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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국왕의 일생 상세페이지

조선 국왕의 일생작품 소개

<조선 국왕의 일생> 이 책은 조선 국왕의 일생을 다양한 시각에서 재구성함으로써 왕의 생활사와 생애의 주요한 특징을 드러내려고 한 시도다. 왕이 태어나는 장소, 교육의 절차, 왕비의 간택, 업무의 실상, 왕이 갖춰야 할 교양의 종류, 조선시대 제왕학의 변천, 왕이 사는 집 궁궐의 이모저모, 왕을 모신 궁중 여인들의 삶, 국왕의 건강을 책임진 식치, 왕실의 잔치와 궁 밖의 행차, 왕의 죽음과 왕실의 사당 종묘까지 역사학, 문학, 국악, 풍수지리학 등을 전공한 한국학 전문가들이 세밀하게 서술해나간다. 이 책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 일반 대중과 역사 지식을 공유하기 위해 펴내는 <규장각 교양총서>의 제1권으로, 다양한 궁중 관련 유물의 도판자료를 활용하여 조선 국왕의 일생을 시각적으로 짜임새 있게 보여주고자 하는 시도도 담고 있다.

패(覇)가 아니라 문文으로 다스렸던 조선의 국왕
보통 왕이라 하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군주를 연상하기 쉽다. 왕은 국가의 소유자요 관리자다. 이 때문에 왕을 일러 모든 사람보다 존귀하다는 뜻에서 지존至尊이라 부른다. 순자는 제왕을 두고 천하의 지존으로 신하를 호령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선의 왕은 지존이면서 사대부적 교양을 함께 지녀야 했다. 맹자는 왕은 덕德으로써 인仁을 행하는 사람이라 정의했다. 왕과 상대되는 개념이 패(覇)이다. 패는 무력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이므로 왕은 무武가 아닌 문文으로 나라를 다스린다.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은 문치文治, 혹은 예치禮治를 지향한 국가였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의 왕은 문文을 아는 문인文人이었고 또 그렇게 되어야 했다. 조선의 왕 가운데는 말 위에서 스스로의 힘으로써 왕위에 오른 사람도 있고 강한 신하에 의하여 하루아침에 옥좌에 앉게 된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왕은 모두 사대부적 교양을 지닌 문인의 한 사람이었다.
이 책은 문인의 가장 위에 군림하는 지존으로서 조선의 왕에 대해 다룬다. 사람들은 왕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대부분은 곤룡포를 입고 등장하는 사극을 통하여 왕에 대한 그럴듯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그림을 좀더 선명하게 그리고자 한다. 선명한 그림을 그리기 위하여 이 책은 출생에서부터 사망에 이르기까지 왕의 일생을 재구성했다. 왕도 사람이기에 그 일생 자체가 다를 바 없겠지만, 일생을 구성하는 하나하나에는 일반 사대부와는 다른 의식과 절차가 있다. 이 책은 왕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사대부의 삶과 어떤 차이를 보이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제1장 ‘왕은 어떻게 교육 받았을까’(김문식)에서는 왕이 태어나고 자라는 과정에서 받는 기초교육의 절차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다. 왕은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交泰殿 혹은 대조전大造殿에서 합궁을 했다. ‘교태’는 하늘과 땅이 만난다는 뜻이요, ‘대조’는 큰 창조를 이른다. 하늘을 상징하는 왕과 땅을 상징하는 왕비가 만나 나라를 다스릴 큰 인물을 낳으라는 바람을 깃들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태어난 왕자는 대군大君이 되고 대군 중에 장자는 세자로 책봉이 된다. 물론 장자가 아닌 대군이 왕이 되기도 하고, 대군이 없으면 왕비가 아닌 후궁의 몸에서 난 군君도 왕이 된 사례도 제법 있기는 하다.
세자로 책봉된 왕자는 성군이 되기 위한 엄정한 교육을 받았다. 문치를 지향하기에 세자 교육은 학문과 문학이 중심을 이루지만, 더욱 중요한 내용은 덕성을 함양하는 일로 구성되었다. 왕은 덕으로 인을 행하는 사람이라는 맹자의 말을 실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조선은 예치를 지향했거니와, 세자는 성장과정에서 수많은 의식을 치르면서 예학을 몸소 습득하게 돼 있었다. 영조가 왕이 되기 전 부친인 숙종과 형 경종의 질병을 연속해서 치료하느라 10년 넘게 시탕을 하면서 효를 실천한 것이 그 극명한 예다. 이 책에서는 작헌, 왕복, 수폐, 입학, 수하 등의 과정을 거치는 왕세자의 성균관 입학 과정을 그림과 함께 설명함으로써 왕이 익혀야 했던 예제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또 글씨와 활쏘기 솜씨는 조선 왕의 유전적 특성이라 할 정도로 뛰어났거니와, 지속적인 교육 또한 뒤따랐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왕이 되기 전 세자는 매달 오늘날의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에 해당하는 평가시험을 치렀으며, 매일 전날 배운 것을 체크하는 쪽지시험도 치러야 했다. 매월 두 차례 시행되는 회강會講 시간에는 왕세자를 가르치는 20여 명의 스승이 모두 참가해 시험을 치렀는데, 답변이 우수하면 ‘통通’, 그럭저럭하면 ‘략略’, 부족하면 ‘조粗’, 낙제에 해당하면 ‘불不’이라고 새겨진 목패를 최고위 스승이 번쩍 들었다.

제2장 ‘왕의 반쪽, 왕비의 탄생’(신병주)에서는 왕의 반쪽이자 국모인 왕비가 탄생하는 과정을 상세히 그려내고 있다. 세자는 일반 사대부처럼 15세 전후의 나이가 되면 혼인을 하게 된다. 왕비가 주관하여 비슷한 연령의 규수 중에 선발하여 혼례를 치르게 했다. 물론 왕비가 먼저 세상을 떠난 경우에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혼인을 할 때가 있다. 영조가 66세 때 15살 된 정순왕후와 혼인을 한 것이 그러한 사례이기도 하다. 왕이나 세자가 신부를 고를 즈음이 되면 전국적으로 금혼령을 내리고, 집안과 용모, 행실 등을 고려하여 간택을 하게 된다. 필자는 왕비의 용모가 오늘날의 기준에서 볼 때 미인이라고 보기 힘들었으며, 전체적으로 반듯하고 견실한 이미지라고 강조하고 있다. 성대한 혼인 의식은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라는 이름으로 정리된다. 의식이 끝난 뒤에는 반드시 문헌으로 정리하는 것이 조선의 기록 문화다. 이 책에서 필자는 기록으로 남아 있는 영조와 정순왕후의 혼례식에서 왕실 혼인의 여섯 가지 예법인 ‘육례六禮’의 과정들과 행사에 참여한 물품 및 사람들의 명단, 왕이 친히 왕비를 맞이하는 모습 등 이모저모를 살펴보고 있다.
왕이나 세자의 여인으로 간택되어 왕비나 세자빈이 되었다 하더라도 그 생활이 화려함만으로 채워져 있지는 않다. 제7장 ‘다시는 궁궐에 살지 않게 하소서’는 정병설 교수가 그동안 연구해온 『한중록』에서 드러나는 궁중 여인의 삶을 이 책에 집약시킨 것이다. 왕비는 아들을 낳아 보위를 이어야 하다는 스트레스 외에도, 정치 세력으로 존재하는 친정의 부침에 늘 마음을 조려야 했다. 이 장은 궁중 여인들의 화려함이 아닌 애잔하고도 힘든 삶을, 그리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궁중에서 불교가 성행하기도 하는 등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았던 조선 왕족 여인들의 삶을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격무에 시달린 조선의 국왕, 그 속을 엿보다
세자 중에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안타깝게 요절한 경우가 많았으며, 더러는 행실이 문제되어 폐위되는 불행한 사태도 일어났다. 물론 그러한 특별한 사유가 없으면 왕이 된다. 왕이 되기 전에 짧은 시간 대리청정을 한 예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왕이 세상을 떠나면 바로 왕위를 계승하여 국정을 수행했다.
제3장 ‘왕은 평소 어떻게 일했는가’(정호훈)에서는 신성과 세속 두 세계를 관장하는 국왕의 업무 내용을 집중 파고들었다. 소의간식宵衣旰食이라는 말이 있다. 임금이 국정을 수행하느라 새벽에 옷을 입고 일을 시작하여 한밤에 밥을 먹는다는 뜻이다. 이 말대로 왕은 국정 수행을 위해 바쁜 일상을 보내야 했다. 하늘과 인간을 매개하는 존재로서 수시로 사직과 산천 등에 제사를 올렸으며, 중요한 의식을 직접 관장했다. 정조 4년(1780)에 있었던 사직단 제사는 오전 10시에 사직단으로 거둥한 국왕이 새벽 3시에 제사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17시간이 넘는 대장정이었다. 나라 안에 일어나는 중요한 일을 신하들과 의논하여 결정했으며 큰 옥사에 대한 판결을 내리고 중국과 일본과의 외교 문제를 처리했다. 왕이 처결해야 할 업무는 행정과 사법, 외교 등 가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국정은 대궐 안에서 이뤄지기도 하지만, 조선후기에는 만백성의 어버이가 되기 자주 대궐 바깥으로 거둥해 민심을 안정시키는 일도 해야 했다. 특히 영조와 정조는 성대한 행차를 자주 하여 군왕의 위엄을 만백성에게 공표하면서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한 바 있다.
필자는 대사·중사·소사 등 3등급으로 나눠 관리된 조선시대 왕실 제사의 면모를 살펴보면서 그 중 국왕권의 행사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 사직·종묘 제사를 자세하게 살펴보고 있다. 이어서 의정부와 육조를 근간으로 하는 중앙 정치제도와 감사-수령으로 이어지는 지방 정치제도를 양축으로 전국을 일원적으로 지배한 중앙집권화된 정치 체제 위에서 국왕의 업무 수행이 이뤄지는 과정을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왕은 연일 국가적인 중대사를 두고 신하들과 수시로 회의를 열었다. 정기적인 조회인 조참朝參, 매일 아침 신하와 간단하게 회의를 열었던 상참常參, 상참에 참여하지 않는 부서의 정례적인 보고를 받는 윤대輪對 등 그 종류도 다양했다. 이러한 바쁜 일상 가운데서도 빠뜨릴 수 없는 중요한 회의가 경연經筵이었다. 경연은 왕의 평생 교육 프로그램이면서 중대한 사안에 대한 의논도 함께 했다. 중요한 경전과 역사서를 신하들과 함께 강독한 후, 당면한 시국 문제에 대해서도 의논했다. 경연 자체도 하루에 세 번이나 열릴 정도라, 각기 조강朝講, 주강晝講, 석강夕講이라 했다. 이처럼 바쁜 왕의 공식적인 일상은 거의 밤 9시가 지나서야 끝이 났다. 우리가 성군이라 일컫는 임금의 하루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밤새워 책이나 문서를 읽고 국정에 대한 구상을 했다. 그 때문에 건강을 해쳐 역대의 성군은 장수하지 못했다.

왕권과 신권이 부딪치고 견제되는 공간, 제왕학
조선의 왕은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일반 사대부에 비하여 부족하지 않은 학문 수준을 갖춰야 성군이 될 수 있었다. 실제 세종이나 정조 같은 성군은 신하를 압도하는 학문적 깊이가 있었다. 역대 임금들은 세자 때부터 뛰어난 학자인 신하를 스승으로 맞아 학문을 익혔다. 조선시대 왕의 학문은 한마디로 성학聖學이라 할 수 있다.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조선이기에 『대학연의大學衍義』나 『성학집요聖學輯要』 『대학유의大學類義』 등 성리학적 이념을 담은 책을 제왕학의 교과서로 택했다. 이러한 교재는 국가의 통치보다 마음의 수양을 강조했다. 성인이 되기 위한 학문이라는 뜻의 성학은 오로지 성리性理의 설로 채워졌다. 여기에는 임금을 성리학의 테두리에 가두어 왕권을 제한하고자 한 의도가 있었기에, 일부의 성군은 신하들보다 더 높은 수준의 성학으로 무장하여 임금이면서 동시에 신하를 가르치는 군사君師가 되고자 했다.
조선시대에는 대궐의 여러 전각 이름 자체도 성학과 연결되어 있었다. 왕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 정전인 근정전勤政殿, 편전인 사정전思政殿은 『대학大學』에서 이른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상징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강녕전에서 자나 깨나 마음을 안정시키고 수양에 힘을 쏟아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근정전에서 국정을 근실하게 수행하고, 사정전에서 휴식할 때조차 국정에 대한 생각을 잊지 말라고 한 것이다.

예술가이자 문인으로서의 조선 국왕
사대부의 정점에 있는 왕은 대부분의 사대부가 그러하듯 학문에 더하여 문학까지 겸비했다. 조선시대 문학은 단순히 개인적인 정감을 토로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국정의 수행에 문학이 필수적인 능력이었기에 과거시험에서 문학의 비중이 컸던 것이기도 하다. 특히 중국과의 원만한 외교를 위해서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갖춘 선비가 필요했고 또 대내외에 문명국가임을 과시하기 위하여 찬란한 시문이 갖춰져 있어야 했다. 성리학을 제일의 사명으로 내건 사림에 의하여 음풍농월이 비판의 대상이 되기는 했지만, 문학은 국정의 운용을 위한 실용적인 능력이었기에 왕은 시학을 진흥하기 위하여 솔선하여 시를 지었다. 이종묵 교수는 이 책에서 ‘통치술로서의 한시’의 측면을 부각시킨다. 임금이 신하와 시를 주고받는 것은 고도의 통치술이었는데, 통치권자가 잔치를 베풀고 여기에 더해 정성이 깃든 ‘문학적인 선물’을 줌으로써 정서적인 소통을 이뤄나갔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무력으로 왕위에 올랐던 태종과 세조는 시를 제작해 공신을 예우하는 문자 정치를 자주 폈다. 반면 왕은 신하로 하여금 시를 지어올리게 해서 신하들의 복심을 살펴보고는 이를 이용해 벼슬을 주거나 귀양을 보내기도 했다.
따라서 왕이 신하들과 어울려 잔치를 베풀고 시를 짓는 일은 단순한 유흥을 목적으로 한 것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임금과 신하, 백성의 연대와 소통을 위한 고도의 통치술이었다. 왕과 문무백관이 화합을 목적으로 연 공식적인 연향인 회례연會禮宴, 효의 실천을 백성에까지 확충하기 위하여 관료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까지도 대상으로 한 양로연養老宴도 그러한 목적을 띠고 있다. 왕은 예禮를 통하여 상하의 위계를 엄정히 지키기면서도 음악을 통하여 다시 상하를 소통하기 위한 배려를 잊지 않았다.

너무나 정치적인 왕의 죽음과 종묘
대개 왕의 즉위는 장례와 맞닿아 있다. 세자가 즉위하여 가장 먼저 하게 되는 일은 선왕의 장례를 치르는 일이다. 국장도감國葬都監을 설치하여 5개월 동안 상을 치르고 길지를 가려 거대한 왕릉을 조성하여 안장을 했다. 그리고 신주를 종묘에 봉안했다. 4대가 지나면 다시 신주를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봉안했다. 조선시대 가장 중요한 왕실의 의식이 이러한 일이었기에 이러한 의식은 엄중하면서도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상세하게 국장도감의궤, 산릉도감의궤, 종묘의궤 등으로 제작되어 매뉴얼로 활용되었다. 이 책에서는 김기덕 교수가 너무나 정치적으로 큰 사건이었던 국왕의 죽음을 장례 절차, 그 이면에서의 정치적 움직임, 왕의 묘소와 관련된 풍수 및 사대부들의 풍수 논쟁 등을 곁들여 재미있게 살피고 있다.
왕은 죽으면 종묘로 간다. 종묘는 조선 왕실의 사당으로서 유교 문화가 고스란히 농축된 곳이었다. 필자 이현진 박사는 종묘 정전과 영녕전의 전체적인 건물구성, 각 건물의 용도, 모셔지는 신위의 종류, 종묘 증축의 과정부터, 신주에 쓰는 나무의 종류와 그 위에 쓰여지는 문장의 내용까지 상세하게 묘사함으로써 종묘의 역사와 실물을 가까이에서 듣고 보는 것처럼 느끼게 했다.

원래 규장각은 임금의 시문을 보관하기 위한 도서관에서 출발했기에, 규장각에는 조선시대 임금의 일생을 잘 보여주는 수많은 문헌을 소장하고 있다. 이에 시민들과 소통하려는 뜻에서 2008년 상반기 시민강좌를 열고 첫 주제로 ‘조선 국왕의 일생’을 다루었다. 그리고 이러한 강좌가 좀더 많은 시민들에게 교양도서로 읽힐 수 있도록 총서로 기획하게 되었다. 향후 양반, 여성, 마이너리티들의 삶이 더 구체적으로 탐색될 예정이다.


저자 프로필


저자 소개

저자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규장각은 조선의 22대 왕 정조가 즉위한 해(1776)에 처음으로 도서관이자 왕립학술기관으로 세워져 135년간 기록문화와 지식의 보고寶庫로서 그 역할을 다해왔다. 그러나 1910년 왕조의 멸망으로 폐지된 뒤 그저 고문헌 도서관으로서만 수십 년을 지탱해왔다. 이후 1990년대부터 서울대학교 부속기관인 규장각으로서 자료 정리와 연구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고, 창설 230년이 되는 2006년에 규장각은 한국문화연구소와 통합함으로써 학술 연구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되살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다시 태어났다.
규장각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국보 지정 고서적, 의궤와 같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문화 유산, 그 외에도 고문서·고지도 등 다양한 기록물을 보유하고 있어 아카이브 전체가 하나의 국가문화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문헌에 담긴 방대한 지식과 정보를 토대로 그동안 한국학 전문가들이 모여 최고 수준의 학술 연구에 매진해왔다. 최근에는 지역학의 한계를 넘어 한국학의 세계화, 그리고 전문 연구자에 국한되지 않는 시민과 함께하는 한국학으로 변신을 꾀하고 있다.
학술지 『한국문화』 『규장각』,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등을 펴내고 있으며 <규장각 자료총서> <한국문화연구총서> <한국학 공동연구총서> <한국학 모노그래프> <한국학 연구총서> <한국학 자료총서> 등 900여 책을 펴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사업단은 “조선의 기록문화와 법고창신法古創新의 한국학”이라는 어젠다를 대상으로 연구사업을 수행하고 있다. 아울러 다양한 연관 사업을 기획하여 우수한 연구 성과를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사회적 확산 프로그램 운영에도 힘쓰고 있는데, 본 교양총서는 그 대표적인 성과물이다.

목차

규장각 교양총서를 발간하며
머리글 | 지존이면서 최고의 문인이었던 조선의 국왕

왕은 어떻게 교육을 받았을까_ 태교부터 통략조불까지
김문식 · 단국대 사학과 교수

왕의 반쪽, 왕비의 탄생_ 조선시대 왕실 혼례 엿보기
신병주 · 건국대 사학과 교수

왕은 평소 어떻게 일했는가_ 입법 · 사법 · 행정권을 모두 행사하다
정호훈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HK연구교수

임금이 시를 짓는 뜻_ 왕의 문예활동과 정치
이종묵 · 서울대 국문과 교수

왕의 학문, 제왕학_ 『정관정요』에서『성학집요』로
정재훈 ·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

임금이 사는 집, 궁궐_ 성리학적 수양관, 건축으로 표현되다
장지연 · 경인교대 사회교육과 강사

“다시는 궁궐에 살지 않게 하소서”_ 궁중 여인들의 삶
정병설 · 서울대 국문과 교수

왕의 까다로운 입을 어떻게 맞출 것인가_ 조선 왕실의 건강법, 식치食治
이순구 ·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관

먼발치에서 왕을 느끼다, 왕실의 행차_ 조선후기 경험된 왕실, 왕실의 재탄생
김지영 · 서울대 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왕이 공식적으로 술 마시는 날_ 궁중 잔치의 종류와 변천
김종수 · 서울대 국악과 강사

너무나 정치적인 사건, 왕의 죽음_ 왕의 장례와 왕릉
김기덕 · 건국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왕은 죽어서 종묘로 간다_ 조선 왕실의 사당, 종묘의 모든 것
이현진 ·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참고문헌 및 더 읽을거리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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