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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윤이 동화선집 상세페이지

한윤이 동화선집작품 소개

<한윤이 동화선집> 한윤이는 아이들이 겪는 일상을 소재로 해서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작가다. 성인들이 읽어도 흥미로울 정도로 뛰어난 그의 단편동화들은 우리 아이들이 성숙에 대해 고민하는 어른으로 자라나는 데 좋은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다. 이 책에는 <쥐와의 하룻밤>을 포함한 14편의 단편이 수록되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한국동화문학선집’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00명의 동화작가와 시공을 초월해 명작으로 살아남을 그들의 대표작 선집이다. 지식을만드는지식과 한국아동문학연구센터 공동 기획으로 7인의 기획위원이 작가를 선정했다. 작가가 직접 자신의 대표작을 고르고 자기소개를 썼다. 평론가의 수준 높은 작품 해설이 수록됐다. 깊은 시선으로 그려진 작가 초상화가 곁들여졌다. 삽화를 없애고 텍스트만 제시, 전 연령층이 즐기는 동심의 문학이라는 동화의 본질을 추구했다. 작고 작가의 선집은 편저자가 작품을 선정하고 작가 소개와 해설을 집필했으며, 초판본의 표기를 살렸다.

한윤이의 작품들은 탄탄하면서도 간결한 구성과 사실주의적인 이야기가 특징으로 꼽힌다. 그녀의 작품을 읽다 보면 마치 잘 쓰인 품격 높은 단편소설을 읽는 것 같다. 성인들이 읽어도 흥미롭게 다가오는 에피소드들을 짧고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해 냈기 때문이다. 또한 아이들이 겪는 일상들을 소재로 해서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런 점에서 한윤이의 단편동화는 폭넓은 독자층에게 즐거움을 주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한윤이의 단편동화를 관통하는 주제 의식을 꼽으라면 우리는 무엇을 꼽을 수 있을까? 이 전집에 실린 작품들을 기초로 해서 분석해 본다면 한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그것은 성숙이다. 작가에게 있어서 성숙은 양심과 사랑, 특히 사람 혹은 세계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랑과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작가는 이 주제 의식을 아이들의 입장에서 보여 주기도 하고 어른의 입장에서 보여 주기도 한다. 한윤이 동화에서는 성숙의 문제는 어른과 아이들 모두에게 중요한 문제다. 때문에 작가는 이것이 문제가 되는 계기적 사건을 우리 앞에 펼쳐 놓는다.

한윤이가 성숙의 계기로 생각하는 순간들은 작가가 그려 내는 이야기를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어른이 되어서 다시 경험하게 되는 유년기의 기억을 통해 드러나기도 하고, 아이들이 경험하는 사건 속에서 겪게 되는 어떤 선택의 과정들 속에서 드러나기도 한다. 어른이 등장할 경우 이는 유년기에는 잘 깨닫지 못했던 어떤 경험의 결과를 특정 사건을 통해 다시 깨달음으로서 유년기에 완성하지 못한 양심과 사랑의 감각을 회복하는 과정을 그린다. 그것은 지연된 성숙의 열매를 뒤늦게 성취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한윤이의 뛰어난 단편동화들은 우리 아이들이 성숙에 대해 고민하는 어른으로 자라나는 데 좋은 계기를 마련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에게 주는 가장 고귀한 선물일 것이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빛나는 선물 말이다.


저자 프로필

한윤이

  • 국적 대한민국
  • 출생 1947년 2월
  • 학력 1972년 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
  • 경력 상명대학교 사범대학부속학교 강사
    2008년 동아일보사 문화센턴 강사
  • 데뷔 197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화 `동박골 아이들`

2015.02.04. 업데이트 작가 프로필 수정 요청


저자 소개

저자 - 한윤이
해방 이태째 되는 1947년은 윤년으로 2월 윤달이 들어 있는 해였다. 나는 이해 윤 2월,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은 도청이 있는 시의 중심지에서 5킬로 정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야산 가운데로 길이 난 말랑고개라는 이름의 고갯길을 올라서면 그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아늑하고 평화스러움을 안겨 주는 마을이었다. 마을 뒤로는 알맞게 소나무들이 배열되어 있는 뒷동산이 있고, 마을 앞으로는 송사리, 붕어 떼들이 걱정 없이 유영하는 냇물이 흘렀다. 그러나 이것들은 이미 옛날의 일이다. 늦은 하학길에 귀신, 도깨비가 금방이라도 뒷덜미를 잡아챌 것 같아 숨죽이고 달음질쳐야 했던 고갯길은 먼 동화 속의 이야기로 사라져 버렸다. 그때의 경이로운 감탄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의 어린 시절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사는 평화로움 그 자체였다. ‘이름대로 간다’는 우리 속담이 있는데, 예부터 내려오던 마을 이름이 평화로운 상태를 뜻하는 ‘화평(和平)’이었으니 어쩜 당연한 일이었을 것 같다.
여름이면 마을 앞을 가로질러 맑게 흐르는 냇물에서 멱을 감고, 대나무 소쿠리로 송사리와 붕어, 미꾸라지를 몰아 잡았으며, 아래쪽에 둑을 쌓아 냇물을 막아 만든 방죽에서 헤엄을 치고, 겨울에 얼음이 얼면 아버지가 만들어 준 스케이트로 얼음지치기를 하며 놀았다.
마을의 뒷동산은 단옷날 그네를 매는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서 있었고, 동산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던 커다란 두 개의 무덤은 귀신놀이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칠흑 같은 그믐께 귀신놀이하다가 겁 많은 아이가 기절해서 야단법석을 떨던 일이 생각난다.
정서적으로 풍요로웠던 유년의 경험과 고향의 자연 속 추억은 내 작품의 모티브이며 그 원천이다. 어린 날의 평화로운 일상에 대한 추억은 인생을 살아가는 내 삶의 거울이기도 하다. 작품 속 등장인물들이 어려운 일에 부닥치거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실을 마주하면서도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밝게, 명랑하게, 희망적으로 살아 내는 것은 나의 낙천적 성품과 더불어 어린 날의 기억 속 자연과 평화로움 속에서의 성장이 무관치 않다 할 것이다.

나는 읽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로 성장했다. 아버지와 오빠, 언니가 일상으로 책 읽는 모습을 보고 자랐으니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또한 내성적인 성격에 몇 시간이고 혼자서 하는 책 읽기가 잘 맞았던 것 같다. 더욱이 책 속의 세계는 현실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마법의 세계가 아니던가. 한번 읽기에 열중하면 집 안에서 뒤적이며 며칠이고 나가 놀지 않는다는 데서 ‘방안퉁수’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우리 집엔 책이 많았다. 안방 선반에 한학을 하신 아버지의 누렇게 변색된 한문책이 층층이 있었고, 오빠의 방엔 문학 서적이 가득했다. 집 안 어디든 손 닿는 곳에 책이 있었다. 초등학교 때 강소천과 마해송의 동화를 읽고, 옛날이야기를 읽었다. 이솝과 안데르센을 읽으며 나도 이담에 이런 동화를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엄마 찾아 삼만 리≫, ≪괴도 뤼팽≫, ≪셜록 홈스≫ 등을 읽으며 추리작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중학생 때부터 다섯 살 위의 문학도였던 오빠 덕분에 ≪현대문학≫과 ≪자유문학≫, ≪사상계≫ 등 문예지를 읽었다. 그때 연재소설로 읽었던 소설들이 지금도 생각난다. 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 ≪움직이는 성≫,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 안수길의 ≪북간도≫와 이범선의 소설들을 읽으며 다음 호가 언제 나오나 기다렸다. 감수성이 예민했던 시절, 깊은 인상으로 나의 감정을 사로잡은 ≪나무들 비탈에 서다≫의 현태, 동호 등 주인공 이름이 지금도 생각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와 레트 버틀러, ≪인간의 조건≫의 가지 상등병도 생각난다. 톨스토이, 발자크, 지드, 사르트르, 카뮈 등 세계문학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아마도 중·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책이 그 이후 수십 년간의 독서량보다 많을 것이다.

우리 집은 늘 오빠의 남녀 문학동인 친구들이 모여들어 열정적으로 문학을 이야기하고 토론하는 모임 장소였다. 문학의 밤 행사를 준비하거나 시 낭송을 하기도 했으며, 각기 써 온 작품 품평회를 하면서 밤을 새우기도 했다. 세계 명작의 한 대목을 읽으며 작품 속 분위기를 연출하기도 했다. 나의 눈에 비친 ‘오빠의 방’ 풍경은 가슴 벅찬 경이로움이었다. 다음 날 학교에 가면, 나는 눈동냥 귀동냥한 문학 이야기를 내 것인 양 친구들에게 이야기하며 또래들보다 한 계단 높이 서 있는 듯한 착각을 하기도 했다. 나는 시나브로 문학 속으로 한 발짝씩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내가 작가를 꿈꾸게 된 것은 문학도였던 오빠의 영향력이 지배한 것이거니와, 오로지 문학으로 포만했던 ‘오빠의 방’에서 보고 듣고 배운 영향이 크다 할 것이다. 오빠가 서울로 진학하면서 ‘오빠의 방’도 함께 갔지만 방학 때면 여전히 그 멤버들이 모였고, 다른 도시에 사는 오빠의 대학 친구들이 이따금 합류하기도 했다. 나는 많은 오빠들의 관심 속에 여전히 ‘오빠의 방’ 언저리에 있었다.
그토록 열정적으로 문학을 논하던 ‘오빠의 방’ 멤버들은 훗날 시인과 소설가와 문학평론가가 되었다. 오빠의 절친 오세영도 시인이 되었다. 그 중심에 있던 내 오빠는 불행히도 자신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그 한을 가슴에 품고 세상을 떠나 안타까움을 남겼다. 당시 ‘오빠의 방’을 지도했던 최호영 선생은 KBS연속극 현상공모에 당선(1960년 <에덴 이후의 낙원>)한 뒤 서울로 이주, 드라마 작가로 활동했다. MBC가 정동에 있을 때 내 직장이 신문로에 있었는데, 선생님이 문화방송국에 오시는 길에 나한테도 종종 들러, 문학에 심취했던 ‘오빠의 방’ 시절을 추억하며, 나의 작품 활동을 격려해 주시곤 했다.

글짓기로 처음 상을 받은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5월 어린이날을 기념한 전국어린이글짓기 공모였는데, 어느 기관에서 주최했는지는 생각나지 않는다. 서울에서 학교로 상장과 함께 부상으로 국어사전이 소포로 왔고, 학교에서는 운동장 조회를 열어 상장 수여식을 하고 축하해 주었다. 전교생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순간이었다. 미술과 작문에 소질이 있어 특별활동으로 두 가지를 다 하면서 도내 사생대회에 나가 상을 타던 때였는데, 글짓기에 자신감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학생 잡지 ≪학원≫에 투고한 글이 뽑혀 실리면서 나는 주변에서 문학소녀로 불리기 시작했고 고등학교를 졸업(1966년 전주영생여고)할 때까지 자주 ≪학원≫에 작품이 실렸다. 그 덕분에 특기 장학생으로 학비를 면제받는 혜택을 누리면서 도(道) 내외 백일장에 학교 대표로 나가는 등 3년 동안 문예반장으로 활동했다.
≪학원≫은 그 시대 유일한 학생 잡지로 매달 전국의 중고생들이 투고한 작품을 심사해 입선한 작품을 실었다. 가난하고 어려웠던 1950∼1960년대에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전국의 문학 청소년들은 ≪학원≫을 통해 정비석의 ≪홍길동전≫과 김내성의 ≪검은 별≫, 조흔파의 ≪얄개전≫ 등을 연재소설로 읽었다. 인기가 대단했던 ≪남궁동자≫를 읽으며 다음 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책이 나오면 먼저 자기 작품이 실렸는지 ‘독자문예’란부터 살폈고, 거기 실린 경쟁자들의 작품을 읽으며 새로운 다짐으로 원고지와 씨름하며 다음 호를 기대했다.
그 시대 청소년들에게 ≪학원≫이 최고 인기였던 것은 학생들에게 필요한 다양한 읽을거리도 있었지만 전국의 중고생을 대상으로 공모한 ‘학원문학상’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문학에 재능 있는 학생을 선발하기 위한 이 상은, 그 시대 문학 청소년들에게 최고의 영예로운 상이었다. 전국의 문학 청소년들은 매년 응모한 작품의 입상을 꿈꾸며, 당선자를 발표하는 1월 호를 손꼽아 기다렸다. 김동리, 박두진, 조지훈, 안수길, 박목월 등 당대 문단의 대가들이 심사위원으로 문턱이 높았으며, 수준 또한 대단했다고 기억한다. 이 상을 받은 ‘학원세대’로 불리던 사람들이 문단에 나와 각 장르에서 활동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나는 여러 번 이 상을 받고 학생 문단에 이름이 알려지면서 전국의 문학소년·소녀들의 편지를 많이 받았다. 윤상규도 그중 한 사람으로 천안에서 문학소녀로 이름을 날리던 김윤경과 더불어 셋이서 릴레이 편지를 주고받았던 생각이 난다. 김은 나보다 두 학년 위였고, 윤은 한 학년 위였다. 윤상규는 1960년대 신춘문예 당선으로 시인이 되었는데, 1970년대 말 윤후명이란 필명으로 소설가로도 데뷔했다.
얼마 전 오순택 동시인이 ‘보면 깜짝 놀랄 귀한 자료’라며 건네주는 누렇게 변색된 오래된 책자를 받았는데, ‘제8회 학원문학상 당선자 발표’가 실린 1963년도 ≪학원≫ 1월 호였다. 당선자 명단과 당선작이 실린 페이지를 따로 떼어 내 성화(聖畵)가 그려진 광고지로 앞뒤 표지를 붙이고 스테이플러로 고정한 얇은 책자였다. 당선자 명단에 눈에 익은 이름들이 있었다. 정호승, 김종철, 윤상규, 한윤이 등 나의 고1 때인 50년 전 흔적을 보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하는 듯했다.

1960년대는 문학에 재능 있는 학생들을 뽑기 위한 방법으로 백일장을 열거나, 대학신문을 통해 전국 고교생 현상문예 공모를 하는 대학들이 있었다. 당선하면 입학 자격과 입학금 감면 같은 특례가 있었다. 집안이 넉넉지 못한 나에겐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였다. 충남대 등 거리가 멀지 않은 대학의 백일장에 참석하는 한편으로 대학신문 현상문예에 응모했는데, 두 군데서 당선 통지를 받았다. ≪전북대학신문≫(1962년 소설 <바람과 모래> 당선)과 ≪서라벌예술대학신문≫(1965년 소설 <벤치 위에서 만난 사람> 당선)이다.
≪전북대학신문≫은 소설과 시, 각기 당선작과 가작 한 편씩을 뽑았는데, 소설 가작에 김준일, 시 당선에 이상열, 가작에 손풍삼이었다. 훗날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 정동 MBC 시절 주로 수사극을 많이 쓴 김준일은 2007년, 소설가로도 데뷔했다. 언젠가 김이연 선생이 진행하는 국군 방송 프로에 초대되어 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 손풍삼이 그 방송국의 요직에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당시 전주의 고교생 문사들이었다. 백일장에 나가면 다들 만나게 되어 있었다. 박정만과 최명희도 함께였다. 최명희는 내가 학생 문단에 이름이 알려지면서 학교로 나를 찾아와 그때부터 친구가 되었다. 우리는 의기투합해 문학 서클(파피루스)을 만들고 모임을 함께 하며 만나기 시작했다. ‘오빠의 방’에서 보고 듣고 터득한 경험이 서클 활동에 도움이 되었다. 이따금 모임 장소가 되었던 옛 우체국 네거리의 제과점 ‘부레옥’엔 약속이 어긋난 사람들이 다음을 기약하는 사연을 적어 꽂아 두는 메모판이 있었는데, 간혹 남의 메모를 몰래 뽑아 가는 사건(?)으로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우리는 많은 이야기로 시간을 함께했고 비밀스러운 사건(?)을 공유했다. 그때를 생각하면 가을날, 구르몽의 <낙엽>을 낭송하며 흩날리는 낙엽 속을 거닐던 다가공원이 생각난다. 공원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명희네 한옥집과, 조용하고 음전한 명희 어머니의 모습과, 담백했던 명희 어머니의 밥상이 떠오른다.

대학신문의 현상문예 심사는 두 군데 다 김동리 선생이 했다. 당시 서라벌예술대학 학장으로 학원문학상 심사도 했는데, 여러 대학의 현상문예 심사도 많이 했던 것 같다. 자료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심사평을 읽고 한동안 벅찬 마음으로 한껏 고무되어 있던 것만은 생각난다. 그 뒤로 동리 선생을 지근거리에서 뵌 것은 훨씬 훗날의 일로, 어느 해, 초창기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을 지낸 손소희 선생 기일을 맞아 묘소 참배길에 한국여성문학인회 이사들이 동행하는 자리에서였다. 일행에게 점심을 사 주시는 자리에서 인사를 드리자 잠시 보시더니 ‘그래, 요즘은 뭘 써요?’라고 물으셨다.
1965년(고3) 가을, 시상식에 참석하려고 돈암동 높은 지대에 있던 서라벌예술대학을 찾아갔던 날이 생각난다. 가족 누구도 함께 갈 사정이 되지 않았고, 담임선생은 하필이면 그때 집안에 초상이 나 부득불 혼자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학교에서 주는 2일간의 필요 경비를 가지고 완행열차를 탄 것은 시상식 전날 밤이었다. 서울길이 완행열차로 일곱 시간인가 여덟 시간인가 걸리는 시절이었다. 새벽에 출발한다 해도 시상식 시간에 대어 갈 수 없었다.
서라벌예대는 개교 10년 정도의 역사가 짧은 학교였는데, 김동리 등 당대의 쟁쟁한 작가들이 문학을 가르쳐 교수진이 좋다고 알려져서 문학도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나는 현상문예 당선으로 입학 특례 학생이었지만, 학비에 생활비 등 입학만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중농 정도의 집안 형편에 남동생 셋과 여동생 하나, 줄줄이 학생이었다. 사회도 주변도 모두 어려운 때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1972년, 힘들고 숨 가쁜 학창 시절을 보내야 했던 나는 어렵사리 대학(전북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을 마치고 국어 선생이 되었다. 이후 서울로 이주하기 전까지 동인 활동(문예가족)을 하며 소설 습작에 열중한다. 훗날, 서민들의 애환과 예술의 극치를 그린 작품으로 평가되는 ≪샛강≫, ≪뱀춤≫의 작가 이정환이 이때의 동인 중 한 사람이다. ‘고교생 문사’ 친구들 중 나와 최명희만 고향에 있으면서 함께했는데, 모교에서 국어 선생을 하던 최명희도 오래지 않아 서울로 학교를 옮긴다.

1974년, 겨울방학을 이용해 서울에 온 나는 당시 종로 5가의 현대문학사가 있던 건물 지하 다방 주네브에서 최명희와 박정만을 만났다. 최명희는 해방촌에서 자취를 했고, 박정만은 잡지사 ≪학원≫에 있었다. 박은 잠시 후 원고료 봉투를 들고 나타난 현대문학 직원 김정숙을 소개했고, 받은 원고료로 밥값과 찻값을 내며 호기를 부렸다. 박은 대학 재학 중에 신춘문예 당선으로 이미 시인이 되어 있었다. 우리 중 최명희가 가장 늦게 신춘문예를 통과(1980년)했다. 이날, 우연찮게 눈에 띈 잡지사 기자 모집 공고는 내 삶의 터전을 서울로 옮기는 계기가 된다.

197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동화 <동박골 아이들>이 당선되며 나는 동화작가가 되었다. 당선 통지의 전화를 받고 벅찬 가슴을 주체하지 못해 옥상으로 뛰어 올라갔던 생각이 난다. 당시 신문로 출판협동조합 건물에 내 일터가 있었는데, 광화문통이어서 교통이 편리해 사람들 만나기에 좋았다. 정동 MBC 작가실의 김준일과 의주로 ≪학원≫의 박정만과 해방촌에서 자취를 하던 최명희와 손풍삼과 김영석(시인) 등 ‘고교생 문사’ 친구들을 자주 만날 때였다. 이해 1월은 나의 신춘문예 당선이 좋은 건수가 되어 오늘도 축하, 내일도 축하…. 축하의 자리로 만남이 잦았다.
신문로 출판협동조합 건물 옆에 ‘돼지집’이라는 대중식당이 있었다. 한잔 술과 식사를 경제적으로 해결하기엔 안성맞춤의 집이었다. 우리는 퇴근 후 그곳으로 모여 가볍게 저녁을 해결하거나 빵이나 음료수를 사 들고 삼청공원으로 옮겨 자리를 잡고 문학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최근에 쓴 작품 이야기를 했고, 쓰고 있는 작품이 잘 풀리지 않는 문제를 올려놓고 토론하거나, 문예지에서 읽은 어느 작가의 형편없는 작품을 비판하는 등 공부를 하는 셈이었다. 때로 우렁찬 목소리로 시 낭송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면 산책객들이 발을 멈추고 구경하기도 했다. 박정만과 이윤기(소설가)는 듀엣으로 ‘봄날은 간다’ 등 흘러간 대중가요를 감미로운 소리로 잘 불러서 종종 격론을 벌인 뒤의 우리 모두를 감동시키며 카타르시스를 주었다. 김준일과 박정만과 이윤기는 가수 뺨치게 노래를 잘 불렀다. 이윤기는 박정만이 직장 동료라며 데려와 소개한 후 자주 어울렸다.
이번 선집 작업으로 작품을 정리하면서, 작품 활동이 가장 왕성했던 때도 그 시기(1976∼1990)였음을 확인했다. 많게는 한 해 열다섯 편, 한 달에 한 편 이상을 썼다는 얘기가 되는데, 팽이처럼 팽팽 도는 시간을 살며 원고지 칸을 어떻게 메웠는지 까마득한 일로 생각된다. 지면 또한 다양해서 아동 잡지, 어린이신문에 그치지 않고 일간신문, 여성 잡지, 문예지, 평론지, 전문지, 각종 사보에 지방 매체까지 있었다. 이 시기 ≪신기료장수≫ 등 소설을 발표했는데, 한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은 평을 들었다.

한윤이의 <쥐와의 하룻밤>은 단편의 압축미를 보여 주는 간결한 짜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 하찮은 소재를 매개로 하여, 한 인간의 내면을 조명하려 한 발상이 돋보인다.
≪월간문학≫, 1982. 6, 이내수

잡지사, 출판사에 있었던 관계로 신인 때부터 문단 원로들을 만나는 기회가 많았다. 이원수, 박홍근, 신지식 등 대선배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 분에 넘치는 시간을 살며 잡지사로 출판사로 일터를 옮겨 다니던 나는 1991년, 출근 생활에 마침점을 찍는다. 이후 프리랜서로 이따금씩 일하며, 동아일보사 문화센터에 출강(1994∼2008)하는 한편 홍익대와 상명대학교 사범대학부속학교에도 출강해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바쁜 시간을 살았다.
출판사 책임자로 일하며, 내 작품을 예문으로 편하게 쓸 수 있어 좋았던 작문교과서가 검인정 교과서(1978년 장원사 간행)로 채택된 일과, 어디서도 미처 하지 않던 고학년 컬러 동화책(1979년 서문당)을 기획하고 발간한 일, 국내 최초의 4·6배판 올컬러 시집(1981년 서문당)을 만든 일, 세계문학대전집을 기획, 중역을 배제하고 새롭게 원서 번역으로 출간(1985년 신영출판사)한 일 등은 보람 있는 일이었다.

1991년 11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국제펜클럽 빈 대회’에 한국펜클럽 이사장 전숙희 선생을 비롯, 신지식, 김원일, 신중신 선생 등과 한국대표작가 일행으로 참석한 것은 국제적인 행사를 경험한 좋은 기회였다. 대회가 끝나고 오스트리아를 관광한 뒤 프랑스와 헝가리를 거쳐 소련을 여행했는데, 당시 소련은 고르바초프가 지고 보리스 옐친이 일어나 페레스트로이카가 한창인 때였다. 먹을 것이 귀해서 빵집 앞엔 빵을 사려는 궁핍한 시민들의 행렬이 길게 꼬리를 문 모습을 거리 어디서나 볼 수 있었다. 크렘린 궁 앞 광장에 연일 플래카드를 든 시위대들이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 풍경은 우리나라 데모대가 연상되어 나라와 인종이 달라도 세상사 인간사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꼈다.

신인 시절, 낭만과 멋과 정이 넘쳤던 이원수, 박홍근 두 분 선생님이 이끌었던 한국아동문학가협회 임원으로 협회 일에 참여했고, 한국여성문학인회, 한국가톨릭문인회 등 문학 단체 일에 참여하며 여러 장르의 작가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1992년, 전옥주(희곡작가) 선생의 이끎으로 천주교 영세를 받고 입교했다. 나의 대모 구혜영(소설가) 선생은 대녀 사랑이 넘치는 분이었다.
박홍근 선생께서 작고하신 뒤 수년 동안, 곁이 외롭고 쓸쓸한 사모님을 도와드리며 인간관계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박 선생님 추모 행사 등 생색 안 나는 일의 심부름을 하면서 미처 알지 못했던 사람들의 가려진 마음을 많이 읽었다. 그리고 세상 공부를 많이 했다.

소녀 시절, 나는 많은 문학 서적들을 가까이하며 소설가가 되고 싶어 했고, 동화작가가 되었다. 소녀 시절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데는 청순한 자태며 감정의 순수함이며…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무한한 꿈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실 소녀 시절의 꿈처럼 일생을 통해 무한하고 현란하고 티 없고 날개 달린 꿈을 꾸는 시기는 없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꿈꾸는 소녀이고 싶다.

작품 및 수상 연보

197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동화 <동박골 아이들> 당선.
1977년∼1978년 ≪소년한국일보≫에 <마음의 꽃다발> 연재.
1980년 ≪귀신을 쫓는 아이≫(서문당), ≪꽃에 얽힌 이야기≫(효성사) 출간.
1981년 ≪하늘을 오르는 사람≫(교학사) 출간.
1983년 ≪나무꾼은 어디로 갔나≫(예문당) 출간.
1984년 ≪바보 신랑≫(서문당), ≪저녁노을≫(공저, 금성출판사) 출간.
1986년 ≪소년≫에 ≪내 마음의 빈자리≫ 연재. ≪당나귀가 된 나그네 ≫(금성출판사) 출간.
1987년 ≪동전을 만드는 돌층계≫(가톨릭출판사) 출간.
1990년∼1992년 ≪소년≫에 ≪최고왕방구≫ 연재.
1990년 ≪종이배와 물총새와 송사리≫(아이템플사) 출간.
1994년 ≪방귀를 파는 사람≫(동화나라), ≪장화를 신은 고양이≫(금성출판사) 출간. ≪빨간펜≫에 ≪다섯 손가락 끝의 무지개≫ 연재.
1996년 ≪세 가지 선물≫(한국안데르센), ≪꾀보 토끼의 판결≫(한국안데르센), ≪참새 귀신≫(한성미디어) 출간.
1998년 장편동화 ≪다섯 손가락 끝의 무지개≫(교학사), ≪거짓말 세 자루≫(한성미디어) 출간.
2003년 ≪야곱의 우물≫에 ≪하늘나라 우체부≫ 연재.

해설 - 김학중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박사 과정에 있다. 아동문학에 관심을 두고 일반문학과 함께 연구하고 있다. 2009년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해 시인으로도 활동 중이다.

목차

작가의 말

동박골 아이들
아이와 하모니카
엄마의 얼굴
자물통에 채워진 양심
저녁노을
쥐와의 하룻밤
말집 이야기
무서운 아입니다
동전을 만드는 돌층계
고향을 잃어버린 다람쥐
아빠의 숙제
반드시 이긴다!
새벽에 만난 도둑
숲속학교 문수 이야기

해설
한윤이는
김학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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