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

조용하던 그들은 왜 ‘리셋’을 외치는가
『단속사회』 이후 2년, 변함없이 소통불능 한국 사회

우리 시대의 소통 불가능성에 대해 분석한 『단속사회』, 이러한 관점을 학교 현장에 적용한 『교사도 학교가 두렵다』 출간 이후 저자는 ‘왜 우리 아버지는 박근혜를 찍었을까’ ‘세월호 이후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 같은 주제의 대중강연을 이어가며 변함없이 엉망인 한국 사회의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한 돌파구를 찾기 위해 노력해왔다. 『단속사회』 출간 이후 2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책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는 이러한 노력의 연장선상에 있는 책이다. 세월호 사건 이후 한국 사회는 메르스 사태, 강남역 살인사건, 구의역 사건 그리고 최근에는 최순실-박근혜 게이트까지 엄청난 일들을 겪어왔다. 그 과정에서 시민들은 매번 광장에 섰고, 권력은 망각을 강요했다. 광장의 조증과 일상의 울증을 함께 앓으며 지낸 그간의 삶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이것이 이번 책의 물음이다. 그리고 그 키워드는 ‘리셋’(reset)이다.
리셋에 대한 언급은 세대를 불문한다. 저마다 ‘시대의 주역’임을 자처했던 과거와 달리, 오늘날 사람들은 배제되어 있다고 느낀다. 전쟁의 참화 위에서 나라를 만들어왔다고 자부하는 어르신들은 “싸그리 망해버려라”를 입에 달고 살며, ‘N포 세대’라 불리는 젊은 층은 불의와 부당함에 저항하며 ‘리셋’을 외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을 망치는 것이건 창조하는 것이건, 그 힘으로부터 배제되어 자신은 그저 무기력하게 자기 자리에 앉아 있기만 한다고 느끼는 세상이다. 이런 근원적인 무기력감은 세계를 다루고 싶은 방식을 바꾸어놓았다. 그 방식은 가난과 전쟁의 폐허에서 나라를 다시 만드는 ‘재건’이 아니다. 그렇게 재건한 국가가 부정의하고 불평등하기에 체제의 전환을 꿈꾸는 ‘변혁’도 아니다. 세계 자체를 원점으로 날려버리려는 ‘리셋’인 것이다.”(본문 17~20면 참조)


우리 마음에 ‘리셋’을 심은 이 누구인가
‘노오력’하지 않는 자들은 가라!

우리 사회가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 그 결과 ‘아무것도 가능하지 않다’고 여기게 된 사람들, 결국 ‘리셋’만이 유일하게 상상 가능한 것이 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멀리 볼 것 없다. 그들은 우리 주변에, 우리 안에 존재한다. 「1부 리셋을 원하는 사람들」은 청장년층부터 노인층까지 우리 사회의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다시 처음부터’를 외치는 현상과 그 원인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근대화의 과정에서 ‘노력의 신화’를 써가던 세대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나라를 재건하고, 사회를 변혁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이후 세대 또한 무한생존의 시대에 자기계발의 청사진을 가슴에 안고 쉬지 않고 달려왔다. 그럼에도 세상은 바뀌지 않고 오히려 역행하는 현실에서 그들은 무기력함을 느끼고, 그 무기렴함은 이내 분노로 바뀌어 개인의 안과 밖을 잠식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모두 ‘노오력의 배신’을 경험하고 있으며, 각자도생의 시대에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을 잠재적 적으로 상정하고 있다.
1부가 개인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2부 리셋을 부르는 세상」은 개인들의 마음에 ‘리셋’을 심어놓은 우리 사회를 조망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국가’라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근대의 성립과정부터 차근차근 살핀다. 중세까지의 권력은 ‘죽게 하고 살게 내버려두는’ 권력이라면, 근대 이후부터는 ‘살게 하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이었다. 즉 중세까지는 공개처형 등을 통해 권력의 위엄을 보이고, 사는 문제에 관해서는 각자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던 반면, 근대 이후부터는 외적이나 재난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수 있어야지만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본문 84~88면 참조).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적어도 안전만큼은 지켜지길 바랐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 이후 이 모든 것이 무너졌다. 최근 들어서는 부패의 고리가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사건들이 터지고 있다. “이게 나라인가”라는 탄식이 쏟아졌고, 국가는 세월호 사건에서 배우기는커녕 그때와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것에 대한 망각을 강요하고 있다. 저자 엄기호는 세월호 사건을 비롯한 일련의 사건 외에도 대다수 한국 사람이 경험하는 갑질 문화, 청장년층이 겪는 졸업·취업·결혼 문제, 그리고 이 모든 것과 무관하게 살고 있는 1% 상위계층의 부정부패 등이 사람들 마음에 ‘리셋’을 심어놓은 원인임을 다양한 현실 사례를 바탕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단순히 한 사회의 문제로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근대사회가 꿈꿔왔던 합리적·주체적 개인이라는 관념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날카롭게 진단한다.


미리 살아본 자만이 ‘이후’를 산다
무너진 곳에서 우리 다시 만나자

내 옆에 선 이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말’을 경청하기를 주저하는 사이 ‘리셋’의 정념이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혐오’의 감정이 관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민주주의가 무너진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동료 시민들과 함께 붙잡아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리셋’은 철저한 파괴를 의미한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이야기되어왔던 ‘혁명’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럼에도 사회는 이들에게 리셋의 씨앗을 심어놓았고, 개인들은 리셋과 파괴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3부 리셋을 넘어서」는 2016년 현재 촛불의 광장에서 사람들이 보여주는 것과 같은, ‘파괴’의 정념을 넘어 개인들이 다시 ‘사회’ 안에서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세 가지 제안을 담고 있다.
첫 번째는 ‘존엄’과 ‘안전’을 다시 생각해보라는 주문이다. 국가가 ‘안전’을 보장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안전마저 개인화될 수는 없으며, 사회적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삶을 선택할 때 우리의 존엄을 가까스로 지켜질 수 있다는 것이다(3부 1장 참조). 두 번째는 ‘리셋’이든 ‘혁명’이든 이후만을 생각하지 말자는 주장이다. 중요한 것은 미리 살아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 완성태만을 생각하기보다 광장에 서서 민주주의의 경험의 일부분만이라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설명이다(3부 2장 참조). 세 번째는 다시 삶의 터전을 협력의 공간으로 조직하자는 주장이다. ‘똑똑한 소비자’가 아니라 ‘협력의 기술자’로 거듭나는 방법을 찾자는 제안이다(3부 3장 참조).
이렇듯 저자는 대안마저 과격한 현실에서 다시 ‘사회’의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주장한다. 쉬운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현실에서 평상심을 갖고 해나가기란 쉽지 않은 주장들이다. 나와 세상, 나와 타인과의 관계 재정립 문제부터 현안에 대한 관점의 문제까지, 이 책 『나는 세상을 리셋하고 싶습니다』는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폭넓게 살핀다. 독자들은 ‘혐오’와 ‘리셋’의 정념을 넘어서기 위한 방안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