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도 미묘한 차이가 있다.
처음, 풋풋함과 설렘으로 다가오는 사랑.
은은한 따뜻함으로 정신적 위안이 되는 사랑.
함께 있으면 불가에 앉은 듯 열기로 뜨거워지는 사랑.
실연의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호주 여행을 시작한 23살 휴학생 소지.
사계절 내내 따뜻한 햇살로 가득한 지상낙원으로 불리는 호주.
그곳에서 그녀는 원색의 아름다운 눈동자를 가진 삼색의 외국 남자들을 만난다.
특별한 그 누가 아닌 바로 당신일 수도 있는 평범한 한 여자와
개성 강한 빛깔로 그녀의 마음을 물들일 세 남자가 함께하는 로맨틱한 감성 여행.
<본문 中에서>
“한결 낫지?”
난 와인 때문인지 알 수 없는 열기에 볼이 붉어짐을 느끼며 어색하게 웃었다.
“머리 스타일 마음에 들어. 소지한테 참 잘 어울려. 러블리해.”
그가 또다시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뚫어질 듯 내 얼굴을 응시했다. 어두운 조명 아래 어느 새 네이비 빛을 띤 파란 눈동자가 내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난 시선을 피하며 와인 잔을 입에 가져갔는데 민망하게도 잔에서 빈 소리가 났다.
“소지, 술 잘 마시네?”
그가 자신의 잔을 집어 들어 내 입술에 가져왔다. 내가 거절하며 밀어내려하자 그의 얼굴이 불쑥 다가왔다. 그를 피하려 고개를 젖히는 바람에 잔에 든 와인이 고스란히 내 입안으로 들어왔다.
“Bottoms up!”
그가 재밌다는 듯 웃으며 원샷을 외치고는 기어코 내가 자신의 와인을 다 마시도록 했다. 그가 잔을 내려놓자 난 화가 나서 사레들린 기침을 하며 그의 팔을 때렸다. 톰이 어린아이처럼 웃으며 내 팔목을 잡았다. 순식간에 그의 파란 눈동자가 내 코앞으로 다가왔다. 순간 그의 입술이 내 입가를 스치는 게 느껴졌다. 내가 돌처럼 굳어져 그를 쳐다보자 톰은 짓궂게 웃으며 자신의 입술을 가리켰다. 그의 아랫입술에 와인 방울이 묻어있었다.
“입에 묻은 거 닦아주려고.”
그는 보란 듯이 혀끝으로 자신의 아랫입술에 묻은 와인을 핥았다. 노골적이다 못해 뇌쇄적인 그 모습에 난 황급히 얼굴을 돌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한시라도 마주하고 있기 힘든 얼굴이었다. 그를 보고 있는 내내 불안하고 가슴이 떨렸다. 따뜻한 와인을 마신 탓일까. 열병을 앓는 것처럼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라 식을 줄 모르고 있었다. 우습게도 이렇게 추운 겨울밤에…….
<미리보기>
나는 제이슨과 나란히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한 살라망카의 거리를 걸었다. 제이슨이 살며시 내 손을 잡았다.
“손이 많이 차다. 추워?”
“아니, 괜찮아.”
제이슨은 자신의 양손으로 내 손을 하나씩 비비며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리곤 내 왼손을 잡아 자신의 주머니 속에 넣었다.
“숙소는 어디로 잡았어?”
“안 잡았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짐은?”
“공항에 있어. 이따 가야지. 내일 비행기니까.”
“아……. 난 그래도 오늘은 여기서 보낼 줄 알았는데…….”
“비행기 시간이 맞는 게 없었어. 그래도 아직 3시간 남았잖아.”
제이슨이 쓸쓸히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나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그를 데리고 이미 구경했던 갤러리들을 둘러보며 처음 보는 사람처럼 즐거워했다. 그렇게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싶었다.
이렇게 직접 얼굴을 마주하고 얘기하고 손을 잡고 함께 걷다보니 잠시 그를 잊었던 지난 시간들이 신기하기만 하다. 역시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는 건가. 사랑은 서로를 바라보고 터치하는 동안 더욱 절실히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심장이 두근대는 것도 이 순간뿐일까. 그가 탄 비행기가 떠나는 기점을 시작으로 난 또다시 제이슨을 잊게 될까.
“소지, 무슨 생각해?”
“어? 그, 그냥. 한 시간 있으면 헤어져야 되잖아. 아쉬워서.”
“우리 그냥 바다 보면서 앉아있자. 사실 아까부터 너밖엔……. 아무것도 눈에 안 들어와.”
제이슨은 방파제로 나를 데리고 갔다. 우리는 방파제 둘레에 쌓아놓은 큰 돌무더기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앉자 그가 날 포옹하며 내 등 뒤에 앉았다. 찬 바닷바람이 그의 온기로 조금씩 누그러졌다. 밤바다에 떠있는 한 두 척의 배에서 하얀 불빛이 번지며 까만 밤하늘을 비추고 있었다.
“소지, 널 절대 잊을 수 없을 거야……. 돌아가서도 한동안 무척 괴롭겠지……. 보고 싶어 미칠 것 같아도 참자, 우리…… 절대 친구로 남는 일, 없었으면 좋겠어. 무슨 뜻인지…… 알지?”
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로 연락하지 말자는 그의 뜻을 난 이해했다. 보고 싶은 마음에 멀리서 서로의 안부를 묻다보면 또다시 우리의 관계는 소원해질지도 모른다. 사랑했던 마음은 흐려지고 어차피 몇 년간 만나지도 못할 거란 생각에 그 모든 일들이 의미 없이 느껴질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보면 설렘은 눈 녹듯 사라지고 친구처럼 편한 사이가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내가 어떻게 제이슨과 친구가 된단 말인가. 그건 생각만으로도 슬픈 일이었다. 깨끗한 이별을 하며 서로를 사랑했던 연인으로 간직하는 편이 아름다울 것 같았다. 비록 추억 속의 연인이 될지라도…….
“소지, 할머니가 돼서도 절대로 나 잊으면 안 돼.”
“뭐야, 바보 같이……. 너도 마찬가지야.”
희미하게 웃는 제이슨의 눈가에 금방이면 떨어질 듯한 물기가 어렸다. 바다 빛과 꼭 같은 짙푸른 그의 눈동자가 내 눈을 뚫어질 듯 응시하고 있었다.
“이토록 검은 눈동자를 내가 어떻게 잊겠어…….”
그의 손이 내 얼굴을 감싸며 밤바다를 담은 눈동자가 점점 가까워진다. 내 입술을 스치는 그의 부드러운 입술이 이 순간을 영원처럼 정지시킨다. 나의 얼굴에 닿는 그의 머리카락과 코끝과 뺨, 그리고 입술에서도 온통 바다 향이 난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나는 필사적으로 그를 껴안았다. 그도 내 온몸을 부서질 듯 껴안는다.
제이슨의 등 뒤로 밤은 점점 깊어가고 약속된 시간이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눈을 깊게 감았다, 뜨고는 영상에 담듯 눈앞의 광경을 바라본다. 우리가 함께 있는 이 시간과 그와 함께 바라보는 밤하늘과 바다, 배, 등대 하나, 부둣가를 따라 불을 밝히고 있는 거리와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오롯이 느끼고 있는 나와 제이슨……. 이 모든 것들은 오늘 이후로는 다신 돌아올 수 없는 소중한 한순간일 테니까.
주변의 모든 것들은 매 순간마다 새롭고 소중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을 난 오늘 밤 느낄 수 있었다. 브랜든의 말대로 살라망카는 더 이상 예전의 그곳이 아니었다. 이제 살라망카는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