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규의 시는 기성 시단이 보여주었던 어떤 시류에도 쏠린 바 없으며, 기성 시단에 빚진 게 없으므로 그의 시는 그간 놀라울 만큼 ‘새로운’ 유형의 이미지들을 쏟아놓아 시단을 긴장시킨 바 있다. 2000년 『문학과사회』 여름호의 신인을 추천하는 해설에서 평론가 정과리는 이준규 시의 “언어의 풍경은 당혹스러운 이미지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 “대담한 상상력으로 놀람을 일으”키는데, 이러한 시인의 시 쓰기가 “문화적 코드를 통째로 파괴하는 시도를 보이고 있는 것은 바로 어떤 특정한 문화적 코드(들)에 대한 도전(혹은 저항)이 문제가 아니라, 문화적인 것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 자체를 부숴야 한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라고 평가했다.
신인의 문학이 주는 충격은 대략 두 가지 방향에서 온다. 하나는 시대의 변화가 문화적 감각을 변모시키는 경우이다. 다른 하나는 문학사가 멈춘 지점에서 입문한 작가·시인이 전혀 다른 문법을 창안하는 경우다. 앞의 것은 자연스럽고 충동적이고, 뒤의 것은 의도적이고 숙고적인 것이다. 신인 문학의 이 두 원천은 그러나 같은 장소에 인접해 있으며, 그것들이 길항하면서도 서로를 자극할 때 신인 문학을 탄생시킬 수 있다.
이준규 시인은 물론 후자에 해당된다. 즉 “의도적이고 숙고적인 것”으로써 “문학사가 멈춘 지점에서 [……] 전혀 다른 문법을 창안”한 경우이다. 그리하여 그의 “기아와 고통과 환각과 죽음 그리고 외로움의 공간”에서의 시 쓰기는 등단 이후 6년 동안 “전혀 다른 문법”들로 채워져 이번 시집에 예순세 편의 시들로 오롯이 묶였다.
이번에 발행된 이준규의 첫 시집 『흑백』은 한마디로 ‘소외된 자의 넋두리’이다. 시인은 단단하게 포장된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참견한다. 아무도 관심 갖지 않고 버려둔 글자들로 시인은 놀이를 감행하고, 그 돌발적 이미지들의 연상 체계는 당혹스런 세상을 창조해낸다. 6년 동안 쓴 시가 부(部)의 나뉨도 없이 한자리에 묶였다는 것은, 각 시편들의 동일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오히려 각 시편들 저마다 새로운 이미지들로 재구성된 제각각의 ‘전혀 색다른’ 시라는 의미가 설득력을 가진다. 그리고 그 전혀 색다른 시들은 마치 인터넷과 연결된 컴퓨터 모뎀이 자료를 송수신할 때 발산하는 깜빡거림처럼 수많은 이미지들을 (깜빡거리며) 쏟아놓는다. 그 방식은 분명 ‘디지털’의 그것처럼 보이지만, 묘하게도 한 편의 시 또는 한 권의 시집 전체를 놓고 보자면 아날로그의 이미지가 떠오를 터이다. 마치 시집 제목 『흑백』이 말해주듯.
자정이 지났을 것이다
서러움을 닮은 수증기가
유리처럼 침묵하고 있다
웅크리고 숨죽이는 우울한
들숨 너머 저기로
매끄럽고 물컹한 것이
솟아오르고 있다
그것은 휴식을 바라고 있다
익숙한 입김처럼
빗줄기의 습한 냉기가
몸으로 스민다
골목이 얼음의 빛을
밟고 맨발로 서 있다
있음이 떨고 있다 (「흑백9」 전문)
『흑백』에 실린 예순세 편의 독특한 시편들은 일관되게 새로운 이미지를 찾는 고독한 여정(旅情)으로 보이는데, 이 모든 행위들은 “나는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이글거리는」)는 선언에 대한 일관된 약속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 새로운 이미지, 그리고 세상의 모든 시’를 위해 이준규 시인은 “세상의 모든 시의 실질적인 실체들, 즉 세상 시의 기저 수준low level으로 더 내려가”(정과리) ‘고독한 글자놀이’를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전혀 색다른 시의 문법이 탄생될 것임은 불문가지이다. 첫 시집 이후의 행보가 벌써부터 기대되는 것도 바로 그때문일 터이다.
이글거리는 불면의 밤이 진행한다
두꺼운 안개가 나뭇잎을 땅 쪽으로 조금씩 밀고 있고
나는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
요란한 치장을 하고 문을 나서는 휴일의 모든 창녀처럼
도대체 움직이지 않는 감각의 보푸라기를 일으키는
무너져 내리는 시간의 나선형 계단에서
소름끼치게 너를 다시 만나리라
너의 출렁이는 싱싱한 육체의 밤
무한히 커지며 이지러지고 물방울 돋치는 새벽
뒤통수에 뜬 달
그러나 아주 작은 별 하나도 없다
어찌 자연의 광휘를 노래하리
새들은 모두 어디에 숨었나
이상한 기계들의 숨가쁜 눈빛
아직도 밤하늘을 배회하는 어색한
기쁜 신의 종족들
결코 상이 되지 못하는
어슬렁 배회하는 느낌들
너라고 불러보는 부름의 짖음의 명확한 끝
밤의 차가운 기운을 쥐어짜는 허리 삔 공간 속에서
투명하게 언어를 움직이고자 하는 불가능한 기획의 막바지
언제나 출발선에 있고 언제나 문 밖에 있는
당신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뜨거움
자살 같은
벼락 같은
마약의 시공 같은
그러나 나는 세상의 모든 시를 시작하리라 (「이글거리는」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