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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조건 상세페이지

BL 소설 e북 현대물

사랑의 조건

소장전자책 정가3,800
판매가3,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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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조건작품 소개

<사랑의 조건> 현대물, 리맨물, 친구>연인, 본래노멀공, 미인수, 짝사랑수, 후회수, 일상물, 공시점


“고등학생 때부터 선배 좋아했어.”
“미안. 나 그쪽으로는 생각도 안 해 봤거든.”

지금껏 수많은 여성들과 사귀어 왔어도
열정적인 감정은 느끼지 못했던 한이욱.
여자 친구와의 덤덤한 이별을 맞은 다음 날
고교 후배이자 같은 회사 직원인 지운에게 고백을 받는다.

‘내게도 독점욕이란 게 있는데 어째서 얼굴도 모르는 놈에게 내 여자를 뺏긴 것보다
그 녀석, 유지운한테 더 화가 나는 거지?’

갑작스럽게 지운의 마음을 확인한 이욱은
당황스러움보다는 아끼던 후배를 잃었다는 것에 마음의 동요를 느낀다.
그러던 중 지운이 전 애인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알게 되고.

쓰레기 같은 놈이 지운의 옛 남자일 수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다.
“아, 진짜. 왜 하필 그런 이상한 새끼랑 엮이냐고. 사람 신경 쓰이게.”

동성애는 생각에도 없던 이욱은 여태 겪은 이별과는 달리,
점점 자신을 멀리하는 지운을 잃기 싫은 마음이 크다는 것을 깨닫는데…….

한 사람만을 12년간 짝사랑해 온 지운과 그런 그를 잃고 싶지 않은 이욱.
두 남자가 가진 사랑의 조건은 상통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해답을 얻게 될까.’


출판사 서평

〈 본문 발췌 〉

0. 기점


살다 보면, 전혀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뒤통수를 후려 맞는 일이 있다.
“뭐……?”
막 불붙인 담배를 깊게 빨던 이욱은 고개를 들었다. 피어 올라가는 연기 너머로 침대 가에 걸터앉은 그녀가 보였다. 어둑한 스탠드 불빛에 새하얀 이욱의 셔츠를 걸친 여린 몸이 설핏설핏 비쳤다. 단추를 하나둘 끄르는 손길은 연달아 한 섹스 탓인지 나른했다. 목소리 또한.
“나 다른 남자 생겼으니까 헤어지자고. 어차피 서로 질릴 시기잖아.”
이욱은 기가 막혔다. 이별이 한쪽의 일방적인, 그것도 지극히 이기적인 생각으로 이렇게 끝나는 것이었던가. 아니, 그런 것보다 자신의 감정까지 멋대로 속단하는 뻔뻔함에 당장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아, 그건가? 상대방을 같은 입장으로 끌어 내려 죄책감이나 양심의 가벼운 짐까지 털어 버리려는 자기기만?
“후…….”
이욱은 얼마 타지 않은 담배를 재떨이에 툭툭 털은 후 다시 입에 물었다. 구겨진 미간에 짙은 음영이 서렸다. 사귄지 사흘 만에 베드 인을 하긴 했으나, 그래도 1년가량 만났다. 최근 이욱이 대리로 진급하며 한동안 많은 업무에 매달리느라 자주 만나진 못했지만, 그래도 섹스에서 열과 흥이 식는 경우는 없었다. 지금도 아직 침대에 열기가 남아 있지 않나.
이욱은 울컥 짜증이 났다.
‘이번에도.’
무난한 연애, 섹스, 그리고 일방적인 이별 통보.
지긋지긋한 패턴.
치익. 이욱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강하게 빨았다. 그러고 연기와 함께 손을 내저었다.
“아아, 그래라, 그래. 잘 가라, さよなら, Good Bye, До свида'ния, Chao.”
“구질구질하게 받았던 선물 다 내놓으란 소리는 하지 마.”
“괜찮아. 반은 짝퉁이었으니까.”
“뭐?!”
그러나 이욱은 내심 이번에도 그럴 거라고 어렴풋 느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1년 정도 만나기는 했지만 ‘끝’까지 갈 만한 관계는 아니라고. 하지만 이런 식으로 허무한 결말을 맞으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그것도 ‘다른 남자’라니.
‘조금 전까지 내 밑에서 교성을 지르던 여자가.’
짜증이 나면서도 한편으론 당황스러웠다.
보통 이런 경우엔 분노가 일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도 이 여자 몸만 좋아했던 걸까? 아니다. 아니야. 함께 웃고 떠드는 시간이 즐거운 적이 있었다. 분명 좋아했을 텐데.
‘드라마나 영화에서 떠들어 대는 사랑 타령 같은 게 전혀 공감된 적이 없긴 했어도, 좋아하긴 했었다고.’
그럼에도 또 다른 이성은 돌아갔다. 이것 또한 이욱을 당황케 했다. 어느샌가 계산적인 어른이 되어 버린 걸까 싶어, 이번엔 우울한 감정이 찾아왔다.
“어쨌든 선물 돌려 달란 소리는 안 할 테니까 전에 나한테 빌려 간 2백.”
“남자가 쪼잔하게 이럴래? 석 달 동안 한 번도 돌려 달란 소리, 하지도 않았으면서!”
마치 대답을 준비라도 했던 것처럼, 그녀는 ‘연봉도 많이 받는 주제에’부터 시작해서, 그간 이욱에게 쌓였던 소소한 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말재간이 없는 이욱은 네네, 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럴 거면 차라리 섹프가 더 나았지.’
처음부터 계산된 관계였다면, 서로 간의 사생활에 깊숙이 관계되는 일 없이 담백하게 끝냈을 터다. 지금 느끼는 당황스런 감정과 짜증을 느끼는 일 없이.
“태워다 줄까?”
“됐네요!”
화내면서 이욱의 셔츠를 벗는 그녀의 몸이 유연하게 휘었다. 역시 몸매 하나는 기가 막혔다. 새하얀 피부도 깨끗했다.
어쩐지 오늘은 키스 마크나 잇자국을 남기지 말라고 하더니.
이욱은 씁쓸한 눈을 끔뻑이며 담배 연기를 뱉었다. 그녀가 침대 아래에 내팽개쳐진 팬티를 집어 다리 사이에 끼웠다. 그러곤 이욱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딱 잘라 말했다.
“다신 연락하지 마.”
“네.”
차인 건 난데.
이욱은 한층 더 우울해졌다.
“SNS도 수신 거부할 거야.”
“네.”
……차인 건 난데.
이욱은 재차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녀가 브래지어를 집어 들었다. 이번엔 이욱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녀의 긴 머리칼이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내 친구들한테도 연락하지 마. 이미 다 말해 둬서 받지도 않겠지만.”
“알았다고, 이 여자야.”
“뒤에 브라 후크 채워 줘.”
“…….”
이욱이 다섯 번째로 사귀었던 그녀는 이렇게 그의 곁을 떠났다.
이욱은 실연당한 김에 한동안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우울함을 전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향했던 감정이 세간에서 떠드는 ‘좋아한다’는 감정이 맞는지는 모르겠으나, 그에 관해 깊이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생각해 본들 마땅한 대답이 나올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와 헤어진 지 열두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욱은 다시 한번 예상치 못한 뒤통수를 맞았다.
이번엔 좀 아팠다.
“나, 게이야.”
무언가 잘못 들은 것 같다는 생각에, 이욱이 처음 보인 반응은 고개를 갸웃하는 것이었다. 점심시간이라 다소 소란스러운 쌀국수집에서 들을 만한 얘기는 아니지 않나?
‘기획부 사원 유지운’. 평소에는 식사할 때 방해가 될까 셔츠 주머니에 잘 넣고 다니던 사원증이 길게 내려와 있었다. 이욱이 주머니에 쑤셔 넣은 사원증과 똑같은 회사 로고가 새겨진 사원증에는 선이 가늘고 단정하게 생긴, 지금의 모습과 똑같은 사진이 들어 있었다.
지운이 이욱의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고등학생 때부터 선배 좋아했어.”
“……뭐?”



1. 혼란


“미안. 나 그쪽으로는 전혀 생각도 안 해 봤거든.”
정신을 차렸을 때 이욱은 저도 모르게 거절의 답변을 내뱉고 있었다. 지운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었다. 그 후 두 사람은 어색해진 분위기 속에서 점심을 먹고, 별다른 대화 없이 함께 회사로 돌아와 각자의 부서를 향해 헤어졌다.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충격을 준 가해자가 곁을 떠난 후에야 이욱은 뒤늦게 혼란에 잠겼다.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땐 지금보다 좀 더 키가 작았지만 차분한 성격은 여전해서 지운이 동생이면 챙겨 줄 맛이 조금이라도 날 것 같다고 생각했었다. 군대와 대학에서 갈려 이 직장에서 우연히 재회하기 전까지 만나지 못했던 시간이 있긴 했어도 그런 주제로 농담할 성격이 아니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뭐냐고, 진짜…….”
오늘내로 제출해야 할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에 사용할 집중력이 자꾸만 흐트러졌다. 아까는 너무 놀라 이성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지만, 10년 넘게 알고 지냈던 후배에게서 느끼는 배신감이 스멀스멀 올라와 신경을 긁었다. 그에 따라 어제 차였던 사건은 머리 깊숙한 곳에 무서운 속도로 묻혀 갔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이욱은 모니터에 뜨는 오타 실수에 미간을 찌푸렸다.
“씨발, 못 해 먹겠네.”
“한 대리, 뭐라고?”
언제 다가왔는지 노총각 과장이 이욱 뒤에서 음침하게 중얼거렸다. 이욱은 어깨를 움찔거리며 돌아보았다. 사회에 찌든 가식적인 미소가 절로 만들어졌다.
“어제 여친한테 차였거든요.”
“그거 축하할 일이네. 어쨌든 일에 화풀이는 하지 마.”
“네에.”
바로 어제 실연당한 것으로 당장의 잔소리를 무마하다니.
이욱은 금세 후회했다. 그러고 다시 생각해 보았다.
이별을 통보했다고 상대방을 때리거나 심지어 살인까지 하는 미친놈들 뉴스가 종종 뜨는 세상이었다. 그런 개만도 못한 놈들과 같은 선상에 두고 생각하긴 싫지만, 그들의 격렬한 독점욕과 집착은 과연 어디에서 기인한 것일까.
‘내게도 독점욕이란 게 있는데 어째서 얼굴도 모르는 놈에게 내 여자를 뺏긴 것보다 그 녀석, 유지운한테 더 화가 나는 거지?’
일에 대한 집중은 좀처럼 되지 않았고 이욱은 퇴근 시간이 조금 지나서야 간신히 오늘 업무를 모두 처리할 수 있었다. 퇴근 카드를 찍고 사무실을 나온 이욱은 지운이 있을 기획부서실 방향을 흘깃 보았다. 분명 오늘도 야근을 자처하며 남아 있을 것이다.
‘내가 이별에 크게 동요하지 않은 것처럼, 고백한 녀석의 마음도 크게 동요할 수준은 아닌 걸까?’
가만히 서서 저 멀리 기획부서실 팻말을 바라보던 이욱은 한숨을 내쉬었다. 점심때부터 쭉 지운에 관한 생각만 하고 있었다.
이욱은 고개를 돌려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이런 경우 마땅히 상담할 만한 상대도 없었다. 고교생도 아니고 서른이나 된 남성이, ‘고등학생 때부터 알고 지내던 ‘남자’ 후배 놈에게 고백받았습니다’라고 누구에게 털어놓는단 말인가.
‘그나마 고민 같은 걸 털어놓았던 상대가 그 녀석이었잖아.’
위에서 내려온 엘리베이터엔 퇴근하는 사람들로 반이 채워져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오른 이욱은 내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183센티미터의 훤칠한 키에 말끔하게 슈트를 차려입은 30대 초반의 남성이 있었다.
고등학생 때 농구를 했고, 군을 다녀온 후에도 틈틈이 몸이 물러지지 않도록 최소한의 관리를 해 온 덕에 군살은 그리 없는 편이었다. 얼굴이야 대한민국 남자들 대다수가 ‘나 정도면 평균 아닌가’ 생각한다 해도, 이욱은 어릴 적부터 여자에게 고백받는 경험이 잦았다.
이욱은 거울을 보며 찌푸려진 미간을 검지로 눌러 폈다.
‘하지만 끝에 가서 차이는 건 항상 나였지.’
솔직히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가 어떤 타입을 좋아하는지, 그들도 여자들처럼 일단 외모와 키부터 보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니. 더 이상 생각하지 말라고, 한이욱.’
이리저리 돌려 생각해도 변치 않는 사실이 있었다.
한이욱은 유지운에게 고백을 받음과 동시에 ‘아끼던 후배’를 잃었다는 것.

우웅. 엘리베이터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주머니 속 핸드폰이 진동했다. 액정에 뜨는 메시지를 확인한 이욱의 미간이 왈칵 구겨졌다.
[여친느님: 나 너희 집에 아끼던 텀블러 놓고 왔는데. 갖다 줄 수 있어?]
[모르는 사람 물건은 전부 버렸습니다. 그런데 누구세요?]
울컥 올라오는 화에, 이욱은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여 여기까지 작성했다. 그러나 이내 이성을 차리곤 삭제한 후 새로이 메시지를 작성하고 전송했다.
[택배로 보내 주마.]
“하……. 피곤해.”
이욱은 왁스로 정리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육체적 피로와 더불어 정신적 피로가 몰려왔다. 24시간도 안 되는 시간 내에 너무나 많은 일을 겪었다.
삑. 스마트 키를 누르자 절로 펴지는 사이드 미러에 엉망이 된 앞머리가 비쳤다. 이욱은 담배부터 꺼내 입에 물었다. 그러나 곁을 지나는 다른 사람들을 의식해, 차에 올라서야 필터를 잘근 씹으며 불을 붙였다. 시동을 켠 후에도 환풍기만 가동시킨 채 한참 동안 담배만 뻐끔거렸다.
“후…….”
다 없었던 일로 되돌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 어차피 헤어질 관계였다면 그 관계는 돌리지 않아도 좋았다. 그러나 후배는 달랐다. 이미 고백을 거절했지만 머릿속에서 그 기억 자체를 삭제하고 싶었다.
지운의 쓴웃음이 떠올랐다.
‘나, 게이야.’

시야에 번지는 쓰린 연기 속에서 이욱은 더욱 먼 과거를 회상했다.
‘씨발, 게이 새끼 무서워서 같이 목욕하겠냐? 후장 따일지도 모르는데?’
‘더러운 새끼.’
‘야, 너희들 조심해라? 멍하니 있다간 잡아먹혀요~’
군에서 자대 배치를 받았을 때였다. 그곳엔 동성애자라고 소문난 선임이 있었다. 그는 다른 선임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고 늘 상처투성이에, 늘 혼자였다. 언젠가 화장실에 틀어박혀 숨죽여 우는 걸 들은 적도 있었다.
그와 함께 군 생활을 했던 건 3개월도 채 되지 않았고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문득 그가 떠올랐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아도 설움과 고독이 꾹꾹 눌려 담겨 있던 울음소리가.
그 사람은 정말 게이였던 걸까.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10년 넘게 알고 지내던 후배가 지금껏 게이였단 사실도,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전혀 몰랐을 정도로……. 그 사람도 게이라는 걸 제대로 감추며 살아가고 있을까. 유지운은 어떻게 성벽을 감쪽같이 숨기며 살아왔던 걸까.
‘휴일에 술 퍼먹고 같이 잔 적도 많았잖아. 고등학생 때에도 농구부원끼리 1박 2일 놀러 가서 발가벗고 같이 목욕까지 했었는데.’

툭.
“앗, 뜨……!”
멍하니 상념에 잠겼던 이욱은 손등을 스치는 작은 열기에 화들짝 놀랐다. 어느덧 길게 타 버린 재가 바지에 뒹굴고 있었다. 이욱은 담배를 재떨이에 거칠게 비벼 껐다. 그러곤 떨어진 재를 향해 가벼이 입김을 불어 떨어뜨렸다.
‘지금 멍 때릴 때냐.’
완전히 기억을 삭제할 수도, 시간을 되돌릴 수도 없지만 잊어야 한다. 거절했으니 이미 끝난 사이다. 앞으론 이전처럼 함께 술도 마시지 못하고 밥도 못 먹겠지만…, 거절한 주제에 쓸데없이 기대감을 심어 주는 것은 더욱 잔인한 짓이다.
이욱은 그렇게 체념하며 안전벨트를 맸다. 그러나 룸 미러에 비친 그의 미간엔 다시 짜증이 완연한 굴곡으로 져 있었다.

***

금방 시합을 끝낸 것처럼 실내 체육관 공기는 후끈거렸다. 그러나 농구 코트에 서 있는 건 한 사람뿐이었다. 디자인은 같지만 다른 명찰 색깔이 한 학년 아래라는 것을 나타내었다.
유지운.
이욱은 지운을 보자마자 꿈이란 사실을 자각했다.
정말 어지간히 충격이긴 했나 보다. 허탈한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꿈속의 얼굴 근육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10여 년 전의 앳된 모습으로 돌아간 지운이 입을 열었다. 게이란 사실을 고백했을 때와 같은 표정이었다.
‘선배. 나…….’
시선을 비스듬히 내린 지운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하지 마.’
이욱의 목구멍까지 말이 차올랐다.
‘게이야. 고등학생 때부터…….’
‘하지 마. 난 널 잃고 싶지 않다, 유지운. 하지 마.’
간절히 원해서일까. 겨우 입술이 달싹거렸다. 입 속에서 맴돌던 목소리가 바깥으로 나오려 했다. 고백받았던 그 순간엔 너무 놀라 하지 못했던 말이, 본래 했었어야 할 말이.
‘그만……!’
그러나 말문은 다시 막히고 말았다. 이욱 스스로 멈추고 말았다.
현실에선 씁쓸한 미소로 그치고 말았던 지운이 울고 있었다.
이욱이 자신의 고백을 거절할 것임을 예상하고.
‘선배 좋아했어.’
그 말과 함께 이욱은 잠에서 깼다.

이욱은 핸드폰의 날짜와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되돌려지는 일 없이, 기억이 삭제되는 일 없이,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씨발…….”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것을 앎에도, 기대했던 자신이 멍청하게 느껴져 짜증이 났다. 그리고 회사에서 유지운을 마주쳤을 때 어떤 표정으로 그를 봐야 하는지, 평소처럼 인사를 해도 될는지에 관한 사소한 문제가 크나큰 시련처럼 다가온다는 것이 기가 막혔다.
상체를 앞으로 굽히며 이욱은 제 머리칼을 거칠게 헝클었다.
“하…….”
길게 한숨을 내쉬어도 형용할 수 없는 묵직함은 가라앉지 않았다.
이욱은 침대 옆 협탁으로 손을 뻗어 담배를 집었다. 그러다 그저께 밤에 쓰고 내팽개쳤던 콘돔 상자에 시선이 닿았다. 아직 뜯지 않은 콘돔의 개별 포장지 모서리가 슬쩍 나와 있었다.
“…….”
평범한 남성이라면 자위든 원나잇이든 그 외 기타 등등이든 일정 기간마다 성욕을 해소해야 한다. 그러니 고등학생 때부터 자신을 좋아했다면, 유지운은…….
거기에서 이욱은 생각을 멈췄다. 또 다른 이성이 그 이상 생각해선 안 된다는 적신호를 울렸다.
이욱은 콘돔 상자를 협탁 서랍에 처넣은 후 담배를 집었다. 그러곤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문 채 침대에서 내려갔다.
평소 기상 시간보다 이른 6시. 그런 꿈을 꾼 탓에 다시 자기는 글렀다. 이욱은 기왕 일찍 일어났으니 간만에 제대로 된 아침밥을 먹고 출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봤자 배달시켜 먹었던 음식의 남은 반찬이지만 말이다.
“아.”
거실을 나온 이욱은 냉장고를 열어 보다 싱크대 위 선반을 보았다. 유명한 카페 로고가 새겨진 텀블러가 보였다.
해외여행 갔을 때 어렵사리 구한 한정판이었지.
이욱은 검지와 중지 사이에 담배를 끼운 채 연기를 훅 내뱉었다. 귀찮음이 밀려들었다.
‘나중에 보내도 되겠지.’

어째서 일찍 일어난 날은 오히려 평소보다 늦게 되는 걸까.
이욱은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자신이 속한 해외영업부서로 바삐 걸음을 옮겼다. 그러면서 출근 카드를 찍기 위해 어느새 안으로 들어간 사원증 줄을 바깥으로 빼냈다. 그러고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지운과 마주쳤다.
“아…….”
“…….”
왼팔에 잔뜩 쌓은 바인더 중 가장 위쪽의 것을 펼쳐 서류를 넘기던 모양새로 지운이 멈췄다. 지운이 곧바로 시선을 내렸다. 2미터 남짓한 거리에서 어색한 인사가 오갔다.
“안녕하세요.”
“아…… 어.”
사석이 아닌 이상 지운은 이욱에게 존댓말을 썼지만 이렇게 마주친 시선을 노골적으로 피하는 일은 없었다. 적어도 그제까지는.
이욱 역시 아침에 일어나기 직전에 꾸었던 꿈, 실제론 한 번도 본 적이 없던 지운의 우는 모습이 떠올라 슬쩍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바쁘게 각자 사무실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두 사람 옆을 지나쳤지만 그들 사이에 내려앉은 어색한 정적은 깨지 못했다.
“……수고하세요.”
“아…… 그래. 너도 수고해.”
결국 먼저 자리를 피한 것은 지운이었다. 이욱은 엉겁결에 대답하며 끄덕였다. 저벅저벅. 낮은 구두 소리와 함께 차가운 바람이 이욱의 뺨을 스쳤다. 그 순간, 이욱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
뭔가 이상했다. 고백을 받은 자신이 오히려 더 지운에게 긴장하고, 그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이.
더불어 화도 났다.
왜 이놈이고 저놈이고 자기 할 말만 내뱉고 떠나 버리는 걸까. 그야 본인들은 마음이 홀가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신은? 차이고 배신당한 한이욱은?!
“—유지운.”
흠칫. 그리 큰 소리로 부른 게 아니었음에도, 이욱을 돌아보는 지운의 어깨가 경직되었다. 복도에 화가 실린 이욱의 목소리가 울렸다.
“너 잠깐 따라와.”
이욱은 지운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휴게실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업무 시작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인지 음료수와 커피 자판기, 흡연 부스와 간이 의자가 놓인 휴게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욱은 투명한 흡연 부스 안으로 들어가 담배를 물었다. 뒤로 부스 문을 닫으며 지운이 물었다.
“선배…… 왜?”
“길게 안 끌어.”
아무렇지 않게 옆을 지나쳤을 때, 무심함으로 무장했던 지운의 표정은 깨어진 지 오래였다. 본래 감정 표현이 드물었던 만큼 초조해 보이는 현재 지운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유지운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던가.
이욱은 라이터 불로 시선을 옮겼다. 어색해진 관계가 짜증 나고, 낯선 지운의 약한 모습도 짜증이 났다. 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후련하냐?”
“……뭐?”
“난 내 마음 다 꺼냈으니 이제 끝이다. 어차피 받아들여지지도 않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털어놓고 끝내자. —이런 식으로, 내가 받을 충격은 신경도 안 쓰고 뒤통수쳐서 속이 시원해?”
“선배, 그건……!”
아…냐…….
이욱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되받아쳤던 지운의 목소리가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마주친 시선을 피하는 지운의 눈썹이 일그러진 채 내려갔다. 잘근 입술을 씹으며 돌리는 옆얼굴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울음을 참는 것만 같았다. 바인더를 콱 움켜쥔 지운의 손가락이 하얘졌다.
“…….”
“…….”
조금 전보다 더욱 경직된 정적이 찾아왔다.
지운은 숨을 죽인 것처럼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흐느낌은 더욱 없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이 녀석은 대체 누굴까.’
정말 내가 10년 넘게 알고 지냈던 유지운이 맞는 건가? 그냥 똑같은 얼굴을 한 타인이 아닐까? 이욱이 알고 있는 지운은 절대 남 앞에서 울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녀석이 아니었다.
고개를 돌린 채 지운이 입을 열었다.
“하고 싶은 말은…… 그것뿐이지?”
“유지운.”
“미안해, 선배. 기분 나쁘게 해서.”
지운은 이욱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등을 돌렸다. 덥석! 이욱은 부스를 나가려는 지운의 팔을 잡았다. 그와 동시에 지운의 어깨가 흠칫하며 크게 떨렸다.
“기분 나쁘다니, 난 그런 말은……!”
지운의 시선이 잡힌 팔을 향했다. 잔뜩 일그러진 눈썹 아래가 눈물로 젖어 있었다. 그러나 지운은 이내 그 눈을 감추며 이욱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다. 그러곤 빠른 걸음으로 휴게실을 나갔다. 지운이 있었던 자리엔 고교생 때와 달리 성인 남성용 코롱 향기만 희미하게 남았다.
“아…….”
멀어지던 구둣발 소리가 이윽고 사라졌다.
이욱은 간이 의자에 털썩 앉으며 중얼거렸다.
“한심해.”
결국 자신은 지운에게 왜 그런 고백 같은 걸 해서 부담을 주냐고 짜증 낸 것에 불과했다. 지운 스스로 고백하지 않았다면 전혀 알 수 없었을, 게이라는 사실. 그것을 터뜨린 각오에 어린애나 할 법한 이기적인 투정을 부린 것이었다.
‘그렇지만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냉정한 이성은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이니 그만 연을 끊으라고 속삭였다.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잊힐 거라고. 그리고 유지운도 새로이 마음을 정리하고 다른 사람을…….
이욱은 신경질적으로 담배를 빨았다. 그러고 한숨 섞인 연기를 내뱉으며 기껏 왁스로 정돈한 머리칼을 흩트렸다.
게이라는 커밍 아웃과 동시에 줄곧 좋아했다는 고백을 하기까지,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화를 내서 미안하다고 사과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욱은 이내 그 생각을 억눌렀다.
‘그만하자, 한이욱. 더 이상 생각하지 마.’
헤어질 땐 아무런 미련 없이. 비단 연인에게만 해당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러기 싫어도 끊어야 할 땐 끊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욱은 꿈에서 유지운의 눈물을 보았을 때보다 울음을 참던 현실 모습에서 더한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에 놀라 욕을 내뱉었다.
“씨발…….”

***

신경을 돌릴 곳이 필요했다.
이욱은 며칠 동안 업무에 쫓기는 사람처럼 쉴 새 없이 일만 했다. 넉넉하게 여유를 두고 해도 될 일까지 미리 처리하고, 하지 않아도 될 정리와 야근까지 자처했다. 그사이 노총각 과장이 이욱이 여자 친구에게 차였다는 소문을 퍼뜨렸는지 몇몇 동료들이 이욱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냈지만 상관없었다.
차라리 새로운 여자를 찾아 공허하게 비어 버린 마음을 치유받을까 하는 충동도 들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만든 인연 또한 허무한 끝을 맞이한다는 것을, 서른 살의 한이욱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지영 씨. 이 보고서, 내가 참고하라던 자료로 만든 거 맞아? 작년이 아니라 2년 전 프로젝트 모델을 토대로 작성하라고 했던 것 같은데? 조건이나 초안 자체가 완전히 다른데 작성하면서도 이상하다는 점 못 느꼈어? 그리고 수장 씨, 프레젠테이션 오타 신경 쓰라고 했지? 한 번 더 훑어보는 게 그렇게 힘들어?”
“죄송합니다…….”
늦게까지 일을 하고 집에 들어가선 담배를 뻑뻑 피우며 술을 마시다 잠들기를 며칠째. 이욱은 잔뜩 인상을 구긴 채 보고서와 샘플 서류를 내밀었다. 신입 사원인 지영과 수장이 이욱의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두 사람의 반응에 이욱은 깊게 한숨을 내쉬며 구겨진 제 미간을 손으로 지그시 눌러 폈다.
“아니…… 짜증 내서 미안하다.”
그날 이후 같은 회사, 같은 층에 근무하면서도 이욱은 지운과 마주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사내 식당에서도, 휴게실에서도. 이전엔 하루에 한 번 정도 우연이라도 마주쳤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지운이 의도적으로 이욱을 피하고 있다는 것일 터다. —혹은 이전의 마주침이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는 것이거나.

“한 대리님, 식사하러 안 가세요?”
“먼저 가세요.”
점심시간이 되자 사원들이 하나둘 사무실을 나갔다. 지난 며칠 동안 컨디션 관리를 제대로 안 한 탓인지 오늘따라 식욕이 돋질 않았다. 이욱은 동료에게 가벼이 손을 흔들어 준 후 느긋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사내 식당 반대편인 휴게실로 걸음을 옮겼다. 휴게실엔 아무도 없었다.
덜커덩. 이욱은 자판기에 지폐를 집어넣고 대충 아무 캔 커피 버튼을 눌렀다. 솔직히 이욱 입맛엔 커피가 완전히 달거나 블랙이 아닌 이상, 그게 그 맛으로 느껴졌다.
우웅. 이욱이 떨어진 캔 커피를 집으려 할 때였다.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여친느님: 택배 안 오는데??]
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이욱은 그제야 사고에서 완전히 밀려났던 텀블러를 떠올렸다. 정확힌 보내 주기로 했던 약속 자체를 잊고 있었다. 하지만 미안한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이욱은 솔직하게 아직 안 보냈다고 답변을 보냈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 담뱃갑을 꺼내 흔들며 흡연 부스 안으로 들어갔다. 부스 안 간이 의자에 누군가가 놓고 간 라이터가 있었다. 달칵. —화륵! 라이터에서 불길이 크게 치솟았다.
“아욱, 씨.”
시야를 장악하는 불빛에 놀란 이욱의 입에서 욕이 튀어 나갔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라이터를 살펴보니 화력이 최대로 맞춰져 있었다.
“대체 어떤 놈이 이딴…….”
다 큰 어른이 라이터 불에 호들갑을 떤 것 같아 이욱은 머쓱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휴게실엔 이욱 외에—
“……아.”
지운이 막 휴게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무언가에 정신이 팔렸는지 지운은 당장 이욱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러나 이내 이욱을 발견하곤 그 자리에 덜커덕 굳었다. 너무나 확연한 동요였다.
지운이 고개를 돌리며 노골적으로 시선을 피했다.
“아…… 안녕…하세요.”
이욱은 바로 며칠 전 이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날 지운에게 과하게 화를 냈다. 기분 나쁘게 고백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게 만들고 말았다.
—그런 게 아니었는데.
‘기분…… 나쁘다든가 그런 것보다 난…….’
위잉. 지운이 앞에 선 자판기에서 지폐 삽입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음료 밑 버튼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지폐가 반환된 것이다. 구겨진 부분이라도 다시 펴는 건지 지운이 손을 꿈지럭거렸다. 이욱은 고개 숙인 지운의 등을 바라보았다. 이미 인사에 답하기엔 타이밍이 늦었다.
지난 며칠 동안 사내 식당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기에 밖에서 점심을 먹는 건가 생각했었다. 그러나 점심시간이 된 지 얼마 안 된 이 시간에 휴게실에 온 것을 보니…… 점심도 제대로 안 챙겨 먹는 모양이었다.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냐? 좀 마른 것 같다.
이 두 마디가 이욱의 목구멍까지 차고 올랐다. 하지만 이욱은 입술을 깨물며 억눌렀다. 이제 더는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기대감을 심어 주는 잔인한 짓은 하지 않기로 했다.
더 이상 유지운이란 인간은 이욱에게 있어 아끼는 후배가 아니라고.
그러는 사이에 다시 지폐가 반환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지운은 아예 다른 지폐를 꺼내기로 했는지 안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그럼에도 지운은 고개를 조금도 돌리지 않았다. 자판기에 어렴풋 비치는 이욱의 시선이 내내 자신에게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고서.
그제야 이욱은 깨달았다. 유지운은 이미 자신과 인연이 끊어질 것을 각오하고 고백했던 것임을. 그리 생각하니 유지운을 잃은 상실감이 더욱 커졌다.
“……아래에.”
이욱은 라이터를 본래 있었던 자리에 툭 던졌다. 이욱의 목소리에 놀란 건지, 라이터가 떨어지는 소리에 놀란 건지 지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이욱은 피우지 않은 담배를 손으로 부러뜨려 재떨이에 버렸다. 그러곤 흡연 부스를 나오며 말을 이었다.
“내가 뽑은 캔 커피 있으니까 밥 먹고 마셔라. 속 버린다.”
“…….”
지운은 대답하지 않았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이고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모습에 처음으로 지운을 향한 동정심이 올라와 이욱을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하게 정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잔인하게 쐐기를 박는 짓이 될지도 모르지만 이는 서로를 위한 것이었다. 적어도 이욱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욱은 자신에게도 들려줄 인사를 말로 내뱉었다.
“잘 지내라.”
“……!”
지금껏 쌓아 온 정이 있다 해도 동정심으로 남자와 사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상상해 본 적도 없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물며 동생처럼 생각하던 유지운과는 더욱 더.
이욱은 콱 움켜쥐어진 지운의 손을 보곤 휴게실을 나왔다. 그러나 발은 돌덩이라도 매단 것처럼 무거웠다. 툭. 결국 이욱은 몇 걸음도 가지 못한 채 복도 벽에 기대고 말았다.
정말 유지운과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야 하는 걸까? 유지운이 그렇게 잘못한 건가? 게이면 사람을 좋아해선 안 된단 말인가? 지금껏 자신을 속인 것에 배신감을 느끼긴 했지만 10여 년이 넘는 오랜 연을 매정하게 끊어 버리는 것이 정말 옳은 판단일까? 유지운이 자신을 향한 마음만 단념해 준다면, 어쩌면 이전처럼—
……흐윽.
이욱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잔뜩 억눌린 울음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이욱은 소리가 난 휴게실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혐오로 얼굴이 뜨거워졌다.
유지운이 마음을 단념해 준다면, 어쩌면 이전처럼 돌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유지운은 지금껏 자신에 대한 감정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버틴 것이 아니던가!
‘나란 새낀 대체 나이를 어디로 먹은 거야……!’
이욱은 저도 모르게 휴게실로 몸을 돌렸다. 한 걸음, 두 걸…음. 거기에서 이욱은 멈췄다. 고백을 거절하고 작별 인사까지 고한 주제에 대체 뭘 어쩌려고.
우웅.
그 순간, 조용한 복도에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요란스럽게 울렸다. 깜짝 놀라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이욱은 황급히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곤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욕을 삼켰다. 여친느님은 얼어 죽을.
우우웅. 진동 소리가 더욱 크게 울렸다. —쿵. 그와 동시에 휴게실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자판기에 사람이 부딪친 것만 같은 소리가.
이욱은 수신 거절을 누른 후 아예 전원을 꺼 버렸다. 그러곤 심호흡을 한 번 하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괜찮냐?”
역시나 자판기에 부딪친 건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지운은 왼팔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축 늘어뜨린 지운의 왼손엔 조금 전 이욱이 뽑았던 캔 커피가 들려 있었다. 여전히 이욱을 돌아보지 않은 채 지운이 말했다.
“……가.”
저 짧은 한 마디에 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까지 모를 정도로 미련하진 않다. 이욱은 이젠 아주 작은 걱정도 할 수 없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는 것을 절감했다.
“……미안하다.”
그러고 지운을 둔 채 다시 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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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

2016.02.05.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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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암브
나중에 읽어도 재밌는 작품을 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참 어렵네요. ^^;

목차

0. 기점
1. 혼란
2. 재회
3. 한 걸음
4. 교제
5. 매듭
6. 외전 - 유지운
7. Epilogue
8. 외전 -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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