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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14 상세페이지

인문/사회/역사 역사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14

유신 몰락의 드라마, 궁지에 몰린 박정희

구매종이책 정가15,500
전자책 정가10,850(30%)
판매가10,850

이 책의 시리즈


책 소개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14> 유신 독재, 김재규의 총성으로 와르르 무너지다
김재규 거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박정희는 청렴했다? 박정희가 경제를 살렸다?
부정부패 악취 진동한 박정희 집권 18년
박정희의 몰락을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1970년대 중반만 해도 박정희의 유신 독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당시 민주화 운동을 하던 사람들조차 박정희가 물러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던 시절이었다. 1975년 박정희는 4·29 특별 담화를 발표하면서 총력 안보 운동이라는 대대적인 동원 정치를 펼쳤다. 다시 한국 사회는 반공 물결로 뒤덮였고, 이어서 긴급 조치 9호가 선포되면서 국민들의 입은 철저히 봉쇄되었다. 또한 박정희 유신 권력은 4대 전시 입법과 학도호국단, 반상회 등을 통해 학원의 병영화뿐 아니라 전 사회·국가의 병영화를 기민하게 이뤄냈다. 여기에다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다는 박정희의 기만적인 발표로 사람들은 오랫동안 들떠 있었고, 중동 건설 특수가 가세하면서 경제가 호조를 보였다. 이런 시절에 어찌 박정희 유신 독재의 끝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반유신 민주화 운동 세력은 고립을 면치 못했다.

그렇지만 박정희 유신 독재는 1970년대 후반 들어 조금씩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또다시 불붙기 시작한 대학가 시위, 한미 관계 뒤흔든 코리아게이트, 유신 붕괴의 문을 연 12?12총선, 김영삼 의원직 날치기 제명, 박정희 치부 폭로한 김형욱의 폭탄 증언…… 무엇보다 유신 경제의 허구성을 드러낸 YH사건과 부마항쟁은 박정희 유신 권력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 총으로 권력을 움켜쥔 독재자 박정희의 마지막 모습은 처참했다. 5·16쿠데타를 일으킨 지 18년 만에, 유신 쿠데타를 일으킨 지 7년 만에 박정희는 부하인 김재규의 총을 맞고 숨을 거두었다.

그렇게 강고해 보였던 유신 정권은 왜 7년 만에 무너졌을까? 독재자 박정희는 한국 사회에 무엇을 남겼을까? 지금도 ‘박정희가 경제를 살렸다’ ‘박정희는 청렴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서중석 교수는 박정희 집권 18년은 부정부패가 만연한 사회였다고 말한다. 박정희가 경제를 살렸다는 말도 허구에 불과하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YH사건과 부마항쟁이 일어나게 된 원인도 경제가 파탄 났기 때문이었다.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14권~15권은 필연적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유신 독재의 몰락 과정을 자세히 분석한다.


출판사 서평

12·12선거, 박정희 유신 붕괴의 문을 열다

서중석 교수는 1978년 12월 12일에 치러진 12·12총선을 박정희 정권이 종말로 치닫게 되는 분수령으로 꼽는다. “박정희 유신 체제 몰락의 드라마는 12·12총선, 국회의원의 3분의 2를 선출하는 선거였는데 이 선거에서 패배한 것에서 시작됐다. 그렇기 때문에 난 현대사에서 중요한 사건의 하나로 1975년 총력 안보 운동과 함께 1978년 12·12선거를 꼽고 있다.”
12·12선거는 유신 체제, 그중에서도 긴급 조치 9호 아래 치러진 선거였다. 그런 만큼 당연히 정치적 발언이 엄격히 제한됐다. 하지만 경제적, 사회적 문제를 거론하거나 나름대로 공약을 하는 것은 허용됐다. 또한 돈 선거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금품을 풍성하게 쓰는 것도 묵인했다. 그렇게 12·12선거는 민심의 이반을 잘 보여준 선거가 됐다.
선거 결과는 놀라웠다. 신민당을 포함한 야당이 공화당보다 8.5퍼센트포인트나 많이 득표한 것이다. 유신 체제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사태였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는 박정희 유신 독재에 대한 염증, 경제 실패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당시 선거 투표율은 77.1퍼센트였는데, 이는 박정희 정권 전 기간 중 가장 높은 수치였다. 그야말로 선거에 적극 참여해 박정희 유신 정권을 심판했던 것이다. “12·12선거 결과가 말해주는 아주 중요한 의미는 정치에 대한 참여 의식 또는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 의식과 민주화에 대한 기대, 열망 같은 것이 이 선거에서 나타났다는 점이다.”

YH사건, 유신 체제를 파국으로 몰고 가다

YH사건은 부마항쟁과 함께 박정희 유신 체제를 파국으로 몰고 간 양대 사건이다. 두 사건 모두 박정희 유신 경제 정책으로 말미암은 사건인데, 결국 유신 체제가 유신 경제로 인해 파국을 맞게 됐다는 걸 이 두 사건은 보여준다. 서중석 교수는 YH사건이 한국 현대사에서 아주 중요한 큰 사건이라고 말한다. “요즘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대부분 YH사건이 왜 그토록 중요한 사건, 큰 사건이라고 내가 얘기하는지 이해가 안 갈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김영삼이건 박정희건 기자들이건 학생들이건 ‘이건 굉장한 사건이다. 정말 큰 사건이다’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김영삼과 박정희의 극한 대립이 얼마간 완화되는 것 아니냐 하는 순간에 터진 대형 사건, 김영삼과 박정희의 관계를 더 이상 타협적으로 만들 수 없게 한 결정적 사건이 바로 YH 여성 노동자 신민당사 농성 사건이다. 이 점에서도 이 사건은 중요하다.”
또 서중석 교수는 YH사건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YH사건은 단순한 노동자 관련 사건이 아니었다. 특정한 업체에서 일한 여성 노동자의 투쟁만 가리키는 게 아니라 유신 체제의 성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사회의 여러 층에 엄청난 충격을 줬다. 특히 학생들한테 준 영향이 대단했다. 1979년 10월 15~16일 부산대에서 나온 학생들의 선언문이 말해주듯이 이 사건은 학생들이 부마항쟁을 일으키는 하나의 중요한 계기였다. 그리고 학생들이 나중에 노학 연대를 하고 1980년대에 노동자와 함께 노동 운동을 거세게 펼쳐나가는 데에도 전태일 분신 사건과 함께 이 사건은 큰 추동력이 됐다.”
한마디로 YH사건은 유신 체제의 모순과 총체적 허구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박정희가 펼친 근대화 노선의 파탄, 박정희 경제 정책의 파탄을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기도 하다.

강제 진압, 그리고 김경숙의 죽음

YH무역은 가발을 생산하는 업체였다. 당시 가발 기업은 수출 산업의 총아였고, YH무역은 그 산업의 대표 기업으로 꼽힐 정도로 잘나갔다. 1966년 노동자 10명으로 시작했던 기업이 불과 4년 만인 1970년에 노동자 숫자가 4,000명을 넘어서는 기업이 됐다. 전체 기업들의 수출 순위에서 15위를 기록할 정도였다. 그러나 곧 가발 산업은 사양 산업이 되었다. 게다가 사주는 회삿돈을 유용했다. 무리하게 확장한 사업도 실패했다. 그러면서 은행 빚이 눈덩이처럼 쌓였다. 결국 YH무역은 1979년 3월 30일에 ‘4월 30일 자로 폐업하겠다’는 공고문을 붙였다.
노조에서는 회사를 살리기 위해 여러모로 노력하는 동시에 폐업에 맞서 강경 투쟁을 벌였다. 이렇게 싸우자 정부와 회사가 일단 한 걸음 물러서는 듯했다. ‘4월 30일 자 폐업’ 방침을 조금 변경하는 식으로 나왔다. 그렇지만 결국 노동자들을 속인 노동청과 경찰서, 무책임한 회사 때문에 여성 노동자들은 거리로 쫓겨날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노동자들은 7월 30일 또다시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자 8월 6일 회사는 폐업을 하겠다고 다시 공고했다. 결국 여성 노동자들은 신민당사로 가서 농성을 이어간다.

“거리에 내쫓긴 저희들은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배고픔과 무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정녕 없다는 말입니까? …… 배우지 못했다고 사회에서 천대를 받고 멸시를 당하면서도 못 배운 저희들만 원망하며 저희 동생들이 나 같이는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조금의 월급이나마 용돈을 줄여가며 저축하면서 동생들의 학비를 보태주고 또 부모님들의 생계와 약값에도 보탠다는 뿌듯한 기쁨으로 신념과 긍지를 가지고 일해왔습니다. …… 저희들은 부당한 것을 원하고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우리가 일할 수 있는 일자리만 주시어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만 해달라는 것입니다. …… 해결이 아니면 우리는 여기서 죽어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저희들의 이 호소가 꼭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박정희가 선택한 것은 강제 진압이었다. 철제 방패와 방망이로 무장한 수백 명의 기동 경찰이 들이닥쳐 닥치는 대로 폭력을 휘둘렀다. 당사에 함께 있던 신민당 국회의원들에게도 예외 없이 폭력을 휘둘렀다. 경찰은 작전을 개시한 지 불과 10여 분 사이에 여성 노동자들을 당사 밖으로 끌어냈다. 그 과정에서 안타깝게도 당시 21세였던 김경숙이 사망하고 만다. 경찰은 ‘스스로 동맥을 끊고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했지만,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김경숙의 부검 보고서와 시신 상태 등을 근거로 해서 손목에서는 동맥을 끊고 자해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으며, 추락 장소도 ‘건물 뒤편 창문 아래 지하실 입구’라는 경찰 발표와 달리 ‘창문이 없는 건물 왼편 비상계단 아래’였다고 밝혔다. 또 곤봉과 같은 둥근 물체로 가격당한 상처가 손등에 있었으며 머리 뒤편에서 치명적인 상처가 발견됐다고 발표했다.
이 사건 이후 정부, 여당에서는 YH 노조 배후의 불순 세력을 규명하겠다는 방침을 세우고 산업선교회를 집중적으로 탄압하게 된다. 신민당은 YH 사태를 “국기를 뒤흔드는 전대미문의 폭거”로 규정했다. 신민당 의원들은 바로 농성에 들어갔다. 4층 강당 연단에 “8·11 폭거는 말기적 발악이다”, “국민의 분노가 무섭지 않은가” 같은 대형 플래카드를 붙이고 당사 현관 입구에는 검은 천을 길게 늘어뜨려서 이 사태에 조의를 표했다. 이후 김영삼과 박정희는 극한으로 대립하게 된다. 이 사건은 경찰의 잔인한 진압으로 끝이 나는 것 같았지만, 부마항쟁으로 이어졌고, 결국 박정희 유신 독재를 끝장낸 양대 사건 중 하나로 역사에 기록되게 된다.

“우리도 인간이다”, 1970년대 민주 노조 운동

이렇게 잔인하게 진압당한 YH 노조는 민주 노조로 불렸다. 당시 여성 노동자들은 방적, 방직, 모방, 스웨터, 봉제 산업, 가발, 전기·전자 산업, 식품, 제약 등에서 많이 일했는데, 여기에 민주 노조가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당시 민주 노조는 임금 인상 투쟁, 노동 조건 향상 투쟁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유신 체제에서 단체 교섭권과 단체 행동권이 사실상 금지돼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민주 노조들은 단체 행동을 통해 요구 조건을 쟁취하면서 조합원들의 지지와 신뢰를 확보했다. 그러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민주 노조들은 권력과 자본, 상급 노조의 끊임없는 탄압에 과감하게 저항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74년 원풍모방 노조의 민주화 투쟁과 회사 재건 투쟁, 1977년 9월에 있었던 청계피복노조의 노동 교실 사수 투쟁, 그리고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집중적으로 이뤄진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노조 수호 투쟁, 1974년 반도상사 노동자들의 노조 결성 투쟁과 임금 인상 투쟁, 그리고 1979년 YH무역 노조의 폐업 반대 투쟁 등이 있었다. 이 중 1976년에서 1978년까지 집중적으로 전개된 동일방직 인천 노조의 투쟁은 국가 권력, 자본, 상급 노조라는 세 권력이 합작해 벌인 노조 파괴 공작에 정면으로 맞서 싸운 1970년대 후반의 대표적인 노동 투쟁의 하나로 꼽힌다.
이 밖에 책에는 고문으로 ‘북괴 동조 세력’ 몰아간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 유신 권력의 또 다른 표적이 된 도시산업선교회 이야기, 분별력 상실한 박정희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김영삼 의원직 날치기 제명 사건, 박정희 권력의 치부를 폭로한 김형욱의 잇따른 폭탄 증언 등이 담겨 있다.

부마항쟁, 유신 정권에 결정타를 날리다

부마항쟁은 유신 정권에 결정타를 날린 역사적 사건임에도 오늘날 많이 잊힌 투쟁이다. 부마항쟁은 1960년 4월혁명, 1980년 광주항쟁, 1987년 6월항쟁과 함께 대표적인 민주화 운동이자 민중 항쟁이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잘 알지 못한다. 이는 부마항쟁이 당시 제대로 보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마항쟁은 1979년 10월 16일 부산에서 일어났는데, 17일까지 어떤 언론 기관도 보도하지 않았다. 18일 0시를 기해 계엄이 선포되고 나서 조금 보도되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까닭은 긴급 조치 9호 때문이었다. 긴급 조치 9호 아래에서는 유신 체제를 비판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보도하지 못하게 돼 있었다.
그렇다면 부마항쟁은 왜 일어났을까? 부마항쟁은 김영삼 의원직 제명 때문에 일어났다고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김영삼 제명이 영향을 끼친 건 확실하지만 그다지 크지 않다는 게 서중석 교수의 판단이다. 이를테면 부산대 교내와 시내에서 있었던 시위에서 ‘김영삼 제명’을 거론한 구호는 나오지 않았다. 그보다는 ‘박정희 유신 정권에 대한 불만이나 분노 폭발’이 부마항쟁이 일어난 원인에 더 가깝다고 서중석 교수는 말한다.
또 부마항쟁은 YH사건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당시 부산대 학생들의 민주 투쟁 선언문을 보면 “모든 경제적 모순과 실정을 근로자의 불순으로 뒤집어씌우고 협박, 공포, 폭력으로 짓눌러왔음을 YH사건에서 단적으로 보여주고”라고 적혀 있다. 곧 YH사건이 부마항쟁의 큰 계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도 드러나 있다. 학생들의 압도적인 구호는 “유신 철폐”, “독재 타도”였다. 부산대 학생들은 유신 헌법을 “악의 근원”이라고 했으며, 박정희와 유신과 긴급 조치 등을 “불의의 날조와 악의 표본”으로 규정했다.
부마항쟁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민중이 중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시위 역사상 보기 드물게 계급 투쟁적 성격도 내보인다. 하층 노동자들이 시위에 많이 참여했고, 주변 자영 상인층이 지원하면서 시위가 더욱 커졌다. 민중들이 이렇게 많이 참여한 것은 유신 경제의 파탄 때문이었고, 그로 인해 민중이 소외되었기 때문이었다. “부마항쟁은 유신 체제의 실상, 유신 경제 정책의 성격이 잘 드러난 가운데 유신 체제와 사회,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들고나온 학생들과 서민, 하층민들의 불만이 화산처럼 폭발하면서 터져 나온 항쟁이다. 김재규가 거사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이 부마항쟁이다. 그런 점에서 부마항쟁은 유신 붕괴의 직접적 요인이었다. 부마항쟁으로 박정희 유신 체제가 무너진 것이다.”

김재규, 박정희에게 부마항쟁을 보고하다

1979년 10월 16일 부마항쟁이 일어나고 10·26이 일어나기까지는 딱 10일이 걸렸다. 그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박정희와 김재규는 어떤 상태였을까?
부산에 계엄이 선포된 직후인 1979년 10월 18일 새벽, 부산에 내려간 김재규는 그날 오후 항공편으로 박정희에게 보고하기 위해 청와대로 간다. 김재규는 곧 박정희에게 “부산 사태는 체제 저항과 정책 불신 및 물가고에 대한 반발에 조세 저항까지 겹친 민란”이라고 보고를 했는데, 박정희는 버럭 화를 냈다고 한다. 그러면서 “앞으로 부산 같은 사태가 생기면 이제는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내리겠다. …… 내가 직접 발포 명령을 하면 대통령인 나를 누가 총살을 하겠느냐”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옆에 있던 차지철도 이렇게 거들었다.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이고도 까딱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00만~200만 명쯤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 김재규는 이 말을 듣고 고심에 고심을 했다고 한다. 박정희와 차지철은 국민을 ‘적’으로 보고 있었고, 김재규는 이런 그들을 보며 자신이 난국을 직접 수습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던 것이다.

김재규, 유신의 심장을 쏘다

“김재규가 언제 거사를 결심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부산 항쟁 직후인 1979년 10월 18일 오후 청와대 회동 때였을 수도 있고 그 이후인 23일이나 24일일 수도 있다. 아마도 김재규는 대행사가 있을 때 거사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판단된다. 대행사가 열리는 궁정동 안가가 중앙정보부 통제 아래 있었기 때문이다.”
1979년 10월 26일 총으로 권력을 움켜쥔 박정희는 부하의 총을 맞고 죽었다. 왜 김재규는 거사를 결심했나? 김재규가 거사하게 된 데에는 크게 보면 ‘한국이 민주주의로 가야 한다. 유신 체제는 안 된다’, 이런 생각이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직접적인 계기는 부마항쟁을 목격한 것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부마항쟁과 같은 사건이 다른 지역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데, 박정희나 차지철의 대응은 국가를 파탄으로 몰고 갈 수도 있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또 하나는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던 박근혜와 최태민 목사 문제였다. 자신이 직접 쓴 항소 이유 보충서에서 김재규는 “본인이 결행한 10·26혁명의 동기 가운데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중요한 것 한 가지는 박 대통령 가족에 관한 것”이라고 밝히고, 첫 번째로 ‘큰영애’의 문제를 들었다. 서중석 교수는 박근혜와 최태민의 관계는 김재규 거사 요인을 밝히는 데에도 중요하지만, 독재자 박정희의 내밀한 가족 관계 속사정, 박정희와 박근혜의 국정 수행 능력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하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차지철이 국정 농단의 주범이라면 최순실의 아버지 최태민은 국정 농단의 작은 한 부분을 맡았다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박정희처럼 냉혹한 사람이 왜 박근혜에게서 최태민을 떼어놓지 않았을까? 서중석 교수는 그 이유를 최태민이 유신 체제 수호에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박정희는 스스로 유신 체제가 어떠한 체제인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도 유신 체제 수호에 차지철처럼 신명을 다 바칠 각오가 돼 있는 사람이 드물다고 생각한 것 같다. 특히 박근혜는 박정희 절대 추종자이자 철저한 유신 체제 신도로 절대로 배신을 하지 않을 피붙이였다. 그런 점에서 최태민에 대해서도 믿어도 좋다고 판단하지 않았을까 싶다.” 곧 최태민은 구국선교단이나 구국여성봉사단, 새마음봉사단을 만들어 유신 체제를 수호하는 데 적극 앞장섰고, 그 모습 때문에 박정희가 굳이 최태민을 박근혜와 떼어놓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김재규 거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박정희 정권이 10·26이라는 형태로 무너진 것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김재규의 거사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시각도 있는 건 분명하다. 그것은 곧 박정희 정권이 민주화 운동 세력에 의해 무너졌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시각이다. 실제로 유신 말기에는 국민적 저항이 확산되고 있었다. 부마항쟁이 있었고, 1980년 5월 서울의 봄이라고 불리는 대학생들의 시위도 있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으면 더 큰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서중석 교수는 김재규의 거사가 더 큰 희생을 막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하고 있다. 부마항쟁과 같은 봉기가 설령 크게 확산됐다고 하더라도 박정희(“내가 직접 발포 명령”)·차지철(“100만~200만 명쯤 죽인다고 까딱 있겠습니까”)의 특성상 엄청난 희생이 일어날 가능성이 농후했다. 김재규는 심각한 유혈 사태를 막으려고 했고, 그런 점에서 김재규의 거사는 의의가 있다고 서중석 교수는 말한다. 또 당시 민주화 운동 세력이 그다지 역량이 크지 않았다는 점도 지적한다. 대학가에서는 유인물을 돌리면서 여러 작은 시위를 할 정도였고, 재야 단체들도 활발하게 움직인 것은 맞지만 부마항쟁 당시만 해도 그 전해에 비해 투쟁력이 더 약화되어 있었다.
서중석 교수는 민주화 운동 세력이 그렇게 강력하지 못할 때에는 김재규 같은 사람이 있어야 역사가 바뀐다고 말한다. “극우 세력 내에서도, 파시스트 내에서도 김재규처럼 온건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 또는 세력, 즉 자신의 잘잘못을 판단할 수 있고 그러면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사람 또는 세력이 역사를 변화시키는 데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난 그렇게 본다. 민주화 운동 세력이 그렇게 강력하지 못할 때에는 이런 사람들의 역할도 중요하다. 이런 사람들이 같이 움직여야만 민주화 운동 세력도 클 수 있고 사회 전체도 합리적인 방향으로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재규의 거사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 박정희가 키웠던 하나회가 쿠데타를 일으켜 정국을 반전시키고 유신 체제를 변형해 계승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서 김재규 거사는 빛을 보지 못하고 말았다. 서중석 교수는 그렇다 하더라도 자유화, 민주화로 나아가는 물꼬를 터준 김재규 같은 사람이 갖는 의미가 크다고 말한다. “이렇게 정리하면 어떨까 싶다. 부마항쟁으로 10·26이 일어났고, 그 10·26에는 부마항쟁의 열망이 들어 있는데, 10·26이 열어놓은 ‘서울의 봄-민주화 광장’이 유신 잔당인 전두환·신군부의 5·17쿠데타에 의해 좌절되는 것에 분노해 광주항쟁이 일어났다고. 그런 점에서 10·26은 민주화 운동에서 의미 있는 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저자 프로필

서중석

  • 국적 대한민국
  • 출생 1948년 8월 25일
  • 학력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
    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학사
  • 경력 성균관대학교 명예교수
    아시아평화와 역사교육연대 상임공동대표
    일본교과서바로잡기운동본부 공동대표
    1988년 신동아 기자

2019.01.07.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저 : 서중석


1948년 충남 논산에서 출생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9년부터 1988년까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했으며, 6월항쟁 당시 『신동아』 취재기자로 역사적 현장에서 그날의 사건들을 생생히 목격하고 기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사학과 명예교수이며 역사문제연구소 이사장, 아시아 평화와 역사교육 연대 상임 공동대표,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 회복 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 『80년대 민중의 삶과 투쟁』 『한국 근현대 민족문제 연구』 『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 1·2』 『신흥무관학교와 망명자들』 『남북협상: 김규식의 길, 김구의 길』 『조봉암과 1950년대』(상·하) 『비극의 현대 지도자』 『배반당한 한국 민족주의』 『이승만의 정치이데올로기』 『한국 현대사 60년』 『이승만과 제1공화국』 『대한민국 선거이야기』 『지배자의 국가 민중의 나라』 『6월항쟁』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 등이 있다.


저 : 김덕련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2004년부터 2015년까지 인터넷 신문 오마이뉴스와 프레시안에서 기자로 일했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현재 인문 기획 집단 문사철에 터를 잡고 역사와 사회에 관한 책 작업을 하고 있다. 그동안 『김기춘과 그의 시대』를 쓰고 『서중석의 현대사 이야기』 시리즈를 기획·공저했으며 『세계를 바꾸는 파업』, 『근현대사 신문』(전 2권), 『세계사와 함께 보는 타임라인 한국사』(전 5권)를 함께 쓰고 만들었다.

목차

책머리에
연표

유신 몰락의 드라마

첫 번째 마당
또다시 불붙기 시작한 대학가 시위,
광화문에서 울려 퍼진 ‘유신 독재 철폐’

두 번째 마당
국민교육헌장 정면으로 비판한
‘우리의 교육 지표’

세 번째 마당
코리아게이트에 더해 망명 물결,
해외서도 궁지에 몰린 박정희

네 번째 마당
“한 사람에 의한 전 국민의 질식”,
통대, 99.9퍼센트로 체육관 대통령 선출

다섯 번째 마당
박정희 유신 붕괴의 문을 연
1978년 12·12총선

여섯 번째 마당
권력 핵심에서 유신 경제팀 경질 요구
쓸쓸한 제2기 체육관 대통령 취임식

일곱 번째 마당
‘선명 야당’ 바람 탄 김영삼,
유신 권력의 공작 정치를 꺾다

여덟 번째 마당
인권 외교와 충돌한 유신 독재,
‘당장 짐 싸라’ 펄펄 뛴 카터

아홉 번째 마당
“거리로 내쫓으면 어디로 가란 말이냐”
유신 경제 허구성 드러낸 YH사건

열 번째 마당
중앙정보부 직접 개입한 똥물 테러에도
몸으로 맞서 싸운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

열한 번째 마당
고문으로 ‘북괴 동조 세력’ 몰아간
크리스찬아카데미 사건

열두 번째 마당
유신 권력의 또 다른 표적,
도시산업선교회

열세 번째 마당
분별력 상실한 박정희의 폭주,
김영삼 의원직 날치기 제명

열네 번째 마당
박정희 심복 중의 심복
이후락·김형욱은 왜 도망쳐야 했나

열다섯 번째 마당
박정희 권력의 치부를 폭로한
김형욱의 잇따른 폭탄 증언

열여섯 번째 마당
김형욱 죽음의 수수께끼
딸에게 이상한 설명을 한 박정희

새마을운동

첫 번째 마당
새마을운동은
찬양 일색이 마땅한 성역인가

두 번째 마당
새마을운동이
일어나게 된 세 가지 요인

세 번째 마당
강제성이 만든
새마을운동의 성공 신화

네 번째 마당
농민들은 빚더미에 깔리고, 이농하고

나가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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