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간집의 작가는 모두 18인으로,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정도에 따라 그 종적(?迹)의 분량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온정균(溫庭筠)은 본명이 기(岐)이고 자(字)가 비경(飛卿)으로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 사람이다. 재능이 뛰어났지만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했다. 음률에 정통하고 사조(詞調)에 능숙해 사문학(詞文學) 초기에 사의 격률을 규범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온정균 사의 예술적인 성취는 당시 사인(詞人)들의 선두가 되었다. 그의 사는 대부분이 여성의 요염한 모습과 자태를 묘사하고 있어 제재 면에서 비교적 협소하지만, 호색적이고 선정적인 화간사의 특징을 개시했다.
황보송(皇甫松)은 본명이 숭(嵩)이고 자가 자기(子奇)로 절강성(浙江省) 목주(睦州) 신안(新安) 사람이다. 시사(詩詞)에 뛰어났으며 신성(新聲)을 제작했다.
위장(韋莊)은 자가 단기(端己)로 섬서성(陝西省) 경조(京兆) 두릉(杜陵) 사람이다. 재능이 뛰어나고 성격이 소탈해 형식에 구애받지 않았다. 당소종(唐昭宗) 건령 원년(乾寧元年)에 진사(進士)에 합격해 교서랑(校書郞)이 되었고, 오대 때 촉(蜀)에 들어가 왕건(王建)의 휘하에서 장서기(掌書記)를 맡아 전촉(前蜀)의 건국을 보좌해 승상(丞相)에 이르렀다. 화간사인으로 온정균과 이름을 같이해 맑고 아름다운 사를 썼다.
설소온(薛昭蘊)은 자가 징주(澄州)로 산서성 하중(河中) 보정(寶鼎) 사람이다. 왕연(王衍) 때 관직이 시랑(侍郞)에까지 이르렀다. 시와 사에 뛰어났고 재능이 출중했다.
우교(牛嶠)는 자가 송경(松卿) 또는 연봉(延峰)으로 감숙성(甘肅省) 농서(?西) 사람이다. 희종(僖宗) 건부(乾符) 5년에 진사에 급제해 습유(拾遺) 등의 관직을 지냈다. 시와 사에 재능이 뛰어났다.
장필(張泌)은 자가 자징(子澄)으로 회남(淮南) 사람이다. 남당의 후주(後主)가 그를 불러 감찰어사(監察御使)로 등용했다. 이후에 후주를 따라 송(宋)에 투항했다. 사 풍격이 온정균과 위장의 작품과 유사하다.
모문석(毛文錫)은 자가 평규(平珪)로 하남성(河南省) 남양(南陽) 사람이다. 14세에 과거에 급제해 전촉(前蜀)에서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와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다. 왕연을 따라 당(唐)에 항복했으며, 후에는 후촉(後蜀)을 섬겼다. 사(詞)를 잘 지었다.
우희제(牛希濟)는 감숙성 농서 사람으로 우교의 조카다. 촉에서 벼슬을 했고 왕연 시기에 한림학사를 지냈다. 후에 당에서 옹주절도부사(雍州節度副使)를 임명받았다. 재능이 민첩하고 시와 사에 뛰어났으며, 사의 풍격은 우교와 비슷하다.
구양형(歐陽烱)은 사천성(四川省) 익주(益州) 화양(華陽) 사람이다. 전촉에서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지냈고, 전촉이 망하자 후촉에서 한림학사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또한 후촉이 망한 후에는 송을 섬겼다. 조숭조가 편찬한 ≪화간집≫의 서문을 써서 ≪화간집≫의 편집 의도를 설명했다.
화응(和凝)은 자가 성적(成績)으로 산동성(山東省) 수창(須昌) 사람이다. 19세에 과거에 급제했다. 처음에는 후당(後唐)을 섬겼고, 후에는 후진(後晋)에서 재상(宰相)을 지냈다. 평생 문장을 지었는데, 특히 단가(短歌)와 염곡(艶曲)에 뛰어나 곡자상공(曲子相公)으로 불리었다.
고경(顧?)은 본적이 상세하지 않다. 전촉에서 왕건 시기에 급사내정(給事內庭)과 무주자사(茂州刺史)를 지냈다. 이후에 후촉에서 태위(太尉)에 올랐다. 시와 사에 뛰어났는데, 그의 사는 진지하고 열렬해 완곡한 아름다움이 감동적이다.
손광헌(孫光憲)은 자가 맹문(孟文)이다. 사천성 능주(陵州) 귀평(貴平) 사람이다. 후당에서 능주판관(陵州判官)을 지냈고, 송에 투항한 이후에는 황주자사(黃州刺史)를 역임했다. 오대의 사인 중 작품 수량이 가장 많다.
위승반(魏承斑)은 부친 위굉부(魏宏夫)가 전촉 왕건의 양자였다. 때문에 위승반 역시 왕종필(王宗弼)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고 제왕(齊王)에 봉해졌으며 관직이 태위에 이르렀다. 그의 사는 대부분이 개인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녹건의(鹿虔?)는 후촉 때 급제해 관직이 검교태위(檢校太尉)에 이르렀지만 후촉이 망하자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았다. 사를 통해 개탄의 정서를 표출했다.
염선(閻選)은 평민이었으나 남당의 후주에게 사를 지어 바쳤다. 이에 염 처사(閻處士)로 불렸다. 사의 풍격이 모문석과 비슷하다.
윤악(尹?)은 사천성 성도(成都) 사람이다. 전촉의 왕연을 섬겼고 한림교서(翰林校書)를 거쳐 참경(參卿)에까지 이르렀다. 시와 사에 능했는데 특히 사가 맑고 간결하다.
모희진(毛熙震)은 후촉 맹창(孟昶) 시기에 관직이 비서감(秘書監)에 이르렀다. 음률에 정통해 사의 대부분이 신성(新聲)이다.
이순(李珣)은 자가 덕윤(德潤)이고 사천성 재주(梓州) 사람이다. 오대 시기 전촉의 수재로 왕연을 섬기다가 나라가 망하자 더 이상 벼슬을 하지 않았다. 사의 풍격이 청신하고 우아하며 소박함 속에 아름다움이 드러나 있어 위장의 작품과 유사하다.
홍병혜
1969년 서울에서 출생했고, 2002년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지금까지<유우석과 백거이 사의 남방성 고찰> 등을 비롯해 2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며,≪구양수 사선≫ 등 10여 권의 저서와 역서 및 편역서를 출판했다.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연구소 초빙연구원과 한신대학교 학술원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중국어대학과 배화여자대학 중국어통번역과에서 강의하고 있다.
<원서발췌 화간집> 저자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