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떠냐?”
“……뭐?”
핑크색 셔츠 위로 회색빛 그러데이션 카디건을 입어선지 영락없는 모범생이다. 모범생 스타일치고는 고리타분하지 않았지만, 태영의 눈엔 이유 없이 그냥 멋있었다.
달랑 면 티 한 장 입고서 레이 업 슛을 하기 위해 골밑으로 뚫고 들어가는 제스처가 멋져서 심장이 두근거렸던 게 기억났다.
“니가 보기에 나는 어떠냐고?”
지훈은 자꾸 대답을 조르는데, 태영은 오글거려서 눈꺼풀을 연신 깜빡였다. 무슨 말이 듣고 싶은 건지, 본인이 더 잘 알면서 대답을 강요한다.
‘왕자병도 아니고 잘생겼다는 소리가 그렇게 좋냐?’
하지만 태영은 밥 잘 하는 며느리처럼 수줍게 뜸을 들였다.
“몰라…….”
얼굴에 열이 오르는 느낌이 났다. 실내가 어두워서 천만다행이었다.
“뭘 몰라? 얼른 말해 줘!”
태영을 놀리는 거에 재미를 붙였는지 지훈은 무척이나 즐거워보였다. ‘에라, 모르겠다.’ 태영은 오늘만 자신을 놔 버리기로 했다.
“넌, 진짜. 열라, 멋져!”
“뭐……? 푸핫!”
이미 고구마가 되어 버린 태영이 창피함에 몸 둘 바를 모르다가 고개를 들어보니 앞자리에 지훈이 없었다.
‘어마?’
벌떡 일어난 지훈이 태영의 옆자리에 앉기 위해 그녀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우왓! 지훈이 이렇게 덩치가 컸나?’
태영은 지훈이 앉자, 꽉 찬 소파 때문에 깜짝 놀랐다. 태영과 지훈의 몸이 자꾸만 서로에게 쏠렸다. 최대한 벽 쪽으로 붙어서 거리를 만들어 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딱 붙은 허벅지 때문에 태영은 망측하게도 온몸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지훈의 허벅지는 대놓고 보니 태영의 두 배는 될 듯 굵었다.
찌릿찌릿, 몸이 왜 이러는지 똥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호흡은 느닷없이 가빠졌다. 지훈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두근두근 미쳐 날뛰는 심장소리가 들릴까 당황스러웠다.
“야, 좁아…….”
‘헉! 내 목소리가 이상하다.’
“싫어, 여기 앉을래.”
“에잇! 빨리 저쪽으로 안 가?”
태영은 이 어색한 분위기가 낯설어서 지훈의 자리를 원상복구 시키고 싶었다. 태영이 자꾸 밀어내자, 지훈이 태영의 팔을 잡아채, 팔짱을 끼며 손을 꼭 잡았다.
‘아아악! 나의 약점인 손을?’
팔짱 덕분에 두 사람은 땅콩샌드처럼 딱 붙어 버렸다. 팔과 다리가 종이 한 장 들어가지 못하도록 완전히 맞붙은 상황이 너무 민망했다. 붓으로 물감을 찍어 덕지덕지 바른 듯 물든 얼굴로 지훈을 올려다봤더니, 지훈은 마치 태영이 쳐다보기만을 기다린 듯 눈을 내리깔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소설에서처럼 지훈의 눈이 암흑과 같이 짙어졌다. 그의 눈빛이 암시하는 다음 상황이 태영의 머릿속에 전개되었다.
‘아아, 릴렉스. 우리 나이가 몇인데 그럴 리가. 제발 릴렉스……’
지훈의 얼굴이 서서히 다가왔다.
‘뭐…, 뭐를……!’
태영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지훈의 오른팔이 언제 등 뒤로 둘러졌는지, 태영의 어깨를 잡아 품으로 당겨 안으며 옴짝달싹 못하도록 만들고서 다른 손으론 태영의 얼굴을 잡아 올렸다.
‘아아악!’
쿵쾅 쿵쾅 쿵쾅!
춘향이처럼 널뛰던 심장이 이번엔 제동이 걸린 것처럼 숨이 멎어 버렸다. 태영은 눈을 질끈 감고 자라목처럼 최대한 어깨 속에 얼굴을 숨기려 애썼다. 강철팔도 한 몫 해주기를 바라며 지훈의 가슴을 떠밀었다. 긴박한 숨결 속에 세상이 정지된 듯 잠잠했다. 더딘 시간이 애타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 침묵이 갑자기 떨림이 가득한 공기로 바뀌고 무언가 이상한 느낌에 가만히 눈을 뜨고 올려다보니, 말 할 수없이 단단하고 커다란 바위처럼 처음 보는 모습으로 우뚝 자리한 지훈이 있었다.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기운에 여자의 저항을 포기하게 만드는 이상한 힘이 느껴졌다. 지훈의 입술이 태영의 입술 앞에서 닿을 듯 말듯 멈춰 있었다. 태영이 여기서 숨을 뱉는다면 지훈이 그 숨을 남김없이 마셔 버릴 것만 같은 거리였다.
두 사람의 눈동자가 맞물려 지진과 같이 커다란 진동이 일어났다. 아직 어린 태영이었지만 지훈의 눈빛에서 숨길 수 없는 강한 욕구를 본 것 같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는지 감도 잡을 수 없는데 태영을 옥죄이던 지훈의 팔이 갑작스레 스르륵 풀렸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훈을 바라보니 그는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이런 거, 넌 생각도 못했지?”
지훈도 그랬다. 이제 막 피어오르는 수줍은 열정과 순수한 욕구였다. 상대가 태영이었기에 생겨버린 마음이었다. 그랬기에 아무리 더디더라도 같은 마음, 같은 기대를 갖게 되길 기다리고 싶어졌다.
“빠르다고 생각하진 않아. 하지만 오늘은 아닌 것 같다.”
“지훈…….”
두 살, 주영과 같은 나이였다. 돼지해에 태어난 사람들은 모두 생각이 많은가? 태영은 이런 식의 은근한 접촉은 예상치 못했기에 그저 어안이 벙벙했다. 어느새 식사가 테이블에 놓이고 있었다. 건너편 자리로 돌아간 지훈은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맛있게 먹으라 했다. 숲 정식은 예쁘고 맛있어 보였지만 태영은 반도 먹을 수 없었다.
좀 전의 열기는 꿈이었나 싶을 만큼 태연한 지훈의 행동에 저 혼자 절절매며 속수무책이었다. 이 공간 안에 지훈과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감전된 듯 심장이 떨려왔다. 태영은 온몸으로 지훈을 의식하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