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모태 솔로의 앞에 거짓말처럼 첫사랑이 나타났다.
오로지 남학생들과 남자 선생님들만 있다는 태양 고등학교에 미술 교생으로 발령받은 모태 솔로 민지민. 그런데 마치 운명처럼 첫사랑 주혁을 교과 담당으로 만나게 되는데…….
쇼생크 탈출보다 더 어렵다는 모태 솔로 탈출.
절대 반지를 찾아 떠나는 포르도처럼, 절대 사랑을 찾아 떠나는 지민의 험난한 모태 솔로 탈출기가 시작된다.
“향수입니다. 민 선생님 향기를 매일 맡고 싶어서 샀습니다.”
“서 선생님,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제 어떤 모습이 마음에 드셨어요?”
“다 마음에 듭니다.”
<본문 중에서>
그 남자였다. 열아홉 순정을 다 바친 짝사랑의 주인공. 크리스마스만 되면 악몽처럼 떠오르는 기억 속 그 사람, 서주혁.
틀림없이 서주혁이 맞았다. 깎아 놓은 알밤처럼 이목구비는 단정했고 풍기는 이미지는 여전히 부드럽고 선했지만 언뜻 칼에 베일 것처럼 날카롭기도 했다. 짙은 눈썹 아래 눈꼬리가 조금 처진 눈은 여전히 매력적이었으며, 검은 두 눈동자에는 예전에 없던 카리스마까지 품어져 나왔다. 그 어떤 조각상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곧은 콧날과 야무지게 각이 진 턱이 다시 한 번 지민의 눈앞에서 서주혁임을 강조해 주었다.
멈췄던 지민의 심장이 다시 깨어난 건 그가 지민에게 고개를 까딱하고 인사를 한 뒤, 지민의 옆을 휙 지나쳐 간 뒤였다. 그에게선 여전히 커피 향이 맴돌았다. 지민은 가만히 선 채로 눈만 껌벅거렸다.
‘뭐지? 날 기억 못하는 건가?’
잠시 후 멈춰졌던 시간이 돌아가기 시작했지만 지민의 시간은 여전히 멈춰져 있었다.
열아홉 살의 그때로.
<중략>
“알고 있습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변명 안 하셔도 됩니다.”
지민은 영문을 몰라 눈을 깜빡거리고는 꾸벅 인사를 하고 계단을 내려갔다. 한 계단 한 계단 내려가는데 괜히 기분이 묘한 것이 감정이 복잡했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음악실을 나오자마자 주혁과 맞닥뜨리는 바람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갑자기 무섭게 노려보는 주혁의 눈동자에 가슴이 철렁했고, 죄지은 사람처럼 심장이 움츠러들었다.
그래서 왠지 억울해서 주혁이 오해하지 않게 변명을 했는데, 왜 그 상황에 변명을 해야 되는지 지민은 그런 자신이 바보 같아 보였다. 그랬는데 다 알고 있었단다.
무뚝뚝하게 다 알고 있었다고 말하는 그 표정과 목소리를 듣자 괜히 울컥하고 말았다.
생각보다 이 사람을 많이 좋아하나 봐. 그냥 잊고 있었는데, 예전보다 더 많이 좋아하나 봐.
이 남자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상처 받는 것을 보면.
지민은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돌아가는 코너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상하게 머리가 어지럽고 다리가 비틀거렸다. 눈동자 아래로 차오르는 눈물을 참으며 옅은 한숨을 내쉬는데, 계단 위에서 주혁의 목소리가 들렸다.
“한 선생님, 민지민 선생은 제 교과 교생 선생님입니다. 그러니까 앞으로는 제 허락 없이 함부로 오라 가라 하지 마십시오.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단호하고 강렬한 주혁의 목소리에 지민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와 함께 잠깐 참았던 눈물이 지민의 눈가에 맺혔다. 그리고 심장이 제 박자를 잃고 두근거렸다.
‘이 남자, 날 걱정해 주는 거였어. 주혁 샘, 이러면 샘이 더 좋아지잖아요.’
지민은 주혁과 마주치지 않게 얼른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음악실에서 나온 주혁은 계단 아래를 힐끔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콩콩거리며 빠르게 내려가는 그녀의 구둣발 소리가 주혁의 심장 소리와 박자를 맞춰 뛰고 있었다.
여자 나이 스물다섯, 모태솔로라도 알 건 다 아는 나이, 더 이상 순수는 없었다. 그와 맞잡은 손에서 따스하고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며 그녀는 상상하고 있었다.
그와 키스하는 상상을, 그리고 조금 더 은밀한 상상까지.
<중략>
그의 혀는 따스하고 부드러웠다. 또 거칠고 난폭했으며 축축하고 사방팔방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능력이 있었다. 낯선 느낌에 주혁의 혀를 피해 달아나던 지민의 혀가 어느 순간 그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뱀이 똬리를 틀듯 주혁의 혀가 그녀의 혀를 말아서 감싸 쥐었다. 그리고 혀끝으로 톡톡 건드리며 그녀를 농락했다.
“으읍…… 하아…….”
지민의 숨소리가 점점 가빠졌다. 어느새 주혁의 손가락이 지민의 머리채 속으로 쑥 들어오는가 싶더니 흐트러진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한 번 쓸어 넘긴 뒤, 아래로 내려와 상앗빛 같은 그녀의 뺨을 두 손으로 어루만지듯 감싸 쥐었다.
키스는 계속 이어졌고 키스를 하는 동안 지민은 자신의 손이 어정쩡하게 벌린 자세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도무지 이 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를 몰라 고민하던 끝에 주혁의 목을 살며시 끌어안았다.
그의 입술이 떨어지고 난 뒤에도 한동안 지민은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꿈인 것 같아서 눈을 뜨는 순간 꿈에서 깰까 두려웠다.
겨우 눈을 뜨자 그녀의 눈앞에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주혁의 모습이 있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렇게 서로의 눈동자만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처음이었다. 이렇게 남자의 눈을 빤히 쳐다보는 게. 이건 용기나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묘한 느낌이었다. 마치 자석처럼 그의 눈동자에 끌린 것처럼. 억지로 설명을 하자면 운명이랄까.
주혁의 손이 지민의 손을 살며시 쥐었다. 그의 손은 따스했다. 따스한 느낌이 지민의 손을 살며시 쓰다듬고 있었다. 주혁의 눈동자는 여전히 지민을 향하고 있었다. 그 눈동자는 모든 것을 태워 버릴 것처럼 강렬했다.
달빛을 받아 맑게 빛나는 강렬한 눈동자, 그 안에 지민의 모습이 오롯이 갇혀 있었다.
강렬한 눈빛을 발산하던 주혁이 이전보다는 더욱 세차게 지민의 손을 꼭 쥐고는 나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민 선생님이 점점 좋아지는 것 같습니다.”
“…….”
지민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을 하는 순간, 꿈에서 깰 것만 같았다.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았다. 나른한 키스의 여운, 첫 키스, 첫 고백,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은 지금의 이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