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은진 동화선집

저자 - 진은진
1969년 경상남도 하동에서 아버지 진충조, 어머니 지길희의 2남 1녀 중 첫째 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임신하고 계신 동안 거짓말을 안 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나는 좀 고지식한 편이고 거짓말을 잘 못한다. 내 빈곤한 상상력도 순전히 아버지 탓이라고 믿고 있다.
나는 태어나자마자 곧 부산으로 이사를 갔고, 세 살 무렵에 서울에 올라와 죽 자랐으므로 고향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 내가 고향 하동에서 살았더라면 더 아름다운 동화를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아쉬워했던 적이 있으며, 지금도 그에 대한 원망과 안타까움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내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 어릴 적, 우리 집은 전파사 위층에 있었다. 밥만 먹고 나면 텔레비전을 보느라 전파사에 내려가 살았던 기억이 난다. 우리 집은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도 순전히 나 때문에 텔레비전을 사게 되었다고 한다. 가구처럼 다리가 달려 있고 문을 여닫을 수 있게 되어 있었던 그 텔레비전은 선명하게 기억이 나는데, 어린 나를 매료시켰던 프로그램들이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기억력은 지금도 좋지 않다.
초등학교 때는 반공 글짓기 대회나 불조심 글짓기 대회 따위에서 심심찮게 상을 받기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이다운 천진함이라고는 없는, 틀에 박힌 글들이었다. 글을 잘 써서 상을 받았던 것이 아니라 정책적으로 상을 줄 수밖에 없는 내용의 글들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소소한 경력 탓에 나는 글쓰기에 재능이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으며, 소설 따위는 읽어 본 적도 없으면서도 장래 희망을 이야기하는 시간에 ‘소설가’가 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심지어, ‘아픈 사람을 무료로 도와주는 의사 선생님’,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변호해 주는 변호사’가 되겠다고 말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소설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 수 있나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소설을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근원적인 고민은 생략한 채 말이다.
≪테스≫니 ≪제인 에어≫니 하는 책들을 처음 알게 된 중학교 시절은 내 책 읽기에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온 시기였다. 그때까지 ≪빨강 머리 앤≫, ≪키다리 아저씨≫, ≪작은 아씨들≫ 등의 소녀풍 동화나 ≪캔디 캔디≫, ≪유리 가면≫ 같은 순정 만화(당시에 좀 수준이 있는 친구들은 ≪오르페우스의 창≫이라는 만화를 보았음)에 빠져 있던 나에게 섬세한 묘사와 긴 문체에 볼륨감 있는 책들은 실로 어마어마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그 후 필독서로 읽어야 했던 김동인, 염상섭, 현진건, 나도향 등의 우리나라 근대 소설과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대지≫ 같은 대작들을 마구잡이로 읽어 치웠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나의 책 읽기는 더욱 마구잡이 잡식성이 되었고 그와 함께 문화 체험도 다양해졌다. ≪열 개의 인디언 인형≫과 같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들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 밖에 약간의 지적 허영으로 ≪나의 누이여 나의 신부여≫와 같은 루 살로메의 전기나 실험극장의 연극 ≪신의 아그네스≫, 정동 마당 세실 극장의 사회 비판적인 연극 등을 경험했다. 물론 거의 이해하지 못했으며 대부분 소화시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꾸역꾸역 씹어 삼켰다.
내 정신 수준에 딱 맞는 책은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었다. 여태까지의 소설들이나 주인공들이 나를 압도하는 것들이었다면, 홀든 콜필드의 반항과 섬세한 감수성 그리고 순수함은 내가 깊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닮고 싶은 모든 것이기도 했다. 나는 아직도 내 삶의 지향과 감수성이 홀든의 그것과 다르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나와 내 작품 속 주인공들은 홀든의 모습을 조금씩 나누어 가지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엔 지리 선생님을 사모하게 되어 날마다 일을 삼고 편지를 쓰느라 소설을 읽는 시간이 줄었다. 대신 시를 많이 읽었는데, 서정주, 김수영, 김지하의 시들을 좋아했다. 그 시인들의 정치적인 입장 차는 전혀 모른 채 말이다.
1987년에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하였다. 황순원 선생님께 수업을 들었던 사실은 대대손손 자랑으로 남길 작정이다. 대학 시절은 1980년대 학번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강의실보다는 거리나 술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또한 소설이나 시보다는 사회과학 서적을 더 많이 읽었다. 이 무렵 철거촌 탁아소 활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가 어린이를 위해 할 수 있는, 혹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가 고민하게 되었고, ‘동화’를 써야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처음으로 하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동화를 쓰기 시작한 것은 대학을 졸업한 후였다. ‘창비아동문고’ 시리즈는 동화를 공부하는 과정에서 도움이 많이 된 책이었는데, 그중 최래옥 선생님의 전래 동화 편을 보고 동화를 쓰기 위해서는 고전문학 공부가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해서 대학원에 진학하여 고전문학 공부를 하는 한편, 선후배들과 ‘푸른 달과 흰 구름’이라는 동아리를 만들어 동화 습작을 시작했다. 동인지 두 권을 만들었고 그 과정에서 아동문학 평론가인 김용희 선생님께 많은 조언과 용기를 얻었다. 습작 시기에 써낸 작품의 대부분은 판자촌이 배경이었고, 철거촌에서 만난 아이들을 모티프로 삼았다.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가난한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써야 하며, 그 이야기는 사회를 변혁시킬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강박이 나를 압도하고 있던 시기였다.
1995년에는 단편 ＜할머니의 날개＞로 제3회 MBC창작동화대상을 받으면서 등단을 했다. 당시에는 그 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어릴 적 반공 글짓기 대회 수상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 당선 전화를 받고도 내가 대상인지 가작인지도 몰랐으며, 바쁜데 시상식에 안 가면 안 되냐고 물어보았을 정도로 무심했다. 심사 위원이 누구인지 당연히 몰랐고 관심도 없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매우 그분께 송구스러운 일이다.
같은 해 6월, 오랜 친구 김동건과 결혼을 하고, 8월에는 ＜우렁색시 설화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 후 설화를 비롯한 고전문학을 내 동화의 중요한 화두로 삼았으나 결과물은 별 볼일 없었다. 이후, 학습지, 사보, 월간 ≪불교≫ 등의 잡지에 단편동화를 연재하면서 작가로서의 명맥을 겨우 유지하였으나 강의와 논문, 육아 등을 핑계로 동화는 거의 쓰지 못했다. ‘개점 휴업’이라는 용어를 처음 배우고 몸소 실천한 시기이기도 하다.
2002년에는 ＜여성탐색담의 서사적 전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학위 취득과 함께 연구자가 아닌 작가로서, 비로소 내 작가 인생에 커다란 전환을 맞이할 계획이었다. ‘고전문학’에 이어 ‘여성’을 내 동화의 두 번째 화두로 삼았으며,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동화작가 정해왕 선생님의 ‘어린이책 작가 교실’에 입학했다. 여기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만나 매우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강의와 논문 등으로 다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면서 여전히 ‘개점 휴업’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게 되었고, 연구자에서 작가로의 직종 변경은 계획대로 진행되지 못하였다.
2003년에는 그간에 썼던 단편들을 모아 ≪마고할미는 어디로 갔을까≫와 ≪하늘나라 기차≫를 펴냈다. 첫 창작집이었으나 자랑스러움보다는 아쉬움이 컸다. 교수 임용에 필요해서 급하게 출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2008년 경희대학교 교양학부 객원교수로 임용되기 전까지 나는 연구자와 작가 사이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였다. 당장 앞에 닥친 강의와 논문에 허덕이느라 동화는 먼 꿈처럼 여겨졌고, 어쩌면 다시는 동화를 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절망과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했다.
훌륭한 작가들이 너무 많다는 것 또한 내가 동화를 포기할 구실이 되기도 하였다. 세상을 아름답게 포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들로 하여금 세상을 바로 볼 수 있게 하는 동화, 그래서 어린이를,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훌륭한 동화를 써야 하는 것이 나의 계획이고 의무였으나 이미 그런 뛰어난 작품들이 너무나 많이 쏟아져 나와서 내가 굳이 어설픈 작품을 보태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내가 동화를 쓰겠다고 나서는 것은 스스로 ‘동화작가’라는 사실을 검증받고자 하는 자기만족을 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자책과 절망에 허우적거렸고, 여전히 동화 쓰기는 미루어졌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런 고민 속에서도 동화를 쓰고 싶다는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슨 욕심인지 알 수 없으나 애초에 그렇게 살아지도록 마련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고 해서 그간의 방황이 불필요한 것이었던 것은 아니다. 동화를 고민하면서 내 삶을 고민하였고, 동화에 대해서도 삶에 대해서도 너무 무거웠다는 것을 늦게야 깨닫게 되었다. 나는 삶과 문학에 대한 목적의식적 강박에 사로잡혀 있었고 ‘선생’이라는 직업도 그러한 강박을 가중시키는 데 한몫했다. 나는 누구든 가르치려 들었던 것이다. 세상을 변혁시키는 동화라니, 참 어리석고 무모했다.
동화와 삶에 대한 나의 고민은 ‘동화로 행복하기’로 마무리되었다. 내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동화가 아니고서는 동화를 읽는 사람도 행복하게 만들 수 없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동화를 선택하기로 하였고, 그즈음, ≪아동문학평론≫에 단편 ＜청아 청아＞(2010년 가을)를 발표했다. 늘 과분할 정도의 기대와 응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김용희 선생님의 배려로 ≪아동문학평론≫에 신작을 발표한 것이었다. 이 작품에 평론을 써 주신 이도환 선생님께도 과도한 칭찬을 받으면서 살짝 용기를 얻었다. 그러나 아직도 내게는 ‘작가’라는 이름이 낯설고 부끄럽다.
나는 맨 처음 동화를 고민할 때의 그 마음으로 다시 돌아가 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처음의 그 원대한 포부와 치열한 열정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냥 쓰는 것이 좋다. 습작을 하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아이디어를 모으고, 글을 쓰고, 동료·선후배들과 합평을 한다. 글을 쓰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조바심 내지 않으려 한다. ‘열심히’ 글을 쓰겠노라 다짐하지도 않으련다. 보이지 않는 바람처럼, 느껴지지 않을 때에도 흐르고 있는 바람처럼, 부드럽게 어루만지기도 하고 세차게 휘몰아치기도 하는 바람처럼, 그렇게 쉼 없이 글을 쓰고 싶을 뿐이다.

작품 및 수상 연보

1995년 단편 ＜할머니의 날개＞로 제3회 MBC창작동화대상 수상. 수상집 ≪할머니의 날개≫(금성출판사) 출간.
1998년 ≪우리 옛이야기≫(학원미디어) 출간.
2003년 ≪마고할미는 어디로 갔을까≫(해토), ≪하늘나라 기차≫(해토) 출간.
2006년 ≪어린이를 위한 흑설공주 이야기≫(뜨인돌어린이), ≪삼국사기≫(금성출판사) 출간.
2007년 ≪선문대 할망≫(웅진씽크하우스), ≪백두산 사슴과 인삼≫(웅진씽크하우스), ≪연오랑과 세오녀≫(웅진씽크하우스) 출간.
2010년 ≪아동문학평론≫(통권 136호, 가을호)에 단편 ＜청아 청아＞ 발표.

해설 - 이도환
1964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한림대학교 사학과를 거쳐 단국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03년 계간 ≪아동문학평론≫ 평론 부문 신인상을 받았으며 이후 아동문학평론가로 활동 중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96가지 이야기≫, ≪행복한 세상≫, ≪아름다운 세상≫, ≪현명한 부모가 지혜로운 아이를 만든다≫ 등의 책을 냈다.
현재 계간 ≪아동문학평론≫ 편집 위원, 한국아동문학연구센터 연구 위원이며, 유교현대화사업단 책임연구원으로 유교 관련 고전의 번역 및 현대화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