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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상세페이지

인문/사회/역사 인문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수업론: 난관을 돌파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
소장종이책 정가10,000
전자책 정가30%7,000
판매가7,000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작품 소개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다음 세대가 묻다
“무언가를 배울 때는 어떤 마음가짐이 필요한가요?”
우치다 타츠루가 답하다
“무지란, 변화를 방해하는 힘입니다. 내일을 걱정하지 말고 어제에 안주하지 마세요. 지켜야 할 나를 버릴 때 천하무적이 됩니다.”


각계 명사에게 ‘다음 세대에 꼭 전하고 싶은 한 가지’가 무엇인지 묻고 그에 관한 응답을 담는 ‘아우름 시리즈’의 다섯 번째 주제는 ‘수업(修業)’이다.
젊은 시절 반항적이고 공격적인 데다 제법 달변이었던 저자는 누구든 개의치 않고 덤벼들었는데, 마음 한편엔 누군가 자신의 폭주를 멈춰주었으면 하는 불안감이 늘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서유기》의 주인공인 난폭한 손오공은 삼장법사를 만나 머리에 ‘금고아’라는 금속 띠를 두르게 되는데, 20대이던 저자에게는 자신의 머리에 금고아를 채워줄 누군가가 절실히 필요했다는 이야기로 수업론(修業論)은 시작된다.
수업(修業)의 사전적 의미는 ‘기술이나 학업을 익히고 닦는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는 수업이란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배울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점에, 무엇을 가르쳐 줄지 좀처럼 알 수 없는 사람 밑에서, 무언지 알 수 없는 것을 배우는’ 이상한 구조를 지닌다. 이것을 ‘개방적이고 역동적’이라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라 받아들이는가로 사람은 ‘수업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갈린다.
요즘같이 배움과 노력도 약삭빠른 거래의 대상이 되는 세상에서 저자는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는’ 수업, ‘자아를 버리는’ 수업, ‘우열 경쟁을 다투지 않는’ 수업 등 비경제적이고 반시대적인 수업론을 제시한다. 그가 말하는 수업이란 대체 무엇이며 왜 필요한 것일까?


시장과 상품밖에 모르는 아이들아,
노력도 거래로 여기는 아이들아,
닥치고 잠자코 수업하자

일본의 철학자, 교육자이자 합기도 무도인이기도 한 저자는 그와 같은 수업 태도가 인생을 길고 넓고 길게 보았을 때 결국 ‘생존의 가능성’을 높인다고 말한다. 생존에 유리한가 그렇지 않는가는 무도인인 저자에게 중요한 기준이다. 여기서 생존이란 나 개인뿐만 아니라 더 많은 사람의 생존, 나아가 세계의 존속까지 포함한다.
이 책에서는 무도, 명상, 신앙의 세 분야로 나누어 수업의 필요성을 다양한 각도로 살펴본다.
무도(無道)의 최종 목표는 ‘무적(無敵)’이 되는 것인데, 무적이란 세상 모든 적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지켜야 할 나’를 버림으로써 달성할 수 있는 경지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약함과 무지(無知)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데, 무지란 지식이 없는 것이 아니라 쓸모없는 지식으로 가득 찬 상태를 말하며, 우리가 변화하려는 것을 방해하는 힘이다. 수업이란 바로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 천하무적이 되는 여정인 것이다.
무도인의 입장에서 본 명상이란, ‘액자 선택’의 기법이다. 사람은 세상을 인식할 때 일종의 액자를 필요로 하는데, 때와 상황에 맞는 적절한 액자를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명상은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능력’을 길러주는 수업으로, 그러한 수업을 통해 ‘지금 여기 나’에 얽매이지 않고 적절한 액자를 선택할 수 있게 한다. 또한 자신이 아닌 자가 되는 능력, 타자에 빙의하는 능력이 무엇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고 말한다.
무도인이 본 신앙이란,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마음, 희미한 신호를 감지하려는 노력이다. 하지만 신앙이든 그 외의 큰 신념이든 살아 있는 사람의 몸을 통해서 실천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저자가 연구해온 프랑스 유대인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의 사상을 살펴보면, 사회가 충분히 정의로우면서도 온화한 감촉을 갖기 위해서는 인간의 살아 있는 몸뚱이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도도 명상도 신앙도 그에게는 결국 ‘살아가는 힘과 지혜’를 키우기 위한 바탕이다. 반대로 살아가는 힘을 약화시키는 것은 무지, 안주, 미래에 대한 예견, 고정관념 등 나라는 감옥에 갇혀 사는 것이다.
즉 수업(修業)이란, 무지를 벗고 난관을 돌파해 성숙에 이르는 여정인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약한 무도인의 난관 돌파법

주목할 만한 점은 무도인답게, 정신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의 중요성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무도는 말할 것도 없고 명상도 신앙도 살아 숨 쉬는 육체에서 꽃피는 것이며 성숙도 철저하게 신체적인 경험이라는 것.
그렇다고 육체적 강함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 심장질환을 앓아 또래 친구들처럼 마음껏 뛰놀 수 없었던 저자는 오히려 ‘약함’이 자신의 전문분야라고 말하며 약함에 대해 연구한 바를 설파한다.
또한 생활이 끝나지 않으면 수업도 끝나지 않는다며 일상생활이 수련이고 수행인 듯이 살라고 권한다. 어차피 수업이란 삶의 현장에서 치러야 할 장거리달리기이므로.


출판사 서평

본문 엿보기

여는 글 한국 독자들에게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길

한국 독자 여러분, 안녕하세요. 우치다 타츠루입니다.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를 구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원제목이 《수업론(修業論)》인 이 책은 현대 일본에서는 꽤 ‘반시대적’인 책입니다. ‘시대착오적’이라고 평할 정도이지요. 그러나 그러한 책이 일본에서 꽤 팔린 것을 보면 그런 ‘반시대적’인 교육론에 대한 수요가 어느 정도는 존재한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일본의 경우, 학교교육을 맡은 선생님들 사이에서 비교적 호평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도 그럴까요?
이어서 나올 ‘여는 글’에도 썼지만 ‘수업(修業)’이라는 말은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배울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시점에, 무엇을 가르쳐 줄지 좀처럼 알 수 없는 사람 밑에서, 무언지 알 수 없는 것을 배우는’ 이상한 구조를 가집니다. 이것을 ‘개방적이고 역동적’이라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이라 받아들이는가로 사람은 ‘수업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갈리지요.
나는 ‘수업하는 사람’입니다. 특별히 ‘수업하는 사람’이 인간으로서 우위에 있고 ‘수업하지 않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를 하나부터 열까지 명확히 이해하고 싶다. 누군가의 의미를 알 수 없는 지시에 비판 없이 따르는 일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이 세상에는 있지요. 그런 사람의 신념에 대하여 특별히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모쪼록 그런 태도로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세요’라며 미소를 머금고 손을 흔들어 줄 따름이지요. 그것은 ‘나는 개를 좋아하고 당신은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다분히 본질적인 경향에 속한 것이지 결코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는 ‘수업을 좋아하는’ 인간입니다. 그것은 후천적 자질이 아니라 분명 선천적으로 타고난 경향입니다. 누군가에게 온몸을 맡기고 싶다, 누군가 내 머리를 눌러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때때로 발동하지요.
‘스승 아래서 수업받고 싶다’는 열의가 절정에 달한 것은 내 나이 25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나를 아는 사람에게 물으면 확인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치다요? 아, 묘한 데가 있는 녀석이죠.” 아마 대부분 지인들의 입에서는 이런 인물평이 자연스레 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내가 봐도 ‘묘한 놈’이었으니 말입니다. 여하튼 반항적이고 공격적인 데다 제법 달변이었지요. 매우 활동적이고, 누구든 개의치 않고 덤벼들었지요. 그러나 ‘이렇게 살다가는 조만간 터무니없는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만큼은 분명히 갖고 있었지요. 누군가 이런 삶을 멈춰 주었으면……, 그러나 대체 어느 누가 나의 폭주를 멈춰 줄까요?
한국에도 잘 알려져 있겠지만, 《서유기》라는 중국 고전이 있습니다. 주인공인 손오공은 손쓸 수 없을 만큼 매우 난폭한 자였지만 삼장법사를 만나 머리에 ‘금고아’라는 금속 띠를 두르게 되지요. 손오공이 나쁜 짓을 하면 강하게 죄어 꼼짝 못하게 만드는 장치이지요. 20대이던 나에게는 금고아를 머리에 채워 줄 누군가가 필요했지요.
다행히 나는 25세 때 합기도의 다다 히로시(多田宏) 선생님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내게 ‘삼장법사’ 같은 분이었지요. 무엇보다 그때 나는 진심으로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연장자와 참으로 오랜만에(어쩌면 태어나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그때의 안도감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나쁜 짓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렸지요(참 이상하지요. 특별히 그 누구도 내게 나쁜 짓을 하라고 강요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여하튼 다다 선생님과 만나 합기도라는 ‘뭔지 모르는 것’을 수업하게 되었습니다. 선생님도 ‘뭔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대체 어떤 식으로 대단한지는 좀처럼 말로 설명할 수 없었지요.
무도 수업을 시작한 지 40년이 흘렀습니다. 지금도 합기도가 무엇인지 다시금 물어도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수업이라는 건 수업하는 주체인 자신이 점차 변화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제 ‘알았던’ 것을 오늘이 되어 ‘알 수 없게’ 되기도 하지요.
나는 누군가 ‘머리를 눌러 주기’를 (나도 모르게) 절실히 원하는 젊은이였습니다. 따라서 스승과 수업할 곳을 얻었다는 것에 진심으로 힘을 얻었습니다.
‘자유롭고 싶다.’ ‘내 개성을 마음껏 발휘하고 싶다.’ 젊은이들은 누구나 이런 말을 입에 담지요. 그러나 나의 젊은 시절을 돌이켜보면, 자유로워지고 싶다는 욕망의 노예였고 개성이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여하튼 나는 그랬습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자유도 개성도 ‘아무래도 좋은’ 것으로 느껴지는, 질펀하여 바람이 잘 부는 환경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게 분명 도움이 됩니다.
수업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나는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났습니다. 그 청량감을 가능한 한 많은 젊은이가 경험해 보길 바랍니다.


한마디로 말해, 수업이라는 것은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 젊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해 봤자 일단 알아듣지 못합니다. 무슨 일이든 그 실용성과 가치에 대해서 대략적으로 제시하도록 요구해야 한다고 어린 시절부터 교육받아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른바 ‘소비자’라 불리는 사람에게는 마땅한 행동입니다. 소비자는 상품에 대하여 반드시 스펙을 요구하게 마련이니까요. 상품을 집어 들고 가장 먼저 묻는 것은 ‘이것은 무엇에 쓰는 물건입니까?’라는 질문입니다. 그런 소비자의 질문을 받고서 ‘써보면 안다’고 답하는 장사꾼은 없겠지요(만약 있다고 해도 그런 상품을 사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용도가 모호한 상품은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습니다. 여하튼 지금 아이들은 그렇다고 믿습니다. 실제로 가정은 물론 학교에서는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그것을 하면 이런 좋은 일이 있다’고 설명하며 이익을 좇아 움직이도록 교육시킵니다. (중략)
달리는 동안에 ‘나만의 특별한 트랙’이 눈앞에 펼쳐집니다. 새로운 트랙, 다른 코스를 계속하여 달립니다. 더불어 어느 수준에 다다르면, 또다시 새로운 트랙이 눈앞에 나타나지요. 그렇게 또 다른 트랙을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죠.
트랙은 매번 길이도 감촉도 제각기 다릅니다. 본디 ‘어디를 향하는지’가 다릅니다.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보면, 아무도 없는 곳을 홀로 달리고 있습니다. 한때 트랙을 함께 달리던 경주 상대는 어디로 갔는지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수업이라는 건 그런 것입니다.
수업을 하는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를 그것을 ‘해낸 뒤’라야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설명할 수 없는 것을 타인에게 설명할 수는 없지요. 남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남과 우열을 비교하고 강약이나 잘하고 못함을 논할 수는 없습니다.
수업은 상업적인 거래와는 다릅니다. ‘노력’을 대가로 내놓으면 사용 가치가 명시된 ‘상품’을 건네받는 단순한 과정이 아닙니다. 따라서 소비자로 키워진 아이들로서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시장과 상품밖에 본 적이 없는 아이는 수업이 갖는 의미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 책은 그런 아이들에게 수업이란 어떤 것인지를 이해시키기 위해 썼습니다.
(지금 왜 ‘수업’을 말하는가?)


적을 없애기 위해서는 적을 없애는 게 아니라 ‘이게 적’이라 생각하는 ‘나’를 지우면 됩니다. 논리적으로 그것으로밖에 풀 수 없습니다.
‘나를 지운다.’
참 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달성할 수 있을까요?
‘나를 지운 나’에 대하여 자기점검을 하고 얼마만큼 달성했는지를 체크하여 성과가 있다면 자화자찬하는 한 영원히 ‘나’를 벗어던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자기점검 금지, 자기평가 금지, 자화자찬 금지!
그렇다면 대체 무엇을 단초로 ‘나’의 변화(원하건대 ‘성장’)를 점검할 수 있을까요? (중략)
그것은 일단 ‘의사(意思)를 갖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의사’라고 해도 좋고, ‘계획’이라 해도 좋고, ‘예단’이라 해도 좋고 혹은 ‘쓸데없는 근심’이라 해도 좋습니다. 어떻게 말하든 그것은 미래에 대한 예견을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래를 예측하지 않는 것’, 그것이 여하튼 무적을 탐구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디딜 때에 실마리가 되는 ‘나’의 조건입니다.
(어떻게 무적이 되는가)


자신의 평소 세계관이 흔들리고 기존의 도량형을 적용할 수 없는 사태와 만났을 때, 우리는 무지로 무장합니다. 그것은 마치 여우에 홀리는 차원을 단연코 뛰어넘어 위기가 닥쳤을 때 가사 상태에 빠지는 것과 비슷하지요.
그것은 오랜 세월 교단에 서면서 깨달은 경험지(經驗知)와도 부합합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학생들의 무지를 두고 지식 부족 때문이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가르치는 입장이 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학생들은 지식이나 정보, 기술이 부족한 게 아닙니다. 인간은 내버려 둬도 놀랄 만큼 엄청난 기세로 지식을 익히고 정보를 받아들이고 기술을 습득합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배움’에 대한 근원적인 충동이 분명 존재합니다.
무지란, 그것을 방해하는 힘이지요. 배움을 저지하고 억제하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대학 교육이란, 무언가 유용한 지식이나 기술을 ‘덧셈’으로 보태는 것이 아닙니다(그렇다고 믿는 교사도 적지 않지만요). 그것이 아니라 ‘배움’에 대한 충동의 자연스러운 발로를 방해하는, 학생들 자신의 ‘무지에 대한 안주’를 해제하는 것이지요.
학교 교육이 달성해야 하는 첫 번째 과제는 학생들의 머리를 지식으로 그득 채우고 끈끈하게 옭아매는, 생동감 넘치는 ‘배움’의 운동을 방해하는 쓰레기 정보를 ‘벗는’ 것입니다.
(‘안주’에서 벗어나기)

여우도 타조도 아닌 방식으로,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만 할까요?
‘명상’이 이 물음에 대한 기술적인 대답이 될 것입니다.
명상이란, 예비적 고찰에서 살펴보았듯이 ‘액자 설정’에 관한 기법입니다. ‘지금?여기?나’라는 부동의 정점에서 벗어나 ‘지금’이 아닌 시간, ‘여기’가 아닌 장소, ‘내’가 아닌 주체의 자리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그곳에서 ‘지금?여기?나’가 조우한 사태를 관찰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이해하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을 합니다. 그것이 무도적인 의미의 명상입니다.
(무도가가 본 명상의 이치)


무도에서 어느 정도의 수련 단계를 밟으면 그런 인습적인 안팎이나 주객의 경계가 차츰 애매해집니다. 자타의 경계를 넘어 ‘드나들’ 수 있게 되지요. 이 같은 ‘경계선이 애매해지는 감각’은 신앙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다다 선생님은 아마도 그 점을 지적하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귀에 들리지 않는 것, 그럼에도 사실적으로 예리하게 다가오는 것이 있다는 실감 위에 신앙은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인간의 오감으로 감지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하는 모든 것이고, 감지할 수 없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판단 위에 종교는 절대로 성립하지 없지요. 모든 신앙의 근간에는 이 ‘감지할 수 없는 것의 선명함’을 실감하는 경험이 존재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마음)


성숙을 이뤄 냈다고 하는, 성숙의 생생한 실감을 최종적으로 담보하는 것은 이지와 개념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신체입니다. 유아 적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았던 것이 들리고, 판별할 수 없던 향기나 맛을 알고, 과거에는 감지할 수 없었던 타자의 감정 변화를 예민하게 이해합니다. 그것이 성숙이라는 것이지요.
성숙이란 철저히 신체적인 경험입니다. (중략)
사회가 충분히 정의로우면서도 온화한 감촉을 갖기 위해서는 인간의 살아 있는 몸뚱이가 필요한 것이지요. 정의가 과도하게 공격적이 되지 않도록, 자애가 지나치게 방탕하지 않도록 균형을 잡을 수 있는 건 오직 살아 있는 육신의 인간뿐입니다.
(성숙해진다는 것)


저자 프로필

우치다 타츠루 內田樹

  • 국적 일본
  • 출생 1950년 9월 30일
  • 학력 도쿄대학교 문학부 불문과 학사
    도쿄도립대학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 박사
  • 경력 고베여자학원대학 명예교수
    쇼와대학교 이사
    일본유대야학회 이사
    합기도 효고현 연맹 이사
  • 수상 2010년 신서 대상
    2007년 제6회 고바야시 히데오상
  • 링크 트위터블로그

2024.04.05.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저자 소개
우치다 타츠루(內田樹)
1950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50여 권이 넘는 저서를 통해 문학, 철학, 정치, 문화, 교육 등 분야를 넘나들며 번뜩이는 통찰력을 보여 주고 있는 일본의 대표적인 사상가, 교육가, 문화평론가이다. 고베여자학원대학 문학부 종합문화학과 교수를 역임했고, 2011년 고베시에 무도와 철학을 수업하기 위한 도장 ‘개풍관(凱風館)’을 열었다. 도쿄대학교 문학부 불문과를 졸업하고 도쿄도립대학 대학원 인문과학연구과 박사 과정을 중퇴했다. 고베여자학원대학 명예교수, 쇼와대학 이사, 일본유대야학회 이사, 합기도 효고현 연맹 이사를 맡고 있으며, 합기도 7단이다.
저서로는 《주저함의 윤리학》, 《유대야문화론》(제6회 고바야시 히데오상 수상), 《일본변경론》(제3회 신서대상 수상, 제3회 이타미 주조상 수상), 《타자와 죽은 자》, 《자면서 배우는 구조주의》, 《죽음과 신체》, 《길거리 미디어론》 등 다수가 있다.
국내에 출간된 저서로는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하류지향》, 《스승은 있다》, 《혼자 못 사는 것도 재주》, 《절망의 시대를 건너는 법》, 《교사를 춤추게 하라》, 《레비나스와 사랑의 현상학》 등이 있다.

옮긴이|박재현
197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상명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외국어전문학교 일한 통?번역학과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도서 저작권 에이전트로 일했으며, 현재는 출판 기획 및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역서로 《최강의 가르침》, 《머리 청소 마음 청소》, 《뇌, 새로고침》, 《공부의 판을 바꿔라》, 《이성의 한계》, 《아침 30분》, 《니체의 말》, 《괴테의 말》, 《회오리바람 식당의 밤》, 《하루에 한 번, 마음 돌아보기》, 《아들러심리학을 읽는 밤》, 《버텨내는 용기》 등이 있다.


|샘터 인문교양 시리즈 아우름 소개|

다음 세대를 생각하는 인문교양 시리즈 아우름(Aurum)
아우름은 다음 세대에 말을 거는 샘터의 인문교양서 시리즈입니다.
‘Aurum’은 라틴어로 ‘빛나는 새벽’이란 뜻입니다.
우리의 감성과 지성에 빛나는 새벽을 여는 책을 만들어갑니다.
세대를 아우르는 지혜, 앞 세대가 다음 세대를 껴안는 사랑을 담습니다.


다음 세대에 전하고 싶은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젊은 세대를 보듬고 성숙으로 이끄는 것은 공동체의 책무라는 생각에서 아우름 시리즈는 출발합니다.
각자의 분야에서 성실히 자기 길을 걸어온 전문가들에게
“다음 세대에 꼭 한 가지만 전한다면 어떤 말을 해주고 싶습니까?”라고 묻고,
청소년과 젊은이에 대한 사랑으로 답했습니다.

지식 + 마음 = 지혜
단편적인 지식이나 기술을 전하기보다는 수천수만 가지 행복을 만들어낼 수 있는 근본적인 힘,
스스로 미래를 만들어갈 수 있는 저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되는 내용을 담고자 합니다.

■ 도서 사양
133×198mm|100~200쪽 내외|표지 4도, 본문 2도|무선|가격 각 권 10,000원
■ 분야
인문 > (인문교양 / 인문교양 문고 / 교양 철학)

■ 시리즈 도서 리스트
아우름 01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_ 더불어 살아가기 위한 생명 이야기(최재천, 생물학자, 국립생태원장)
아우름 02 사랑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_ 문학에서 찾은 사랑해야 하는 이유(장영희, 영문학자, 작가)
아우름 03 왜 주인공은 모두 길을 떠날까? _ 옛이야기 속 집 떠난 소년들이 말하는 나 자신으로 살기(신동흔, 구비문학연구가, 건국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아우름 04 인연이 모여 인생이 된다 _ 내가 먼저 좋은 친구가 되는 법(주철환, 전 방송 PD, 아주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신간 아우름 05 배움은 어리석을수록 좋다 _ 수업론: 난관을 돌파하는 몸과 마음의 자세(우치다 타츠루, 일본 사상가, 교육자, 무도인, 고베여자학원대학 명예교수)
근간 아우름 06 운명의 지도를 바꾸는 힘, 지리적 상상력 _ 절망과 위기를 극복하는 지혜 ‘공간적 의사결정력’(김이재, 지리학자, 경인교대 교수)
문의: 영업마케팅부 02-763-8966

목차

차례
여는 글 ? 한국 독자들에게
‘나’라는 감옥에서 벗어나는 길


0장. 초보 수업자를 위한 안내서
지금 왜 수업을 말하는가?

보상도 없고 처벌도 없다 / 해낸 후에야 알 수 있는 수업의 의미 / 수업은 ‘신체 단련’이 아니다 / 결승점을 알 수 없는 미지의 트랙을 달린다


1장. 난관을 돌파하는 삶의 자세, 하나
무도와 수업, 두려워 말고 머물지 말고

무엇을 어떻게 수업할 것인가
무적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무적이 되는가
‘약함’을 연구하다
‘안주’에서 벗어나기
생활 속에서 익히고 닦는 수련


2장. 난관을 돌파하는 삶의 자세, 둘
명상과 수업,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능력

명상이란 적절한 액자를 고르는 것
무도가가 본 명상의 이치
명상과 무도,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들


3장. 난관을 돌파하는 삶의 자세, 셋
신앙과 수업, 살아 움직이는 몸에서 시작하라

레비나스와 합기도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마음
나를 사로잡은 레비나스의 변신론
희미한 신호를 감지하려는 노력
예배당을 청소하는 의미
성숙해진다는 것


닫는 글
세상에서 가장 약한 무도가가 살아가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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