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노춘(朴魯春, 1912~1999)은 1912년 11월 12일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 다방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인(子仁)이고, 호는 노강(蘆江), 아차산인(峨嵯山人)이다. 이능구(李陵九)라는 필명을 쓰기도 했다.
1943년 3월 일본 동경의 법정대학(法政大學) 고등사범부 한문과를 졸업했다. 1952년 천안공업고등학교에 교사로 부임하고, 같은 해 가세곡국민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직했다. 1955년 10월부터 현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대학교의 전임강사로 취임했고 이내 교수로 부임했다. 이후 서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건국대학교, 상명여자대학교, 국민대학교 등 여러 대학에서 강의했다. 1966년 2월 건국대학교에서 <회문체 시가 고찰: 언어·문자·유희 연구>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7년 12월 국민교육훈장 동백장을 받았고, 국어국문학회 대표이사, 한국어문교육연구회 이사 등을 역임했다.
해방 후 고전문학을 연구하는 국문학자로서 연구에 매진했다. <시조 창곡의 발생과 그 이칭>, <한국 신연극 오십년 약사>, <박씨본 ‘해동가요’의 자료적 가치>, <고전 주역 문제>, <시조 창곡의 최초 문헌> 등의 논문을 썼고, ≪주해가사문학전집≫, ≪한문숙어사전≫, ≪고시가주해≫ 등의 저서를 냈다. 성실한 자세로 학문 연구에 몰두하면서도 시를 즐겨 쓰고 노래하는 시심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후학 양성과 학회 조직에 힘쓰다 1999년 향년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함윤수(咸允洙, 1926~1984)는 1926년 4월 1일 함경북도 경성군 경성면에서 출생했다. 호는 목운(牧雲)이다. 1938년 시 동인지 ≪맥≫의 동인으로 참여했고, 이 잡지의 창간호에 <앵무새>, <유성> 등을 발표하며 문단에 나왔다. 이어서 같은 해 10월에 나온 ≪맥≫ 2호에 <너구리 같은 여인>을, 3호에 <말 못하는 앵무새>를 발표했다. 1939년 첫 시집 ≪앵무새≫(삼문사, 1939)를 출간했다. 이듬해 두 번째 시집 ≪은화식물지(隱花植物誌)≫(1940)를 도쿄의 장학사에서 출간했다.
해방 직후 최명익, 유항림, 전재경, 한태천, 남궁만, 김이석, 박남수, 황순원 등과 함께 평양에 거주하는 문학인과 예술인으로 결성된 평양예술문화협회의 멤버로 참가했다. 그러나 사회주의 사상이나 북한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았다. 1951년 1.4 후퇴 때 월남한 뒤 <부취(腐臭)>(1953), <눈으로 말하고>(1955), <포위된 태양>(1958) 등을 발표하며 왕성한 창작 의욕을 보였다. 이 시기에 제3시집 ≪사향묘(麝香猫)≫(중앙문화사, 1958)를 출간하고, 1965년에 ≪함윤수시선(咸允洙詩選)≫(중앙문화사)를 냈다. 상명여고와 청주대 등에서 교편을 잡았고, 출판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1984년 숙환으로 안양동 자택에서 타계했다.
차선일은 부산외국어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박태원 문학의 미적 자율성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학하며 근대 탐정소설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순수문학과 대중문학, 고급문학과 저급문학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싶은 욕심 때문에 능력 밖의 연구에 몰두하며 애를 먹고 있다. 이후로 문학의 범위를 벗어나 철학과 사회학 등 인문학 담론을 공부하면서 문학 연구의 외연을 넓히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현재는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에서 민속학과 근대문학의 연결점을 찾는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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