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가난한 연기 지망생인 김범은 연인 대행을 하고 그 대가를 받아 사는 보잘것없는 남자였다.
그러나 최은우라는 여자를 만나고 같이 하룻밤은 보내고 난 후 은우가 남긴 50만 원에 비참해서 견딜 수 없었다.
뭔가 달랐던 자신과 달리 화대처럼 던져 놓고 간 은우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그러나 자존심이 상해서 그런 것일 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은우를 본 순간……. 그건 자존심이 아니었다.
사랑이었다.
너무 많은 것을 가진 은우에게 여전히 턱없이 모자라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해 보이기 위해 범은 기꺼이 자신을, 아니 사랑을 팔기로 했다.
-본문 중에서-
“저기……. 나와요. 부끄러워하지 말고. 우리 부끄러운 일 따위 하지 않았잖아요. 예?”
[…….]
이번에도 안에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 순간, 범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지만, 욕실에 은우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이미 객실을 빠져나가 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고 벌컥 문을 열어 보았다. 깨끗했다. 사람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곳을 사용한 적조차 없는 것처럼.
“설마…….”
범은 얼른 발걸음을 침대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침대 옆 한편에 있는 화장대 거울에 껌 딱지처럼 붙어 있는 노란 포스트잇을 발견했다.
[즐거웠어요. 이 정도면 특별 근무 수당은 충분할 거예요.]
마치 노란 종이가 자신의 손바닥 위에서 놀리는 것처럼 여린 창문으로 들어온 바람에 파닥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화장대 위에 수표 다섯 장이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50만 원. 은우가 자신과의 밤에 대한 대가로 내놓은 것이었다. 수표를 손에 든 순간……. 그 차갑고 가벼운 느낌이 은우의 그것처럼 아프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연인 대행일 뿐이었는데 지난밤 자신은 은우와 뭘 한 것인지. 생각 없고 어리석은 남자여서 짝사랑하던 남자의 배신에 몸부림치며 자신을 유혹한 은우를 안으며 혼자 행복해서 은우와의 미래를 꿈꾸고 너무나 아름다운 은우의 몸을 찬양한 대가치고는 너무 잔인하고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
“젠장……. 50만 원이라……. 결국 나와의 하룻밤이 50만 원이라는 건가? 아니면 나란 남자가 50만 원의 가치밖에 안 되는 남자라는 건가? 뭐가 됐든 둘 다……. 기분 좋지는 않네. 아니, 지랄 같네.”
털썩 자리에 주저앉듯 앉은 범은 십만 원권 수표 다섯 장을 손에 쥐고 파르르 떨었다. 태어나 제일 모멸감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반지하 방을 구하려고 화대를 받고 섹스를 했던 그 순간보다 더 치욕스러웠다. 그때는 감정이라는 것이 없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특히 지난밤, 자신은 은우에게 모든 것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미쳐 있었고 그것이 사랑이라고 확신했다. 얼마를 만났는지 아닌지 따위 필요 없었다.
은우가 힘들어하는 것을 본 순간, 안아 주고 싶고 키스하고 싶었다. 대단할 것도 없어 보이는 남자 때문에 입술을 깨물고 주먹이 하얗게 될 때까지 거머쥐는 것을 보며 은우 대신 남자를 무시해 주었다. 말을 건네도 원하는 대답을 해주지 않고 엉뚱한 말을 하는 것으로 은근히 기분 나쁘게 했다. 조금 비겁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은우를 아프게 한 것을 생각하면 비겁하고 못난 행동 따위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미리 보기]
“젠장……. 뭘 하자는 건지.”
“뭘 하자는 건지 정말 몰라서 물어요? 날 보던 PD님의 눈빛을 봤는데 지현 씨에게 심하게 감정 이입했던데. 나랑 키스하고 싶다고……. 내게 속삭이고 있었는데 아니에요?”
너무 강하게 밀고 들어오는 범 때문에 주춤 한 걸음 물러나며 화를 냈다. 마치 민얼굴을 들킨 것처럼 부끄러웠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 없어요. 마음대로 생각하지 말아요. 지금 이러는 것……. 실례라는 것 알죠? 그러니까 이쯤에서 그만두고 나가요. 당장.”
“그래요? 지현 씨가 잠시 자신의 밴으로 가자고 하는 것을 뿌리치고 왔는데……. 돌아가야겠네요.”
“……!”
범이 은우를 바라보며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마치 잡지 않으면 정말 지현의 밴으로 갈 것이라는 얼굴을 하고. 가든 말든 상관없어야 했다. 둘이서 무슨 짓을 하든 상관 말아야 했다. 자신은 범과 더는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되기에. 아버지의 경고까지 받은 마당에 육체적인 끌림 때문에 한 걸음 더 다가가는 어리석은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돌아서려는 범을 그냥 둘 수 없었다. 적어도 범을 지현에게 보낼 수는 없었다.
“가지 말아요.”
범의 손목을 낚아챈 후 아주 낮은 목소리로 은우가 속삭였다.
“뭐라고요?”
“가지 말라고요. 여기 있어요.”
“……지현 씨에게 가면 아마도 정말 멋진 휴식 시간을 가질 수 있을 텐데 내게 뭘 줄 수 있죠?”
“…….”
은우는 대답할 수 없었다. 두려웠다. 범과 뭔가를 시작할 수 없었다. 그것이 단순한 육체적 관계라고 해도. 그런데 범이 다그치고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갈 거라고.
“이런……. 여전히 최은우라는 여자는 날 아주 막다른 골목까지 몰아가네요. 당신……. 아주 못된 여자라는 것 알아요? 그런데 그래서 난 최은우가 좋아요. 당신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다고요. 젠장…….”
마치 드라마 속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 하는 말처럼 지금 은우에게 흔들리고 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당장 세트장 한쪽에 있는 침대로 끌고 갈 것처럼 뜨거운 눈빛을 하고. 그 순간, 알게 되었다. 그냥 육체적인 끌림만이 아니었다는 것을. 바보같이 자신 안에 범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1년 전부터 계속. 아버지인 최 회장이 알아차릴 정도로. 자신만 모르고 있었던 것일 뿐이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