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은 태산에게 2년을 아침 마다 끈질기게 말을 걸어오는 여자가 있었다.
종알종알 귀찮은 그녀가 점점 거슬리기 시작했다.
여자에게 신경 쓰는 자신이 싫어 거친 말과 행동으로 상처주고 나면 태산의 마음은 그 만큼 아프고 불안했다.
사랑하지 않겠다고 했지만 감정은 제 멋대로 넘쳐났고 영원할 것 같은 상처는 사랑으로 인해 완치되었다.
사랑은 늘 많은 변수를 가지고 있다.
갑자기 나타난 지난 사랑과, 트라우마로 남아버린 지난 사랑,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별것 아니었다.
스스로 지옥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솔직한 사람은 사랑이 쉽다.
너 때문에 모든 것이 행복했다.
-본문 중에서-
다짜고짜 하영을 끌어다 놀이터에 벤치에 앉힌 태산은 앉았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말을 꺼내지 못 했다. 하영은 몸을 웅크리며 말했다.
“추워요. 빨리 말해요? 뭐 부탁할 거라도 있어요?”
생기 있는 하영의 목소리에 태산은 약이 올랐다. 모든 것이 그대로인 하영과 달리 자신은 지금 간신히 이 자리를 버티고 있었다.
“저녁은 먹었어?”
“먹었어요. 어, 비 온다.”
해끗은 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더욱 몸을 움츠리는 하영을 본 태산은 점퍼를 벗어 하영의 어깨에 둘렀다. 추운 곳에서 비까지 맞힐 수는 없고 그렇다고 아무 말도 못하고 하영을 보낼 수도 없어 무작정 하영을 끌고 집으로 들어왔다. 하영은 차마 거실 안으로 들어서지 못했다.
“여긴 뭐 하는 곳이죠?”
“들어와.”
자신의 집이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태산은 하영의 표정에 거실을 둘러봤다.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빈 캔과 과자 부스러기들, 옷가지와 먼지들이 거실을 점령하고 있었다. 서둘러 옷가지를 줍고 쓰레기들을 정리하며 하영이 앉을 자리를 마련했다.
“이런 곳에도 사람이 사는구나.”
“남자들 혼자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따뜻한 거라도 줄까?”
“그 싱크대에서 먹을 게 나와요? 설마 나를 독살하려고?”
“그래, 여기서 꼼짝도 못하게 하려고 그런다.”
하영의 농담에 긴장이 조금은 풀린 듯했다. 먹을 거라곤 맥주와 간단한 안주, 커피가 전부 인 상황에서 하루 종일 카페에서 일한 하영에게 따뜻한 커피를 줘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하영이 소리쳤다.
“그냥 물이나 주세요. 물은 있죠?”
“맥주 마실래?”
“전 술 마시면 큰일 나요.”
자신이 마실 맥주와 하영이 마실 물을 간신히 자리가 나온 테이블 위에 놓았다. 하영은 태산을 보고 픽 웃어 버렸다.
“맥주 회사에서 협찬 받아요?”
“무슨 말이야?”
“맥주 캔만 모아도 부자가 될 것 같아서요.”
“그래 협찬 받는다.”
장난스럽게 대답하며 다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정말 엄청난 양의 빈 캔이 거실 구석구석을 점령하고 있었다. 싱거운 농담을 몇 마디 하던 하영은 어색하게 웃곤 말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데요? 저 늦었어요.”
“나에게 요즘 왜 그러지?”
태산은 직접적으로 물었다. 왜 그동안의 행동과 달라졌는지 묻는 말이었다. 하영은 얼굴에 담겼던 작은 미소마저 지워 버렸다.
“무슨 뜻이에요? 제가 어쨌는데요?”
“나를 피하고 있잖아?”
“그렇게 하길 원하셨잖아요. 그래서 그렇게 해 드리고 있잖아요?”
“넌 뭐든 빠르고 즉흥적이지? 다른 생각은 하지 않고 네 멋대로.”
두 손에 힘을 주는 하영을 느꼈다. 굳어진 얼굴로 거친 숨을 내쉬는 하영의 모습이 그대로 전해졌다.
“그래요, 뭐든 내 마음이에요.”
“그럼 나는? 너 때문에 이렇게 된 나는?”
갑자기 큰소리를 내는 태산 때문에 하영의 눈엔 물기가 차올랐다.
“저 때문에 뭐가 잘못됐는데요? 제가 어떻게 해드리면 되는데요? 아주 멀리 가 버리면 돼요? 이젠 안 그런다잖아요.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한다잖아요!”
“그러니까 왜 안 하느냐고, 날 이렇게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왜 안 하느냐고!”
태산은 저도 모르게 큰소리가 나왔다.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화를 내는 꼴이 되고 말았다. 하영의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고 가슴이 아려 왔다.
“민재랑은 어떻게 된 거야?”
태산은 가만히 물었다. 나의 고백이 아무 소용이 없을지 모른다. 벌써 모든 것은 민재를 향해 기울었을지도……. 설령 하영의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다 해도 민재와 만나기로 약속 했다면 모든 관계가 너무 아플 테니까. 그렇다면 고백 따위 아예 하지 말아야 하는 거니까.
“그건 왜 물어요?”
“내 친구의 일이니까.”
“친구의 일이니까? 민재 씨가 부탁을 하던가요? 날 더 멀리하라고?”
“민재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알아요. 그런 사람이 아니죠. 그럼 친구를 위해 날 설득하는 거예요? 귀찮게 하지 말고 다른 남자한테나 가버리라고?”
태산은 차츰 마음이 안정되어 갔다. 지금 하영의 말은 민재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있었다. 태산은 하영의 앞에 앉았다. 하영의 시선이 내려와 태산의 눈과 마주했다. 흐르는 눈물을 급히 닦으며 고개를 돌렸다.
“난 이제 너의 짝사랑이 아니야.”
“알았어요. 안 한다고요.”
“널 짝사랑하고 싶지도 않아.”
“안 한다고요. 그런 거 안 하면 되잖아요.”
“너의 남자 친구가 되고 싶어.”
태산의 말을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는 하영에게 태산은 명확하게 말했다.
“뭐라고요?”
“계속 좋아해 달라고.”
하영은 고개를 저었고 태산은 하영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계속 널 좋아할 수 있게 해 줘.”
“무슨 말이에요? 나한테 왜 이래요? 나 놀리는 거예요?”
하영의 굵은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 턱 선에서 떨어졌다.
“왜요?”
하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요는 일본 요고, 울지 좀 마.”
커다란 손으로 하영의 눈물을 닦아 준 태산은 가녀리게 떨리는 어깨를 살며시 안아 주었다.
“미안해. 많이 아프게 했다면 미안해.”
“난 이제 괜찮아질 거예요. 내가 아파서 걱정이 돼서 그런 거라면 난 괜찮아요.”
“너 바보지?”
서글프게 우는 하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태산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제 울지 않게 해 주겠다고 미안하다고 마음으로 사과하고 또 사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