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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치사상사 3 상세페이지

중국정치사상사 3작품 소개

<중국정치사상사 3> 수당 황제들의 성숙하고 완비된 군도론

제3권은 수당 시대부터 다룬다. 강성했던 수隋와 화려했던 당唐은 중국 봉건사회의 전성시대였다. 진시황이 황제 제도를 확립한 이래 봉건 전제주의 중앙 집권 정치 체제는 800여 년에 걸친 장구한 비바람의 역정과 곡절의 변천을 겪으면서 제도적, 이론적으로 날로 성숙하며 완비되었다.
581년 수 왕조가 건립되었다. 이어서 양梁나라를 멸하고 진陳나라를 평정하여 589년에 통일천하를 실현했으며 위진魏晉 이래 근 400년을 지속해온 분열 국면을 끝장냈다. 머지않아 천하 대란이 일어나 강력한 수나라가 멸망하고 이李씨 당나라로 대체되었다. 당 초의 여러 황제가 정치에 온힘을 기울임으로써 사회, 경제, 문화는 다시없을 번영을 이루게 되었다. 당 중엽 이후 사회 모순이 날로 격화되었고, 755년 안사安史의 난을 전환점으로 당 왕조는 극성기를 지나 쇠락했으며 번진藩鎭의 할거로 차츰 오대십국의 분열 국면에 접어들었다.
수당과 양송兩宋은 고대 정치사상 발전의 중요한 단계다. 선진 사상의 특징을 발단, 분화, 쟁명爭鳴이라 하고, 양한과 위진 남북조 사상계의 주요 경관을 일존一尊, 다원, 융합의 상호 작동이라고 한다면, 수당과 양송 사상 발전의 전체 추세는 종합, 심화, 겸용兼容이었다고 하겠다. 수당 시기에도 다원과 쟁명은 여전히 사상 문화의 영역에서 사람의 의지에 의해 바뀌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정치사상의 각도에서 본다면 수많은 중대한 이론 문제가 결론을 얻고 심화되었다. 유교, 불교, 도교의 이론 형태가 모두 심각한 변화를 통해 수많은 사상문화적 성과를 얻게 되었다는 것은 대부분 인정하는 바다. 수당 여러 황제의 군도론君道論은 바로 이와 같은 사상 문화 발전의 큰 추세 가운데 첫 번째로 중대한 성과다.

수당 시기 불교와 도교의 정치사상

유, 도, 불 3교는 중국 전통문화의 3대 지주다. 수당 이래 3교의 교차와 통섭이 고대 문화의 전체를 구성했다. 유, 도, 불 3교가 이데올로기 영역에서 지배적 지위를 다투며 끊임없이 갈등하고 부딪힌 것은 수당 사상사의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3교의 충돌은 위진魏晉 시대에 시작되어 남북조 시대에 성행하다가 당나라 때 3교가 병립하는 국면을 연출했다. 봉건 왕조가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문화 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에 3교는 각자의 장점을 발휘하여 셋으로 나뉘어 정립의 형세를 띰으로써 백중을 가리기 어려웠다. 서로 배척하고 침투하는 과정에서 3교의 학설이 모두 획기적인 발전을 이루며 각자의 이론 형태에 심각한 변화가 생긴 것도 수당 사상사의 특징 중 하나다. 불교와 도교가 수당의 문화생활, 사회생활 및 정치 생활에 끼친 영향은 그 정도가 절대로 유가에 못 미치지 않았다. 사상 문화상 3교가 하나로 귀결됨으로써 전통문화의 내용을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수당 유학의 부흥과 정치 철학의 새로운 변화

수당 시기 유학의 이론 형태에 중대한 조정과 개조가 일어났다. 일찍이 양한 시기에 통치 지위를 차지했던 유학은 위진 이래 현학, 불교, 도교 등 몇 가지 강대한 사상 체계의 충격을 받고 일시적으로 쇠락하는 형세를 보였다. 수나라와 당나라의 정치적 통일로 경제는 번영하고 문화가 발달하면서 유학 진흥의 계기와 조건이 만들어졌다. 수당 교체기에 유학은 중대한 일부 이론 문제를 돌파했다. 당나라 중기 이후 유학은 3교 항쟁을 거치면서 차츰 피동적 위치에서 주동적 위치로 바뀌었으며 일련의 이론적 성과도 얻었다. 유학은 끊임없는 자아 조정과 개조를 통해 쇠미한 상태에서 부흥을 향해 치달았다.
수당 시기 최고 통치자들의 대대적인 지지야말로 유학이 부흥하게 된 정치적 전제였다. 3교 가운데 유학은 줄곧 남다른 정치적 우세를 누렸다. 특정한 시기 혹은 제왕은 유학을 충분히 중시하지 않았을 수도, 돌아볼 여가가 없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유학의 정치적 지위는 부정된 적이 없었고, 불교나 도교처럼 시시로 압제와 타격을 받은 적은 더더욱 없었다.

당말오대唐末五代의 정치사상: 군주 정치에 대한 반성과 균평均平 이상의 동경

당나라 말년 정치는 부패하고 사회 모순이 전면적으로 격화되었다. 제왕은 하나같이 황당했으며 국고는 고갈되었다. 통치 계급 내부의 분쟁도 그치지 않았다. 번진藩鎭에선 영웅들이 할거하며 서로를 공격했고, 환관이 발호하여 제멋대로 생살을 주도했다. 남아南衙1의 조신들과 북사北司 환관 사이의 다툼이 물과 불처럼 위세가 등등했으며 조신들 사이 붕당 간 다툼 또한 분분히 발생했다. 국방은 텅 비어 이민족들이 침입함으로써 전쟁도 빈번히 일어났다. 토지 겸병 또한 엄중하여 “부자들은 전답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으나 빈자들은 송곳 꽂을 땅도 없었다”. 관리들은 부패하고 세금은 가혹하여 민중의 생활은 도탄에 빠졌다.
정치가 어두울수록 사회적 폐단은 확연히 드러나는 법이다.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여러 계급과 계층의 인물들이 성찰과 비판의 태도를 견지한 채 사회와 정치를 자세히 살펴보면서 일련의 사조를 형성했다. 성찰과 비판은 사회적 폐단을 없애줄 구세의 길을 찾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상 사회에 대한 사람들의 동경과 구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기도 했다.

북송 시기 정치 개혁, 왕권 강화의 정치사상

송나라는 위로 수나라와 당나라를 이어받아 아래로 명나라와 청나라의 문을 열었다. 역사 발전 과정으로 볼 때 중국 봉건사회는 이로부터 가장 융성한 시대에서 차츰 말기로 진입했다. 송대에 중앙 집권은 한층 더 강화되었고 소작 제도가 보편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상공업이 크게 발전했다. 자연과학 및 각종 학술 사상 또한 장족의 발전을 했다. 송 왕조는 안팎으로 궁지에 몰리고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왕조였으며 수많은 골치 아픈 정치적 난제를 안고 있었다.
정치 개혁과 왕권 강화는 북송 정치사에서 가장 주목을 끈 현상이었다. 태조와 태종은 구 정치 체제를 개혁했으며 인종仁宗은 ‘경력신정慶曆新政’을 행했다. 신종神宗은 ‘희풍신법熙豐新法’을 실시했고 철종 또한 ‘원우경화元祐更化’를 단행했는데 모두 중대한 정치적 조치였다. 이러한 정치 변동을 둘러싸고 조야 상하 간 의론이 분분했으며 심지어 때로는 커다란 풍파가 일어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정치사상 영역을 활기차게 만들었으며 정치 사조가 잇달아 출현하면서 여러 학파를 탄생시켰다.

송대 리학의 정치 철학, 정치 가치, 정책 사상

리학理學은 북송에서 흥기하여 남송에서 성숙되었다. 사실상 리학은 남송 말기에 이미 통치 사상의 지위를 획득했다. 원 왕조로부터 청 왕조가 멸망하기까지 리학은 줄곧 봉건 왕조에 의해 관학官學으로 받들어지며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600~700년 동안이나 주도권을 장악했다. 리학은 봉건 통치 계급의 권위주의적 정치 이론의 바탕이었을 뿐만 아니라, 과거를 통한 인재 선발의 법정 표준으로서 정치, 경제, 문화의 발전에 직접 영향을 미쳤다. 리학은 송대 이래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정치적 사유 방식이며 전통문화의 대표자였다. 리학은 결국 유학 스스로가 내적으로 쌓아온 논리에 따라 부단히 변화하고 승화된 결과다. 위진 이래 유학은 본체, 규율, 방법, 인성 등 철학 문제 및 그것과 도덕, 정치와의 관계에 대해 깊이 있는 논의를 진행하여 차츰 심오한 철학적 사변을 갖춘 이론 체계를 구성해왔다. 리학은 이러한 사상의 변화, 발전 과정의 완성이고 총결산이다.

남송의 사공事功 사상과 등목鄧牧의 이단 사상

남송에서 리학 사조와 대등한 입장에서 대응한 것은 진량陳亮과 섭적葉適으로 대표되는 사공事功 즉 업적주의 사조다. 진량과 섭적 정치사상의 뚜렷한 특징은 실제를 지향하고 실천을 중시하며 사공을 제창하고, 심성을 둘러싼 공리공담에 반대하고, 농업과 상업의 상호 이익을 주장한 점이다. 그들은 강산을 가리키며 금金나라에 항거할 것을 애써 주장했다. 시대 정치를 평론하고 개혁을 창도했으며 사회 현실에 격렬한 비판을 가했다. 리학 사조에 대한 그들의 비평과 비난은 당시 사상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송말원초 사회는 급격한 혼란에 빠졌으며 수많은 선비는 산림으로 숨어들었다. 그들은 현실을 비판하고 폭정을 폭로하며 이단 사상의 발전을 촉진했다. 등목鄧牧의 정치 이상은 일부 선비들의 소망을 반영하고 있는데, 격렬한 사회비판 사상으로 일정한 가치와 의의를 지니고 있다.

요遼, 서하西夏, 금金의 통치 사상

당 왕조의 멸망에서 원 왕조의 수립까지 300여 년 사이에 요遼(거란契丹), 서하西夏, 금金나라가 북부(동북과 서북을 포함한) 중국에서 앞뒤로 흥기했다. 그들은 피차간 대치하기도 하고 중원의 왕조와 대항하고 경쟁하기도 했던 독립 왕조들이다. 그 가운데 요나라와 금나라는 연이어 북방에 웅거하면서 광활한 강역을 지배하고 극성기를 누렸던 대제국이었다. 요, 서하, 금은 정치 문화의 변천 측면에서 어느 정도 공통된 특징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하나하나의 마상馬上 민족이 한漢 민족을 통치하는 과정에 점진적으로 중화의 예법을 받아들이게 되었음이 그렇다. 그들은 문명의 큰길을 향해 치달았다. 왕권이 부단히 강화되어감에 따라 요, 서하, 금 내부의 군신 간 구별도 날로 삼엄해졌다. 군주와 신하가 상대적으로 권력을 나눠 가졌으며, 서로를 제약했던 구체제의 요인들은 이로 인해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 왕권은 또한 부패의 길을 향해 치닫기도 했다. 그리하여 또 하나의 마상 민족이 굴기하여 앞의 것을 대신하고 (…) 역사는 반복하여 비슷한 윤회의 수레바퀴를 보여주었다. 여러 원인으로 요, 서하, 금의 통치자들은 체계적인 정치 논저를 남기지 않았다. 이론화한 정치사상 체계는 더더욱 형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치국 방략, 정책과 언행을 보면 일부 뛰어난 군주들은 정치 문제에 아주 깊이 있는 사고를 표명하기도 했다.

원元대 ‘용하변이用夏變夷’ 사조와 리학의 관학화

원 왕조는 몽고 귀족이 한족 통치 계급과 연합하여 건립한 봉건 왕조다. 북송과 남송 이래 북방 소수 민족이 연이어 흥기했다. 하夏, 요遼, 금金 왕조를 건립했던 당항, 거란, 여진족 등과 비교할 때 몽고족의 흥기는 비교적 늦었지만 세력은 가장 왕성했다. 남송 개희開禧 2년(1206) 성길사한成吉思汗(칭기즈칸)이 대몽고국大蒙古國을 건립하고 막북漠北을 통일하고는 신속히 외부로 확장했다. 남송 단평端平 원년(1234)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적극적으로 송나라를 도모했다. 남송 도종度宗 함순咸淳 7년(1271) 세조世祖 홀필렬忽必烈(쿠빌라이)이 원元 왕조를 건립하고 얼마 안 있어 남송은 멸망했다. 송원 교체기 화하華夏 전통의 유가 문화는 전대미문의 맹렬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낙후한 북방 유목 문화와 고도로 발달한 중원 예악禮樂 문명은 격렬한 충돌, 대항을 거치면서 점차 조화와 융합의 과정으로 나아갔는데 이는 원대 정치사상의 발전에 매우 특수한 상황을 제공하게 되었다.

명대 통치자들의 전제집권 강화 정치사상

명明 태조太祖, 명 성조成祖, 장거정張居正을 대표로 하는 명대 통치자들은 중앙 집권과 전제를 강화하고 관리에 대한 통제와 안민安民을 동시에 주목하는 치국 방침을 받들었으며, 제왕의 권력을 한층 더 절대화했다. 절대 군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들은 중앙 집권 체제의 완성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정치 이론의 건설 또한 중시하여 일련의 치국 사상을 마련했는데, 이는 명대 정치의 발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주의를 끄는 것은 절대 군권을 옹호하는 이 정치 이론이 군권君權을 조정하려는 전략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구준丘濬의 ‘제왕학帝王學’은 군권을 위한 활동 범위를 명확히 획정했으며, 최고 통치자들로부터 인가를 받았는데, 이는 명대의 통치 사상과 정치 사조를 이해하는 데 전형적인 재료를 제공해준다.

왕양명王陽明의 심학 및 그 후학들의 정치사상

원대 이래 정주학이 일세를 풍미했다. 그 철학, 정치론, 도덕관념이 인심에 깊이 파고들면서 거의 학계의 주류가 되었다. 명대 중엽에 이르러 이 국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더니 학술계에 정주학을 비판하는 사조가 출현했다. 심학의 굴기는 일시에 폭넓은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이데올로기 영역에서도 광범한 영향을 미쳤다.
왕양명은 위로 공맹을 계승하고 “주희와 육구연을 범위로 하여 나아가거나 물러섬으로써”1 심학心學의 집대성자가 되었다. 그는 송·명 리학 가운데 정인심正人心 사상 및 그와 관련된 철학적 사변을 집중적으로 발전시켰으며 정주학의 폐단을 교정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정程·주朱와 육陸·왕王의 기본적인 정치 가치관은 다르지 않지만 심과 리를 결합시킨 왕양명의 철학적 사변은 심의 본체성 및 그 윤리도덕적 속성을 강화시켰다. 격민심지비格民心之非, 즉 민심의 잘못을 바로잡고, 파심중지적破心中之敵, 즉 마음속의 적을 깨뜨리라는 말은 심학이 특별히 관심을 기울인 이론 문제다. 왕양명과 그의 후학들은 이 사유의 길을 따라 서민을 교화하고 사회를 안정시킬 구세의 방안을 탐색했으며 이로써 유학은 더욱더 세속화하게 되었다.

동림당인東林黨人의 시폐 관심 정치사상과 충군忠君의 정치 심리

명 왕조 중기 이후 국세의 점진적 쇠퇴는 주로 정치 혼란과 이치吏治 부패로 드러났으며 사회 갈등은 심화되었다. 만력萬曆 초기 장거정張居正이 재상을 맡던 시기엔 정치적으로 중앙 집권을 강화하고 경제적으로 일조편一條鞭 세법을 시행하며 개혁에 힘씀으로써 퇴세가 늦춰지기는 했다. 그러나 오래되고 깊은 적폐 때문에 그의 조치들은 겉만 다스렸을 뿐 근본적인 전환을 가져올 수 없었다. 장거정은 권력을 쥐고 국정을 담당하면서 독단을 하고 친신만을 임용하며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고 언론을 억눌렀다. 이로써 통치 집단 내부의 권력 충돌은 더욱 격화되었다. 장거정이 병사한 후 권력 충돌은 아주 빠르게 격렬한 붕당 투쟁으로 바뀌었다. “당론黨論의 흥기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명나라 말엔 당쟁이 흥기했을 뿐만 아니라 발생할수록 수습이 불가능했다. “정사를 논하는 사람들은 갈수록 집정자를 심하게 재단하고 집정자는 날마다 그들과 맞서며 물불처럼 서로 용납하지 못하면서 명나라가 망할 때까지 이어졌다.”
명 말 붕당의 이름은 절당浙黨, 제당齊黨, 초당楚黨, 곤당崑黨, 선당宣黨 등 아주 많았다. 동림당東林黨은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들은 ‘쟁국본爭國本’ ‘이궁移宮’ ‘정격안梃擊案’ ‘홍환안紅丸案’ ‘과장안科場案’ ‘북왕지국福王之國’ 및 계리計吏, 경찰京察4 등 정치 문제를 둘러싸고 공공연히 암투를 벌이고 쟁송을 그치지 않았다. 다른 붕당 집단과 비교할 때 동림당이 가장 특색이 있었다. 그들의 정치 주장은 시대의 폐단과 깊이 관련이 있어서 특정 사회 계층의 광범한 지지와 호응을 얻었으며 명대 정치사상 발전상 특별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청 초 봉건 사대부 집단의 자아비판 사조

명청 교체기 인재와 천재가 무참히 이어지면서 사회 모순은 전례 없이 격화되었다. 명나라 조정 내부의 당쟁은 그치지 않았고, 부패는 견디기 어려울 정도였다. 북방에선 만주족滿洲族이 발흥하여 대청大淸 정권을 수립하고 누차 명나라 군대를 패퇴시키며 중원을 압박했다. 하층 민중은 방법이 없이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사내가 장대를 높이 쳐드니 천하가 그에 호응했다.”1 복잡하게 뒤얽힌 사회 모순들이 한꺼번에 터짐으로써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게” 되었으며, 국왕의 기강은 해체되었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봉기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숭정제崇禎帝는 매산煤山에서 스스로 목을 매었다. 머지않아 청군이 산해관山海關으로 들어와 중원을 쟁탈하니 대순大順, 대서大西, 남명南明이 연이어 패망했다. 중국역사상 최후의 왕조인 대청제국이 천하통일을 실현했다.
극렬한 사회 혼란과 나라와 군주를 잃은 정치 대변동은 수많은 사대부로 하여금 명대의 정치적 병폐를 반성하게 만들었고, 송명 리학을 반추하게 했으며, 전통 정치사상과 정치 체제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하도록 했다. 비판과 성찰의 기초 위에서 그들은 도를 밝혀 세상을 구제하고, 실용을 숭상하고, 군권을 조정하고, 체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분분히 주장하고 나섰으며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친 정치 사조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 사조를 대표하는 인물로는 주로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왕부지王夫之, 여유량呂留良, 당견唐甄 등을 꼽는다.

청淸대 전기 제왕들의 정치사상: 절대 군권의 수호

1644년 청나라 군대가 북경을 점령함으로써 전국을 통치한 중국 역사상 최후의 봉건 왕조가 그 서막을 열었다. 청조의 최고 통치 계층은 만주족 귀족이 핵심이었는데 입관入關 전과 입관 후 상당 기간 동안 문화적 소양이 비교적 낮았다. 청조 원래의 정치권력 체제는 내지에 대한 통치에 적응하기 위해 개혁이 필요했다. 청나라 초의 순치順治, 강희康熙, 옹정雍正, 건륭乾隆 네 황제는 정치적으로 아주 열심히 정무에 종사했으며 정치사상적으로도 각자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히고 탐구했다. 청조 황제의 정치사상에 대한 분석은 중국 고대 정치사상사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부분이다. 청 조정은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총결하며 정치권력 체제상 군주 일인 전제를 극단적으로 강화했다. 동시에 청조 황제들 또한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견해를 제기했다. 가장 잘 드러난 점은 군주 전제 사상을 한 단계 절대화한 것이다.

공자진龔自珍과 고전 정치 사유의 종결

청대는 중국 역사상 중대한 변화가 발생한 시기다. 일찍이 청 왕조가 건립되기 전 중국의 봉건사회는 이미 말기에 접어들고 있었다. ‘강건 성세康乾盛世’를 지난 뒤 대청제국은 극성기에서 쇠퇴기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19세기 전기에 이르러 봉건 제도의 문란과 청 왕조의 쇠락이라는 이중의 말세적 상황이 만들어졌다. 전체 사회에서 경제 쇠퇴, 정치 부패, 사상 침체, 민생 곤궁이라는 황폐한 현상이 노정되었다. 각종 사회 모순이 매우 첨예하게 드러났으며, 농민과 각 소수 민족은 청 왕조의 통치에 반항하여 맹렬한 기세로 봉기를 일으켰다. 가경嘉慶 18년(1813) 천리교天理敎가 봉기를 일으키니 민중이 청조의 궁궐에 난입하여 융종문隆宗門에 활을 쏨으로써 청 조정을 크게 놀라게 했다. 가경제는 슬피 탄식했다. “한, 당, 송, 명에 없었던 일이 끝내 대청 조정에서 일어났구나.” 동시에 세계 자본주의 각국이 피비린내 나는 야만적 해외 약탈을 전개하면서 중국에 대해서도 염탐과 침략의 고삐를 바짝 당기고 있었다. 중국의 대문을 열기 위해 영국은 외교 방법을 통해 교섭하는 동시에 무력 침략을 적극적으로 획책했다. 불법적인 아편 무역은 중국에 심각한 사회 문제를 가져왔다. 사회 제도의 위기, 청 왕조의 위기, 그리고 중화 민족의 위기가 모두 무르익어 전면적 폭발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중국 사회는 이미 “산비가 내리려니 온 누각에 바람이 가득했다”.
세도世道의 쇠패와 사회의 동요는 다시 한번 사람들의 시선을 현실로 끌어왔다. 날로 격화되어가는 사회 모순은 새로운 정치적 사유를 불러왔다. 통치 계급 또한 세상을 구제하고 운세를 만회할 방법을 화급히 구하여 현존 질서를 유지하는 데 더욱 효과적인 사상적 무기를 만들려고 했다. 세도의 변화를 가장 먼저 민감하게 느낀 사람은 사대부 계층이었다. 이런 분위기는 직접적으로 사상계 풍토의 변화를 유발시켰으며 차츰 하나의 사회 사조로 자리를 잡아갔다. 공자진龔自珍은 이 사조의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하나다.




출판사 서평

류쩌화의 『중국정치사상사』 한국어판 완역
현대 중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사상사 분야의 고전적 저작!
인류 지성사를 통틀어 가장 치열하고 뜨겁고 깊었던 대토론이 펼쳐진다.

“어떤 사람은 중국의 사상 문화 정신이 화합 혹은 중화中和라고 말하며, 이른바 화합과 중화란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의 화해, 평등, 우애 등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실을 따져보면 이런 판단은 역사적 실제에서 멀어져도 너무 멀어졌다. 중국 고대의 화합이 사람과 사람의 평등한 화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귀천의 구별이 뚜렷한 등급 질서의 조합일 뿐이다. 결국 정치사상과 정치정신을 떠나서는 진정한 중국의 역사정신을 이해할 수 없다.” _ 한국어판 서문

“중국은 중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화中華 민족, 즉 한족漢族이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면서 주변 민족을 통합하고, 영토를 넓히고, 나중에는 북방 민족들과 대결하면서 수천 년간 독자적인 정치 전통을 형성해왔다. 인간 사회에서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갈등과 그것을 처리·해결하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지식인들의 고뇌가 정치에 관한 다양한 사유를 만들어냈다. 중국 정치사상사를 돌아보는 것은 바로 이처럼 더 나은 인간관계와 다양한 정치적 사유에 대한 지혜를 찾아가는 길이다.” _ 옮긴이 서문


한국어판 번역과 그 의미

1980년대 이래 동양철학 및 동양사학 영역에서 중국 정치사상사에 대한 접근이 일부 있었으나, 주로 일본어로 쓴 저작의 번역이거나 몇 편의 논문을 묶은 모음집이 대부분이었다. 주자학 이래 특정 사상 조류를 다루기도 했고, 개념 분석으로 정치사상을 철학사 영역 안에서 다루기도 했으나 통시대적 고찰을 통한 중국 정치사상사 전체에 대한 소개는 거의 없었다. 서울대 최명 교수가 샤오궁취안蕭公權의 『중국정치사상사中國政治思想史』 영어본을 번역한 것이 거의 유일하다. 하물며 이 번역도 초기에는 선진先秦 부분 일부만 되어 있다가 손문호 교수와 공역으로 근대 부분까지 완역된 것은 1998년이었다.
샤오궁취안의 위 작품이 전통적 시각에 입각하고 서양 방법론을 수용한 논리 분석에 충실한 좀 어려운 책이라면, 류쩌화가 펴낸 『중국정치사상사』는 현대적 시각에 입각한 사료 방증과 전통적 학문 방법에 충실한 비교적 쉬운 책이다. 중국 난카이대학의 정치사상사 연구 그룹의 중추인 류쩌화 교수와 거취안, 장펀톈 박사 등의 공동 저작인 이 책은 선진先秦, 진한위진남북조秦漢魏晉南北朝, 수당송원명청隋唐宋元明淸 세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방대한 고문 원전 자료의 인용, 규모, 세밀한 분석, 다양한 해석과 예시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특히 갑골문甲骨文을 인용한 상商대 정치사상 분석, 그리고 그동안 소홀히 다루어진 분야 및 인물에 대한 철저한 고증을 통한 사상사적 복원 등은 이 분야의 선구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류 교수와 그의 수십 명 연구 그룹이 동참하여 펴낸 『중국 정치사상통사中國政治思想通史』(2014)의 내용 대부분 또한 이 책의 확장이다. 따라서 국내에서 중국 정치사상사 연구를 진작시키는 데 필요한 자료로서의 가치를 풍부히 함유하고 있으며, 동서양 사상을 융합한 새로운 정치 이념을 모색하는 데 있어서도 빛나는 지혜를 제공해줄 것이다.
역사학을 전공한 저자들이 무려 2167쪽에 달하는 이 책의 태반을 원전 사료로 채우고 있어 우리말 번역에서 그 분량이 두 배 이상 늘었다. 이 책의 특징을 살리고 자료로서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옮긴이는 일일이 원전 사료에 대한 고문 원문을 각주로 달았으며, 옮긴이 주를 통해 비교적 상세한 해설을 보완했다.
중국은 중원을 중심으로 형성된 중화中華 민족, 즉 한족漢族이 분열과 통합을 거듭하면서 주변 민족을 통합하고, 영토를 넓히고, 훗날에는 북방 민족들과 대결하면서 수천 년간 독자적인 정치 전통을 형성해왔다. 인간 사회에서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갈등과 그것을 처리·해결하는 과정을 보여주었고,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지식인들의 고뇌가 정치에 관한 다양한 사유를 만들어냈다. 중국 정치사상사를 돌아보는 것은 바로 이처럼 더 나은 인간관계와 다양한 정치적 사유에 대한 지혜를 찾아가는 길이다.
중국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인의 내면을 깊이 알아야 하고, 중국인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사유를 지배하고 언어를 생산해내는 역사적 구조를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은 중국의 내면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어줄 것이다. 중국에 관한 책은 서점이나 도서관 서가에 넘쳐난다. 하지만 깊고 오랜 사유의 산물로, 긴 호흡으로 읽음으로써 중국인들의 지적 성취를 느낄 수 있는 책은 많지 않다. 특히 중국에 대해 ‘공부’하고 싶은 모든 학문 분야의 사람들에게 5000년의 사상사를 원전 사료와 더불어 관통해서 읽을 수 있는 책은 더욱 드물다. 중국의 전통 문헌 거의 모두가 정치사상서라는 점에서 이 책은 중국을 공부하고 연구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참고서다.


이 책의 핵심 관점

짧은 서문에서 저자는 “중국 고대 정치사상의 주제는 무엇인가? 대답은 천만 갈래일 수 있으나 다음 세 가지로 귀납될 수 있다”고 밝힌다. 그것은 1)군주 전제주의 2)신민臣民의식 3)성인 숭배 관념이다. 고대 정치 관념에서 근대 정치 관념으로의 전환은 주로 위 세 가지를 넘어섬을 의미한다. 즉, 1)군주 전제주의로부터 민주주의로의 전환, 2)신민의식으로부터 공민公民의식으로의 전환, 3)성인 숭배 관념으로부터 자유 관념으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이 세 마디에 이 책의 핵심 관점이 담겨 있다.
중국과 유럽의 역사는 이런저런 다른 점이 있으나, 그중 가장 주의를 기울일 만한 점은 중국이 대일통의 전제 제국으로 제왕이 사회 정점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저자 류쩌화 교수는 이 특징을 ‘중국의 왕권주의王權主義’라고 부른다. 이 책에서 말하는 왕권주의는 사회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권력 체계에 한정된 이야기도 아니다. 일종의 사회적 통제와 운행 기제mechanism를 가리킨다. 저자는 이것을 왕권을 중심으로 한 권력 체계, 이러한 권력 체계를 골격으로 하여 형성된 사회 구조, 이에 어울리는 관념 체계의 세 가지로 나눠서 보고 있다. 중국 고대에는 왕권의 형성 과정에서 그에 상응하는 사회 구조 체계가 동시에 형성되었고 정치적 통치권과 토지 및 인민 점유, 지배권은 한데 섞여 있었다. 토지와 사람
의 육신 모두를 다층적으로 소유하는 왕은 곧 모든 소유권의 꼭대기에 위치했다. 권력의 조합과 분배 과정은 동시에 사회적 재화와 사회적 지위의 조합, 분배 과정이기도 했다.
춘추 전국 시대의 백가쟁명은 중국 역사상 사상 문화의 형태가 변화한 시기일 수 있다. 제자백가가 창립한 학설과 사유 방식은 그 후 2000여 년의 문을 열었다. 후인들에게 창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근대 이전까지 기본적으로 그 시대의 창조적 사유 방식과 틀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제자백가 사상에 총체적 평가를 내리는 것은 그 후 2000여 년의 사상을 파악하는 데 극히 중요한 참고가 된다. 이 책에서는 특히 두 가지 문제를 제기했다. 첫째, 제자백가 사상의 주류와 귀결점은 무엇인가? 마땅히 정치다. 이 점에 대해서는 사마담司馬談이 잘 개괄하고 있다. “『주역』 「계사하繫辭下」에 말하길 ‘천하의 목표는 일치하나 그것을 향한 생각은 수만 가지이고, 다 같이 한곳으로 귀결되나 걷는 길이 다르다’고 한다. 음양, 유, 묵, 명, 법, 도덕가 모두는 정치에 힘쓴 사람들이다. 다만 그들이 좇는 말이 다른 길을 걸어 혹자는 전해져 성찰되었으나 혹자는 성찰되지 못했을 따름이다.” 반고班固의 견해는 사마씨를 계승하여 제자백가란 ‘왕도王道’가 분화된 결과이며, 철두철미하게 국왕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사람들로 하여금 훌륭하고 성스러운 군주를 만나 절충하는 바를 얻을 수 있도록 모두 온몸의 자질을 다했다.” 제자백가가 논한 바는 위로 푸른 하늘에서 아래로 황천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음이 없지만, 마지막에는 ‘치治’ 한 글자로 귀결된다. 이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우리는 현대의 과학적 분류를 가지고 과거의 사상에 대해 그에 상응하는 연구를 행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해당 시대의 사상은 하나의 전체이며 그 나름의 특정한 논리와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이 책의 기본 입장이다. 정치사상이야말로 그것의 핵심이고 주류였다. 이 기본적인 사실을 무시한다면 역사적 사실에 가까이 접근하기가 매우 어렵다.
도가 가운데 ‘장자학莊學’은 정치적 의미를 애써 배제하면서 자연으로 돌아갈 것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무엇으로부터 돌아간다는 말인가?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를 내던져버려야 비로소 회귀를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어떻게 정치와 거리를 유지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토론해야 한다. 다시 말해 반드시 정치에 대해 논의하고 정치에 대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장자 천고의 걸작인 「응제왕應帝王」 편이야말로 정치에서 떨어지고 싶어도 떨어지지 못하는 뛰어난 문장이다.
둘째, 정치의 중심은 무엇이었는가? 저자는 오직 한 가지 결론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바로 왕권과 왕제王制다. 중국 역사상 몇 안 되는 사람만이 무군론無君論을 주장했을 뿐, 모두 유군론자였다. 왕권과 왕제를 옹호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공통되며, 그들의 정치적 이상은 거의 모두가 왕도와 성왕의 정치다.
관념이 된 왕권주의의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왕을 높이고 신하를 낮추는 이론과 사회의식이다. 우리의 가장 위대하고 걸출한 사상가들은 거의 모두가 왕을 높이기 위해 각양각색의 이론을 짜냈으며, 역사적 운명과 태평 시대의 사명을 왕에게 맡기고 있다. 이상의 인식에 기초해서 필자는 중국 정치사상사 연구야말로 전체 중국 역사 연구에서 빠져서는 안 될 기본 고리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이뤄진 토대 저술들

류쩌화 교수가 정치사상사에 대한 학습과 연구를 시작한 것은 196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정력을 모아 주 전공으로 삼은 것은 1970년대 말이다. 그 후 계속 일련의 저작을 출판하고 논문을 발표했다. 동시에 수십 명의 대학원생을 배출했다. 그리하여 난카이南開대학에서 차츰 학문 동업자 그룹이 형성되었다. 저자와 그의 동료·후학들은 근 20년간 20종에 가까운 중국 정치사상사 관련 저작을 출판했는데, 이것이 『중국정치사상사』라는 거작의 밑거름이 되었다. 먼저 류쩌화 교수의 저작으로는 『선진정치사상사』(1984), 『중국 전통 정치사상 반사反思』(1987), 『중국의 왕권주의』(2000), 『사인과 사회』(‘선진권’, 1988) 등이 있다. 저자와 거취안葛荃, 장펀톈張分田 박사 등이 공동으로 쓴 것으로는 『중국정치사상사』(3권본, 1996), 『중국 전통 정치철학과 사회통합』(2001), 『중국 고대 정치사상사』(1992년 초판, 2001년 개정판), 『정치학설 간명 독본』(2001), 『중국 전통 정치 사유』(1992) 등이 있다. 저자와 왕마오허汪茂和, 왕란중王蘭仲의 공동 저작으로 『전제권력과 중국사회』(지린문사출판사, 1988)가 있다. 그리고 거취안의 저작으로 『정덕지政德志』(1998), 『입명과 충성: 사인정치정신의 전형분석』(2000) 등이 있고 장펀톈의 저작으로 『정치학지』(1998), 『주인이고 노예이고: 중국 고대 관료의 사회인격』(2000) 등이 있고, 장룽밍張榮明의 저작으로 『은주 시대 정치와 종교』(1997), 『왕권의 토템화―정교합일과 중국사회』(2000), 『중국의 국교』(2001) 등이 있다. 마지막으로 후쉐창胡學常의 『문학언어와 권력언어: 한부漢賦와 양한 정치』(2000)가 있다.



저자 소개

지은이 류쩌화 劉澤華
1935년 중국 허베이성河北省 스자좡石家莊에서 태어났다. 톈진의 난카이南開대학 교수로서 중국 정치사상사 연구로 일가를 이루었다. 20세기 중국 역사학을 대표하는 걸출한 학자로 온갖 역경을 이겨내고 중국 대륙 학계에서 중국 정치사상 분야를 복원해냈으며, 평생 중국 정치사상사 한 분야의 연구에 매진해 왕권주의학파, 류쩌화학파, 난카이학파를 개창했다.
1987년에 출간돼 큰 반향을 일으킨 『중국 전통 정치사상 반사』로 인해 그는 비판과 성찰의 학자로 불린다. 또 다른 저서 『중국 정치사상 통사』는 중국 최초로 가장 완전하고 전면적이며 체계적으로 정치사상을 다루었다고 하여 최고의 화제로 남아 있다. 제자인 거취안, 장펀톈 등과 함께 쓴 『중국정치사상사』(전3권)는 샤오궁취안蕭公權의 『중국정치사상사』, 쉬푸관徐復觀의 『양한사상사』, 거자오광葛兆光의 『중국사상사』 등과 함께 현대 중국에서 가장 널리 읽히는 사상사 분야의 고전적 저작이다. 임종 직전까지 놀라운 기억력과 비판적 정신을 견지한 그는 부드러운 필치로 마지막 작품 『80자술: 사유의 길』에서 60년의 사상 연구 역정을 써냈고, 이는 중국 전역 언론들이 추천하는 필독서가 되기도 했다. 중국 고대 사상 분야의 세계적 권위자 중 한 명인 히브리대학의 유리 파인은 “류쩌화 교수를 통해 가장 커다란 지적 성취를 거두었다”며 극찬한 바 있다.
생전 총 16권의 저서와 10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중국 정치사상사를 하나의 학문 분과로 정립함으로써 그의 지도를 받은 교수는 현재 60여 명에 이른다. 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중국 정치사상사 학회는 현재 활발한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옮긴이 장현근 (koosnikr@hanmail.net)
중국 문화대 대학원에서 『상군서』 연구로 석사학위를, 『순자』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용인대 중국학과 교수이자 중국 지린대 문학원 겸임 교수다. 중국 고대 사상을 연구의 발판으로 삼아 중국 정치사상 전반을 국내에 소개하고, 전통문화 및 사상에 대한 재해석과 비판적 계승 작업에 힘을 쏟고 있다.
지은 책으로 『관념의 변천사: 중국의 정치사상』, 『맹자: 바른 정치가 인간을 바로 세운다』, 『성왕: 동양 리더십의 원형』, 『중국사상의 뿌리』 등 20여 권, 옮긴 책으로는 『신어역해』, 『논어』, 『순자』 등 10여 권이 있다. 대표 논문으로는 「도덕이상주의: 선진유가의 왕도와 내성외왕론」, 「사회철학으로서 현대 유학의 행로」, 「荀子‘化性起僞’的政治意義」, Differentiation and Fusion of “Ritual as common” and “Law as public” in Ancient Chinese Political Thought 등이 있다.

목차

제1장 수당 황제들의 성숙하고 완비된 군도론君道論

제1절 수당 황제들의 자아 정치의식과 군도
01 제왕 관념: 신화神化, 도화道化, 인화人化
02 군도의 내재 모순, ‘군주 노릇 하기 참으로 어렵다’
03 시작하지 않은 것이 없는데 끝을 본 것은 거의 없다

제2절 민본론: 군권의 절대성과 상대성
01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인민에 의존한다
02 중민重民 정책의 기본 원칙과 그 실천의 한계
03 군권지상과 민위국본民爲國本의 일치성

제3절 군신君臣 일체론: 군신群臣의 통제와 천하의 통제
01 군주와 신하: 정치적 통일체
02 봉건 논쟁: 왕위 전승과 공사公私 논의
03 효치孝治: 충효 규범과 신하의 길
04 신하 제어 방법과 신하 통제 제도

제4절 법제론: 인치와 법치
01 왕권이 목적인 법제 사상
02 법의 운명은 군주의 덕행에 달려 있음

제5절 납간론納諫論: 겸청兼聽과 독단獨斷
01 납간: 모든 제왕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정치 원칙
02 도간導諫: 사람들이 말하지 않음을 두려워하고 간언을 하도록 유도하라

제2장 수당 시기 불교와 도교의 정치사상

제1절 유, 도, 불 3교의 경쟁과 겸섭
01 부혁의 왕권 존중과 화이華夷 변별의 폐불론廢佛論
02 불교 불성론, 도교 도성론 및 유가 심성론

제2절 도교의 왕권 및 종법 신격화의 정치사상
01 당대 저명한 도사들의 존왕숭도론尊王崇道論
02 도교 경계經戒의 사회정치 문화에 대한 영향

제3절 불교의 중국화와 정치 문화
01 불교 도덕의 종법화와 신민臣民 문화
02 교화의 보조: 불교와 왕권의 결합
03 미륵의 출현과 왕권에 대한 저항의 정치의식

제3장 수당 유학의 부흥과 정치 철학의 새로운 변화

제1절 공영달의 도론道論과 치도
01 자연 본체와 윤리 본위를 상호 결합한 도론
02 예禮, 인仁 중심의 치국 방법
03 군덕론君德論
04 도론의 선양과 계승 발전

제2절 『중설』의 흥왕도興王道, 정예악正禮樂 정치사상
01 3교三敎는 통일될 수 있다
02 ‘사업을 벌임에 각자 주재하는 바가 있다’는 천인관
03 흥왕도, 정예악
04 사심 없는 도의 수호와 애민후생愛民厚生

제3절 유종원의 대중지도大中之道와 국가정체론
01 인간사를 중시한 천인 상호 불간여론
02 국가정체론: ‘세勢’의 필연으로서 군현제
03 인의, 예법, 경권經權과 왕권 체계
04 생인生人의 도, ‘폭정은 호랑이보다 더 사납다’

제4절 한유의 도통론道統論과 존군 사상
01 각종 기예를 널리 취하여 ‘공자의 도에 합치하도록 힘씀’
02 도통론: 유학이 중화의 혼이다
03 성품설: 사회 등급 제도의 이론 기초
04 성인 입법창제설과 존군론

제5절 이고의 복성설復性說과 유가 도덕의 절대화

제4장 당말오대唐末五代의 정치사상: 군주 정치에 대한 반성과 균평均平 이상의 동경

제1절 농민 전쟁의 무기의 비판과 균평의식의 부각

제2절 피일휴의 제왕전제에 대한 비판 및 인정론

제3절 『무능자』의 성인, 군왕, 강상 부정의 정치사상
01 자연, 무위, 무심의 천리론天理論
02 성인은 인류 사회의 죄인

제4절 나은의 폭군 비판과 명군론

제5절 담초의 군도론君盜論, 균식론均食論, 상검론尙儉論

제5장 북송 시기 정치 개혁, 왕권 강화의 정치사상

제1절 송 초 제왕들의 체제 개혁, 집권 강화의 정치 전략
01 무신 제어를 요지로 삼음
02 지방 권력 삭탈과 조신朝臣 권병의 제한
03 사대부와 더불어 천하를 다스린다: 관료를 양성하고 겸병을 억제하지 않음
04 안을 지키고 밖을 비움

제2절 개혁 사조의 흥기와 ‘경력신정慶曆新政’
01 개혁 사조의 흥기 및 그 특징
02 범중엄의 변통경장變通更張과 우국우민의 정치사상

제3절 이구의 통변구폐通變救弊 정치사상
01 예론禮論
02 도겸상권, 통변구폐와 군주의 ‘안민’ 정책
03 왕자와 패자는 동질에 속하며 음식과 재화가 정치의 근본이다
04 강본절용強本節用, 이재평토理財平土, 우병어농寓兵於農

제4절 사마광의 급어구인急於求人, 완어입법緩於立法 정치사상
01 역사를 정치의 바탕으로 삼는 정치의식
02 천자의 직무는 예보다 큰 것이 없다
03 이상적 성왕 모델
04 용인用人을 중심으로 한 신하 제어와 치국의 술

제5절 왕안석의 변법 사상과 ‘희풍신법熙豐新法’
01 도는 본말을 겸하고 ‘본성은 선악으로 말할 수 없음’
02 개혁론
03 법도를 밝히고 인재를 등용하고 겸병을 억제함
04 개혁의 귀결

제6장 송대 리학의 정치 철학, 정치 가치, 정책 사상

제1절 송대 리학 사조 및 주요 학파
01 리학 사조 흥기의 원인
02 송대 리학의 유파 및 주요 대표 인물

제2절 리(도)론理(道)論: 종법 군주 제도 사회 규범의 절대화
01 도(리)는 우주의 본체이며 최고의 주재자
02 만수일본萬殊一本: 도와 인륜은 실체가 같으나 이름이 다름
03 리일분수理一分殊: 강상이 인도의 큰 원칙이고 정치의 근본이다
04 이상 정치 모델: 종법宗法, 분봉分封, 정전井田

제3절 인성론人性論: 존천리存天理, 멸인욕滅人欲
01 천명지성天命之性: 모든 사람이 동등한 도덕 속성
02 기질지성氣質之性: 인간의 종류에 차이가 생기는 근본 이유
03 리욕理欲의 변별과 종법 윤리에 따른 정치 인격
04 내성외왕: 군주 제도에 적합한 정치적 역할을 만들어주는 도덕 수양법

제4절 중화론中和論: 예인禮仁 정치의 방법론
01 분이합일分二合一, 정위불역定位不易의 모순관
02 중화中和의 정치철학적 의미
03 예인禮仁 일체의 정치론
04 덕과 형: 위민청명爲民請命과 위민청살爲民請殺

제5절 도통론道統論: 정치 이상 및 시대와 세상의 구원
01 성왕합일聖王合一의 정치 이상
02 강상의 성쇠 및 끝없는 순환의 역사철학
03 손익損益, 경권經權, 혁명革命: 정치 조절의 방법과 주체
04 일심一心이 나라를 흥하게 할 수 있고 군심君心의 잘못을 바로잡는다

제7장 남송의 사공事功 사상과 등목鄧牧의 이단 사상

제1절 사공事功을 제창한 진량의 정치사상
01 진량과 주희의 왕패王覇, 의리義利에 관한 논변
02 군신론: 위에서 요체를 장악하고 상세한 것은 아래에 나누어준다
03 화이華夷 분별론과 화전和戰에 대한 변

제2절 섭적의 ‘이의利義 화해’ 정치사상
01 이利와 의義의 화해, ‘도는 물질로 귀결된다’
02 권위의 칼자루를 홀로 운용하고, 구획을 나누어 권력을 섬김
03 덕치를 근본으로 삼고, 현인을 발탁하고 백성을 양육함

제3절 등목의 군주 제도 비판의 이단 사상

제8장 요遼, 서하西夏, 금金의 통치 사상

제1절 겸용과 포괄, 풍습에 따른 통치, 점진 한화의 통치 방략
01 중원 왕권을 모방하여 황제 제도를 건립함
02 풍습에 따른 통치와 두 벌의 관제
03 동이도 중화를 바꿀 수 있다면서 유교를 특별히 중시함
04 중화의 군도君道를 익히고 정통 천자가 됨
05 부단한 개혁 및 중화와의 점진적 대동

제2절 승천후承天后와 요 성종聖宗의 정치사상
01 현인을 임용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며,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않음
02 이치吏治의 정돈과 탐학의 엄금
03 과거를 통한 선발과 한인 관리의 중용
04 법률 수정과 제도 개혁

제3절 금 세종의 이치吏治 사상
01 천자는 전횡이나 독단을 해서는 안 됨
02 사람을 잘 알아보고 현인만을 임용함
03 엄격한 제도와 법에 의한 신하 제어

제9장 원元대 ‘용하변이用夏變夷’ 사조와 리학의 관학화

제1절 초기 한몽漢蒙 문화 관계와 야율초재耶律楚材의 치국론
01 원 왕조의 민족 차별 정책과 정치사상 발전의 추세
02 야율초재의 치국론

제2절 학경을 대표로 한 ‘용하변이用夏變夷’ 사조와 예치 사상
01 용하변이: 한몽 문화 소통의 가치 매개
02 한법漢法의 보급과 예의치국

제3절 리학의 관학화
01 정주 리학의 북방 전파와 ‘유용한 학문’의 제창
02 허형과 리학의 관학화

제10장 명대 통치자들의 전제집권 강화 정치사상

제1절 주원장의 절대 군권 수호의 정치사상
01 혁명의 발흥과 혁명의 금지
02 중민重民과 군주 전제
03 유학 경전의 존중과 우민愚民
04 관속을 다스리는 술

제2절 주체의 정치사상: 도통 숭배와 리학 존중

제3절 구준의 ‘제왕학’
01 만세 제왕 천덕왕도天德王道의 표준을 세움
02 조정을 바로잡고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함
03 군심君心을 바로잡고 기미幾微를 헤아림

제4절 장거정의 ‘존주비민尊主庇民’ 정치사상
01 기강의 진작: 중앙 집권의 강화
02 명실의 종합 고찰 및 이치吏治의 정비
03 호족을 억압하고 나라의 근본을 굳건히 함
04 사학私學 금지와 문화 전제의 실행
05 치체용강治體用剛

제11장 왕양명王陽明의 심학 및 그 후학들의 정치사상

제1절 왕양명의 심학과 ‘파심중적破心中賊’
01 ‘심즉리心卽理’와 ‘천하일가天下一家’의 정치 이상
02 치양지致良知와 파심중적
03 ‘지행합일’과 정치 도덕의 실천

제2절 왕간, 하심은의 세속화한 유학 정치사상
01 왕간의 ‘백성일용百姓日用의 학’
02 하심은의 ‘비명교非名敎로 통제 가능한’ 도덕평등관

제3절 이지의 정치사상: 평등의 추구와 개성의 선양
01 천지본원설과 평등관
02 동심설과 전통 가치 비판
03 사리설私利說
04 다양화된 이상 사회의 발전

제12장 동림당인東林黨人의 시폐 관심 정치사상과 충군忠君의 정치 심리

제1절 군권 수호의 이상 선택과 현실과의 충돌
01 존군尊君과 군권 제한
02 ‘이도광군以道匡君’과 군권의 충돌

제2절 도덕 구세
01 예의도덕에 의한 천하 통치
02 유학 부흥을 통한 구세
03 수신을 근본으로 삼고 사람들은 모두 선을 지향함

제3절 탐관오리의 징치
01 이치吏治의 붕괴 현상과 그 원인
02 관리를 다스리는 방법
03 광감세사에 대한 엄한 징계

제4절 군자와 소인의 변별
01 군자, 소인과 치란
02 군자, 소인의 절대화와 당파 의식

제5절 동림당인의 정치 심리
01 동림당인의 정치적 선택
02 동림당인의 정치 심리 특징

제13장 청 초 봉건 사대부 집단의 자아비판 사조

제1절 황종희의 진한秦漢 이래 정치 체제에 대한 비판
01 ‘천하가 주인이고, 군주는 객’이라는 주장
02 재상의 정무 관리, 방진의 변방 방어, 학교의 청의
03 천하 부세의 재정립과 ‘공업, 상업 모두 근본’

제2절 고염무의 군주 집권 정치 체제 개혁에 대한 구상
01 ‘사천하私天下’ 정치 체제에 대한 비판
02 적절한 분권의 정치 체제론: ‘봉건적 의미가 담긴 군현’
03 명도구세와 ‘천하의 생원을 폐지하라’

제3절 왕부지의 유가 정치 철학에 대한 반추와 재구성
01 ‘천하의 공公에 따를 것’과 고진누송孤秦陋宋에 대한 격렬한 비난
02 역설을 내포한 역사관: 리세상성과 예유정상
03 리욕합일과 이적夷狄, 소인, 서민 금수론
04 도기 통일론과 임법임인任法任人의 병행
05 도통, 치통과 존군尊君

제4절 여유량의 ‘군주 천하일통’에 대한 규탄

제5절 당견의 폭군 배격, 왕권 조정의 사상
01 진한秦漢 이래 제왕은 모두 도적이다
02 절대 군권 조정에 관한 구체적 구상
03 공평하면 만물이 제자리를 찾는다

제14장 청淸대 전기 제왕들의 정치사상: 절대 군권의 수호

제1절 절대 군주 전제의 정치 이론
01 군위君位의 독존과 신하에 대한 강한 억압
02 붕당의 배척과 근절
03 문화 영역에서의 숭정척사론崇正斥邪論
04 비밀건저의 이론과 실질

제2절 ‘신절臣節’을 부각시킨 정치관

제3절 경천법조敬天法祖의 정치 원칙

제4절 대일통론과 정통론

제15장 공자진龔自珍과 고전 정치 사유의 종결

제1절 19세기 전기의 사회 사조

제2절 공자진의 정치사상: ‘자개혁自改革’과 구쇠세求衰世
01 쇠세에 대한 격렬한 규탄과 조정에 대한 자체 개혁 권고
02 평균, 농종과 존명
03 이상: 군사합일君師合一
04 ‘존군-죄군’ 정치 문화 모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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