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리디 접속이 원활하지 않습니다.
강제 새로 고침(Ctrl + F5)이나 브라우저 캐시 삭제를 진행해주세요.
계속해서 문제가 발생한다면 리디 접속 테스트를 통해 원인을 파악하고 대응 방법을 안내드리겠습니다.
테스트 페이지로 이동하기

순정 상세페이지

BL 웹소설 현대물 ,   BL 웹소설 판타지물

순정

순정 표지 이미지
19세 미만 구독불가

소장하기
  • 0 0원

  • 순정 32화 (완결)
    • 등록일 2017.11.27.
    • 글자수 약 9.2천 자
    • 200

  • 순정 31화
    • 등록일 2017.11.24.
    • 글자수 약 7.1천 자
    • 200

  • 순정 30화
    • 등록일 2017.11.23.
    • 글자수 약 7.1천 자
    • 200

  • 순정 29화
    • 등록일 2017.11.22.
    • 글자수 약 7천 자
    • 200

  • 순정 28화
    • 등록일 2017.11.21.
    • 글자수 약 7.3천 자
    • 200

  • 순정 27화
    • 등록일 2017.11.20.
    • 글자수 약 7.6천 자
    • 200

  • 순정 26화
    • 등록일 2017.11.17.
    • 글자수 약 6.7천 자
    • 200

  • 순정 25화
    • 등록일 2017.11.16.
    • 글자수 약 7.1천 자
    • 200

시리즈의 신간이 출간되면 설정하신 방법으로 알려드립니다.


리디 info

* 단행본으로 출간된 도서입니다. 단행본 이용을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 링크로 접속 부탁드립니다.
단행본 보러 가기>>


이 책의 키워드


다른 키워드로 검색

순정작품 소개

<순정> 키워드 : 시대물, 현대물, 판타지물, 전생/환생, 인외존재, 오해/착각, 애증, 계약, 서브공있음, 이복형제, 악마수, 순진수, 짝사랑수, 후회수, 병약수, 인간공, 수말고다른사람좋아하공, 냉혈공, 능욕공, 집착공, 시리어스물, 근친물

“계약을 하자. 내가 너의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줄게.
대신 네가 죽고 나면 네 영혼을 나에게 줘.”


인간 세상을 떠돌던 악마 이스엘은
어느 날 짝사랑의 아픔에 울던 피닉을 마주친다.
그에게 매혹된 이스엘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제안하지만,
피닉의 세 가지 소원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를 가져오는데…….

“빨리 다시 되돌릴 수 있다고 말해!”
“왜 화를 내……? 나는 소원을 들어준 건데.”


피닉을 위해 금기를 깨고 저승의 강을 건너려던 둘은
결국 지옥의 왕과 천사에 의해 벌을 받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한국의 대학생으로 재회한 피닉과 이스엘.

“요즘 꿈에 자꾸 어떤 남자가 나와요.”
“그 꿈…… 언제부터 꿨는데?”


사랑을 위해 악마에게 영혼을 판 인간 피닉과
사랑을 위해 인간에게 심장을 바친 악마 이스엘.
세 가지 소원의 결과로 천국과 지옥에서 버림받은 인간과 악마의
진실한 사랑을 찾는 애절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말해 줘. 나를 사랑했어?”


출판사 서평

〈본문 발췌〉

제1장 : As you wish


어찌하여 앞길이 보이지 않게 사방을 에워싸 버리시고는 생명을 주시는가
(욥 3:23)

피닉을 처음 만난 건 1894년의 겨울이었다. 늦은 밤이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네 개의 탑이 세워진 거대한 저택의 웅장함에 흥미를 느낀 나는 복도를 걸으며 벽에 걸린 그림을 구경했다. 그러다 열린 방문 너머로 남자의 흐느낌 소리를 들었다. 예기치 못한 우연이었다. 우연으로 시작해 운명으로 발현할.
남자는 붉은 가죽 소파에 앉아 있었다. 검은 대리석 벽난로에서 어른대는 불기가 그의 얼굴에 음영을 드리웠다. 벽난로를 제외하고 불을 전부 끈 방은 어두웠지만, 나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고전적인 미남이었다. 특히 속눈썹이 짙은 눈이 그랬다. 남자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 밑에 그늘을 드리우는 검은 속눈썹은 일견 애처롭게 보일 정도였다. 살짝 내리깐 눈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서정을 담고 있다. 하지만 높게 솟은 콧대와 선이 뚜렷한 입술에서는 눈매와 상반되는 야성이 느껴졌다. 한없이 우울해 보이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느낌의, 종잡을 수 없는 인상을 가진 남자였다.
나는 단번에 그의 눈에 매혹되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심해처럼 어둡고 깊은 파란 눈이 흡반을 가진 양 거세게 나를 끌어당겼다. 아름다운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 그의 남자다운 뺨을 적셨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유도 없이 초조해졌다. 나는 원래 인간에게 간섭하지 않지만, 어쩐지 그에게는 말을 걸고 싶었다. 그래서 모습을 드러냈다.
갑자기 허공에서 나타난 나를 보고도 남자는 놀라지 않았다. 그저 소리를 죽여 울기만 했다. 내가 물었다.
“어째서 울고 있어?”
그가 답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의 고통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에게 구애할 자격이 없는 것이 비참해서 울고 있단다. 나는 이해할 수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자격을 만들면 되잖아?”
“너는 몰라. 자격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야. 주어지는 거지.”
그의 말대로 나는 몰랐다. 인간의 풍습은 내겐 너무 어렵고 복잡했다.
하지만 고통에 몸부림치는 청년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나는 손으로 턱을 받치고 잠시 그의 모습을 감상했다. 흑표범처럼 미끈한 얼굴, 온몸으로 풍기는 사내다운 분위기와 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순수한 눈물. 문득 저 남색 눈동자가 갖고 싶었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도, 얼굴을 문지르는 커다란 손과 파르르 떨리는 입술도 갖고 싶었다. 그의 울음과 웃음, 그 외의 다른 표정들도 모두 갖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제안했다.
“우리 계약을 하자. 내가 너의 세 가지 소원을 들어줄게. 대신 네가 죽고 나면 네 영혼을 나에게 줘.”
그렇게 피닉은 내 첫 번째 계약자가 되었다.

***

나는 지옥의 귀족이며 역병과 질투의 아들이다. 질투의 가슴을 찢고 세상에 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살아 있는 인간의 피를 마시고 살점을 뜯어 먹는 일이었다. 인간의 뜨거운 피는 나를 황홀하게 했고 붉은 살점은 내 혀를 달게 적셨다. 태어나 처음으로 맛본 진미였다. 그 얼굴이 아름답든 추하든, 그 신분이 고귀하든 천하든 인간은 내게 모두 먹이로만 보였다.
하지만 피닉은 달랐다. 나는 그를 먹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말을 걸고 싶었다. 곁에 두고 관찰하고 싶었다. 항상 무표정을 유지하는 그가 다른 표정도 보여 주었으면 했다. 그래서 그와 계약을 맺었다. 이후 나는 소원을 들어준다는 핑계로 내내 그의 곁에 머물렀다.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며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했다. 피닉은 불편해 보였지만, 딱히 제지하지는 않았다.
기실 피닉은 처음 제 앞에 나타난 나를 요정이나 천사 뭐 그런 종류의 것으로 착각했다고 했다. 계약을 맺고 나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아마 겉모습을 보고 그런 거겠지. 고위 악마의 외모는 인간을 현혹하는 데 안성맞춤이니까. 어쨌거나 내 정체를 안 후에도 피닉은 그다지 후회하는 기색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세 번의 기회를 가장 효과적으로 써먹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눈치였다.
일주일 뒤, 피닉이 내게 처음으로 빈 소원은 이러했다.
“내게 작위를 줘.”
“작위?”
“그래.”
“그게 뭔데?”
피닉은 귀족의 아들이었지만 차남으로 태어난 탓에 작위를 가질 수 없었다. 그의 아버지가 가진 작위와 영지, 그 외 모든 권리는 장남인 형에게 상속될 것이었다. 피닉의 몫으로 돌아오는 건 아주 약간의 재산뿐이다.
나는 이 모든 사실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꼬치꼬치 캐물었다. 피닉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기 때문이다. 피닉은 곤란하다는 듯 인상을 쓰면서도 성실히 답해 주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나는 웃음을 터트리며 피닉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작위는 누구에게로 상속되는데?”
“보통 첫째 아들에게 상속되지. 장남이 불의의 사고를 당하면 차남에게, 차남도 죽는다면 그다음 아들에게로. 만약 아들이 없다면 가까운 친척에게.”
“너희 집안의 작위는 지금 누가 가지고 있는데?”
“내 아버지, 오데어 백작이 가지고 있다.”
“그럼 아버지가 죽으면 너한테 오겠네?”
“나는 차남이다. 작위는 내 형님에게 승계되겠지.”
“차남?”
“둘째 아들.”
그 정도는 아는데. 몸을 일으켜 테이블 위에 놓인 케이크를 찾았다. 케이크의 속을 장식한 크림을 손가락으로 찍어 입에 넣고 쭉쭉 빨았다. 엉망진창으로 먹어 대는 내 앞에서 피닉은 반듯하게 앉아 차를 마셨다.
“가능한 빨리 그 작위라는 것을 네게 주는 게 좋겠지? 안 그러면 그 아가씨가 결혼해 버릴 테니까 말야.”
“그래 주면 고맙겠군. 하지만 작위를 얻을 만한 공을 세우는 일이 그렇게 쉽지는 않아. 여왕 폐하께서는…….”
그가 작위를 얻는 방법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오직 그의 목소리와 얼굴에만 집중했다. 어서 피닉의 소원을 들어주고 싶어 심장이 쿵쾅거렸다. 빨리 밤이 왔으면 했다.
그의 소원을 들어주면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 있을 테지. 인간들은 친애하는 사람의 볼에 입맞춤을 남기기도 한다던데, 어쩌면 그런 것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몰라.
“혹은 남아프리카나 인도에서…….”
“피닉.”
“왜 그러지?”
“소원 들어주면 뭘 해 줄 거야?”
“……내 영혼을 가져가기로 했잖나.”
“아니, 그거 말고.”
“…….”
“웃어 봐. 환하게.”
피닉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마지못해 웃어 보였다. 시원한 입매가 보기 좋게 위로 휘어졌다. 그 모습을 보는데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케이크의 크림과 빵에 곁들여 나온 잼을 피닉의 턱에 묻히며 장난을 쳤다. 그의 흰 크라바트에 찐득한 붉은 덩어리가 묻었다. 피닉이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뭐든지 들어줄게.”
“…….”
“네가 원한다면, 뭐든지.”

사위가 고요했다. 사용인들까지 모두 잠든 밤, 꺼져 가는 벽난로의 장작 타는 소리만이 괴괴히 복도를 울렸다. 나는 피닉의 형을 찾아갔다.
침대의 휘장을 걷었다. 미색의 이불 속, 피닉과 똑 닮은 얼굴이 평온하게 누워 있다. 옆에는 그의 부인이 자고 있었다. 허리를 굽혀 형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나쁜 꿈을 꾸는지 빽빽한 속눈썹이 이따금 가늘게 경련했다. 피닉과 찍어 낸 것처럼 닮은 얼굴임에도 아무런 감흥이 들지 않았다. 피닉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귀를 기울여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충만한 생명의 소리였다. 그 소리를 앗아 가기는 매우 쉬웠다. 내 손이 스치는 것만으로도 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숨을 쉬지 못해 괴롭게 헐떡헐떡 몸부림치더니 몇 분도 되지 않아 목을 꺾고 죽어 버렸다. 옆자리의 남편이 죽어 가는 와중에도 깊게 잠든 부인은 미동조차 없었다.
한껏 구겨진 그의 몸을 정성스레 펴서 도로 반듯하게 누였다. 상처도, 독의 흔적도 없는 죽음. 누가 봐도 의심하지 못할 사랑스런 죽음이었다.
휘장을 치고 돌아서기 전 다시금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까와 달리 숨을 쉬지 않는다. 여전히 나는 아무 감정도 느끼지 못했다. 그의 옆자리에 누운 부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부인도 죽여 버릴까 했지만, 태중에 아이가 없기에 그냥 살려 두었다. 저 여자가 깨어나 지르는 비명은 나와 피닉의 기쁨이 되어 줄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심장의 박동을 매우 빠르게 만들어 놓았다. 남편을 잃은 충격에 절규하다 그대로 절명할 수 있도록. 이미 죽어 버린 남자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다 등을 돌렸다.
피닉의 아버지를 죽이는 일은 더욱 손쉬웠다. 초로의 남자는 몸부림칠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숨이 끊어졌다. 그의 옆에는 비명을 질러 줄 부인이 없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주름진 얼굴이 피닉과는 전혀 닮지 않았다는 것도.
피닉의 아버지가 뿜어내는 죽음의 냄새를 맡으며 나는 한동안 침대 맡에 앉아 있었다. 지금쯤 스틱스 강에서 재회하고 있을 부자의 얼빠진 얼굴을 생각하니 웃음이 났다.
동이 트고 날이 밝았다. 형의 부인이 지르는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 급하게 뛰어가는 사용인들의 발소리도 들린다. 곧 집사가 백작의 침실 문을 쾅쾅 두드렸다. 여유가 없다 못해 주먹질에 가까운 손길이다. 다급한 노크 소리를 배경 삼아 일어섰다. 침실의 창을 열고 춤추듯 훌쩍 뛰어내렸다.

일부러 저택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끌었다. 정원의 폭포와 분수대를 구경하고 오두막의 나무 벽에 대고 장난을 쳤다. 지금쯤 내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피닉을 생각하니 기분이 들떴다.
내 활기를 반영하듯 날씨도 화창했다. 피닉의 눈동자보다 훨씬 밝은색의 파란 하늘 위로 하얀 조각구름이 떠가고, 신선한 공기가 피부를 가볍게 감쌌다. 늘 비가 와 눅눅하던 곳이었다. 맑은 날씨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어쩌면 천사들조차 나의 우아한 솜씨에 놀라 비를 뿌리는 일을 잊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다. 당연하지, 나는 지옥에서 300년 만에 태어난 고위 악마이자 마천 전쟁 당시 홀로 천사 한 군단을 몰살한 질투의 아들이니까.
정원을 둘러싼 저택에서 터지는 인간들의 울음과 비명이 끊임없이 내 기분을 돋웠다. 하루 만에 자신의 소원을 이뤄 준 내게 피닉이 어떤 찬사를 보낼지 벌써부터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그는 준남작 정도면 충분하다고 했는데, 내가 그에게 준 것은 무려 백작위였다. 게다가 어마어마한 재산과 영지도 함께였다. 성취감에 목구멍이 간질간질했다.
빙글빙글 돌며 저택으로 돌아오는데 검은 사냥개가 나를 보고 컹컹 짖었다. 저 시끄러운 개의 피로 간지러운 목을 축일까 생각하다 이내 그만두었다. 저 개는 이제 피닉의 재산이므로.
술 저장고에서 훔쳐 낸 포도주를 들고 피닉을 찾아갔다. 피닉의 아버지가 아끼던 것이라 피닉 역시 특별한 손님이 방문했을 때를 빼고는 마셔 본 적이 없다던 술이었다. 하지만 백작은 이제 죽어 버렸고, 이 저택의 새로운 주인은 피닉이었다. 이까짓 술쯤 피닉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었다.
“피닉!”
소파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피닉의 뒤에서 왁 하고 모습을 드러냈다. 포도주 병과 잔을 든 손으로 피닉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의 얼굴에 뺨을 비비고 귓불을 물며 방방 뛰었다. 하지만 피닉은 굳은 채였다. 내 힘에 온몸이 들썩거리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반응이 없다.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는 대꾸가 없어 의아함에 몸을 뗐다. 피닉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이 기이할 정도로 일그러져 있었다. 흰 뺨에 눈물이 흥건하고 안구의 실핏줄이 모두 터져 시뻘겠다. 당황해 뻗은 내 손을 피닉이 사납게 쳐 냈다. 튕겨 나간 유리잔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깨졌다. 황망하여 물었다.
“피닉, 왜 그래?”
억눌린 대답이 돌아왔다.
“네 짓인가?”
“뭐가?”
“네가 아버지와 형님을 죽였나?”
나는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대체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이라도 피닉의 기분이 나아졌으면 했다. 오늘은 좋은 날이 아닌가.
“내가 소원 들어준다고 했잖아. 너무 빨리 이루어져서 얼떨떨해? 괜찮아, 별일 아니었으니까. 우리 이거 먹으면서 축하하자. 너 이 술 다시 마셔 보고 싶다며.”
“내가, 언제…….”
“이거 아니야? 다른 거 가져올까?”
생긋 웃으며 피닉의 뺨을 감쌌다. 순간 그의 몸이 격하게 요동쳤다. 피닉은 속에서 치받쳐 올라오는 것을 삼키듯 눈을 질끈 감더니 씹어뱉듯 한 마디를 토해 냈다. 꽉 쥔 그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치 당장에라도 내 목을 죄고 싶은 것을 참고 있는 양.
“다시 되돌릴 수 있다고 말해.”
“…….”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나는 멀뚱히 선 채 눈만 끔뻑거렸다. 내가 고개만 갸우뚱할 뿐 반응이 없자 벌떡 일어난 그가 내 목줄기를 잡았다. 커다란 손이 온통 땀으로 축축했다. 나는 충분히 피닉을 뿌리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가 내게 왜 화를 내는지 몰라 당황스러웠다.
“빨리 다시 되돌릴 수 있다고 말해!”
“왜 그래, 피닉……. 의심받을까 봐 그래? 걱정하지 마, 아무도 몰라. 상처 하나 안 남겼어. 그냥 숨통만 막아서 죽였단 말이야.”
달래듯 조근조근 설명했다. 역효과였다. 내 목을 움켜쥔 그의 손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이러다간 정말 내 목을 부러뜨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놓아 달라고 턱 끝으로 톡톡 치자 더 강하게 조여 온다. 이를 악물고 나를 노려보던 그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되돌려 놔. 소원 같은 거 필요 없으니까, 다시 살려 놔.”
“이미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어. 스틱스 강을 건넌 영혼을 다시 데려오는 건 우리 왕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일인걸.”
“…….”
“너무 갑작스러워? 아버지는 죽이지 말걸 그랬어? 하지만 나는 네가 빨리 작위를 가졌으면 해서…….”
아버지가 죽으면 바로 작위를 받을 수 있잖아, 중얼거리며 피닉의 눈치를 살폈다. 태어나 누군가의 눈치를 본 건 처음이었지만 그런 것을 떠올릴 겨를도 없었다. 풀죽은 나를 본 그의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고 혐오스러운 것을 보듯 내 몸에 닿은 제 손을 천천히 떼어 냈다. 나는 피닉이 움켜쥐었던 목을 가만히 쓸어 보았다. 목구멍이 부어 화끈거렸다. 그는 정말로 내게 화가 난 모양이다. 나는 항의했다. 억울함에 목소리가 떨렸다.
“왜 화를 내……? 나는 소원을 들어준 건데. 네가 그랬잖아, 작위를 달라고. 작위를 줬는데 왜 화를 내.”
“그게 네 귀엔 아버지와 형님을 죽여 달란 소리로 들렸나 보지?!”
피닉이 악을 썼다. 갈기갈기 찢어진 그의 목소리가 허공을 벴다. 내게 손을 뻗었다가 도로 거둬들였다가 차라리 자기 목을 조르려는 듯 힘을 주었다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여유 없이 한참을 그러다 무릎에 힘이 풀리는 듯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얼른 그의 주변에 널린 유리 조각들을 치워 주었다. 그는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속이 막힌 것처럼 가슴만 쥐어뜯던 그가 갑자기 내 손에 들린 술병을 빼앗아 저만치 내던져 버렸다. 곧이어 씨근거리며 일어선 피닉이 이번엔 방에 있는 물건들을 죄다 부수기 시작했다.
이따위 방법으로 얻은 작위는 필요 없다는 둥, 도로 살려 내라는 둥, 차라리 자기 목숨을 거둬 가라는 둥 그의 절규가 방안을 왕왕 울렸다. 나는 도리 없이 서서 그런 피닉을 지켜보기만 했다. 양손이 피투성이가 되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발광하던 그가 문득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언제…… 내 혈육을 죽여 달라고 했느냔 말이야.”
“…….”
“그렇게까지 해서 가지고 싶은 건 아무것도 없어.”
핏발 선 눈동자가 내게로 돌아왔다. 처음 받아 보는 경멸의 눈빛이다. 고작 인간 하나가 쳐다보는 것인데도 뱃가죽에 화살이 꽂힌 양 아팠다. 목을 졸렸을 때보다도 더한 통증이 일었다. 나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섰다. 피닉이 입을 열었다. 낮게 쉰 그의 목소리가 독무처럼 바닥으로 깔렸다.
“내가 너무 순진했군.”
“…….”
“악마가 순순히 소원만 이루어 줄 리 없다는 걸 깨달았어야 했는데.”
오해다. 나는 황급히 그에게 다가섰다. 벌어졌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며 그의 팔을 잡았다. 그가 진저리를 치며 내 손을 거부했다. 진절머리 난다는 듯한 그 동작에 혀가 뻣뻣하게 굳었다. 나는 입술을 벙긋거렸다. 바보처럼 입술만 벌렸다 닫았다 했다. 피닉이 냉엄하게 나를 보았다. 내 변명을 들어 줄 생각 같은 것은 조금도 없는 얼굴이었다.
“어제 내게 웃어 보라고 했었지.”
“…….”
“내 가족을 죽이려는 줄도 모르고 웃는 나를 보고 즐거웠겠군. 어리석은 인간을 실컷 조롱하니 기분이 좋던가?”
“아니야, 그건…….”
“너 같은 악마 새끼와 계약을 맺는 게 아니었어.”
“…….”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그는 내가 자신을 가지고 놀았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나는 돌아서는 피닉을 잡지도, 사과를 하지도, 그렇다고 따지지도 못한 채 입술만 씹었다. 이런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사실 일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인간의 감정은 내게 너무 어려웠다. 내게 그런 것을 설명해 줄 사람은 피닉뿐인데, 그는 나를 보고 싶지도 않아 했다.
손을 들어 반대쪽 팔을 감쌌다. 겨우겨우 단어를 골라 말을 끌어냈다. 지금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선의 말이었다.
“……마음대로 해. 그래도 계약을 한 이상, 네가 죽고 나면 네 영혼은 내 거야.”
“잘됐군. 죽기 전까진 너를 볼 일이 없을 테니.”
“…….”
그가 문을 가리켰다. 나가라는 뜻이었다. 나는 반항하듯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그리고 모습을 숨긴 채 다시 들어왔다. 피닉은 어깨를 떨며 울고 있었다.
잠시 후 집사가 들어와 형의 부인이 쇼크로 끝내 사망했음을 알리기까지, 그는 얼굴을 묻은 베갯잇이 흠뻑 젖을 정도로 울었다. 널찍하던 남자의 어깨가 유난히 좁아 보였다.
나는 땀에 젖은 피닉의 머리칼을 매만졌다. 내 손길은 그에게 닿지 않았다.

이튿날부터 장례 절차가 진행되었다. 깃털 달린 검은 보닛을 쓴 숙녀들과 무거운 코트를 걸친 신사들 사이로 십자가가 새겨진 세 개의 관이 지나갔다.
오데어 일가의 영문 모를 죽음이 전염병 탓이 아니냐는 의혹이 돌아 작별의 키스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관은 굳게 닫힌 채 못질 되었다. 하지만 피닉은 세 개의 관 모두에 정성스런 입맞춤을 남겼고, 체면도 의식하지 않은 채 끝내 눈물을 흘렸다. 묘지의 천사상 위로 눈발이 흩날렸다.
그제야 후회가 들었다. 피닉의 부모형제를 죽일 때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싸늘하게 식은 그들의 시체가 서서히 부패하기 시작한 지금까지도, 그들이 죽은 것은 조금도 슬프지 않았다. 하지만 피닉이 우는 모습을 보는 것은 안타까웠다. 나는 조용히 피닉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내가 들어준 피닉의 첫 번째 소원은 피닉으로 하여금 나를 증오하게 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

피닉은 자기 앞에서 꺼지라고 했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다시 나타났느냐고 고함치는 그에게 그렇게 내가 보기 싫으면 소원을 빌라고 대꾸했다.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나를 외면했고 나는 뻔뻔스럽게 그의 옆에 머물렀다.
여전히 그와 같은 침대에서 잠이 들었고 아침과 저녁을 함께했다. 오후의 티타임에는 그의 몫으로 나온 스콘과 샌드위치를 집어 먹으며 저택의 일을 미주알고주알 떠들었다. 모든 것을 내 뜻대로 했지만 기분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다. 나는 은근슬쩍 피닉의 눈치를 보았고 피닉은 그런 나를 끊임없이 무시했다.
피닉은 내게 몇몇 감정들을 깨닫게 했다. 주눅, 긴장, 후회……. 너무나 생소해서 기분이 나빴다. 그동안 내가 알던 부정적인 감정들은 질투, 분노, 살의 뭐 그런 것들이었다. 그것들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하지만 새로 깨달은 감정들은 나를 불안하게 했다.
그즈음 나는 피닉이 사랑하는 여자를 볼 수 있었다. 백작이 된 피닉에게는 하루빨리 결혼을 해 후사를 볼 의무가 있었고, 그는 의무를 다하기 위해 성실히 사교 모임에 참석했다. 1년에 3만 파운드를 버는 부유한 귀족, 키가 크고 어깨가 단단한 독신 남성에게 온 사교계의 이목이 쏠렸다. 갓 사교계에 나온 소녀들부터 혼기가 꽉 찬 숙녀들까지, 모든 여성이 피닉을 소개받기 위해 자신의 보호자를 재촉했다.
하지만 피닉의 눈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 한 곳만을 향하고 있었다. 피닉은 내게 따로 일러 주지 않았지만, 머무는 시선만 보아도 그가 누구에게 영혼을 빼앗겼는가는 명백했다.
로렌. 그 여자의 이름은 로렌이었다. 총기를 머금고 반짝이는 두 눈과 또랑또랑한 목소리, 얼굴을 구기며 씩 웃는 표정이 인상적인 미인. 그라프 공작의 금지옥엽이자 사교계의 유명 인사.
“그라프 양.”
“오데어 씨. 아, 이제는 백작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저어…….”
“무언가 필요하신가요?”
“예. 그게 그러니까…….”
“……?”
“……제게 그라프 양과 함께 춤출 수 있는 영광을 베풀어 주시겠습니까?”
“어머나, 백작님! 저는 중대 발표라도 하시는 줄 알고 긴장했지 뭐예요.”
피닉은 정말로 그녀를 좋아했다. 가족이 죽은 뒤로 더욱 그랬다. 혈육을 잃은 상처를 그녀에게 몰두함으로써 치유하는 것처럼. 파티에 도착하면 제일 먼저 그녀의 모습부터 찾았고 그녀가 등장하면 눈빛부터 달라졌다. 느른하게 풀어져 있던 몸이 순식간에 긴장하고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었다. 혹시라도 그녀가 오지 않으면 눈에 띄게 실망하여 우울해하는 기색이 주변인들의 눈에 뜨일 정도였다.
춤추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그는 꾸준히 파티를 열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라프 가에 보내는 초대장을 가장 먼저 썼다. 로렌에게 말이라도 건넬 양이면 피닉은 긴장에 자꾸 침을 삼켰고, 종종 무언가를 실수했다. 행여 로렌이 다른 남자와 즐겁게 이야기라도 나눌 때면 그는 질투와 불안함에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그는 심지어 로렌이 정찬 모임에 달고 오는 리본의 색깔까지도 날짜에 맞춰 기억하고 있었다.
피닉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못마땅한 눈으로 로렌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그리고 분석했다. 무엇이 피닉으로 하여금 그녀를 사랑하게 하고 애정을 갈구하게 하는 걸까, 나에겐 없고 그녀에겐 있는 그 특별한 무언가를 대체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 걸까 하며. 분명 흠이 있는데, 저 결점이 그에게는 보이지 않는 건가 의문하면서.
확실히 그녀는 조금 특이했다. 나태하지 않았고, 오히려 부지런했다. 책을 많이 읽었으며 그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은 투표권과 식민지 문제에 관해 격렬하게 토론을 벌인 끝에 상대 남성을 결국 입 다물게 해 버린 적도 있었다. 여성이 의견을 내는 것을 같잖게 취급하며 자신의 지식으로 그녀를 한 수 가르치려던 남자였다.
물론 그가 입을 다물었다고 해서 그녀가 이긴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사람들은 로렌의 의견을 멋모르는 헛소리 취급하며 무시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에게 당당했다.
언제나 로렌의 말을 진지하게 듣는 사람은 피닉뿐이었다. 심지어 피닉은 로렌의 의견에 동의하며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여 주변인들을 경악시키기도 했다. 상대방이 사랑하는 로렌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피닉은 상대방에게 호감이 있건 없건, 그가 여성이건 남성이건 늘 상대의 말을 신중하게 듣고 성의껏 답변하는 종류의 인간이었다.
어느 봄, 피닉은 로렌의 가족을 비롯한 열 명의 손님을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부인이 없는 피닉을 위해 이미 결혼한 그의 여동생이 안주인 노릇을 했다. 여자 주빈은 로렌이었다. 피닉의 팔짱을 끼고 식당에 입장한 그녀는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의 입맛에 맞추어 준비된 아홉 가지 코스 요리를 만족스럽게 즐겼다.
다양한 주제를 통과한 대화가 책과 문학에 닿았다. 로렌은 자신이 ‘제인 에어’라는 소설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저자가 여성이라는 이유로 글까지 폄하될 것을 우려해 필명으로 글을 냈던 작가 샬롯 브론테의 죽음 이후로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상황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고도 했다. 어김없이 신사들은 그녀를 찡그린 얼굴로 보았다. 숙녀들은 쓸데없는 말을 한다며 우아하게 비꼬았다.
여성들이 먼저 응접실로 떠나고 남성들만 남은 자리에서 한 신사가 로렌을 망아지에 비유하며 경박하게 웃었다.
“그라프 양은 언행을 조심할 필요가 있어요. 그렇게 뿔난 망아지처럼 굴다간 붉은 방에 갇히기 십상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자칭 신사라고 일컫는 다른 남자들도 모두 그 말에 동의했다. 그라프 공작은 붉어진 얼굴로 모욕을 감내했다. 그 역시 자신의 딸이 실수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저마다 한 마디씩 보태던 사람들이 화살을 피닉에게 돌렸다. 피닉은 간단하게 답했다.
“그런 그라프 양의 당당한 면이 저는 사람처럼 보이더군요.”
그 말에 로렌의 아버지조차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결혼에 목매며 인형이 되길 택한 여자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부조리한 인간 사회에서 그녀들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방식이었다. 그 흐름에 순종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가려는 로렌 역시 가치 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녀를 조롱하는 남자들이었다.
인간은 자신의 성별에 따라 의견을 말할 수 있고 없음이 정해진단 말인가? 저들보다 훨씬 오랜 세월을 살아갈 내 눈에, 저들이 그토록 되길 원하는 진짜 신사는 피닉 오데어뿐이었다.
피닉과 로렌은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피닉은 혈육을 잃은 슬픔을 잊어 갔고, 사랑의 충만함에 젖어 갔다.
이따금 그 감정은 너무나 과해서 집착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그의 의사는 명백했다. 로렌을 얻기 위해 어마어마한 값을 치렀으니, 자신은 무조건 그녀의 옆자리에 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녀의 선택을 받기 위해 피닉은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했다. 죄책감과 애정과 갈망이 뒤섞인 감정은 쓸쓸했고 처량했으며 그래서 서글펐다. 원인을 제공한 나는 그저 지켜볼 뿐이었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다.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던 피닉은 새벽이 오자마자 몸을 일으켰다. 그의 이른 기상 시간에 사용인들이 놀랄 정도였다. 그는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몇 시간이나 공들여 몸을 씻고 옷을 걸쳤다. 그리고 흐린 창밖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시간이 흐르자 겨우 안개가 걷히고 맑은 하늘이 고개를 내밀었다. 피닉은 간신히 예의에 맞춘 시간에 그라프 가를 방문했다. 그의 손에는 다이아몬드와 홍옥으로 장식한 아름다운 반지가 들려 있었다.
피닉의 청혼을 받은 로렌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어제, 다른 이와 약혼했음을 알렸다. 타 귀족가의 삼남으로 작위도, 작위를 받을 가능성도 없는 남자였다. 재기 넘치는 그녀는 단 몇 마디로 내가 들어준 피닉의 소원을 아무 쓸모도 없게 만들어 버렸다.
“저는 제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 거예요. 작위 같은 것은 없어도 좋답니다. 앞으로 귀족으로 살아가지 못한대도 상관없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제 친우이신 백작님이라면 저를 이해해 주시겠지요?”
피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힘겹게 축하한다고 말했다. 나는 로렌의 뒤에 서서 피닉의 가슴이 무너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저택으로 돌아온 피닉은 한참을 두문불출했다. 그는 생의 모든 것을 순식간에 잃은 사람 같았다. 식사도 걸렀고, 잠도 자지 않았다. 내가 그를 처음 보았던 붉은 소파에 정물처럼 앉아 그저 존재하고 있었다.
그의 수행원과 집사가 젊은 주인의 상태를 걱정하며 의사를 부를 때쯤이 되어서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이블 위에 놓인 다 식은 차를 벌컥 들이켠 피닉이 작게 중얼거렸다.
“로렌조차 내 옆에 있어 주지 않는다면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피붙이를 죽인 거지?”
문득 고개를 든 그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그는 갈등하고 있었다. 자신의 선택을 과연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것인지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는 고민을 하는 피닉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맞받았다. 이윽고 결심하듯 작게 고개를 끄덕인 그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그 어느 때보다 낮고 음울했다. 어쩌면 그때 피닉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긍심과 교양인으로서의 바닥을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 가족을 죽인 악마와 다시 한번 손을 잡으면서.
“내가 나머지 소원을 빌든 그러지 않든 어차피 내 영혼은 네 것이라고 했었지.”
“…….”
“두 번째 소원을 빌겠어.”
“…….”
“로렌이 나와 결혼하게 해 줘.”
“……네가 원한다면.”
이번에는 내가 고개를 끄덕일 차례였다.
반면 피닉의 고개는 떨구어졌다. 그는 로렌의 결정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짓밟았다는 자괴감에 얼굴을 들지 못했다. 스스로를 한심하고 부끄럽게 여겼다. 그러면서도 소원을 철회하지 않는 자신의 위선에 치를 떨었다. 그것은 내가 해득할 수 없는 종류의 고뇌였다.
오데어 가문 사람들의 초상화와 흉상이 전시된 복도를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로렌 그라프, 그 당찬 귀족 여자의 삶을 나락으로 떨어트리고 망가뜨려 결국 피닉의 품에 안겨 주는 방법에 대해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로렌의 약혼자를 죽이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피닉이 또 화를 낼 것이 뻔했으므로 그 안은 제쳐 놓았다. 인간은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죽으면 죄책감을 느낀다. 피닉의 곁에서 가장 절실히 깨달은 교훈이었다.
이번에는 결코 실수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그간 배운 인간의 풍습을 이용해서 아주 세련되게, 교묘한 방식으로 일을 처리할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피닉이 내게 감사할 수밖에 없을 만큼.
방법은 금세 떠올랐다.
“로렌 그라프.”
그녀의 방으로 잠입하는 것은 한 번의 읊조림이면 충분했다. 그녀를 염탐하며 이미 수십 번도 넘게 와 본 곳이므로. 피닉보다 로렌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건 바로 나였다. 나는 그녀에 대해 정말로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그녀가 언제 자리를 비우는지, 하녀에게 절대 손대지 못하도록 하는 곳이 어딘지, 남에게 보일 수 없는 은밀한 물건을 어디에 보관하는지도.
로렌의 방은 미색과 호박색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푹신한 소파 위에는 베끼다 만 ‘폭풍의 언덕’ 원고가 놓여 있다. 은은한 장미 향이 공중을 떠돌았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뒤 곧장 화장대로 다가갔다. 서랍 속 보석함에 들어 있는 편지 뭉치를 꺼내 들었다. 그녀가 이전 연인과 교환했던 연애편지였다. 연인 관계를 암시하는 내용만으로도 이 시대의 여인들에게는 치명적이다.
편지에 뿌린 향수를 추적해 상대방을 찾아내는 것은 손쉬웠다. 그 상대방을 매수해 로렌의 편지를 공개하도록 하는 일은 더욱 쉬웠다. 결혼을 앞둔 전 연인의 명예를 완전히 부수는 결정을 내리도록 하는 데는 보석 하나면 충분했다. 남자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고, 이 모든 것이 단 이틀 만에 이루어졌다. 공개된 편지를 읽은 로렌의 약혼자가 부들부들 떨며 ‘정숙하지 못한 여성과의 파혼’을 선언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일주일이었다. 로렌은 아름답고 총명한 여성이었지만 남자 보는 눈은 없던 게 분명하다.
로렌에 관한 추문으로 사교계가 들썩거렸다. 신사들은 ‘건방진 여자’의 추락에 즐거워하며 은유적인 희롱을 던졌고, 숙녀들은 그녀를 헐뜯으며 자신은 다르다는 것을 남편 후보들에게 강조하고자 했다. 모두가 기꺼이 로렌을 겨냥한 마녀사냥에 동참했다.
이제 그녀는 원래의 약혼자는 물론이고 그 누구와도 결혼할 수 없게 되었다. 귀족 여성은 자신을 보호해 줄 남편과 자식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다. 곤경에 빠진 로렌을 구해 줄 남자는 이제 피닉뿐이었다.
멋지게 일을 성공시켰지만 나는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조마조마했다. 내가 또 무언가를 실수한 건 아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확인했다. 아무도 죽지 않았고, 아무도 다치지 않았다. 모든 과정을 다시 한번 되짚어 본 후에야 나는 피닉에게 돌아갔다.
또다시 추적추적 비가 내렸다. 빗물을 잔뜩 머금은 공기가 싸늘했다. 춥지도 않으면서 나는 조금 몸을 움츠렸다. 피닉은 창가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빗줄기가 거세게 창문을 두드리는 광경을 그저 무연히 바라본다. 딱히 기뻐 보이지도, 그렇다고 화나 보이지도 않았다. 그가 분노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는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나를 확인한 피닉이 반도 피우지 않은 담배를 창틀에 비벼 껐다. 저벅저벅. 구둣발 소리가 울렸다. 나는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가 된 심정으로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윽고 앞에 선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우수 어린 그 얼굴에서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그래서 그가 내 뺨을 때렸다는 것도 나는 한동안 느끼지 못했다.
“…….”
상황은 느릿하게 파악되었다. 내가 멍하니 있는 동안 피닉이 다시 내 뺨을 쳤다. 고개가 이쪽저쪽으로 휙휙 돌아갔다. 볼이 후끈했다. 상황을 인식하자 바로 모멸감이 따라붙었다. 감히……. 나도 모르게 피닉을 확 밀쳐 냈다. 창백한 내 손에서 적색 기운이 넘실거렸다.
순식간에 방을 날아 구석에 처박힌 피닉이 웅크리며 신음했다. 그의 눈과 코에서 피가 흘렀다. 그가 떨어진 곳은 벽난로 바로 옆이었다. 자칫하면 불기가 오르는 벽난로 안에 그대로 밀어 넣어질 수도 있었던 위치. 한 번의 손짓에도 날아가는 연약한 인간들이 불구덩이 속을 버틸 리 없다.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아?!”
“…….”
“미안해, 피닉……. 이렇게 쉽게 날아갈 줄 몰랐어. 정말이야.”
손으로 그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 주었다. 인간이 어느 정도로 죽는지 몰라 오만 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말 그대로 안절부절못했다. 그가 내 뺨을 다섯 대나 때린 것쯤은 이미 잊어버렸다.
다행히 피닉은 멀쩡해 보였다. 그는 내 손을 쳐 내더니 제 힘으로 일어섰다. 그리고 책상을 짚고 선 채 헐떡이며 말했다. 그의 푸른 눈이 기이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깨달은 게 있어.”
“피닉…….”
“내 절망이 네겐 한낱 유희거리에 불과하다는 거. 내가 아무리 분노를 쏟아 내 봐야 네겐 닿지도 않겠지.”
“…….”
“내 절박함을 이용하고, 상황을 망치고, 괴로워하는 날 보며 즐기고 있어. 또다시 네게 소원을 들어 달라 비는 나를 얼마나 조롱했을지 상상도 되지 않는군.”
“피닉, 나는…….”
“재미있었나?”
나는 최선을 다해 설명하려고 애썼다. 로렌의 약혼자를 죽일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것, 모두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상한 것은 로렌의 평판뿐이며 결국 그녀는 네 것이 될 테니 상관없지 않으냐고. 종국에는 서러움에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왜 그런 건 알아주지도 않고 나를 비난해? 그럼 네가 방법을 알려 주지 그랬어.
눈시울이 달아올랐다. 안아 달라고 팔을 뻗었다. 피닉의 손을 들어 얼굴을 묻었지만, 그는 몸서리치며 나를 밀어 냈다.
“로렌이 나를 사랑하게 만들었으면 됐잖아. 그게 다섯 살짜리 어린애도 생각해 낼 수 있는 정상적인 해결책이라구. 아니면 역시 악마라서 올바른 방법은 떠올리지 못하는 건가?”
“사람의 감정은 내 힘으로 움직일 수 없어.”
할 수 있었다면 네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었을 거야.
“너는 그녀를 천박한 여자로 만들었어!”
“어쨌든 가졌잖아. 이제 그녀에게 청혼할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소원을 들어줬잖아…….”
“망가뜨려서 갖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지?”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혹감에 입술만 뻐끔거리자 피닉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손수건으로 꼼꼼히 얼굴의 피를 닦아 낸 그가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깊게 빨아들이며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네게도 감정이란 게 있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피닉도 더 묻지 않았다. 널찍한 방 안에 빗방울 부딪치는 소리만 공허했다. 피닉이 만든 담배 연기에 눈이 어릿해졌을 즈음, 정중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실례합니다, 백작님.”
“무슨 일이지.”
“그라프 양께서 방문하셨습니다.”
“그라프 양이?”
피닉이 큰 목소리로 되물었다. 당장 모셔 오라고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흥분과 당혹으로 떨렸다. 그가 허둥지둥 담배를 끄고 창문을 열었다. 빗줄기가 들이쳤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손수 현관으로 뛰쳐나가 로렌을 맞아들이기까지 했다.
다시 본 로렌의 모습은 좋지 않았다. 안색은 초췌했고 틀어 올린 머리카락은 푸석했다. 노란 치맛자락이 흙탕물에 젖어 지저분했다. 그런 그녀에게 피닉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추락한 사람은 로렌인데 정작 애간장이 끊어지는 표정인 건 피닉이었다.
그녀를 응접실로 안내한 피닉은 채 빠져나가지 않은 담배 연기에 당황했다. 좋지 않은 냄새를 맡게 해 죄송하다 사과하고는 열린 창문과 최대한 먼 곳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떨고 있는 그녀를 위해 손수 벽난로에 장작을 던져 넣은 그가 집사에게 뜨거운 차와 담요를 가져오도록 지시했다.
나는 피닉의 코앞에서 철저히 소외당하고 있었다.
피닉이 로렌을 자기 앞의 편안한 의자에 앉혔다. 나는 보란 듯이 둘 사이의 테이블에 앉았다. 그는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주의를 끌어 보려 몇 번 노력하다 제풀에 지쳐 버렸다. 멀찍이 떨어진 창틀에 올라 무릎을 세웠다. 그곳에 얼굴을 묻었다. 끊길 듯 이어지는 로렌의 말소리가 들렸다.
“저는 상처받지 않았어요. 그보다는 세상에 실망했다는 편이 옳겠지요. 저는 제가 저지른 일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어요. 성인 남녀가 사랑의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없습니다. 백작님도 저를 정숙하지 못한 여자라고 생각하신다면 차라리 지금 저를 내쳐 주세요. 이제 와 말을 번복하는 제 꼴이 우습다는 건 알아요. 궁지에 몰린 여성의 정신 나간 행동으로 보이겠지요. 뻔한 거짓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백작님을 사랑하지 않아요. 하지만 그러도록 노력하겠어요. 백작님은 이 세상에서 저를 인간으로 대해 주는 유일한 사람이니까요.”
묵묵히 듣고 있던 피닉이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당신의 영혼은 비겁하지 않습니다.”
그는 로렌의 손등에 입 맞추며 맹세했다. 당신을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하고 아껴 주겠노라고. 사랑을 넘어 존중하겠으며, 매사 당신의 의견을 구하고 귀히 여기겠다고. 당신은 인형, 종달새, 천사 따위가 아니라 로렌이라는 한 인간으로서 가치가 있다고.
피닉이 로렌의 손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그때야 나는 그녀가 맨손임을 깨달았다. 예의에 어긋나는 차림을 보고도 피닉은 말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장갑 중 가장 좋은 것을 골라 그녀의 손에 끼워 주었다. 커다란 흰색 장갑이 그녀의 작은 손과 반지를 따뜻하게 감쌌다.
그녀가 돌아간 뒤에야 나는 피닉의 시선을 나눠 받을 수 있었다. 창을 꽂듯 던져진 시선에 움찔하는 사이 그가 싸늘하게 말했다. 조금 전의 열렬함은 간데없는 차가움이었다.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아 줬으면 좋겠군.”
“너는 저번에도 그렇게 말했어.”
“그랬었나? 미안하군. 이번에는 진심이야. 나는 앞으로 절대 네게 소원을 빌지 않을 테니까.”
“…….”
“이만큼 놀아 줬으면 충분하지 않나?”
더 볼 것 없다는 양 그는 몸을 돌렸다. 그 길로 집사를 불러 결혼을 알리고, 필요한 것들을 지시했다. 나는 시위하듯 그의 앞에서 모습을 감췄다. 방 안의 어둠에 몸을 숨기고 피닉의 일거수일투족을 훔쳐보았다.
하지만 나의 시위는 무용했다. 피닉은 내가 사라진 것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그는 오히려 날이 갈수록 홀가분하고 즐거워 보였다. 시간이 지나자 나는 섣불리 그의 앞에서 모습을 감춘 행동을 후회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결혼식 날, 나는 새로 단장한 부부 침실에서 술을 마셨다. 인간이 아닌 나는 아무리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았지만, 그냥 그 기분을 느껴 보고 싶었다. 그의 아버지가 아꼈고, 이제는 그가 아끼는 비싼 포도주 한 병을 통째로 비우고 몸을 일으켰다.
눈을 깜빡이자 장소가 바뀌었다. 피닉이 너무나 다정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어 순간 움찔했다. 하지만 곧 그것이 내가 아니라, 내 바로 앞에 선 로렌을 위한 눈빛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닉이 로렌과 눈을 맞추었다. 그녀에게 허리 숙여 절하며 분명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당신의 종복이 되겠습니다.”
로렌을 향한 애정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피닉을 보며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단순히 그를 옆에 두고 싶은 게 아니었다. 그의 마음을 얻고 싶은 거였다. 죽음 후에 그를 영원히 갖게 된다고 한들 그것은 어차피 껍데기였다. 그는 절대로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것이고, 로렌처럼 애틋하고 소중하게 여겨 줄 일은 영겁이 흘러도 없을 거였다.
로렌이 인형이 아니듯 피닉도 인형이 아니었다. 그는 내 소유가 될 수 없었다. 끔찍하게 증오하는 상대와 영원의 시간을 함께하게 된 피닉은 서서히 망가지겠지. 망가뜨려서 갖는 것은 가치가 없다는 피닉의 말을 나는 비로소 이해했다.
앞으로 내게 남은 것은 타 버린 재와 같은 허망함뿐.
내가 들어준 피닉의 두 번째 소원은 피닉으로 하여금 나를 경멸하게 했다.

***

로렌 그라프는 로렌 오데어가 되었다. 첫날밤, 피닉은 아내의 뺨에 정중하게 입을 맞추고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내 아내가 되었다고 해서 멋대로 굴고 싶지는 않소.”
로렌이 원하지 않는 한 그녀와 잠자리를 갖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그녀를 기만했다는 죄책감의 발로이자 사랑하는 이에 대한 존중의 표시였다.
그리고 피닉은 정말로 참았다. 로렌이 진실로 마음을 열고 자신을 받아들일 때까지, 한 침대에서 잠들면서도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때로 잠든 로렌을 바라보며 곤란한 듯 한숨을 쉬거나 이를 악물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피닉은 성실한 남편이었고, 나는 매일 밤 부부의 침실을 훔쳐보는 도둑고양이였다.
그는 억눌린 욕구를 사냥으로 풀었다. 피닉은 타고난 사수였다. 생명체를 죽이고 목을 비트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정중하고 과묵한 신사와는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인간 사냥도 잘할 것 같았다.
실제로 그는 로렌을 모욕하는 자들과 몇 번인가 결투를 했고, 전부 이겼다. 패배자들은 목숨을 잃거나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다. 피를 흘리며 실려 나가는 신사들을 보며 나는 피닉이 정말로 죽이고 싶은 이는 바로 내가 아닐까 생각했다. 내가 그보다 월등한 존재가 아니었다면 그는 자신의 바람을 즉시 실행에 옮기고, 또 성공했을 터였다.
안주인을 맞은 오데어 저택에는 활기가 돌았다. 저택은 섬세하고도 화려하게 단장되었고, 일주일에 한 번은 정찬 모임이 열렸다. 로렌의 재치 있는 메뉴 선택은 언제나 찬탄의 대상이었다.
“오데어 부인, 요즘은 편지를 쓰지 않으십니까?”
“그러게요. 역사에 길이 남을 명문이었는데 말이에요.”
“애석하게도 요새는 쓰지 않는답니다. 타인의 치부를 조롱하는 무뢰한을 고발하는 편지라면 언제든지 쓸 의향이 있지만요.”
로렌은 사랑할 가치가 있는 여자였다. 그녀는 자신을 둘러싼 사교계의 조소에 의연하게 맞섰다. 백작가의 안주인으로서 그녀는 매 순간 성실하게 의무를 수행했고, 자신에게 한 점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리고 피닉은 그녀의 명예를 지켜 주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바쳤다.
계절이 바뀌고, 피닉이 또 한 번의 결투를 치르고 온 날, 로렌은 그의 앞에서 스스로 옷을 벗었다. 흘러내리는 가운 사이로 희고 매끄러운 살결이 드러났다. 침대에 앉은 피닉은 홀린 듯 자신의 아내를 바라보았다.
그는 연약한 꽃을 다루듯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를 만졌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입을 맞추고 끊임없는 감탄과 찬사를 보냈다. 뻣뻣하게 굳은 로렌의 몸이 부드럽게 풀어지고, 마침내 통증 없이 그를 받아들일 때까지 온몸을 애무하며 기다렸다. 인내심이 깊은 피닉다운 행동이었다.
피닉은 매일 밤 로렌을 안았다. 그의 몸짓은 때로는 녹아내릴 듯 달콤했고 또 때로는 태워 버릴 듯 격렬했다. 절정에 달할 때면 로렌을 꼭 끌어안고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아끼는지에 대해 말했다.
그들이 잠자리에 들 때면 나는 방 밖으로 나가 문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러면 곧 로렌의 높은 교성과 함께 침대가 삐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귀가 밝았다. 살결을 빨아들이는 소리와 둘의 속살이 깊게 맞물릴 때 나는 질척한 소음까지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거부하지 않고 모조리 엿들었다. 이럴 거면 왜 나와 있는 건가 하는 자조가 들 때도 있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겹쳐 있는 두 몸에 칼을 꽂아 넣는 상상을 했다.
한번 시작된 소리는 좀처럼 끊이지 않았다. 나는 피닉의 낮은 신음을 들으며 문밖에서 자위했다. 그들의 몸이 물결치는 리듬에 맞춰 성기를 감싼 손을 움직였다. 피닉이 절정에 달할 때면 나도 함께 사정했다. 손바닥에 묻은 멀건 액은 침실의 방문에 문질러 놓았다. 그리고 방으로 돌아가 피닉의 머리맡에서 잠들었다. 그럴 때면 이유도 없이 서러워졌다.

해가 바뀌었다. 부쩍 식욕이 줄고 피곤해하는 로렌을 진찰한 가문의 주치의는 그녀가 임신했다는 진단을 내렸다. 로렌은 수줍게 웃었고, 피닉은 그런 그녀를 번쩍 들어 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리고 주변인들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깊게 입을 맞췄다. 부부 사이에도 거리를 두어야 하는 시대, 피닉은 그런 관습 따위 깡그리 무시한 지 오래였다. 교양 없이 구는 젊은 백작에 대한 구설수는 이제 새롭지도 않았다.
“아들이면 좋겠지요? 가문에 후사가 없어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요.”
“부인과 내 사이에서 난 아이라면 성별은 상관없소.”
“그래도요.”
피닉이 흠, 헛기침을 했다. 귀까지 빨개져 있다.
“이런 말은 이상하게 들릴 수 있겠지만…….”
“……?”
“나는 그 아이가 부인과 나의…… 사랑의 결실이라고 생각하오. 그건 내게 후계 따위보다 훨씬 큰 의미요.”
그가 다시 한번 아내의 뺨을 감싸고 소중한 듯 입술을 겹쳤다. 로렌은 부끄러운 농담을 들은 양 웃었지만 피닉은 진심이었다.
로렌의 배가 불러 오자 피닉은 단어 그대로 안절부절못했다. 온종일 그녀의 곁에 붙어 사소한 것까지 본인이 직접 챙겼다. 음식을 먹여 주고, 따뜻한 물을 가져다 손과 발을 씻어 주었다. 무리해서 걸을 필요가 없도록 자신이 식당까지 안고 가겠다고 했을 때는 저택의 모든 사용인이 경악했다. 주치의를 어찌나 들들 볶아 대었는지 풍채 좋던 중년 의사의 피골이 하루가 다르게 상접했다.
하루아침에 혈육을 잃었던 피닉의 가족에 대한 집착은 유난했다. 그는 아이가 태어남으로써 자신의 모든 상처가 보듬어질 것처럼 굴었다. 이미 로렌에게 모든 것을 해 주고 있으면서도 무언가를 더 해 주지 못해 안달이었다. 아내의 손발톱을 다듬어 주며 자신과 로렌, 그리고 둘의 아이가 꾸려 나갈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는 피닉은 행복해 보였다.
그 상처를 만든 장본인인 나는 더욱 그의 앞에 나설 수 없었다. 나는 그의 삶에 존재하는 배경이고 미물이었다. 언제나 그의 옆에 있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공기였다.
그는 정말로 내 존재를 잊은 것 같았다. 자신의 소원을 들어준 악마가 있었다는 것도, 그 악마 덕분에 지금 자신이 로렌의 곁에 있다는 사실도 모두 잊어버린 듯했다. 내가 자신의 옆에 내내 붙어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피닉, 오직 아내와 그녀의 행복만을 생각하는 어리석은 인간 옆에서 나는 조용히 도사리고 있었다. 언젠가 그가 다시금 절박해져 또 한 번 나를 찾게 되기를, 간절하게 내 이름을 부르는 날이 오기를 고대하면서.
그날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


저자 프로필

한여름

2017.09.25.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겨울을 좋아하는 한여름입니다. 서울시 마포구에서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대표 저서
올림피언 표지 이미지
19세 미만 구독불가 상세페이지 바로가기

불온 표지 이미지
19세 미만 구독불가 대여 1무료 상세페이지 바로가기


세헤라자데 표지 이미지
19세 미만 구독불가 상세페이지 바로가기

서울 여름 커피 표지 이미지
19세 미만 구독불가 상세페이지 바로가기

출간작 전체보기

저자 소개

한여름
서울시 마포구에서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목차

〈목차〉

제1장 : As you wish
제2장 : 추적
제3장 : 꽃노래

외전 제0장 : 불꽃 (Another point of view : Iskaran)
외전 제1장 : 야하고 싶어 (Another point of view : Finnick Odair)
외전 제2장 : 서열 정리
외전 제3장 : 예수천국 불신지옥

후기


리뷰

구매자 별점

4.7

점수비율
  • 5
  • 4
  • 3
  • 2
  • 1

188명이 평가함

리뷰 작성 영역

이 책을 평가해주세요!

내가 남긴 별점 0.0

별로예요

그저 그래요

보통이에요

좋아요

최고예요

별점 취소

구매자 표시 기준은 무엇인가요?

'구매자' 표시는 리디에서 유료도서 결제 후 다운로드 하시거나 리디셀렉트 도서를 다운로드하신 경우에만 표시됩니다.

무료 도서 (프로모션 등으로 무료로 전환된 도서 포함)
'구매자'로 표시되지 않습니다.
시리즈 도서 내 무료 도서
'구매자’로 표시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같은 시리즈의 유료 도서를 결제한 뒤 리뷰를 수정하거나 재등록하면 '구매자'로 표시됩니다.
영구 삭제
도서를 영구 삭제해도 ‘구매자’ 표시는 남아있습니다.
결제 취소
‘구매자’ 표시가 자동으로 사라집니다.

이 작품과 함께 구매한 작품


이 작품과 함께 둘러본 작품



본문 끝 최상단으로 돌아가기

spinner
모바일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