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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크릴파르처 Franz Grillparzer

    프란츠 크릴파르처 프로필

  • 국적 오스트리아
  • 출생-사망 1791년 1월 15일 - 1872년 1월 21일
  • 학력 오스트리아 빈 대학교 학사

2015.02.23.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 프란츠 그릴파르처
19세기 오스트리아의 가장 뛰어난 극작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프란츠 그릴파르처(Franz Grillparzer)는 1791년 빈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매우 냉정하고 엄격해 사교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어머니는 선량하면서 열정적인 성격으로 극도로 섬세한 감수성을 지닌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극도로 이질적인 부모의 이러한 성향을 물려받은 그릴파르처는 일생 동안 극단적인 몽상의 시인과 냉엄한 오성적 인간 사이에서 방황했다. 과묵하며 애국적인 아버지는 1809년 빚을 남긴 채 죽었고, 재능 있는 음악가 집안 출신인 어머니는 신경쇠약 증세가 아주 심해 10년 뒤에 자살했다. 그릴파르처는 빈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뒤, 생애의 대부분을 공직에서 보냈다. 1814년 국세청의 세무사로 시작해 1818년 재무부의 사무관, 그 뒤 재무부 문서국의 국장이 되었으나, 더 이상 승진이 되지 않자 1856년 공직에서 은퇴했다.
그릴파르처의 일기장과 자서전에는 자기 자신과 합일을 이루지 못하고 갈등하는 영혼의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그처럼 고뇌하며 일생을 산 사람이 전무하다 할 정도로 그는 비극적인 삶을 살다 간 작가였다. 이 양면성이 조화를 이루지 못해 이반(離反)과 분열의 고통을 겪었는데, 이것이 그의 인생과 작품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고, 일생 동안 정신과 영혼, 안정과 격정, 자기 보존과 자기소외의 끊임없는 긴장 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는 또한 일생 동안 자기 자신에 매달려 스스로를 분석한 자기관찰자였다. 극도의 자기관찰로 인해 자기혐오에 빠진 그릴파르처는 자기혐오자의 숙명으로 남을 사랑할 수 없는 운명에 시달려야 했다. 따라서 그릴파르처의 작품에는 사랑의 힘을 평가절하하는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사랑으로 인해 인간은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소외당하며, 그리하여 그릴파르처에게 사랑은 어두운 숙명적인 힘으로 묘사된다.
그릴파르처의 괴로운 삶의 구원은 문학과 음악이었다. 그에게 최고의 진리는 문학예술이었으므로 어두운 삶과 현실로부터의 도피처는 문학예술이었다. 실제의 삶은 우연이 많고 일관성이 없으며 그림자처럼 허망하기 때문에 그는 예술로 도피한 것이다. 예술은 그에게 삶이 거부한 것을 충족시켜 주며 보상해 주었다. 예술가는 예술을 창조하기 위해서는 삶으로부터 떨어져 고독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기 때문에, 그릴파르처는 삶을 희생하고 자신의 문학 창작을 위해 온 힘을 쏟았다.
그릴파르처가 작품 활동을 한 시기는 문학사조 중에서 비더마이어에 속한다. 비더마이어 문학사조는 권세나 세속적인 명예와는 거리를 두고 내적인 평화와 안정을 최우선의 가치로 삼는다. 이 사조는 사회현상에서 눈을 돌리고 전원적이고 가정적이며 목가적인 소재를 사실적으로 세밀히 묘사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 다시 유럽에 드리운 구체제의 그늘에서 오스트리아와 독일 슈바벤 지역 일부 문인들은 현실 정치에 대한 관심을 접고 은거한 채 소시민적 자족감이 밴 글쓰기를 추구했는데, 이런 문학 경향을 비더마이어라고 부른다.
루트비히 아이히로트의 풍자시 <슈바벤의 학교 교사 고틀리프 비더마이어와 그의 친구 호라티우스 트로이헤르츠의 시>(1850)에 나오는 소박하고 비정치적인 인물의 이름에서 비롯한 비더마이어 문학은 쇼펜하우어와 헤겔 우파의 보수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마음의 평화나 은둔의 행복 따위를 자연 예찬과 교양 추구의 맥락에 배치하며 때로는 낭만적으로, 때로는 익살스럽게 형상화했다.
그릴파르처 외에 희곡 분야에서 비더마이어를 대표하는 작가로는 배우를 겸했던 페르디난트 라이문트와 요한 네스트로이가 있다. 그릴파르처는 소설의 아달베르트 슈티프터와 카를 이머만, 시의 아네테 폰 드로스테ᐨ휠스호프와 에두아르트 뫼리케, 니콜라우스 레나우 등과 함께 이른바 비더마이어 문학을 대표하는 극작가다. 그릴파르처는 비더마이어의 다른 두 극작가와는 달리 배우가 아니라 공직을 겸했다. 45년간 오스트리아 제국 재무부 관료로 일하면서 그는 꾸준히 희곡을 썼고, 때때로 서정시와 단편소설, 문학평론에도 손을 댔다.
작가로서의 생활은 당시 유행하던 운명비극 형식의 <조비(祖妣, Die Ahnfrau)>(1816)로 시작되었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이 작품에서 조비의 죄로 전 족속이 파멸하며 갑작스러운 우연이 사람들을 타락의 길로 빠뜨린다. 이어서 그리스의 여류 시인을 모범으로 삼아 예술과 삶의 겉돎을 천착한 연애 비극 <사포(Sappho)>(1818)로 주목을 받는다.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의고전적 특징을 보이는 이 비극에서 ‘체념’은 기본 사상이다. 사포는 예술로 신들에게 헌신했지만 그녀도 세속적인 사랑의 기쁨을 누리고 싶어 한다. 그러나 친구 파온은 품위 있는 노예 메리타에게 사랑을 느낀다. 사포는 복수심에 불탔지만 결국 “사람을 사랑하고 신들을 경외하자”는 고백을 하고 체념한 후 죽는다.
그리스 신화에서 소재를 취한 ≪금 양모피≫(1821)는 <빈객>, <아르고호 선원 원정>, <메데이아>의 3부작으로 이뤄진 비극으로 낭만적 수법과 창의력이 뛰어난 작품이다. 저주와 죽음이 따르는 금 양모피는 소유자를 파멸로 이끄는 니벨룽(게르만 신화 <니벨룽의 반지>에 나오는 난쟁이족)의 금을 연상시킨다. 콜키스의 왕은 은신처를 찾는 ‘빈객’을 살해한다. 그로 인해 금 양모피에는 저주와 죽음이 따른다. ‘아르고호 선원’에서 콜키스 왕의 딸인 메데이아는 나라와 가족을 배반하고 금 양모피를 찾으러 온 이아손과 함께 그리스로 도주한다. 제3부 <메데이아>는 가장 격렬한 부분으로, 그리스인 이아손과 이방인 메데이아의 결혼이 깨어진다. 복수심에서 메데이아는 이아손과의 사이에서 난 두 아이를 죽이고 떠난다.
계속하여 <오토카르 왕의 행복과 종말(König Ottokars Glück und Ende)>(1825), <군주의 충복>(1828), <바다의 물결, 사랑의 물결(Des Meers und der Liebe Well- en)>(1831) 등을 발표해 성공을 거두었다. <오토카르 왕의 행복과 종말>은 그릴파르처의 역사극 중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사랑의 희곡 <바다의 물결, 사랑의 물결>에서의 음조는 섬세하고 부드럽다. 헤로와 레안더의 이야기로 독일 가요에 등장하는 두 연인의 비극적인 이야기다. 희극 <거짓말하는 자는 화를 입으라!(Weh dem, der Lügt!)>(1838)는 빈 사람들에 의해 거부당했다. 부엌 하인 레온은 칼론 주교의 조카를 적의 감옥에서 구출할 때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받는다. 그는 주교 조카를 구하러 왔다고 진실을 말하지만 아무도 믿지 않는다. <거짓말하는 자는 화를 입으라!>가 평단의 비웃음과 혹평을 받은 뒤, 그는 47세로 몰이해한 연극계와 인연을 끊고 작품 발표를 일체 중지했다.
하지만 그릴파르처는 그 이후에도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로 건조한 공무원 생활의 피폐함을 달랬다. 그의 80세 생일에 사람들이 거대한 경의를 표하자 그는 모든 것을 귀찮아하며 “너무 늦었다… 이것은 단지 마지막 선심일 뿐이다”라고 말했다. 1872년 1월 21일 그릴파르처는 빈에서 81세로 숨을 거두고 슈베르트 공원에 안장되었다. 사후에 <리부사(Libussa)>(1848), <합스부르크가의 형제 갈등(Ein Bruderzwist in Habsburg)>(1848), <톨레도의 유대 여인(Die Jüdin von Toledo)> 등 세 편의 비극이 간행되었다. 프라하의 창건에 관한 전설을 다룬 희곡 <리부사>에서는 낭만주의가 다시금 울려 퍼진다. 두 세계, 즉 공주 리부사의 조용한 요술 왕국과 도시들을 건축하고 영리를 추구하는 진보의 세계가 서로 대립되어 있다. 농부의 오두막집에 내려간 리부사는 험한 현실 때문에 파멸한다. 여성의 모습을 통해 시인은 옛 시대와 자연과의 행복한 삶을 형상화하고, 남자의 모습을 통해서는 쉼 없이 일하는 진보의 시대를 표현한다. 이 작품은 그릴파르처 자신의 고백이 아닌가? 그는 확고한 의지의 인간이 아니었다. 그의 정신은 가혹한 현실과의 싸움에서 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문학은 오늘날의 시대를 예언하지 않았는가? 외적인 진보가 오늘날 인간의 정신적인 삶을 위협하고 있다고 우리는 한탄하고 있지 않은가?
그 밖에 자기 고백적인 서정시와 단편소설 <불쌍한 악사(Der arme Spielmann)>(1848) 등이 있다. 그는 문학평론과 미학 논문도 썼으며 특히 날카로운 경구를 남겼다. 1909년에서 1942년까지 그의 작품 전집이 총 42권으로 발간되었다.

역자 - 윤시향
윤시향은 함경북도 무산에서 태어나 이화여자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논문 <브레히트의 반파시즘연극 연구>(1991)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는 ≪브레히트의 연극세계≫(공저), ≪하이너 뮐러의 연극세계≫(공저), ≪독일 문학의 장면들-문학, 영화, 음악 속의 여성≫(공저), ≪15인의 거장들-독일어권 극작가 연구≫(공저), ≪서사극의 재발견≫(공저), ≪유럽 영화예술≫(공저), ≪소리≫(공저) 등이 있고, 역서로는 ≪클라이스트≫, ≪당나귀 그림자에 대한 재판≫, ≪어두운 밤 나는 적막한 집을 나섰다≫, ≪시체들의 뗏목≫ 등이 있다. 한국브레히트학회 회장, 한국여성연극인협의회 공동대표, 한국연극학회 편집위원, 한국뷔히너학회 편집위원, 한국I.T.I. 감사, 한국공연예술원 이사 등을 지냈으며 연극 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현재 원광대학교 유럽문화학부와 공연·영상학 연계 전공 교수로 재직 중이며 원광대 문화콘텐츠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프란츠 그릴파르처의 메데이아> 저자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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