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을만드는지식 천줄읽기>는 오리지널 고전에 대한 통찰의 책읽기입니다. 전문가가 원전에서 핵심 내용만 뽑아내는 발췌 방식입니다.
도스토옙스키란 이름은 단순한 소설가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묵시론적인 종교주의자, 정치적 예언가, 위대한 철학자, 날카로운 비평가, 훌륭한 저널리스트, 열렬한 사상가, 병적인 정신의 심리 분석가 등 어딘지 의미심장하고 거대한 의미를 내포한다. 사실주의 작가에게 붙이기엔 너무도 낭만적인 수식어다. 그래서 그의 사실주의를 낭만적 사실주의라 부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독자 대부분의 의식 속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이름은 4대 장편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상기시키며, 읽기도 전에 그 두께에서 우리를 경악케 할 뿐만 아니라, 주제 또한 무겁고 난해해서 큰맘을 먹지 않는 한 감히 어찌해 볼 길조차 없는 그런 작가라는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여기 소개하는 ≪도박사≫는 책의 두께도 만만하고, 다루고 있는 소재와 주제 또한 일반 독자가 공감하기에 아무런 무리가 없다. 26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에 완성된 작품 속에서 우리가 조우하게 될 작가는 거대한 철학과 사상으로 우주적인 고통에 괴로워하는 형이상학적 인물이 아니라, 돈이 없어 절절매고, 불안정한 사회적 지위로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으며, 또 갖지 못하는 사랑에 애달아하는 생생히 살아 있는 19세기의 청년이다. 작가의 4대 대작이 거대한 철학적 사상의 전쟁터이며, 그 전쟁은 언제나 하느님에의 길, 예수의 겸허하고 희생적인 사랑을 역설하며 기독교적인 승리로 마감한다면, ≪도박사≫에서는 거대한 철학적 사상이나 기독교적 색채는 거의 찾아보기가 힘들다. 거대 철학의 조각들은 인물의 대화를 통해 발견되지만, 그것들이 결코 작품을 관통하는 주된 주제로까지 발전하지는 않는다. 도스토옙스키 하면 떠오르는 짙은 종교적인 색채도 거의 느낄 수 없다. 전 인류를 염려하는 신적인 고통 대신, 결핍된 인간의 생생한 고통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신의 냄새 대신 사람 냄새가 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작가가 집필 직전에 직접 경험했던, 그래서 아직도 기억과 느낌이 생생한 도박 중독과 또 중독 같은 사랑이라는 테마가 중심을 이루고, 도박도 사랑도 중독과 같이 극단으로 치닫고자 하는 주인공의 심리에 방점을 둔다. 프로이트가 극찬한 심리 분석가로서의 면모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 중 하나다. 1866년에 쓴 ≪도박사≫에는 3년 전, 즉 1863년 작가의 인생에서 가장 뜨겁고 질긴 운명적 사랑이었던 아폴리나리야 수슬로바와의 만남과 그 애증 관계에서 작가가 느껴야 했던 사랑과 열정, 열등감, 굴욕, 비참, 증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일어났던 도박과의 만남, 첫 승리, 제어할 수 없는 중독이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만큼 ≪도박사≫는 그의 다른 작품들보다 실제 작가의 삶과 가깝고 작품의 인물들 역시 작가의 삶 속에 등장했던 실제 인물들과 닮아 있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알렉세이 이바노비치는 20대라는 옷을 입은 40대의 작가 도스토옙스키라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실제 그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
재능도 있고 조국에도 이바지할 수 있었던 이 청년이 이런 식으로 자신의 재능을 썩히고 인생을 끝장낼 수밖에 없는 것, 이것은 비단 알렉세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1860년대 러시아의 가난하고 힘없는 귀족 인텔리겐치아의 문제다. 대학의 박사 후보생이자 3개 국어를 하는 귀족, 그러나 조국 러시아에서도 해외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현실은 그들에게 자신이 쓸모가 있다는, 그래서 삶이 의미가 있다는, 살아 있다는 생생한 자각을 주지 못한다. 매우 주관적인 화자의 고통은 시대의 고통이 된다. 그가 느끼는 낮은 자존감, 도박 외에는 어떤 것에서도 큰 희망을 볼 수 없는 상황, 정체성의 위기, 심리적 위기는 시대의 위기다. 사실주의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인 전형성을 보여 주는 인물이다.
극심한 스트레스, 도박과 강박증, 생과 사의 갈림길의 경험, 많은 아픔 등, 작가의 인생을 함께했던 고통은 그의 작품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형상화된다. 사실주의 시대를 이끌어 간 작가답게 그의 개인적 고통은 시대의 고통을 담아내는 거울이 되고, 개인적 무기력과 소외는 19세기 지식인이 감내해야 했던 무기력과 소외가 된다. 전통과 혁신, 러시아적인 가치와 서구적인 가치, 과학과 신 사이에서 혼란스럽던 19세기의 러시아, 그 안에서도 밖에서도 생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낼 수 없는 지식인의 내면과 심리를 배경으로 부조리로 가득한 인간의 삶이 희비극적인 색채로 그려져 있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은 작가가 처한 역사적 상황의 실존적 본질이 담겨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의 주제 선택과 심리 분석, 소설의 플롯 라인은 세기를 뛰어넘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도스토옙스키와 그의 작품은 언제나 현재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