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하불명

〈 본문 발췌 〉

序章.


삼복아.
할애비 말 잘 들어라.
뭐든지 욕심내면 탈 나는 거여.
사내가 불알 두 쪽만 건사하면 되지, 뭐 한다고 더 가지려고 혀?
가진 것에 만족하며 살믄 다 잘될 것이란게. 알겄냐?
봐라. 요놈, 황구가 산증인 아니겄냐.
나만치 살았는데도 팔팔한 거 보래이.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믄 그게 다 복이여.
……자냐?



第一章. 형문산의 사냥꾼과 사자맹의 이공자


딱!
“악!”
이마가 화끈거렸다. 삼복은 낑낑대며 이마를 문질렀다. 굵은 문설주에 부딪힌 탓에 통증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왕!
삼복의 비명에 놀랐는지 마루 밑에서 자고 있던 황색 털을 가진 개가 펄쩍 뛰었다.
“괜찮아, 노옹.”
끼잉?
털을 쓰다듬는 부드러운 손놀림에 개, 노옹(老翁)의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으그그. 할아버지가 또 장죽으로 때리는 꿈을 꿨지 뭐야.”
부루퉁하니 입을 내민 삼복의 눈이 흐릿해졌다. 평소엔 과묵했던 조부가 말이 많아지는 때가 있다면, 그건 술을 마시고 난 후였다. 그때엔 한 시진(약 두 시간)이고, 두 시진이고 잔소리가 끊이지 않아 삼복은 종종 졸기 일쑤였다. 그럴 때마다 조부는 물고 있던 장죽으로 삼복의 이마를 따끔하게 때리곤 했다. 그리운 추억이었다.
이제 조부는 없다. 미수(米壽, 88세) 넘도록 장수했으나 순리에 따라 자연으로 돌아갔다. 다른 이들은 호상(好喪)이라며 좋은 곳에 갔을 거라고 위로했지만 유일한 가족이었던 삼복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러나 시간은 괴로움도 무디게 했다. 한 해가 지나자 삼복은 겨우 조부의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혼자서 살아야만 하는 현실과 헌신적인 노옹의 위로―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에 겨우 자신을 추슬렀다.
삼복은 다리를 죽 펴고 뻐근한 어깨와 목을 꾹꾹 주물렀다. 잠시 선잠에 든 것뿐인데 이미 해가 중천에 솟아 있었다. 슬슬 산에 놓은 덫을 확인하러 갈 때였다. 따로 시각을 알려 주는 도구가 없기에 삼복은 해의 위치와 그림자가 늘어진 방향으로 왕복 시각을 얼추 짐작할 수밖에 없었다.
“노옹, 잠깐만 기다려. 준비해서 나올게.”
왕!
마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것처럼 노옹이 힘차게 짖었다. 삼복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내부는 두 사람 정도만이 겨우 드러누울 수 있을 정도로 협소했다.
삼복은 안을 훑는 일 없이 곧바로 벽에 걸린 활을 집었다. 손바닥에 착 달라붙는 느낌에 씩 웃음이 나왔다.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활이지만 이젠 그의 손에도 제법 익었다. 삼복은 전통과 열 개의 화살까지 다 챙긴 후에야 바깥으로 나갔다.
그사이에 노옹도 부지런히 움직였는지 컹컹대며 입에 문 무언가를 내밀었다. 무두질한 가죽으로 만든 각반과 토시였다. 늘 있는 일인 듯 삼복은 여상한 얼굴로 그것들을 받아 착용했다. 기다란 끈으로 헐렁한 각반을 다리에 단단하게 여미고 마루 한쪽에 놓아둔 가죽 칼과 사냥용 끈, 돼지나팔을 망탁(網槖, 망태기)에 넣었다.
“노옹, 자.”
마지막으로 노옹에게 상으로 육포를 던졌다. 소금에 절여 처마에 걸어 놓은 것이었다. 노옹이 펄쩍 뛰어 낙하하는 육포를 낚아챘다. 날카로운 이빨로 고기를 질겅질겅 씹는 모습이 자못 사나워 보였으나 삼복은 그저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날 좋고, 바람은…… 흐읍, 음, 좋아. 비도 안 오겠다. 어제부터 맑았으니 잘하면 덫에 노루가 걸렸을지도 몰라. 노옹, 잡으면 반은 네 거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삼복이 농을 건네자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한 노옹의 시선이 돌아왔다. 육포를 질겅거리느라 대꾸조차 없었지만 진심이 느껴졌다. 삼복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산속의 작은 초옥에 사는 이라곤 삼복과 노옹밖에 없었다. 그깟 고기쯤 반으로 뚝 떼어 준다고 해서 아쉬울 건 없었다.
“그럼, 가 볼…….”
챙―! 채챙! 챙!
그때 날카로운 소리가 삼복의 말을 갈랐다. 칼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삼복은 멀뚱히 산 아래를 응시했다. 시야가 좋아도 눈살을 찌푸려야 겨우 보일 정도로 먼 곳에서 올라온 소리였다. 굳이 확인해 보지 않아도 어디에서 난 소린지잘 알고 있었다.
“산신제…… 하나 보네.”
사아아아아아―
시원한 바람이 볼을 스치고 지나갔다. 절벽을 타고 올라온 날카로운 바람도 꼭대기에 이르니 산들바람이나 다름없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칼날의 파찰음이 삼복의 귀를 어지럽혔다.

삼복이 사는 곳은 호광성 북쪽 끝에 있는 형문산으로, 마을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지만 가장 잘 알려진 마을을 고른다면 누구나가 ‘장가촌’을 가리켰다.
그곳은 장 씨가 대다수인 집성촌인데 형문산 인근 마을 중 가장 규모가 컸다. 장가촌의 사내들은 사냥으로, 여인들은 약초로 생계를 유지했다. 실력이 좋은 만큼 수확물도 최상질이라 형문현 지현(知縣, 현감)이 주시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 소리 또한 장가촌에서 나는 것이었다. 혼자인 삼복과 달리 그곳 사내들은 무리 사냥을 주로 했다. 개인 사냥에 비해 장기간으로 진행되는 데다 동일하게 이득을 분배해야 하긴 하지만, 여럿인 만큼 큰 사냥감을 포획할 수 있고 잡은 짐승을 팔았을 때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런 그들을 위해 장가촌에선 종종 산신제를 지냈다. 위험한 사냥을 하는 마을 장정들의 무사 귀환을 바라는 의미도 있지만 신성한 산에 피를 흘리면 노할 산신을 달래려는 의도도 있었다.
짝―!
삼복은 양손을 맞부딪치고 깊게 허리를 숙였다. 그들의 기원에 자신의 기원도 얹었다. 어째 다 차린 밥상에 젓가락 하나 놓는 뻔뻔함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비록 미신일지라도 혹시나 하는 마음은 그도 가지고 있는 탓이었다.
대충 산신에게 기원한 삼복은 곧게 허리를 폈다. 이미 시간을 많이 지체했다. 탁 트인 성 내부와 달리 산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덫을 놓은 곳까지 다녀오려면 서둘러야 했다.
“가자, 노옹.”
삼복이 돌아서자 그와 마찬가지로 절벽 아래를 빤히 보던 노옹이 코를 찡긋거렸다. 꼬리로 다리를 툭툭 치는 게 마치 그를 위로하는 듯했다.
삼복은 쓰게 웃었다. 가슴이 조금 따끔거렸다. 괜히 살갗을 북북 긁어 그 느낌을 떨쳐 냈다. 어차피 갖지 못할 것. 애초에 미련 두지 않는 게 좋았다. 진실을 아는 순간 성인 ‘장 씨’를 버렸다. 그런 삼복에게 가장 중요한 건 생존과 노옹이었다.
“늦으면 고기 다 내 차지다! 뒤처지지 마!”
컹!
삼복이 땅을 박찼다.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았음에도 신형이 앞으로 죽죽 뻗어 나갔다. 오랜 산 생활로 달리기 하나는 자신 있었다. 바람을 가르고 뛰어가는 그의 뒤로 노옹이 경쾌하게 발을 놀렸다.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로운 하루였다.

***

원(元) 지정(至正) 이십팔 년, 홍건적을 주축으로 한 농민 봉기로 인해 원나라의 마지막 황제 보르지긴 토곤 테무르가 통주(通州)에서 패하고 사막 북쪽으로 도주함으로써 중원은 다시 한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해, 홍건적의 우두머리였던 주원장이 집경(集慶)을 수도로 정하고 제위에 오르니 그가 명의 태조, 홍무제였다.
주원장은 끈질기게 원의 잔당을 뒤쫓았다. 명 홍무(洪武) 삼 년, 토곤 테무르가 몽골 다륜 지구에서 사망하고 그의 후비와 황손 등을 포로로 사로잡음으로써 목적을 이루는 듯했으나 토곤 테무르와 기황후의 아들인 태자 아유르시리다르를 끝내 놓치고 말았다. 도망친 아유르시리다르는 몽골 고원 카라코룸에서 황좌를 계승해 북원(北元)을 수립하는데…… 그가 곧 소종이다.
다시 대륙을 노리는 아유르시리다르와 되찾은 대륙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주원장. 새로운 시대가 열렸건만 아직은 불안정하기만 했다.
하지만 원나라의 무인 통제 정책에서 벗어난 무림엔 희망이 꽃피기 시작했다. 대륙 곳곳에서 무인들의 열망이 태동하고 그로 인해 일어나는 갈등도 즐거운 비명으로 치부됐다. 봉문과 멸족으로 시들어 가던 정파의 기세가 서서히 일어나면서 협객을 자처했다가 지명 수배됐던 수많은 의협인도 즐거이 거리를 돌아다녔다.
그러한 이때……하나의 소문이 은밀히 호담자(嫭談者)를 통해 퍼지기 시작했다.

***

원(元)의 무인 통제 정책으로 수많은 이들이 핍박받았다지만 말기에 이르러선 오히려 세력을 키운 곳이 있었다.
바로 사도련(四徒聯)이다.
정파가 체면과 명분 때문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고 몰락한 것과 달리 사파는 온갖 불법을 자행하며 생존의 길을 틔웠다. 자고로 금력 앞에 청빈한 이 드물다 했다. 초원을 질주하던 강맹한 전사도 오십여 년 이상 한자리에 안주하다 보면 타락하기 마련이었다.
사파는 그 틈을 파고들었다. 뇌물을 먹이고, 여자를 제공하고, 그들의 손발이 되어 암암리에 활약했다. 한족 입장에선 매국노나 다름없지만 그들은 본시 타인의 이목을 신경 쓰는 자들이 아니었다. 사파인이 가장 중요시하는 건 생존과 욕망. 그것을 위해서라면 누구와도 손을 잡았다.
그렇게 세력을 불린 사파에서도 크게 강성한 곳이 넷 있었으니…… 호광성의 사자맹(死者盟), 복건성의 와룡방(臥龍幇), 항주의 흑사방(黑蛇幇), 소주의 비룡방(飛龍幇)이었다. 그들은 서로의 손을 잡고 ‘사도련’이란 연합체를 만들어 사파의 세력을 굳건히 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최고를 뽑자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사자맹을 꼽을 터였다. 사도련의 련주 또한 사자맹의 맹주가 겸임하고 있었다.
오라, 강자들이여. 투지의 대지로.
다른 사파가 불법적인 일로 세력을 키웠다면 사자맹은 오로지 무력으로 한 성(省)을 발아래에 뒀다. 그것은 현 천하제일인인 사자맹의 맹주 파천도제(破天刀帝) 구백천의 역할이 컸다. 더해서 그를 필두로 파천도제의 일곱 제자와 장로 격인 사십칠랑(四十七狼)이 각자의 위치에서 무림에 위맹을 떨쳤다.

호광성 남쪽 동정호 인근의 사자맹.
사자맹은 거대한 연무장을 중심으로 사합원(四合院) 형태의 집 수십 채를 일정한 간격으로 맞물리듯이 지은 터라 그 모습이 흡사 거대한 요새와 같았다.
사자맹의 입구는 그저 문설주만이 덩그러니 선 채 문짝이 없었는데, 강자의 도전은 언제든지 받아 준다는 오만한 명성에 걸맞은 모습으로써 오히려 그것이 더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저 문설주만이 덩그러니 서 있는 대문을 지나면 일반 맹도들이 거주하는 외정(外庭)이 나오고 두 번째 대문인 이문(二門)을 지나서야 비로소 내원이 나온다.
내원의 가장 중심부엔 사자림이라 불리는 대숲이 있다. 바로 사자맹의 맹주 파천도제 구백천이 머무는 곳이다. 그곳을 중심 삼아 일곱 방향으로 일곱 제자가 머무는 전각이 위치하고 그 바깥으로 사십칠랑의 전각이 맹주와 그의 제자들을 보호하듯 둘러싼 형태를 보이니, 설계 단계부터 철저한 계산하에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외정과 달리 심처인 내원 중정(中庭)의 일곱 전각 중 한 곳, 흑림전(黑林殿)으로 향하는 한 인영이 있었다. 곧게 편 허리, 유려한 걸음, 머리에는 백색의 문사건을 쓰고 손으로는 제갈공명이 애용했다는 백우선을 살랑인다. 위맹한 사자맹의 무사라기엔 차림새부터가 달랐다.
문사 차림의 청수한 중년인이 흑림전으로 들어섰다. 전각 밖에서 시립하고 있던 시비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중년인은 말문을 열려는 시비를 손으로 저지하고 직접 문을 열었다.
막아서려던 시비는 잠시 고민하다가 뒤로 물러섰다. 흑림전의 주인에게 중년인은 측근 중 하나였다. 주인의 책사이자 사십칠랑의 말석을 맡은 사람인만큼 전각의 주인도 살짝 타박은 할지언정 이 정도 무례는 가벼이 넘기는 편이었다.
안으로 들어선 중년인은 주렴을 헤치고 들어서다 작게 감탄했다. 원형 탁자에서 고요히 책을 읽고 있는 한 사람 때문이었다.
남방 흑진주처럼 새까만 머리카락이 허리춤에서 요요히 살랑거리고, 유려한 이마 아래 숯처럼 까만 눈썹이 능선처럼 완만하게 휘었다. 그 아래 반개한 눈은 별처럼 반짝였으며 오뚝한 코를 스치고 우묵한 인중을 지나면 산수유처럼 붉은 입술이 작게 달싹여, 보는 이로 하여금 갈증을 일으켰다. 가히 절세가인(絶世佳人)이었다. 탄탄하게 잡힌 골격이 아니라면, 그래서 사내라는 게 두드러지지 않았다면 능히 무림에서 꽃이라고 불릴 만한 미모였다.
그가 바로 이 흑림전의 주인이자 파천도제 구백천의 둘째 제자인 오절도왕(五絶刀王) 사지평이었다.
기다랗고 새하얀 손가락이 느릿하게 책장을 넘겼다. 서책을 응시하는 심각한 얼굴이 독서에 얼마나 열중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 줬다.
그가 열 번째 책장을 넘겼을 때에야 중년인은 퍼뜩 정신 차렸다. 사내의 측근으로 산 세월이 적지 않았음에도 인세(人世)의 것이 아닌 듯한 미모엔 쉬이 적응할 수 없었다. 저 미모는 보는 이를 미혹에 빠뜨리는 독이었다.
중년인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공자, 책 거꾸로 드셨습니다. 어차피 읽지도 못하는 거 왜 그렇게 뚫어지게 보고 계십니까?”
“…….”
사지평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뒤이어 날카로운 파공성이 터졌다. 재빨리 중년인이 고개를 숙였으나, 일직선으로 날아가던 연적(硯滴)은 유연하게 선회하며 그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중년인은 악 소리도 못 내고 철퍼덕 엎어졌다.
머리를 가격하고 튕겨 나간 연적을 어디선가 튀어나온 그림자가 낚아채 다시 사지평의 앞에 놓았다. 그림자, 흑명이 한껏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주공, 비싼 겁니다.”
“썅.”
그 말에 사지평이 연적을 훑었다. 이미 두 사람에게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책사, 가사군은 뇌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