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12월 7일(병신 십일월 초삼) 절강성 부양현의 한 몰락한 지주 집안에서 태어남. 이름은 원, 자는 따푸, 어릴 때 이름 은 인성. 사숙의 교사이자 의사였던 부친 위스셴과 모친 루 씨 사이에서 3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남. 1898년 부친 사망. 모친의 노동에 의해 가정이 꾸려지기 시작. 1902년 나씨사숙에 들어가 글을 읽음. 1903년 괴성각사숙으로 옮김. 1904년 공립 춘강서원에 들어가 공부함. 1908년 강서원이 부양현립고등소학당으로 바뀌어 1학년으로 편입. 고전문학과 영어 등을 배우기 시작함. 1911년 부양현립고등소학당 졸업. 구체시 창작을 시작. 가흥부 중학에 들어갔다가 가을에 항주부중학으로 전입. 쉬즈머와 동학. 1912년 미국 장로회가 설비한 지강대학 예과에 들어감. 교장 반대 시위에 참가하였다가 쫓겨남. 1913년 봄에 미국 침례회가 항주에 설립한 혜란중학에서 영어를 공부함. 3개월 뒤 교육방식에 실망, 고향으로 돌아와 독학을 시작. 9월에는 큰 형 위화가 일본의 사법제도를 시찰하기 위하여 출국하는 길에 따라가 동경 신전정칙보습학교에 들어감. 1914년 7월, 동경 제1고등학교 예과 시험에 관비유학생 자격으로 합격. 처음에는 문과에서 공부했으나 나중에 형의 뜻에 따라 의과로 바꿈. 꿔머뤄와 동학. 서양문학을 접촉하기 시작. 1915년 7월, 동경 제1고등학교 예과 수료. 9월, 나고야 제8고등학교 의과로 배치. 1916년 제8고등학교에서 전공을 정치학으로 바꿈. 1919년 7월, 제8고등학교 졸업. 동경제국대학 경제학부에 응시. 고등학교와 대학 시절에 러시아, 독일, 영국, 일본, 프랑스 등의 소설과 유명한 문학작품, 철학서를 탐독하고 구시와 소설을 습작. 1920년 여름방학 동안에 귀국하여 쑨췐과 결혼. 1921년 6월 하순에 꿔머뤄, 청팡우 등과 창조사 발기. 정식으로 창작활동을 시작함. 7월, 소설 "은회색의 죽음"을 상해 "시사 신보", "학등"에 T.D.Y.라는 필명으로 발표. 9월, 귀국하여 "창조계간" 발간을 준비. 친구의 소개로 안휘공립법정전문 학교 영문과 주임을 맡음. 10월 15일, 처녀소설집 "타락"을 상해 태동서국에서 출판. 1922년 2월, 소설 "아득한 밤" 창작. 3월, 동경제국대학 졸업 시험에 응시하러 일본으로 건너감. 경제학 학사학위 수여. 4월, 소설 "항수병자" 창작. 5월, "창조계간" 제1기 출판. 7월, 일본에서 귀국하여 유학생활을 마침. 소설 "풍령"(나중에 "공허"라 개칭) 창작. 8월, 소설 "피눈물" 창작. 9월, 안휘 법전으로 돌아가 가르침. 10월, 단막극 "고독한 비애"(나중에 "고독"으로 개칭" 창작. 11월, 역사소설 "채석기" 창작 시도. 1923년 2월, 안휘법전 사임. 북경에서 루쉰을 알게 됨. 4월, 상해로 돌아와 창조사의 간행물 출판과 편집에 힘씀. 5월, "창조주보" 창간. 논문 "문학상의 계급투쟁" 기술. 7월, "창조일"("중화신보" 부간) 창간. 소설 "조라행" 창작. 10월, 북경대학 통계학 강사로 부임. 소설산문 합집 "조라집"을 태동 서국에서 출판. 1925년 2월, 무창사범대학 문과 교수로 부임. 짱즈핑과 함께 일함. 11월, 국가주의파와 수구파의 갈등에 분노하여 상해로 돌아옴. 연말에 폐병에 걸려서 항주에서 요양. 1926년 1월, 상해 광화서국에서 "소설론" 출판. 소설 "이산 전에"를 "동방잡지"에 발표. 2월, 다시 상해로 돌아와 창조사 활동에 참여. 3월, "창조월간" 제1, 2기를 편집. 소설 "안개 그림자" 창작. 남부의 혁명정세에 고무되어 꾸머뤄, 왕뚜칭 등과 함께 광주로 가 광동대학의 문과 교수직을 맡음. 5월, 소설 "추운 밤", "가로등" 창작. 6월, "문예론집"을 상해 광화서국에서 출판. 7월, "희극론"을 상해 상무인 서관에서 출판. 11월, 중산대학(광동대학) 교수직 사임. 12월, 상해로 돌아와 창조사의 출판 활동을 계속하여 "창조월간", 반월간 "홍수", 주간 "신소식" 등을 주편. 1927년 1월, "홍수" 제3권 제25기에 르꾸이라는 필명으로 "광주사정"을 발표하여 광주에서 겪은 바, 혁명의 좋지 못한 경향들을 공개적으로 거론. 소설 "과거" 창작. 2월부터 상해 법 과대학에서 독일문학사 등의 과정을 한 학기 강의. 6월, 쑨 췐과 별거. 항주에서 왕잉샤와 결혼을 약속하고 동거에 들어감. "한회집"이 "따푸 전집" 제1권으로 상해 창조사에서 출판. 8월 15일, 상해 "신보"와 "민국일보"에 창조사 탈퇴 성명을 발표. 9월, 혁명정론 간행물 "민중"지 주편. "일기 구종"을 상해 북신서국에서 출판. 10월, "따푸 전집" 제2권 "계륵집"이 상해 창조사에서 출판. 11월, 소설 "길 잃은 양"을 "북신양월간"에 연재하기 시작함. "따푸 전집" 제3권 "과거집"을 상해 개명서점에서 출판. 1928년 1월, 중편소설 "길 잃은 양"을 상해 북신서국에서 출판. 3월, "따푸전집" 제4권 "기령집"을 상해 개명서점에서 출판. 왕잉샤와 정식 결혼. 봄에 첸싱춘의 소개로 태양사에 비밀리에 가입. 4월, "따푸 전집" 제5권 "폐체집"을 상해 북신 서국에서 출판. 6월, 루쉰과 공동으로 월간 "분류" 창간. 9월, 루쉰의 지지하에 "대중문예" 창간. 소설 우란분회"(나중에 "도주"라 개칭) 창작. 10월, 중국혁명호제회 참가. 아잉과 함께 "백화" 창간. 1929년 6월, 소설산문 합집 "재한풍리"를 하문세계문예서사에서 출판. 9월 말, 안휘대학 문과 교수로 부임. 1주일 뒤 안휘성 교육청장인 청치팡의 공격으로 적화분자의 명단에 올랐으나 친구의 도움으로 상해로 도피, 창작활동을 지속. 1930년 2월, 중국자유운동대동맹 성립, 루쉰 등과 함께 선언문 발표. 3월, 중국좌익작가연맹 성립, 루쉰의 거명으로 발기인이 됨. 7월, 소설 "지폐의 도약" 창작. 8월, 소설 "딸기소주" 창작. 12월, "따푸 전집" 제6권 "미궐집"을 상해 북신 서국에서 출판. 1931년 3__5월, 중편소설 "신기루"를 월간 "청년계"에 연재. 12월, 쪼ㅉ런, 후위즈 등과 함께 상해문화계반제항일대연맹 발기, 조직. 산문 "참여독백" 창작. 1932년 2월, 루쉰, 마오뚠 등과 연명으로 "상해문화계고세계서"를 발표하여 일본 제국주의가 일으킨 '1.28사건'에 대해 강력히 항의. 꽈꿍쩐, 천왕따오 등과 중국저작가항일회 조직. 오송 중국공학에서 가르침. 9월, 소설 "동재관" 창작. 10월, 폐병 재발로 항주에서 잠깐 요양. 소설 "지계화", "벽랑호의 가을 밤" 창작. 11월, "신보"의 자유담 난에 글을 쓰기 시작하여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반대하는 글을 다수 발표. 1933년 1월, 소설 "표아화상"을 "신중화" 반월간 창간호에 발표. 2월, 소설산문 합집 "참여집"을 출판. 3월, 쑹칭링, 차이웬 페이, 양상풔, 린위탕, 루쉰 등이 주축이 된 중국민권보장 동맹에 참가, 상해분회 집행위원으로 피선. "따푸 자선집"을 상해 천마서점에서 출판. 4월 25일, 항주로 이사. 혁명에 대항 염증과 진보적 문화활동 사이에서 갈등함. 5월,소설 "지모" 창작. 7월, 쩡쩐ㄸ, 푸뚱화 주편의 월간지 "문학" 창간, 루쉰, 마오뚠과 함께 편집위원이 됨. 8월, 극동 반전회의에 참가하여 외국표를 환영하는 선언을 루쉰 등과 연명으로 발표. "따푸 전집" 제7권 "단잔집"을 상해 북신서국에서 출판. 12월, 유기 "절동경물기"를 항강철로국에서 출판. 항주로 이사한 뒤 청도, 절강, 안휘 등지를 유람. 1935년 2월, 소설 "유명론자" 창작. 7월, "따푸 일기집"을 상해 북신서국에서 출판. 10월, "따푸 단편소설집"을 상해 북신서국에서 출판. 11월, "문학"지에 마지막 소설 "출분"을 발표. 1936년 3월, "따푸 유기"를 상해 문학창조사에서 출판. 4월, "따푸 산문집"를 상해 북신서국에서 출판. 5월, 산문집 "한서" 상해 양우도서관에서 출판. 6월, 상해에서 조직된 중국문예가 협회에 가입. 10월 19일, 루쉰 사망. 이튿날 복건에서 상해로 급히 달려와 장례에 참석하여 친히 영구를 메었으며, 산문 "루쉰 선생을 회상하며"를 발표하여 비통한 애도감을분출. 11월, 일본의 여러 문학단체 초청으로 일본으로 건너가서 강연하고 일본에 있던 꿔머뤄를 방문. 12월 하순, 대만을 거쳐 민남으로 귀국. 1937년 5월, 꾸머뤄에게 편지를 써 귀국을 종용. 7월, 로구교사변이 발생하여 꿔머뤄가 항전에 참가하려고 일본에서 귀국하자, 위따푸는 복건에서 상해로 환영하러 옴. 1938년 1월, 국민정부군사위원회 정치부 제3청이 무한에 조직되어 꿔머뤄가 청장을 맡고 위따푸는 꿔머뤄의 요청으로 설계위원직을 맡음. 3월, 무한에서 조직된 중화전국문예계항적협회에 참가하여 상무이사, 연구부 주임을 맡음. "항전문예" 편집위원으로 피선. 쪼우언라이와 알게 됨. 4월, 태아장, 강소, 하남 등지의 전선에서 항일전사 위문. 6월, 절강과 안휘 시찰. 8월, 일본의 공격으로 무한에서 호남으로 후퇴. 왕잉샤와의 갈등이 공개화됨. 12월, 해외에서 항일선전활동을 하기로 결심, 연말에 왕잉샤와 함께 싱가폴로 감. 1939년 1월, "성주일보" 부간인 "신성", "번성" 주편. "성빈일보"의 "문예" 편집. 이때부터 해외의 동포들에게 호소하는 강력한 항일투쟁의 정론과, 단평, 잡감, 구체시사 등을 창작. 3월, 홍콩의 "대풍"에 "훼가서기"를 기고하여 집안의 분열 과정을 공개함으로써 왕잉샤와의 관계는 완전히 파국으로 치달음. 중경에서 거행된 문협대회에서 이사로 당선. 11월, 큰형 위화가 일본의 위장특무기관의 위협에 항거하다 상해에서 암살됨. 위따푸는 이 소식을 듣고 만사를 부침. 1940년 3월, 왕잉샤와 정식 이혼. 6월, 일본 문예비평가 신쮜꺼에게 보내는 공개편지 "적아지간" 발표. 1941년 3월, "성화문예공작자치교포서"를 발표하여 항일을 위해 단결할 것을 주장. "화교주보" 주편. 11월, 태평양전쟁 발발. 싱가폴 화교문화계 전시공작단 주석과 문화계 전시간부훈련반 주임을 맡음. 1942년 1월, 싱가폴 화교항적동원위원회가 조직, 집행위원으로 피선 됨. 싱가폴 문화계항적연합회 주석. 2월 4일. 일본군의 싱가폴 진주가 임박하여 후위즈, 왕런수 등과 함께 싱가폴에서 철수. 4월, 일본군 점령하의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서 전전하다 이름을 짜오리엔으로 바꾸고 '조예기주창'을 열어 비밀리에 항일활동을 함. 6__7월, 우연한 기회에 일본군이 그가 일본어에 정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강제로 일본 헌병부의 통역을 맡김. 8__9월, 이 기간에 그는 은밀하게 화교들의 권익을 보호해 줌. 1943년 2__3월, 일본 헌병부의 억압에서 벗어나 다시 주조장을 운영. 9월, 인도네시아 화교인 허리유와 결혼. 1944년 봄에 간첩의 밀고로 일본 헌병부에서 짜오리엔이 바로 위따푸라는 사실이 발각되어 비밀리에 감시를 받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선언. 인도네시아 헌병은 자신들의 죄행을 은페하기 위해 8월 29일 위따푸를 비밀리에 체포하여 9월 17일 비밀리에 살해. 중국정부는 1952년에 그를 혁명열사로 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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