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경제를 다시 읽다
사회적 경제에 대한 관심이 커짐에 따라, 다양한 분야에서 시민의 참여가 확산되고 이에 대한 중앙・지방정부의 지원도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그간의 사회적 경제운동이 보여준 실천의 폭과 깊이는 유의미한 성과를 거론할 만큼의 진전을 이뤄내지 못했다. 일각에서는, 외부의 지원이 끊기는 순간 조직의 생기도 급속히 소실되고 마는 현실을 지적하기도 한다.
이 책은 작금의 사회적 경제운동이 힘있는 행보를 보이지 못하는 가장 주된 이유로 역사적・이념적 이해부족과 착각, 그로 인한 방향성의 부재와 혼란을 꼽는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경제에서 “사회적”이 갖는 의미가 올바로 정립되지 못했음을 밝힌다. 고금의 풍부한 동서양 사례 분석을 통해 사회적 경제의 원형을 탐색하고, 종교・사상・철학・문학의 담론들로부터 사회적 경제의 원리를 포착해낸다. 이를 바탕으로 향후 사회적 경제가 지향해야 할 중요한 원칙으로서 “주체의 확대” “영역의 확장” “지역사회의 창출”이라는 세 가지 주제를 제시하고, 그 가능성에 대한 독창적이면서도 심도 깊은 논의를 전개한다.
사회적 경제에서 “사회적”이 갖는 의미
“이렇게 집요하고 교묘하게,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박원순 시장이나 조희연 교육감이 생각하는 교육관을, 그런 이념을 주입하려는 박원순 조희연 두 분에 대해서 섬뜩함을 느낍니다.”
서울시 국감장에서 자유한국당 장제원 의원이 박원순 시장을 향해 ‘사회적 경제’와 ‘사회주의경제’를 동일시하며 비난한 일은 사회적 경제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우스개 해프닝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바 있다. 그의 착각과 달리, 러시아혁명이 끝난 직후 레닌과 크로포트킨 사이에 오간 대화는 사회주의자의 눈에 협동조합(사회적 경제)이 어떻게 비쳤는가를 잘 보여준다.
한편으로 사회적 경제의 ‘공익’적 측면에 주안을 두어, 사회적 경제가 마치 국가의 역할을 대신해줄 수 있는 것처럼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사회적 경제는 비록 ‘공익적’ 성격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본질은 결코 ‘공익’에 있지 않다. ‘나’를 위한 ‘모두’의 경제행위인 시장경제나 ‘모두’를 위한 ‘모두’의 경제행위인 국가경제와 달리, 사회적 경제는 기본적으로는 ‘나’를 위한 ‘우리’의 경제행위다. ‘결사(association)’야말로 다른 경제와 대비되는 사회적 경제의 가장 큰 특징인 이유다.
문제는 ‘우리의 결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머문 결사’에 있다. 우리를 범위로 결사가 이루어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렇다고 결사의 행위마저도 우리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나’를 위하지도 또 ‘우리’를 유지할 수도 없게 한다. 사회적 경제가 ‘상호부조’를 바탕으로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밖으로 열려 있는 정신’ 즉 ‘호혜’다. 이는 단순한 윤리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호모 사피엔스가 오늘날의 인류로 출발할 때부터 그 생존을 가능케 한 조건이었다.
자본주의의 위기, 4차 산업혁명이 그 해결책이다?
흔히 마르크스의 경제학에서 가장 어렵게 대면하게 되는 개념은 자본과 화폐에 대한 것이다. 제2장에서 다루는 자본이란 본래 마르크스의 그것, 유물론적 사관에 따른 자본주의적 자본의 그것이 아니다. 자본의 생성 자체부터 그 기원이 다르다고 본다. 마르크스가 자신이 세운 세계관에 입각하여 자본의 몰락을 도출해내고 이에 따른 이상적 공산제 사회의 모습으로 원시공산제사회를 상정했지만 이는 실현될 수 없는 것으로 증명되었는데, 사실 그 전제부터가 오류였다.
마르크스의 예측과 달린 자본주의는 자체의 모순 해결을 다른 경로를 통해 해결해왔고(비록 일시적일지라도), 이에 더하여 기존 사회주의체제의 몰락은 지금의 자본주의를 선택지가 없는 불변의 성처럼 여기게 만들었다. 그러나 지나온 모든 유형의 자본주의를 들여다보면, 그것들이 공간의 분할과 주변으로부터의 이익 수집을 통해 중심의 성장을 이루어왔다는 점이 확인된다. 초기 단계에서 자본주의는 한 국가 안에 주변을 만들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오다가 그 주변이 균질화되자 이번에는 국외에 눈을 돌려 세계 곳곳에 주변을 만들었다. 자본주의의 세계화는 결국 세계를 선진국과 후진국으로 나누어 후진국인 주변으로부터 선진국인 중심으로 부를 수집해온 과정이었다.
하지만 온 세계가 자본주의로 균질화되면서, 즉 자본주의의 세계화가 확대되면서 주변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후진국을 두고 벌어지는 선진국의 각축전은 오히려 후진국을 향한 선진국의 분할과 수집을 점점 어렵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가 선택한 길은 ‘다시’ 국내였다. 국내로 다시 눈을 돌려 이제까지의 국내적 균질성을 소멸시키면서 한 국가 안에 새로운 주변을 만들기 시작했다.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통한 비정규직의 양산은 자국 안에 새로운 주변을 만들기 위함이었다. 미국발 금융위기의 단초가 된 서브프라임 모기지론은 이런 자국 내 주변으로부터 이익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파생한 것이었다. 지금 세계 각국이 공통으로 직면한 양극화 문제는 세계적 차원의 자본주의가 균질화되면서 후진국을 대신해 자국 내에 주변을 만들어온 결과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자국 내 주변에서도 이제 더는 부의 수집이 불가능하게 되어간다는 데 있다. 양극화에 따른 빈곤이 오히려 먹잇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시키고 있고,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지금 저출산과 고령화로 소비 자체가 정체하거나 감소하고 있다.
저출산에 따른 인구감소는 소비 개체수 자체의 절대적 감소를 의미하고, 인구의 고령화는 개인이 연명할 최소한의 감가상각 내에서만 소비가 이루어짐을 의미한다. 경제성장이 감가상각의 범위를 넘어서는 소비의 확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런 세계적 차원에서의 인구감소와 고령화는 더 이상의 경제성장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4차 산업혁명이 마치 구세주인 양 떠드는 것은 말이 안 된다. 4차 산업혁명의 기술적 실현 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이는 자본주의 공간을 생명과 우주로 확장할 뿐, 이렇게 확장된 공간을 중심과 주변으로 분할하지는 못한다.
4차 산업혁명으로 아무리 값싼 재화가 생산되더라도 소득이 따라주지 않는데 소비할 리 없고, 소비할 사람이 없는데 소비가 늘어날 리 없다.
산업혁명은 한 사회의 기술적 토대이지 그것이 한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새로운 사회를 낳는 것이 아니다. 신석기시대에 간석기가 있었고 농경시대에 보습이 있었던 것처럼, 산업자본주의시대에는 증기기관에 의한 기계화(1차 산업혁명)와 전기에 의한 대량생산(2차 산업혁명)이 있었고, 금융자본주의 시대에는 컴퓨터에 의한 자동화(3차 산업혁명)가 있었을 뿐이지 이런 산업혁명이 한 사회나 시대를 낳은 것이 아니다. 이를 두고 마치 산업혁명이 새로운 사회나 시대를 낳는다고 보는 것은 결과로 원인을 설명하는 잘못된 해석이다.
마한의 소도와 지역사회의 창출
이와 같은 자본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이 책의 제3장에서 거론하는 마한의 소도에 대한 평가는 사회적 경제가 추구해야 할 생명가치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중국의 사서 『삼국지』에서는 마한의 소도에 대한 기술에서, 소도에 들어온 이들은 죄짓고 “도망 온 사람들”이며, 소도가 이들을 “누구 하나 돌려보내려 하지 않고” 맞이했으니 나중에는 “도적질을 좋아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도망 온’으로 해석되는 ‘망도(亡逃)’는 실은 ‘도망(逃亡) 온’ 이 아니다. ‘망도’는 말 그대로 “망(亡)해 피해 온다(逃)”는 의미지 “죄짓고 도망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어쩔 수 없이 도피해야만 하는 상황을 수없이 맞는다. 가난에 짓눌려 도저히 회복할 수 없게 되었을 때, 장애나 질병을 얻었는데 누구로부터도 도움을 받지 못할 때, 극심한 억압과 차별 속에서 누구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을 때, 인간은 그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피하게 된다.
이를 놓고 볼 때, “송파 세 모녀 사건”이 우리 사회에 던진 파문은 뼈아프지 않을 수 없다. 모 언론은 이들 모녀가 사회복지제도를 이용할 줄 몰랐던 탓으로 돌리기도 했지만(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 전에 더 심각하게 살펴야 할 것은 망(網, network)의 부재였다. 세 모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은 이 나라의 복지제도였고, 이를 국가의 일이라고만 생각해온 우리 자신이었다. 이 나라에는 국가만 있지 사회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 사회에는 또 제도만 있지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국가와 사회를 만든 장본인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만약에 세 모녀 곁에 누군가가 있었다면, 더구나 그 누군가가 선의를 가진 한두 명의 개인이 아니라,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고 끝까지 함께해줄 다수의 관계망이었다면 어땠을까? 이 시대에 새로운 소도가 필요한 이유고, 사회적 경제가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금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회적 경제에 거는 기대는 다음 세 가지로 압축할 수 있다.
먼저 ‘주체의 확대’다. 사회적 경제는 이제까지 어떤 시대나 상황에서도 항상 주변인 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여왔고, 그들의 인간다운 삶을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상황은 지금 더욱 심각하다. 사회적 경제를 지탱시켜줬던 중산층 가정마저 주변으로 내몰릴 위험에 빠져 있다. 사회적 경제가 중심과 주변의 중간에 머물지 않고 주변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이런 상황을 반영한 때문이다. 상호부조를 통한 환대를 강조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다음으로 ‘영역의 확장’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영역의 확장은 단지 사업의 다각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주체의 확대’를 통해 대두된 주변과 그들의 필요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이런 필요에 대응하는 방식이 재화의 공급에서 재분배로까지 향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2장에서 “사회적 경제는 호혜・상품교환・재분배의 융합이다”라고 강조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경제에 거는 가장 큰 기대로 ‘지역사회의 창출’이 있다. 이는 한마디로 시민과 그들의 결사를 토대로 때로는 지자체와도 협력하면서 시민은 물론 그 바깥의 모두를 향해 ‘시민적 공공성’을 구축하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