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諸葛亮, 181∼234)
중국 삼국시대의 저명한 정치가다. 자(子)는 공명(孔明)이고 동한시대 영제(靈帝) 광화 4년(181) 7월 23일에 서주의 낭야군 양도현에서 태어났다. 부친 제갈규(諸葛珪)는 태산군의 승(丞)을 지냈고, 세 명의 아들과 두 명의 딸을 두었다. 첫째 아들이 제갈근(諸葛瑾), 둘째 아들이 제갈량(諸葛亮), 막내아들이 제갈균(諸葛均)이었다. 제갈량은 어릴 적에 생모인 장씨(章氏)가 병으로 사망했고, 이에 부친은 얼마 후에 재가했다. 이후 부친 역시 영제 중평(中平) 6년(188)에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에 제갈량은 나이 겨우 8세로 그의 가족 모두는 숙부인 제갈현(諸葛玄)에게 기탁했다. 제갈현은 예장 태수로 부임하며 어린 제갈량, 제갈균과 두 명의 조카딸들을 데리고 갔고, 나이가 많은 제갈근과 그 계모는 고향에 남겨 두었다.
형주목 유표에게 의탁한 제갈현을 따라 양양에 거주하던 제갈량은 제갈현 사후 방덕의 보살핌으로 양양의 서쪽 교외인 융중에서 농사일과 독서를 하며 은거 생활을 했다.
건안 12년(207) 유비의 삼고초려를 통해 유비의 군사가 되었다. 그는 조조와 대항하기 위해 손권과 동맹을 맺고 촉한과 한실의 부흥을 위해 노력했다. 건흥 원년(223) 유비가 백제성에서 대패한 후 사망하자 그 아들 유선을 후주로 즉위시키고 보필했으며 촉한의 내정에 주력했다. 이후 중원을 평정하기 위해 6차례에 걸쳐 북벌을 단행했으나 군량미 부족 등 여러 원인으로 실패하고 건흥 12년(234) 과로로 인해 오장원에서 사망했다.
조영래
중국 고대사에 관심을 두고 있는 연구자로서 경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의 베이징대학교 역사학과에서 중국 고대사를 전공했다. <북조(北朝) 시기 잡호(雜戶)의 연구>로 석사 학위를, <북위(北魏) 탁발(拓跋) 통치 집단의 형성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베이징수도사범대학교 역사학과 객원교수를 거쳐서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와 경희사이버대학교, 숭실사이버대학교 등에 출강하고 있다. 중국 고대사 가운데 특히 진한(秦漢)과 위진남북조사(魏晉南北朝史)의 통치 집단의 형성과 민족 문제에 관심을 두고 북방 민족의 정권 수립과 지역화 과정에 관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아울러 선진(先秦) 시기의 제자백가의 사상과 목록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특히 역사 문헌학적인 지식을 근간으로 역사 문헌의 체계적인 분류와 문헌 사료의 효율적인 이해와 활용에 관한 문제를 주의 깊게 보고 있다. 역서로는 ≪중국학 개론≫, ≪신자≫가 있으며, <16국 시기 호군제(護軍制) 연구−호한 분치(胡漢分治)를 중심으로>, <盛樂及代北地區與拓拔鮮卑的建國>, <중국 소수민족 정책과 민족 간부 양성>, <‘신중화주의’ 속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 사부(史部)의 분류 체계에 관한 기원 연구>, <중국 역사지리 문헌의 문헌학적 분류와 그 기원의 연구> 등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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