.

조선시대 의사의 경쟁자는 ‘판수’와 ‘무당’
처방전 휘갈겨 쓰고 사기·속임수 횡포도 심해


‘명의와 속의俗醫의 경계에 선 조선의 의원들’에서는 의관으로 출세하기 위한 힘든 길을 먼저 말한다. 양반과 역관의 중간에 의관이 있었다. 조선의 왕실의료는 약을 전문으로 쓰는 약의藥醫, 침을 쓰는 침의鍼醫, 종기만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종의腫醫의 식으로 세분되어 있었다. 후기에는 부인과, 소아과, 안과 등으로 더욱 분화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의학공부는 다른 어떤 공부보다 힘들었다. 경전·역사는 필수이고 진맥학, 침구학, 내과학, 본초학, 방제학 등을 통달해야 했으며 중국 의서를 교재로 썼는데 『찬도맥』 『동인경』 『소문』은 통째로 외워야 했다. 허나 이렇게 힘들게 공부해서 의관이 되어도 종6품 이상 올라가지 못했기에 양반들에게 의관은 기피 직업이었다. 조선시대 의사는 의관과 민간 의원으로 나뉘며 후자의 숫자가 훨씬 많았다. 민간 의원은 뛰어난 실력으로 단숨에 미천한 신분에서 벗어나기도 했다. 불을 달군 침을 사용하는 번침법을 고안한 인조 때의 이형익, 독특한 외과종기술을 창안한 인조 때의 백광현, 가전家傳 고약을 써서 유명해진 정조 때의 피재길 등이 그들이다. 조선시대에 여성이 전문지식으로 전문직을 갖는 경우는 의녀醫女가 유일했다. 남녀 내외를 실현하기 위해 의녀제도를 둔 것은 동아시아에서 조선이 유일했다. 허나 의녀는 여성 범죄자의 몸을 수색하거나, 연회의 취흥을 돋우는 약방기생을 겸해 전문화가 철저하지 못했다. 의원의 경쟁자는 점을 쳐서 병을 알아내고 독경으로 병을 치료하는 판수 집단과 굿을 벌이는 무당 집단이었다. 돈 많은 양반들은 주로 의원을, 돈 없는 백성들은 주로 판수·무당을 찾았다. 유만주의 『흠영』, 하멜의 조선기행문 등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선전기에는 양반들도 자주 판수를 불러 병을 점쳤다. 이는 이문건의 『묵재일기』에 나온다. 무당은 주로 두창이나 역병 등 불치·난치병에 동원되었으며 이런 굿에는 고관대작이나 왕실도 별 예외는 아니었다.
의관은 녹봉만으로는 살 수 없었기에 사적인 진료도 겸했다. 한성의 경우 의관을 비롯한 수백 명의 의원이 거주했기에 의원 사이의 경쟁이 치열했다. 조선후기로 가면 의원들의 횡포가 자주 목격되었다. 환자를 한번 휙 보고 처방전을 휘갈겨 쓰고는 한 글자도 고치지 않는 권위적인 태도(정약용), 남의 급한 때를 이용해 기만 술책으로 재물을 취하는 것(황도연), 대단히 더운 약을 쓴 뒤 효험이 나지 않으면 극히 찬 약을 투약해 행여 살아나면 능력을 과시하고, 죽었을 때는 운명으로 돌린다(이익)와 같은 지적들이 필자 신동원 교수의 글을 통해 흥미롭게 드러난다.

100년 전의 사채시장
온정적 대부자의 모습 발견돼


‘100년 전 서울의 일수장부를 엿보다’에서는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백 년 전의 시기에도 일수쟁이들이 활약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규장각에 소장된 『순봉장책』 『순봉책』 『일봉책』이 일수쟁이의 대표적인 장부다. 이 안을 들여다보면 한 면에 네 건의 일수 거래가 기록되어 있고, 건마다 대부일자, 차입자, 원금, 매일 상환할 금액, 상환 일수가 적혀 있다. 조영준 연구교수가 고지도를 참조해서 오늘날의 지도로 복원해보니 차입자들이 분포한 지역은 남대문 근처의 ‘창내장’과 ‘칠패’라는 두 시장이었다. 이들 시장의 상인들과 서민들이 주로 일수를 찍었던 단골고객이었다. 눈여겨볼 것은 이때는 이자율이 ‘20퍼센트’를 넘지 못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영조대에 반포된 『속대전』의 규율을 따른 것인데, 이러한 단서조항이 19세기 말~20세기 초까지도 작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을 오늘날의 이자율에 빗댈 순 없다. 이때에는 상환하는 기간에 따라 이자율이 현격히 달라졌는데, 그것을 평균 내보면 농촌 이자율은 연 30~50퍼센트였고, 도시 전당포에서는 최대 60퍼센트까지 적용해 엄청난 고리高利였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차입금을 제대로 갚지 못해 불량채권을 유발한 이에게 고리업자가 다시 대출을 해주기도 하며, 일부를 탕감해주는 등 전형적인 ‘온정적’ 대부자의 모습을 띠고 있다는 점이다. 즉 근대의 여명이 막 열릴 즈음, 즉 조선의 삶의 결이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이때 일수쟁이들은 하층 상인들을 동반자로서 끌어안아야 하는 존재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달문을 차지하기 위한 의금부와 군기시의 경쟁
세상 구석구석에 대하여 눈 뜬 진정한 견자見者


‘광막한 천지를 떠돌던 조선의 광대’에서는 18세기 무렵 팔도를 뒤흔든 대중 스타, 달문의 삶을 들여다보았다. 달문의 최고의 개인기는 자신의 주먹을 쭉 찢어진 입에 넣었다 뺐다 하는 것이었다. 추남이었던 그는 장가도 들지 않고 노래와 춤으로 살았는데 “아침이면 시중에 들어가 노래를 부르며 다니다가 저녁이면 부잣집 문하에 들어가 잠자면 그만이지, 한양 성중이 8만 호이니 매일 집을 바꾸어 자더라도 일생동안 다 다니지 못할 것이다”라고 호언하곤 했다.
달문은 만석중놀이와 철괴무, 팔풍무에 능했다. 만석중놀이는 인형놀이의 일종이며, 철괴무는 탈춤이고, 팔풍무는 남사당놀이 가운데 땅재주 부리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면 달문의 춤은 어떻게 묘사되고 있을까? “몸을 뒤로 젖히면 머리가 발에 닿고 배꼽이 불쑥 하늘을 쳐다보네” “온몸이 유연하여 뼈가 없는 듯 삽시간에 몸을 돌려 뒤집더니 어느새 휙 하고 바꾸어 꼿꼿이 섰다가 갑자기 넘어진다”는 감탄사가 달문의 몸을 쫓아다녔다. 땅재주를 부리는 중간에도 ‘눈을 흘기며 비뚤어진 입에서 나오는 대로 떠드는’ 입심도 대단했다고 한다. 어느 날 길을 가다가 싸움을 보고는 그 옆에서 흉내를 냈는데, 싸우던 이들이 웃느라 싸움을 멈췄다. 말하자면 그는 소속사도 동료도 없는 장안 최고의 독불장군 광대였다. 광대놀음을 의미하는 조선시대의 ‘산대 나례’는 의금부와 군기시가 좌우로 나뉘어 경쟁적으로 거행했는데, 달문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야 산대 나례의 좌우변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연예계 톱스타[上色才人]의 위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조선의 광대는 거지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았다. 실제 달문은 거지들의 왕초로 통했고, 기생들의 기둥서방을 하기도 하고, 시정에서 얻은 신뢰를 밑천으로 ‘주릅’으로 나서기도 했으며, 결국엔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팔도를 떠돌며 동가식서가숙했던 유랑인생이었다. 필자 사진실 교수는 “천민 광대로서 몸은 청계천의 거지 패거리와 함께 지내지만 재상가를 드나들며 상층의 오락 유흥에 기여했던 달문, 그 괴리를 통해서 중세적 질서와 차별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세상 구석구석 예외 없이 박혀있는 삶의 애환과 고통을 목격하고 고뇌했고, 그래서 그는 세상에 눈떠 반역을 꿈꾼 광대가 아니었을까?”라며 달문의 삶에 의미를 부여했다.

악공, 관현맹인, 무동, 기녀, 취고수, 세악수, 풍류객 총 출동
승려는 단순히 배척된 존재만은 아니었다.


‘조선의 승려, 허응당 보우’에서는 승려의 모습을, 6장 ‘조선의 음악가들’에서는 악인들의 현실을 다뤘다. 조선시대의 전문 음악가들 대부분은 기록의 주변부에 머물러 있었다. 기록에 노출된 음악가들은 그들의 비범성, 혹은 빼어난 예술성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평생을 연마한 걸출한 실력이 사람들로 하여금 기록하지 않을 수 없도록 했다. 잊혀져가는 노랫말을 기록하여 가집歌集으로 남긴 전문 음악가들도 있었다. 조선시대의 광대는 궁중 행사나 외국 사신 영접 때 잡희나 나례 등을 공연하는가 하면 전국 각지를 다니며 각종 기예로 사람들 곁에서 위안을 주었다. 그 위안은 피 나는 연마 과정을 거친 실력 있는 전문인에게 주어지는 마음의 선물 같은 것이었다.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는 억압하는 정책을 견지했던 조선에서 승려들은 배척받는 삶만 살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배척과 존중의 기로에 서 있었다. 선입견을 버리고 바라볼 필요가 있다. 필자 남동신 교수는 조선조 명종대에 불교 부흥을 주도한 보우普雨의 삶을 통해 배척과 존중의 기로에 선 승려들의 위치를 탐문했다. 율곡 이이는 보우를 가리켜 “요승”이라고 단언한 반면, 임진왜란 때 나라를 구하는 데 앞장선 사명당 유정은 보우를 “천고에 둘도 없는 지인”이라 극찬했다. 남교수는 유불을 대표하는 두 지식인이 직접 목격한 보우에 대해 상반된 평가를 내린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묻고, 그 평가의 뒤안에서 실제로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고 있다.

‘궁궐 살림을 책임진 여성 일꾼들’에서는 조선 왕실연구 권위자인 홍순민 교수가 조선시대 궁녀의 계보학을 펼쳐 보인다. 홍 교수는 궁녀라는 제도의 ABC를 확실하게 알려준다. 내명부의 의미, 그 안에서 정과 종으로 갈리는 등급의 의미, 1품부터 9품까지 소속된 궁인들의 맡은 바 소임 등을 자잘하게 거론하며 이를 도표로 제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궁녀들의 역할을 몇 가지의 대분류를 통해서 들려주는데, 비서 영역, 의전 영역, 복식 영역, 음식 영역, 접대 영역, 직조 영역, 사법 영역 등이 그것이다. 궁궐에 사는 궁녀들의 수효는 얼마나 되었을까? 태종대 시녀의 수효는 20~30명 규모였고 세종대에도 수효가 100명을 넘지 않았다. 이것이 영조대에 이르면 “600명의 궁인도 오히려 부족하다”는 기록이 발견될 정도로 늘어난다. 이 책에서는 궁궐 속 궁녀들의 위상, 월급의 종류, 하사받은 물품과 먹을거리들을 상세하게 알려주기도 한다. 상궁과 시녀에게는 각각 중미 두 되 다섯 홉, 두부콩 두 되, 단 장 네 홉, 맑은 장 한 홉 여섯 작을 줬다는 식이다. 그 외에 궁녀들의 출신 성분, 임상궁을 모델로 하여 궁녀의 인생을 살펴봄으로써 명실공히 ‘궁녀학’의 대강을 갖췄다. 시중의 궁녀 이야기 류를 통해 에피소드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이 책은 궁녀사회에 대한 제도적 이해와 그 내부의 역학관계까지 맛보게 해준다.

‘조선의 집 짓는 사람들’에서 김왕직 교수는 22종류나 되었던 조선시대 목장木匠의 세계를 세밀하게 살펴보았다. 조선사회가 건축에 투사했던 이념부터 시작해서, 건축의 기본이 되는 한옥의 설계도가 갖는 특징(이를테면 위에서 내려다본 시각과 정면 시각을 하나의 화폭에 동시에 담는 기법에 대한 설명) 등을 설명한다. 그리고 건축에 쓰이는 재료를 구하는 방법, 공급을 담당한 상인들의 실체, 이 과정에서 돈은 어떻게 오고갔는지 실질적인 측면도 들려준다. 여기엔 운송업자도 끼어든다. 무거운 목재와 석재를 누군가 날라야 했으니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목재를 엄격하게 다뤘기 때문에 이곳에서 저곳으로 옮기는 데에도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한양에서 쓸 목재는 가능하면 가까운 남한강이나 북한강 등지에서 구했는데, 강가에서 2-3리 떨어진 곳에서 벌목해 낱개로 방류하고 화천에서 물길이 어느 정도 깊어지면 뗏목을 엮어 운송했다. 이윽고 건축이 시작되면 수많은 ‘건축 전문가들’이 동원되었다. 달고로 기초를 다지는 사람, 목장, 조각장, 선장, 병풍장, 목혜장, 제와장, 단청장 그리고 이 모든 장인들의 우두머리인 도편수부터 인부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화정火丁까지 대 건축공사를 옆에서 실시간 관찰한 것처럼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선시대 건축공사의 고용인부를 ‘모군’이라 불렀는데 이들은 하루 10-14시간의 고된 노역에 시달렸지만, 대부분 자유 의지에 따른 지원자들이었다. 1794년 화성 성역 공사에서 모군과 장인들은 비바람이나 무더위로 작업을 잠깐 중단하는 기간에도 1인당 1전4푼씩의 식대를 특별지급 받았다.

이외에 이 책에서는 역관, 화가, 책쾌 등 조선시대의 다양한 전문직종을 다루고 있다. 역관에게 주어진 일은 말을 통역하는 일이었지만 외교적인 면에서 그들은 특유의 기질과 역량을 발휘할 것이 요구되었다. 외국을 오가며 세계의 변화를 몸으로 빨리 읽어낸 역관들은 조선 사회의 새로운 흐름을 적극적으로 이끌어간 사람들이었다. 지식을 나르는 서적 중개상인 책쾌, 인기 소설을 재미있게 읽어 사람들을 웃고 울리는 전기수, 이들은 조선 사람들에게 마음의 양식을 선사한 전문인이었다. 또한 붓 하나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을 알뜰하게 그려낸 이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문가들의 삶이 이 한 책에 펼쳐진다.


저자 프로필


저자 소개

편자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규장각은 조선의 22대왕 정조가 즉위한 해(1776)에 처음으로 도서관이자 왕립학술기관으로 만들어져 135년간 기록문화와 지식의 보고寶庫로서 그 역할을 다해왔다. 그러나 1910년 왕조의 멸망으로 폐지된 이후 그저 고문헌 도서관으로서만 수십여 년을 지탱해왔다. 이후 199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으로서 자료 정리와 연구 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창설 230년이 되는 지난 2006년에 규장각은 한국문화연구소와의 통합을 통해 학술 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국보 지정 고서적, 의궤와 같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 유산, 그 외에도 고문서·고지도 등 다양한 기록물을 보유하고 있어서 아카이브 전체가 하나의 국가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문헌에 담긴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그동안 한국학 전문가들이 모여 최고 수준의 학술연구에 매진해왔다. 최근에는 지역학으로서의 한계를 넘어서 한국학의 세계화, 그리고 전문 연구자에 국한되지 않는 시민과 함께하는 한국학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학술지 『한국문화』『규장각』『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등을 펴내고 있으며 <한국학 자료총서>(총3권) <한국학 연구총서>(총18권) <한국학 모노그래프>(총40권) 등을 펴냈다.

기획 - 송지원

목차

규장각 교양총서를 발간하며
머리글

1장 군사부일체 사회의 버팀목, 그러나 불우한 삶
- 조선조 교사와 훈장의 삶·정순우 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과학부 교수

2장 왕의 허락을 얻어 하늘을 관찰하다
- 조선의 천문 역산가·문중양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3장 의관으로 출세하기 위한 험난한 길
- 명의와 속의俗醫의 경계에 선 조선의 의원들·신동원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4장 팔도를 뒤흔든 대중 스타, 달문의 삶
- 광막한 천지를 떠돌던 조선의 광대·사진실 중앙대 음악극과 교수

5장 배척과 존중의 위태로운 경계에 서다
- 조선의 승려, 허응당 보우·남동신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

6장 먹고사는 업으로 택하거나, 인격 수양의 방편으로 삼거나
- 조선의 음악가들·송지원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7장 조선시대 궁녀의 계보학
- 궁궐 살림을 책임진 여성 일꾼들·홍순민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8장 목장木匠의 종류만 스물둘
- 조선의 집 짓는 사람들·김왕직 명지대 건축학부 교수

9장 붓끝에서 탄생한 무명의 예술혼
- 조선의 화원·황정연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10장 작은 기예를 부리던 자에서 문화 선봉장이 되기까지
- 조선의 역관은 어떻게 탄생했나·백옥경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

11장 조선시대엔 왜 서점이 없었을까
- 책 파는 사람, 책 읽어주는 사람·이민희 강원대 국어교육과 교수

12장 100년 전 서울의 일수장부를 엿보다
- 조선의 금융업자·조영준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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