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서 인생이 편하기만 할 거라고?
너는 태어나고 보니 재벌이더라, 이게 얼마나 무시무시한 건줄 알아?
시기, 질투, 음모가 넘쳐나고
사랑 한 번 사랑답게 해보지도 못 해!
물론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환경, 그런 건 감사하게 생각해.
하지만 난, 사람답게 살고 싶었어.
평범하게 사는 거, 나한텐 그게 제일 어려운 일이라고!
스스로 재벌가 자제이길 포기한 여자 유해린.
그리고 그녀의 사랑을 쟁취해야만 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
-본문 중에서-
웨이터가 와인을 가져와 코르크를 열어 내밀자 태진이 흡족한 미소로 그 향을 맡았다. 그리고 시음 후 괜찮다는 사인을 받고 웨이터가 물러갔다.
“와인 괜찮아?”
“네. 맛있어요.”
해린이 와인잔을 들어 불빛에 그 빛깔을 바라보며 답했다.
“그렇게 웃으니까 좋네. 해린 씨 웃는 게 참 예뻐.”
“네. 아……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밖에서 보자고 하신 건가요?”
해린이 애써 미소를 감추며 화제를 돌렸다. 몇 년간 연애 감각이 마비 상태라 이런 분위기를 어떻게 이어 가야 할지 몰라서였다.
“남자가 이런 자리 마련해서 오붓하게 식사하자고 하는데, 그게 뭘까?”
콩닥콩닥!
“해린 씨…… 우리 같이 일한 지도 2년 가까이 됐지?”
“네.”
“그동안 많이 조심스러웠는데, 저기…… 그러니깐.”
“말씀하세요.”
쿵쿵쿵쿵!
“해린 씨는 나를…….”
태진이 사춘기 소년처럼 안절부절못해 가며 단어를 고르고 있었다.
설마, 이건……!
“어이구! 이게 누구십니까? 가 상무님 아니십니까?”
갑작스런 불청객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고개를 한참이나 꺾어 위를 바라보니 나주원. 그가 아주 반가운 사람을 만난 듯이 신이 나 있었다. 옆에 있던 최 실장이 난처한 표정으로 그의 옷깃을 잡아당겨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안 그래도 찾아뵈려 했는데, 이렇게 또 만나는군요! 잘됐습니다. 합석하시죠.”
그러곤 주원이 이쪽 의견은 묻지도 않고 의자를 뽑더니 태진 옆으로 불쑥 앉았다. 앞에 앉은 두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해린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최 실장도 이쪽저쪽 눈치만 보다가 조심스럽게 해린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이게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역시나 당황한 태진이 주원에게 물었다. 최대한 점잖은 척을 하느라 그도 힘들어 보였다.
“제가 그날 무례를 범한 것도 있고. 안 그래도 사석에서 한번 모시고 싶었습니다.”
“저희 지금 중요한 얘기 중이었습니다.”
태진이 흥분한 기색을 애써 누르며 말을 뱉었다.
“두 분이서 중요한 얘기를 하신다는 게, 아하! 엊그제 밤에 유 팀장님께서 저희 집에 오셨다가 하려던 그 말씀이시죠? 일요일 아침에 댁까지 못 모셔다 드려서 죄송합니다. 하하하!”
저 자식이 지금 뭐하자는 짓이야!
해린의 눈이 점점 더 커짐과 동시에 입도 점점 크게 벌어지고 있었다.
엊그제 밤? 아침에 데려다 줘?
주원의 얼굴을 노려보던 태진의 눈이 급하게 해린을 찾았다. 해린이 입이 떡 벌어져서 고개를 세차게 젓고 있었다.
“무슨 오해가 있으신가 본데…….”
“오해는 무슨. 저 그거 하겠습니다. 춤을 추고 노래도 하고 재밌겠는데요?”
주원이 너스레를 떨며 얘기했다.
“진짜 하실 거예요?”
예상치 않게 해린이 방금 전까지의 모든 상황을 잊은 듯 광고를 하겠다는 주원의 말에 깜짝 놀라며 물었다.
“그럼요! 우리 우 회장님께서 특별히 말씀하신 거니 해야지요!”
그렇게 말하는 주원의 속마음은 울고 있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 거야, 멈춰 나주원!
“뭐, 필요하면 바보 연기도 해보죠. 하하하하!”
미쳤어? 돌았어?
주원은 그대로 21층 건물 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하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멀리 있어서 둘의 대화는 들을 수가 없었지만 자꾸만 이쪽으로 신경이 쓰였다. 거기다가 그 강단 있던 여자가 몸까지 배배 꼬아 가며 나긋나긋한 모양새라니, 심히 불편했다. 천리안이라도 있는 건지 여자의 붉어지는 얼굴 모양새가 자기 마음속에 사이렌을 울려댔다.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여기 테이블까지 왔을 때는 이미 너무 늦어 버린 뒤였다.
“저기! 주원 씨. 무슨 말이야, 그게. 나랑 상의도 없이!”
해린 옆에 조심스럽게 앉은 최 실장이 정색했다.
“실장님, 안 그래도 방금 그 얘기를 꺼내려던 참이었어요. 하하.”
주원과 최 실장이 눈으로 기 싸움이라도 하는 듯 허공에서 팽팽하게 부딪쳤다.
“어머! 안 그래도 이게 기획안을 몽땅 뒤집는 일이라 저희 팀원들이 고생이 많았어요. 잘됐다. 바로 일 진행할게요. 제가 내일 당장 대행사랑 미팅 잡을까요, 상무님?”
해린의 마음은 어느새 일로 집중돼 있었다. 금요일 미팅 후 일을 완전히 새로 하게 돼 직원들의 사기가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아무리 대행사라지만 그쪽에도 난처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가 원래 기획안대로 하겠다니!
한편, 태진은 말을 잃고 묵묵히 주원을 곁눈질하며 노려보고 있었다. 그의 시린 표정이 주변의 공기까지 얼려 버릴 기세였다. 평소 보지 못했던 그 모습에 해린이 순간 움찔했다. 그 모습을 본 건지 태진이 얼른 평소의 가면을 꺼내 썼다.
“응, 그래요. 유 팀장.”
태진의 그 대답을 끝으로 분홍빛 테이블은 그대로 시들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