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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창문을 열고 상세페이지

로맨스 e북 현대물

바다는 창문을 열고

소장단권판매가300 ~ 3,600
전권정가3,900
판매가3,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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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0 0원

  • 바다는 창문을 열고 (외전)
    성인도서
    바다는 창문을 열고 (외전)
    • 등록일 2018.01.08.
    • 글자수 약 1.6만 자
    • 300

  • 바다는 창문을 열고
    바다는 창문을 열고
    • 등록일 2017.03.02.
    • 글자수 약 17.3만 자
    • 3,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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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는 창문을 열고작품 소개

<바다는 창문을 열고> 그 애가 처음으로 창문을 두드리던 날,
창문을 열자 바다로부터 해풍이 불어왔다.
꼭, 바다가 창문을 두드린 것만 같다고 생각했었다.
바닷가에서 만난 그 소녀의 얼굴이 신희에게는 바다 그 자체였다.

누구와도 함께 있고 싶지 않았던 세상은
소녀가 창문을 두드리며 열리기 시작했고
그 아이의 자전거 종소리가 사라지면서 다시 닫혔다.

그 후 14년,
어른이 된 소년과 소녀는 다시 바다 앞에 서 있었다.

환자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싶어 마취과를 선택한 공중보건의 이신희.
“딱히 누구와 함께 있고 싶진 않았어. 그런데 너에게만 자꾸 욕심이 생겨.”
정직하게 살고자 했던 시인의 삶을 좇아 이재하 문학관의 직원이 된 강정아.
“여기까지만 들어오면, 세상 바다를 다 가 보는 거예요.”

여자는 싫은데, 정아는 괜찮았다.
남자는 무서운데, 신희는 괜찮았다.
서로가 의사인 동시에 환자이기도 한 둘의 관계가 다시 시작되었다.


출판사 서평

〈원고 미리 보기〉

프롤로그


워낙 남쪽이라 한겨울에도 크게 온도가 떨어지지 않긴 했지만 그날은 가을 중에서도 유난히 더운 날이었다. 해가 슬슬 저물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열다섯 살이던 정아는 그때 앞서가던 남자의 뒷모습을 정확하게 기억했다. 얇은 책을 한 손으로 들고, 다른 손으론 글을 한 줄씩 가리키며 읽던 세 살 위의 도시 소년. 큰 키에 교복도 머리도 언제나 단정한 상태를 유지하던 소녀의 첫사랑.
그가 언제 서울로 돌아갈지 알 수 없었다. 정아는 연락처를 물어봐야 한다고 계속 생각했지만 그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세 살이나 많은 오빠라서. 그는 정아를 마냥 어린아이 보듯 할 뿐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런 그의, 신희의 태도가 당연했지만 그때는 그게 잠이 안 올 만큼 서러웠다. 정아는 열다섯 살에 이미 키가 다 자라서 성인이 된 지금의 그녀와 비슷했다. 그러니 속도 다 자랐다고 생각했었다.
모래사장을 천천히 걸어가며 책을 읽던 그를 생각하면 깔끔하게 머리칼을 정리한 유독 하얀 뒷목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를 제외한 세상은 노을에 물들어 온통 금빛이었다.
정아는 그의 뒤를 따라 자전거를 끌며 흘깃흘깃 신희의 뒷모습을 보다가 괜히 찔려서 딴청을 했다. 그러다가 키가 한참 큰 그와 보폭이 차이 나 거리가 벌어지자 몇 걸음을 달려 신희를 따라잡았다. 소녀가 달리는 발소리에 앞서가던 신희가 웃느라 어깨를 들썩였다. 그러던 그가 갑자기 뒤를 돌아보는 바람에 정아가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 그가 그 작고 하얀 얼굴로 물었다.
“좀 천천히 걸을까?”
따라가고 있는 걸 알았나 보다. 놀란 정아가 고개를 푹 숙이더니 자전거를 인도로 끌고 가 잽싸게 올라탔다.
얼른 페달을 밟아 도망치다가 힐끔 뒤를 돌아보니 신희가 당황해 손을 뻗었다가 내리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정아가 얼마 못 가 자전거를 멈추고 내려섰다. 귀 끝까지 빨개진 그녀가 가만히 서 있자 신희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리고 자전거에 달린 바구니에 책을 넣어 준다.
“읽어. 너 줄게.”
“준다고? 왜?”
정아가 묻자 신희가 다시 앞장서 걸으며 말했다.
“너 귀여워서.”
어린애 대하듯 하는 걸 알고, 정아의 빨개졌던 얼굴이 이번엔 붉으락푸르락한다. 신희가 준 책도 펼쳐 보니 심지어 동화책이다.
누군 남자로 좋아하는데, 어린애 대하듯. 중학생한테 동화책이 웬 말인가!
심술이 나서 첫 장을 폈는데, 생각보다 꽤 재미있었다. 정아가 제자리에 서서 책을 읽자 앞서가던 신희가 뒤를 돌아본다.
나름 중학생이라고 교복 입고 돌아다니는 정아가 신희의 눈엔 그저 귀여웠다. 햇빛을 가리고 다니지 않아 여름 내내 까맣게 탔다. 올해 초만 해도 초등학생 같았는데, 이제 좀 중학생 티가 난다. 그래 봤자 꼬마지. 저렇게 어린 꼬맹이도 크면 여자가 될까. 신희가 팔짱을 끼고 잠깐 고개를 기울였다가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럴 리가 있나, 싶었다. 저 애는 평생 가도 꼬맹이일 것 같다.
정아가 책장을 넘기다가 문뜩 바람이 세차게 불어 고개를 들었다. 아니다. 어쩌면 그 바람에 커진 파도 소리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신희가 안 가고 그녀의 앞에 여전히 서 있었다.
“천천히 읽어.”
“…….”
“기다릴게.”
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첫사랑 중인 소녀에게 아주 치명적인 미소였다. 태어나서 저렇게 예쁘게 웃고, 다정하게 말하는 남자는 처음 보았다. 그가 웃고, 말하는 모든 순간이 소녀에게는 설렘이었고, 아플 정도의 짝사랑이었다.
정아가 책을 탁 덮어 다시 바구니에 넣었다.
“집에 가서 읽을래.”
“그래. 그렇게 해.”
“고마워. 오빠.”
그리고 자전거를 끌며 다시 해변을 걸었고, 그 남자애도 멀찍이 떨어져 걸었다. 정아는 자기가 읽었던 부분을 신희에게 물어보고, 신희는 부드러운 말투로 대꾸를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 순수한 시간은 정아 인생에 가장 행복한 순간이 되어서, 마치 녹화해 놓은 영상처럼 종종 머릿속에 띄워 보곤 했다.
정아는 아직도 그 책을 가지고 있었다. 부모님이 그녀를 잠깐 이모네 집에 맡겼을 때에도, 서울로 대학을 갔을 때에도 가지고 다녔다.

***

한여름에도 장사가 잘되지 않는 해수욕장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리면 읍내가 나왔다. 읍내에서 1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민가가 있는데 거기 이재하 시인의 문학관이 있다. 정아가 여기서 먼저 일하고 있던 직원, 소하에게 말을 걸었다.
“저기 할아버지들 계속 계셔도 되는 거예요?”
아직 취직한 지 삼 일밖에 되지 않은 그녀가 난감해하며 문학관 로비를 가리키자 소하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여기 가끔 동네 분들도 오셔서 쉬실 거예요. 정아 씨한테 크게 잔소리만 안 하시면 그냥 두세요.”
“아. 네. 그럴게요. 고마워요.”
정아가 너무 깍듯하게 말하자 소하가 불편해 죽겠다는 듯 몸을 이리저리 꼬며 말했다.
“어차피 둘밖에 없으니까 그냥 말 편하게 할까요? 관장님도 신경 안 쓰세요. 원래 있던 직원 언니는 저랑 여섯 살 차이였는데도 편하게 지냈거든요.”
그녀가 쿨하게 말하자 정아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럴까요?”
“응. 동갑이잖아요. 아. 이따 점심 먹을 때 카페 알려 줄게. 커피 필요하죠?”
“엄청 필요하죠. 못 마시면 좀비가 돼요.”
정아가 투덜거리자 소하가 즐겁게 웃는다. 일에 관한 건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정아는 취업이 확정된 날 받은 프린트에 적힌 이재하 시인의 이력, 문학관 역사 등을 이미 달달 외운 상태였다.
관장 하나와 직원 두 명도 많은 것 아닌가 싶을 만큼 한적한 공간이었다. 문학관은 언덕 위에 있어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소하가 창밖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정아에게 말을 걸었다.
“쭉 서울에서 살았어?”
선배인 그녀가 먼저 말을 놓자 정아도 조심스레 말을 놓았다.
“아니. 나도 이 근처 사람이야. 버스로 한 시간쯤 떨어진 곳.”
“그래? 잘됐네. 집 가까워서.”
정아가 대답 없이 미소만 지었다. 본가에 갈 일이 별로 없을 거라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한동안 직원이 구해지지 않아 외로웠다며, 소하는 재잘재잘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동갑내기가 들어왔는데 지난 삼 일간 서먹하게 지낸 게 억울했던 소하가 폭발적으로 수다를 떨자, 정아도 긴장이 풀려 같이 이야기를 나눴다. 대학 다닐 때 이야기며, 졸업하고 일하던 영어 학원 이야기도 했다. 정아의 대학 생활은 아르바이트의 연속이었다. 그중 영어 학원 강사 일이 잘 맞아서, 졸업 후에도 그 일을 했다. 꽤 이름이 알려져서 돈도 웬만큼 벌었다.
생활력 강한 그녀의 이야기에 소하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우와. 그럼 학비랑 생활비 다 네가 번 거야?”
“응. 다신 못 해. 진짜.”
정아가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부르르 떤다. 소하가 감탄했다.
“대단하다. 난 졸업하고도 용돈 받으면서 살았는데. 그러고도 취업이 잘 안 돼서 이렇게 시골까지 왔……다고 하면 짜증 나지? 여기 사람이라며.”
“아니. 시골 맞지 뭐. 근데 이 정도면 번화가야. 우리 동넨 더 시골이거든.”
“윽. 진짜?”
“응. 나 처음에 서울 갔을 땐 어떻게 이렇게 어딜 가나 사람이 많나 싶더라. 그래서 동기들이랑 맨날 사람 구경 했잖아.”
온도가 뚝 떨어진 수요일, 문학관에는 관람객이 한 명도 오지 않았고 덕분에 둘은 내내 수다를 떨었다.
소하는 정아보다 삼십 분 먼저 출근해 문학관을 열고, 삼십 분 먼저 퇴근했다. 혼자 뒷정리를 마친 정아가 창가로 향했다.
파도 소리처럼 들리던 것이 실제로 파도 소리였다. 서울에 간 이후에도 가끔 차가 지나가는 소리를 파도 소리로 착각하곤 했다. 싫어하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바다.
정아가 창문을 닫고 문단속을 했다. 다시 바다로 돌아오고 말았다.

***

“야. 너처럼 생기면 인생이 어떠냐?”
현수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면적만 넓었지 사람은 얼마 살지 않는 어느 면(面)의 보건지소. 공중보건의로 근무 중인 신희가 팔짱을 끼고 뒤로 기댔다.
“뭐. 피해는 안 주지.”
“와, 건방진 자식.”
현수가 몸서리쳤다. 신희의 진료실 책상 위에 알록달록한 단지가 있고, 그 안에 아기들 먹으라고 가져다 놓은 사탕이 들어 있었다. 디자인에 센스가 없는 신희가 직접 고른 단지는 좋게 말해 알록달록이지, 사실 조잡스러웠다. 현수가 사탕을 또 꺼내 먹자 신희가 핀잔했다.
“이 썩는다.”
“봐 봐. 사탕 몇 개 집어 먹었다고 구박하는 거. 이런 쫌생이에 결벽증 환자가 뭐가 이쁘다고 여자애들이 너만 보면 난리냐고.”
신희는 남들보다 일 년 일찍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그의 동기인 현수는 한 살이 많았다. 학교 다닐 때부터 가장 친하던 동기였다. 군의관인 현수의 부대가 하필 여기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곳이라 툭하면 술 먹자고 신희를 찾아온다.
귀찮기는 해도 신희의 좁디좁은 인간관계에 몇 없는 절친이었다. 같이 술집을 가는 대신, 집에서 안주를 해 먹어야 되는 불편함을 이해해 주는 친구였다. 현수가 사탕을 우물거리며 물었다.
“근데 연애는 왜 안 하냐?”
“못 하는 거지.”
신희가 속눈썹이 긴 눈을 천천히 내려 감았다. 더 말하기 싫어하는 그의 표정을 깨끗이 무시하고, 현수가 물었다.
“결벽증 때문에?”
“응.”
그가 다시 눈을 떴다. 바닷가의 밝은 태양이 눈이 아프도록 진료실로 스며든다. 곧 할머니 한 분이 들어오자 현수가 눈치껏 진료실에서 나갔다.
인구가 많지 않은 동네에 삼 년 가까이 있으니 이제 환자들 대부분이 눈에 익었다. 영순 할머니는 항상 무릎이 너무 아프다고 울상이셨는데 오늘 유난히 표정이 밝았다. 신희가 영순에게 물었다.
“무릎 좀 어떠셨어요?”
“좋아. 오늘은 덜 아파. 그것 때문에 온 건 아니고.”
영순이 손으로 오밀조밀 만든 도시락을 신희의 데스크에 내려놨다.
“혼자 사니까 밥 잘 챙겨 먹으라구.”
음식 통에서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물씬 풍겼다. 손맛 하난 좋다는 자부심을 젊어서부터 가지고 사셨다는 말을 하신 것이 떠올랐다. 신희가 목구멍으로 치미는 구역질을 억지로 삼켰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의사 양반, 건강 잘 챙겨. 혼자 산다고 대충 끼니 때우지 말고.”
“네. 그럴게요.”
영순이 필요하다던 약만 진단받아 떠나고 얼마 후. 신희가 도시락 통을 챙겨 들었다. 속이 뒤틀리는 것 같다. 모든 신경이 이 도시락 통에 있었다. 신희는 진료실 옆에 있는 작은 주방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어 도시락 안의 내용물을 전부 쏟아부었다. 그러고 나서야 싱크대를 붙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공중보건의로 오기 전, 4주 훈련 때에는 정말 굶어 죽을 뻔했었다. 남이 해 준 밥을 먹는 것이 힘들었다. 입에 정체불명의 음식을 넣는 것이 역겹다.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강박이 들었다.
그나마 남자들이 한 밥은 어떻게든 삼켰는데, 여자가 한 밥은 여전히 삼킬 수가 없다. 삼키기는커녕 냄새만 맡아도, 아니 심지어 보기만 해도 썩은 음식 냄새를 맡은 것처럼 역겨웠다.
먹은 것이 없어 헛구역질을 하던 신희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불도 안 켜고 있었다. 그가 열린 문 쪽으로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가 숨이 턱 막혀 그대로 굳었다. 되돌아왔던 영순이 주방 맞은편, 개방 화장실을 가리켰다.
“아, 아니 변소 좀 가려고…….”
그러더니 얼른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신희는 뭐라 말도 못하고 허탈한 표정으로 할머니의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

정아는 문학관 일에 금방 익숙해졌다. 소하의 말대로 이재하 시인의 문학관 로비는 동네 사랑방이었다. 선선하게 에어컨이 돌아가는 곳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앉아 계셨다.
여전히 관람객이 그리 많지 않은 곳이다. 퇴근을 하기 위해 노트북을 끄고 뒷정리를 하는데 근처에서 떡갈비집을 하는 봉단 할머니가 데스크 앞으로 오신다. 정아는 봉단이 들고 있는 커다란 택배 상자에 놀라서 두 손을 뻗어 상자를 받쳤다.
“이걸 여기까지 들고 오셨어요?”
“어디서 온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 글씨를 못 읽으니.”
봉단이 상자에 쓰여 있는 주소와 발신인을 가리켰다. 정아가 그것을 읽으며 말했다.
“양평에서 왔네요.”
“양평? 양평에서 뭐가 왔나.”
“김미순 님한테서 왔고 홍삼이래요.”
“아. 우리 큰며느리한테서 왔네.”
봉단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돈다. 정아가 가방을 꺼내며 말했다.
“저 금방 다 끝나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가게까지 제가 들어다 드릴게요.”
“어휴, 안 그래도 돼! 내가 들고 왔는데 내가 들고 가야지.”
“딱 오 분만요!”
정아가 고집을 부리더니 더욱 부산하게 뒷정리를 했다. 동네에 글씨를 읽지 못하는 할머니들이 꽤 계셨는데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이 편지나 택배가 오면 이 문학관으로 가져오셨다.
이 문학관이 기념하는 1934년생 이재하 시인은 이 지역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모교에 교수로 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여생을 마쳤다. 시인은 말할 것도 없이 이 동네 최고의 지식인이었단다. 동네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당연하다는 듯이 이재하 시인에게 가져와 물었다. 그녀가 칠순도 못 넘기고 작고한 후에도 동네 사람들의 그 습관은 변하지 않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시인의 생가인 여기 문학관에 와서 무엇이든 물어보곤 했다.
정아는 이재하 시인이 무척 다정한 사람이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죽고 이십 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어도 습관적으로 문학관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학관 뒷정리를 마치고 묵직한 택배 상자를 들어 봉단이 운영하는 떡갈비집으로 향했다. 가게에 도착하니 그 앞 그늘에 봉단과 동갑내기인 영순이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봉단이 먼저 시무룩해 보이는 영순에게 다가갔다.
“영순아. 무슨 일 있어?”
봉단이 영순 옆에 같이 앉아서 묻는다. 영순이 말했다.
“요즘 내가 간을 잘 못 보나 봐. 음식 맛이 없어…….”
정아가 영순이 앉은 곳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두 손으로 무릎을 짚고 허리를 숙여 영순에게 말했다.
“왜요. 저 지난번에 할머니가 만들어 주신 호박범벅을 세 그릇이나 먹었는데.”
타지에서 온 정아가 쓸쓸할까 봐 툭하면 반찬을 나눠 주셨는데 왜 갑자기 이렇게 서운한 말씀을 하실까. 정아가 의아해 고개를 갸웃거렸다. 수줍음 많은 영순이 더 말을 안 하자 봉단이 재촉했다.
“왜? 무슨 일인데?”
“내가 보건지소 의사한테 반찬을 해다가 줬는데. 나갔다가 변소 가려고 다시 들어가니까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더라구.”
그 말에 놀란 정아의 큰 눈이 더욱 커졌다.
“반찬을 버려요? 왜요?”
“그걸 내가 아나……. 그 의사 양반이 원래도 무뚝뚝해서. 속을 알 수가 없어.”
영순은 손맛이 좋은 게 자랑이었다. 고향은 산이고 시집은 바닷가로 와서 육지 음식도, 바다 음식도 잘했다. 부끄럼을 많이 타서 자기 입으로 자랑은 잘 못 해도 옆에서 맛있다고 해 주면 대답 않고 배시시 웃었다.
정아는 마음이 아픈 다음에, 열이 받아 얼굴이 뜨거워졌다. 봉단이 말했다.
“그 양반이 좀 인간미가 없긴 하지.”
“서울 사람 입에 안 맞았나 보네.”
영순의 울적한 목소리에 정아가 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웃기는 사람이네 정말! 할머니. 그걸 절 줘야지, 뭐 그런 사람한테 가져다주셨어요? 절 주셨으면 맛있게 먹었을 텐데! 할머니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데요!”
옆에서 화를 내 주니 영순은 마음이 좀 풀려서 슬쩍 웃었다.
“의사 양반이 봐 주니까 그렇게 아프던 몸이 한결 나아서……. 아직 먹을 만하지? 그래도 내가 밥해 온 세월이 얼만데. 젊은 사람이라 입맛이 까다로웠나 봐.”
됐으니 이제 걱정 그만하라는 듯 말하셨지만 정아의 속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손자뻘인 그 의사를 먹이려고 아픈 몸으로 열심히 만들어 가셨을 텐데 그걸 버리다니.
영순 할머니의 몸에서도 마음에서도 진을 쭉 빼 간 것 같아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 ‘보건지소 의사’라는 남자는 하도 숙소에만 처박혀 있어서 정아는 한 번도 그를 만난 적이 없었다. 이 작은 동네에서 그러기도 힘든데.
정아가 이 동네로 이사 온 후, 할머니들은 이 주변에 젊은 미혼 남녀가 얼마 없으니 둘이 한번 만나 보라고 권하곤 했다. 얼굴도 그렇게 잘생겼고 나이도 정아와 딱 세 살 차이라면서.
그런 할머니의 말들을 민망해하며 웃어넘기던 차였다. 그런데 기껏 만든 음식을 버렸단 이야기를 들으니 얼굴도 모르는 그가 미워진다.
그날 밤 정아는 깊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무래도 한번 찾아가 보지 않으면 이 화가 안 풀릴 것 같았다.

***

문학관은 월요일에 휴관했다. 정아는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근무하고, 일요일은 소하와 격주로 한 명씩만 문학관에 나갔다.
일요일 근무를 하고, 월요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난 그녀가 하품을 하며 옥외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정아는 2층짜리 건물 옥탑방에 살았다. 이 2층짜리 건물에는 보육원이 있었다.
그녀가 들어오자 보육원 바닥 청소를 하고 있던 태진이 흘기며 말했다.
“또 왔어, 또. 젊은 애가 왜 맨날 여길 와.”
태진은 오십 대 중반의 여의사로, 내내 해외에서 근무하다 이제 막 한국으로 들어왔다. 이 보육원에는 건강이 좋지 않은 아이들이 많아 지금은 잠시 여기 눌러살고 있었다. 조만간 지진 구호 활동을 위해 A국가로 떠나기 때문에 그 전까지만 이 보육원을 맡기로 했다.
어깨 조금 아래까지 오는 머리칼을 찰랑거리는 태진은 피부가 까무잡잡해서 무척 건강한 인상을 주었고, 실제로도 굉장히 체력이 좋았다.
정아가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전 우리 꼬맹이들 영어 가르쳐 주러 오는 거거든요?”
“으이구…….”
태진이 또 ‘그럴 시간에 연애 좀 해라’라며 잔소리하기 위해 준비 자세를 취했다. 그래서 정아가 잽싸게 말을 돌렸다.
“아. 그보다 태진 쌤. 어제 진짜 열 받는 얘기 들었어요. 영순 할머니 있잖아요. 가끔 보육원에 음식 가져다주시는.”
“응. 알지. 엄청 수줍음 많은 할머니?”
영순은 종종 음식을 만들어 여기 보육원에 가져다주고, 아이들이 맛있게 먹는 걸 말없이 보기만 하다가, 그게 에너지라도 된 것처럼 힘이 난 걸음으로 떠나곤 했었다.
“그 할머니가 보건지소 의사한테 반찬을 만들어다 줬는데, 그걸 쓰레기통에 버리더래요.”
차분히 말하려던 정아가 중간부터 울컥해서 언성이 높아졌다.
“말이 돼요? 부잔가……. 아니, 부자여도. 어떻게 할머니가 해 주는 음식을 버려요?”
“그러게. 그 녀석 참 못됐네.”
태진이 맞장구쳐 주면서도 속으론 내심 의아해했다. 정아는 원래 웬만한 것들에 웃으며 좋게, 좋게 넘어가는 타입인데 웬일로 저렇게 뿔이 났나. 사람 좋은 것도 지나치면 걱정거리였다. 늘 웃고 상냥한 그녀의 속에서 뭔가가 짓눌려 썩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태진은 처음, 열다섯 살의 정아를 만났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 정아의 몸에 있던 상처들이 아직도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었다. 저 애가 영영 화내는 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줄 알고.
그 보건지소 의사에게는 화도 안 날 정도로, 태진은 정아가 화내는 모습이 반가웠다. 정아가 순한 두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그래서 저도 오늘 보건지소 가 보려고요.”
한참 딴생각을 하던 태진이 문뜩 정신이 들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보건지소? 오늘? 가서 따지게?”
“네. 왜 버렸는지 알아야겠어요. 영순 할머닌 맘이 약해서 화를 못 내시잖아요.”
씩씩거리는 걸 보니 속이 많이 상했나 보다. 하여튼 저 남 생각하는 오지랖 반만 자기 걱정을 해도 옛날에 남자 친구가 생겼겠네. 태진이 속으로 생각하며 괜히 입을 삐죽거렸다.

***

신희는 며칠째 너무 잔소리를 들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오늘도 아침부터 할머니 두 분이 오시더니 중얼중얼 잔소리를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할머니가 얼마나 서운해했는지 몰라. 떡갈비집 할머니랑 문학관 아가씨가 달래 줘서 그나마 좀 풀어졌지.”
“……죄송합니다.”
도시락을 버린 후, 영순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을 때. 신희는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해명해야 하는데 온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동네가 얼마나 작은지 동네 사람들이 다 와서 한 소리씩 하신다. 진료를 받고 난 할머니가 말했다.
“그러니까 의사 양반. 문학관 아가씨랑 한번 잘해 봐.”
“예?”
대화가 왜 또 거기로…….
말주변 없는 신희는 이럴 때마다 어떻게 넘겨야 할지 몰라 무척 난감했다. 할머니들이 종종 신희에게 문학관 아가씨를 만나 보라고 중매를 하시는 것이다. 이 동네 젊은 사람이 딱 둘밖에 없는 것도 아닐 텐데. 하긴 젊은 미혼 여자가 동네에 거의 없긴 했다. 젊은 여자들은 대부분 결혼해서 오게 된 이주 여성이었다.
“그렇게 착한 아가씨도 없어. 얼굴은 또 얼마나 예쁜데.”
“네.”
“의사 양반은 하도 무뚝뚝해서, 그런 사근사근한 아가씨가 딱이라니까.”
“아. 그렇군요.”
신희가 심심한 반응만 보이자 결국 할머니들도 포기하고 슬슬 자리에서 일어선다. 신희가 말을 덧붙였다.
“할머니. 큰 병원 꼭 가셔야 해요. 내과요. 알겠죠?”
그러자 알았다는 듯이 손만 휘휘 젓고 나가신다. 저러고 다음에 또 보건지소에 와서 ‘여기 의사 양반이 있는데 왜 큰 병원을 가. 돈 아깝게.’ 하실 것이 뻔하다.
보건지소는 한계가 있었고 신희의 전공이 아닌 과에서 해결해야 할 증상이 수두룩했다. 화술 공부를 해야 하나. 어떻게 해야 어르신들을 병원으로 보낼 수 있을까.
잔소리와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점심시간이 되자 신희는 보건지소 2층으로 올라갔다. 그의 숙소는 사람이 산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깨끗했다. 신희가 슬리퍼를 신고 베란다 건조대에 널어 둔 빨래를 만져 보았다. 아침에 널어놓고 나갔는데 해가 워낙 좋아 벌써 다 말랐다.
점심 식사로 냉장고에 넣어 뒀던 주먹밥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그 잠깐 사이에 빨래를 걷고 식탁 앞에 앉아 점심을 먹으며 공부를 했다. 이렇게 여유 있어 본 것도 정말 오랜만이다.
처음에는 보건지소 사람들이 같이 점심을 먹으러 가자고 했었지만, 신희가 외식을 못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따로 밥을 먹는 것이 자연스러워졌다. 사람들과 어울려 밥을 먹지 못하니 친해지는 속도가 언제나처럼 더뎠다.
신희가 주먹밥을 다 먹고 책을 덮었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아 담배 한 대를 물고 옥외 계단으로 나가는 문을 열었다.
거기 서서 담배를 피우는데, 멀리서부터 씩씩거리며 걸어오는 여자 둘이 보였다.
“진짜 들어가게?”
소하가 정아를 붙잡으며 물었다. 길에서 우연히 정아를 만나서 어디 가냐고 물었더니 보건지소에 가서 의사와 따진단다. 동네 사람들을 다 도와주고 다녀서 오지랖이 넓은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다. 소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도 정아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응. 따질 거야.”
“네가 찾아가서 따질 일은 아니잖아?”
소하가 상식적으로 이야기하니 욱해 있던 정아가 조금 진정하는 기미를 보인다.
신희가 담배를 한 모금 더 깊이 빨고 재떨이에 비벼 껐다. 설마 싶어 계단 몇 개를 내려가서 정아의 얼굴을 확인하며 중얼거렸다.
“아니겠지.”
아는 사람과 너무 닮아 당황했다.
신희가 1층에 내려갈 준비를 하기 위해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사이, 정아가 말했다.
“그래도. 사과는 하라고 할 거야. 할머니한테.”
“너도 진짜. 오지랖이 태평양이다.”
소하가 포기했는지 한숨만 쉬었다. 정아는 영순 할머니가 유난히 애틋했다. 잠깐만 이야기해도 울컥 눈물이 날 정도로 고달픈 삶을 사셨어도, 굶주리던 자신의 어릴 때를 떠올리며 음식을 챙겨 보육원에 종종 찾아오시는 그 걸음이 자꾸만 떠올랐다.
“가 볼게. 내일 봐.”
정아가 씩씩하게 인사하더니 보건지소 앞으로 향한다. 결국 소하는 한숨을 쉬며 바로 뒤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보건지소 건물 앞에는 트럭 몇 대가 있고 지역 이름이 적힌 깃발, 태극기, 보건지소 깃발 이렇게 세 개가 바닷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문 안으로 들어가니 한쪽에 금연 포스터가 있고 동네 사람들 몇 명이 로비에 앉아 쉬고 있었다. 정아가 지나가던 하얀 가운을 입은 여자를 붙잡았다.
“저기 죄송한데 혹시 여기 남자 의사 선생님 계세요? 키가 큰.”
할머니들에게 들은 인상착의를 말하자 여자가 의아해하며 되물었다.
“네? 무슨 일이세요?”
“아, 그게…….”
정아가 자초지종을 말하려던 때였다. 여자가 정아의 뒤를 가리키며 말했다.
“혹시 저 선생님 말하는 건가?”
그 말에 정아가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왔는지 그녀의 뒤에 할머니들 말대로 키가 엄청나게 큰 남자가 서 있었다.
정아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분명히 입구에 금연하자고 포스터까지 걸려 있는데 의사에게선 담배 냄새가 났다. 가글을 해서 산뜻한 향기가 나긴 했지만, 가운에 담배 냄새가 배어 있는 모양이다. 신희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들 정도로 희미하게 웃었다.
“들어가서 말씀하시죠.”
그가 말하며 진료실을 턱짓했다. 정아는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정아의 뒤에 서 있던 여자가 물었다.
“이신희 선생님. 아는 분이에요?”
“아무튼 저 찾으러 오신 것 같긴 합니다.”
신희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신희’라는 이름에 정아의 눈이 커졌다. 가운을 입은 여자는 “별일이네.” 하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원래 제가 있던 진료실로 들어갔다.
정아가 커진 눈으로 신희를 올려다보기만 하자 그가 고개를 조금 숙여 물었다.
“나 찾으러 온 거 아니에요?”
“네? 아, 맞는데……요.”
그가 맞을까. 마지막으로 본 신희가 열여덟 살. 14년이 지났다. 신희가 몸을 돌리더니 진료실로 들어가며 말했다.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그럼.”
그의 뒷모습에 정아는 더욱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첫사랑. 책을 읽으며 걸어가던 그 세 살 위의 첫사랑이다. 어릴 땐 그렇게 예쁘장하던 소년이 삼십 대가 되어서는 어른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정아가 신희를 뒤따라 진료실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은 그가 모른 척 물었다.
“어디가 아파서 왔어요?”
“네? 아, 아픈 게 아니라…….”
“아픈 게 아니면?”
신희가 되묻자 정아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무슨 자신감으로 그에게 따지러 왔던 건지.
정아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첫사랑일지도 모르는 남자와 단둘이 있는 이 진료실이 숨 막히고 불편했다.
그녀의 불편한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신희가 물었다.
“반찬 때문에 왔어요?”
어떻게 알았지? 정아가 움찔했다.
“할머니가 얼마나 속상해하셨는지 알아요?”
그녀가 묻자 신희가 표정을 찡그리더니 대답했다.
“전 원래 남이 주는 거 안 먹습니다.”
정아가 고개를 들고 남자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신희의 얇게 쌍꺼풀이 진, 도시적이기 그지없는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하러 의사가 저렇게 잘생겼는지 모르겠네. 그 얼굴에 설레기는커녕 울컥 열이 받는다.
그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신희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아프도록 좋아했던 내 첫사랑. 14년 전 어느 날, 인사도 없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그 이신희.
나에게는 그가 아프도록 소중했는데, 그는 나를 기억이나 할지 모르겠다. 정아가 그런 앙금을 담아 추궁했다.
“왜요? 왜 안 먹어요?”
“알 거 없어요.”
신희의 말을 들었는지 말았는지, 정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협상안을 내놓았다.
“이렇게 해요.”
“뭘?”
“할머니가 해 준 반찬을 먹었는데 너무 맛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아껴 먹으려고 그늘진 곳에 올려놓다가 바닥에 쏟은 걸로. 어때요? 영순 할머니한테 그렇게 말할게요.”
평소 남자를 영 불편해하던 정아는 술술 말이 잘 나오는 제 스스로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신희의 마르고 하얀 얼굴 때문인가. 예쁜 피조물이지만 남자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그가 고집스럽게 대답했다.
“싫습니다. 그랬다가 음식을 또 가져오시면 어떡해요. 남이 한 음식은 절대로 안 먹어요.”
신희에게는 처음 겪는 일도 아니었다. 어차피 이런 식으로 사람들과 관계가 틀어진 것이 한두 번도 아니니, 잠깐만 이 죄책감을 참고 잊으려 노력하면 된다. 남들이 질색하는 눈으로 자신을 보는 건 이미 익숙했다.
애매하게 돌려 말해 봤자, 상대에게 더 큰 상처를 줄 뿐이었다. 악의가 느껴질 정도로 냉정한 신희의 말에 정아가 표정을 찡그렸다.
신희는 정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 혹시 내가 아는 그 꼬마 아니냐고, 물어볼 기회도 없이 관계가 나빠지고 말았다. 익숙한 절차였지만 저 여자가 만약 그때 그 꼬마 애라면. 그 애가 저런 눈으로 보는 건 좀 서운했다. 그래도 꽤 근사한 오빠로 기억되길 바랐으니까. 정아가 그를 흘기며 말했다.
“주변 사람들이 의사 선생님 싫어하지 않아요?”
신희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거 원래 신경 안 써요.”
“괴짜…….”
“누가 괴짜예요?”
신희가 괴짜란 말에 바로 반응했다. 이상한 놈이란 소리깨나 듣고 산 모양이었다. 정아가 인상을 썼다. 저 남자가 저렇게 못됐었나. 기억에 있는 첫사랑은 하얗고, 웃는 게 예쁜. 꽤 괜찮은 사람이었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어려서 남자 보는 눈이 없었나 보다.
하긴 그때는 그럴 만했지. 마음이 상처투성이라 누가 조금만 보듬어 줘도 좋아하며 졸졸 따라다녔을 것이다. 어리고, 다쳐 있던 열다섯 살의 여자 아이는.
첫사랑에 대한 추억이 변색되는 기분이었다. 살면서 더욱 반짝여지고, 미화된 기억. 아무 말 없이 바닷가를 걷기만 해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던 순수함을. 어른이 된 지금은 느낄 수 없는 건지도 모른다. 정아가 휙 일어섰다.
“말도 안 통하는데. 전 그냥 갈래요.”
그녀가 일어서는 순간 신희의 손이 저도 모르게 정아를 잡으려 올라갔다가, 빠르게 내려갔다. 그가 서운한 마음을 애써 감추고 물었다.
“겨우 그거 말하러 온 겁니까?”
“네. ‘겨우’ 그거 말하러 온 거예요.”
정아가 단호하게 말하자 신희가 크게 쉬고 싶은 한숨을 깊은 심호흡으로 대신했다. 자신의 성격이 벌써 그녀를 짜증 나게 만든 모양이다. 신희가 말했다.
“여긴 환자가 오는 곳입니다. 진료가 급한 환자가 있으면 어쩌려고 내 근무 시간을 뺏어요?”
윽. 맞는 말이다…….
정아는 양심이 찔렸지만 왠지 지고 싶지 않아서 신희 앞에 있는 의자에 다시 앉았다. 그러더니 두 손을 제 이마에 올리고 말했다.
“저 아마 열 날 걸요?”
아마 열이 나는 건 뭐람. 신희는 어이없는지 가볍게 한숨을 쉬고 적외선 체온계로 열을 쟀다. 그런데 진짜로 열이 있다.
“……진짜네.”
체온을 확인한 신희가 혼잣말하자 꾀병이 들킬까 봐 겁먹었던 정아가 좀 더 당당해져서 말했다.
“거봐요. 저 감기 걸린 것 같아요.”
“아, 해 봐요.”
신희가 입을 연 정아의 목 상태를 확인하더니 말했다.
“목이 많이 상했네. 약 제때 챙겨 먹고 이틀 뒤에 다시 와요.”
“네에.”
정아가 건성으로 대답했다. 하여튼 이 동네 사람들은 대답 건성으로 하는 게 특기다. 익히 당해 온 신희가 한 번 더 말했다.
“대충 대답하지 말고 진짜로 와요. 날도 풀렸는데 왜 감기에 걸립니까?”
속을 들키자 정아가 조금 주눅이 들어 대꾸했다.
“저도 출근해야죠. 게다가 하나도 안 아픈데…….”
“오라니까요?”
신희가 정아에게 심각함을 표현하려고 살짝 인상을 썼다. 그게 또 은근히 섹시해서, 정아는 자신이었으니 망정이지 다른 여자였으면 벌써 그 반반한 얼굴에 넘어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신희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할머님들이 문학관 아가씨 착하고 예쁘다고 꼬셔 보라고 했는데.”
“으으…… 정말…….”
“별로 착하지도 않네. 말도 안 듣고.”
말을 안 듣다니, 누가 어린앤 줄 아나. 겨우 세 살 많으면서. 어릴 때나 커 보였지 지금은 별것도 아닌 차이다. 정아는 정말 별로 아프지도 않은데 왜 오라는지 몰라 억울한 표정이었고, 신희는 분명히 감기가 심한데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정아가 답답했다. 오랜만에 재회한 둘은 할머니들의 예상과 달리 영 맞지 않았다. 정아가 불만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괜찮다니까요.”
“안 괜찮다니까요.”
“제 상태는 제가 잘 알거든요?”
그녀가 고집을 부리자 신희가 울컥해서 언성을 높였다.
“네가 의사야? 의사가 안 괜찮다잖아.”
그의 말에 정아가 눈이 동그래져서 되물었다.
“알았어요. 오면 되잖아요. 근데 왜 반말이에요?”
“아. 미안해요. 아는 사람이랑 닮아서…….”
신희가 말끝을 흐렸다. 정아가 어딘지 억울해 보이는 커다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바람에 실수했다. 그 까맣게 탔던 꼬마가 이제는 하얀 얼굴의 어른이 되었지만 그 맑은 눈만큼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문뜩 14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가 무안한 마음에 정아를 내보내려고 문 쪽을 턱짓했다.
“다음 환자분 들어오셔야 하니까 이제 그만 나가요.”
“안 그래도 나가려고 했거든요?”
“이틀 뒤에 와요. 꼭.”
정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진료실 밖으로 나갔다. 14년 만에 첫사랑을 만났는데 단숨에 설렘이 사라져 버렸다.
밖으로 나갔던 그녀가 벽에 붙어 있는 종이를 발견했다. 거기 보건지소 점심시간 안내가 적혀 있었는데, 그 내용에 의하면 점심시간이 끝나려면 아직 5분이나 남았다. 시계를 보며 망설이던 그녀가 다시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신희를 흘기며 말했다.
“아직 점심시간이잖아요. 환자분들 시간 뺏은 것도 아니네.”
정아의 핀잔에 할 말이 없는지 신희가 대답이 없다.
“있잖아요.”
그녀가 화났다는 듯 발소리를 크게 내며 걸어와 신희의 맞은편에 다시 앉았다. 그리고 불만으로 가득한 얼굴을 그에게 가까이 하고 물었다.
“나 누구 닮았는데요?”
그녀가 묻는데 신희는 정아를 마주 볼 뿐 말이 없다.
“네? 누구 닮았는데요.”
“강정아.”
신희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아닐까 봐 걱정이 돼서. 네가 아닐까 봐 무서워서. 그녀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기 힘들었다.
제 이름이 나오자 화가 나 있던 정아의 표정이 한 번에 가라앉았다. 그녀가 찬찬히 신희의 얼굴을 살피고, 입을 열었다.
“의사 선생님도 내가 아는 오빠랑 닮았어요. 심지어 이름도 똑같고.”
“다행이네.”
그제야 그녀의 존재를 확인한 신희가 한숨을 쉬듯, 말을 이었다.
“오랜만이다.”
정아는 이제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바로 대답하지 못한 채 신희를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동네 할머니들이 낯가림이 심한 것 같다고 말했던 보건지소 의사 역시 빤히 정아를 바라보며 그녀가 대답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게요. 왜 이렇게 오랜만이에요, 도대체.”
당신 생각. 참 많이 했는데. 왜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야 만났어요, 우리?
어떻게 살았어요?
묻고 싶은 게 많은데, 정아는 어쩐지 이 14년 만에 만나는 첫사랑과 마주 앉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입을 열면 뚜렷한 이유도 없이 울 것 같아서 그냥 입을 열지 않았다. 신희 역시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점심시간이 끝나 환자가 들어오자 정아는 말없이 보건지소를 나왔다.
영순 할머니에게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나. 그 원망스럽던 보건지소 의사가 나의 첫사랑이었다니. 머릿속이 복잡했다.


저자 프로필


저자 소개

기진

1. 연애 상담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2. 달달하고 유쾌한 이야기를 쓰고 싶습니다.
3. 인생 목표가 해피엔딩입니다!

목차

프롤로그
1. 재회
2. 나쁜 기억
3. 위로하는 방법 1
4. 산책
5. 위로하는 방법 2
6. 치료
7. 이상한 음식
8. 약한 여자
9. 안전한 남자
10. 출국
11. 마음을 보내다
12. 아이스크림 1
13. 아이스크림 2
14. 연락
15. 서울
16. 좋은 사람
17. 다시 시작된다
에필로그 1
에필로그 2
외전
작가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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