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누구보다 순결하고 깨끗하다고 믿었던 여자친구 유안이 다른 남자와 호텔 침대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것도 자신과의 기념일을 축하하기 위해 예약한 블루호텔 1003호에서.
배신의 트라우마를 안고 과거를 잊고 싶어 하는 진욱의 앞에 그 여자 유안이 다시 나타났다. 뻔뻔한 얼굴을 들고 다시 만나고 싶다고.
“그래, 내 주제에 과한 제안이었다는 것 인정해. 그럼 조금 조건을 바꿔볼까? 한 달이면 어때? 딱 한 달만 만나줘. 날 만나주기만 하면 나는 네가 시키는 대로 다 할 거야. 노예처럼 하녀처럼 몸종처럼 이름이 뭐든, 나를 마음대로 부려 먹어도 되고. 기간도 딱 좋잖아. 길지도 짧지도 않고 딱 한 달. 물론 매일 만나야 하는 건 아니야. 네가 좋은 시간에 편한 시간에 나는 언제든 널 기다리고 있을게.”
“무슨 수작이야, 이게? 도대체 저의가 뭐야?”
“그런 거 없어. 그냥 널 만나고 싶어.”
<본문 중에서>
“좋아, 정 네가 그렇다면 네가 내 노예로서 얼마나 자격이 있나 먼저 보자. 내가 널 데리고 뭘 하겠니? 데리고 다니면서 비서로 쓸 것도 아니고 집안일을 시킬 것도 아니고 침대에서 뒹구는 거 밖에 더 있겠어? 근데 벌써 5년이나 지났고 넌 그 사이 이십대에서 삼십대가 되었어. 네가 내 성욕을 자극할 만한 몸매를 유지하고 있는지 한 번 시험해 봐야겠어. 벗어.”
진욱은 말을 마친 뒤 소파에 가서 앉았다.
“잘 보이게 이쪽으로 와서 서.”
벗은 여자의 몸을 보는 것은 오히려 진욱의 성욕을 자극하지 못한다는 걸 진욱 자신은 잘 알고 있었다. 유안에게까지 자신이 임포텐스(발기불능)가 되었다는 걸 알릴 필요는 없지만, 진욱 자신에게 유안의 이 웃기는 제안에 흔들리지 않는 이유를 납득시켜야 했다. 말로는 거부하면서도 유안이 나타난 그 순간부터 흔들리고 있는 자신의 마음에 명확히 선을 그을 명분이 필요했다. 이미 자신은 여자를 안을 수 없는 몸이라는 걸 스스로에게 확인시켜야 했다.
“뭐해? 벗으라니까.”
진욱은 자신이 지정한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유안을 재촉했다.
“자신 없으면 여기서 그만하고.”
진욱이 소파에서 일어서려고 반쯤 몸을 일으켰을 때 유안의 몸에서 트렌치코트가 미끄러져 내렸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심사를 받을 줄 알았다면 운동 좀 열심히 해둘 걸 그랬어.”
유안이 배시시 웃었다. 이 상황에 웃을 수 있는 유안이 진욱은 미웠지만 왠지 웃음이 서글퍼보여 진욱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유안은 담담히 옷을 벗었다. 부끄러워하지도 당황하지도 않았다. 유안의 벗은 몸을 예전에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시간의 공백이 있었으므로 진욱이 오히려 쑥스러웠다. 진욱은 자신의 그런 감정을 내 보이는 것이 자존심이 상해 태연한 척 하려고 애썼다.
옷들이 유안의 발 아래로 떨어지고 점점 유안의 살빛이 드러났다. 유안은 속살이 유난히 희었다는 기억이 진욱의 눈앞에서 생생하게 현현되었다.
가늘고 여린 목선을 지나 관능적으로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 그 아래로 길게 뻗은 매끈한 다리. 투명하게 하얀 피부는 윤이 났다. 유안의 아름다운 몸은 기억 속 그대로였다. 아니 오히려 여인의 향기를 입은 농염함까지 더해져 더 눈이 부셨다.
진욱은 유안의 몸을 처음 열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서로의 처음을 서로에게 주면서 서투르고 어색하고 부끄러웠지만,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가슴 떨렸던 그 순간을.
그 아름다운 추억을 다 망가뜨려 버린 것은 민유안, 이 여자였다. 지금 진욱의 앞에서 스스럼없이 옷을 벗고 있는 이 여자.
유안이 브래지어끈을 손에 걸어 아래로 내려뜨리자 진욱은 눈을 감고 말았다. 담담한 유안과는 달리 유안의 맨 몸을 마주 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유안에 대한 원망과는 달리 서서히 흥분하고 있는 자신의 몸에 당황하고 있었다.
‘이럴 수는 없어. 여자에게 제대로 반응하는 법을 잊어버린 지 수년 째였어. 왜 저 여자의 벗은 몸에 반응하는 거야? 너 자존심도 없어? 밸도 없어?’
진욱은 감은 눈을 번쩍 뜨고 유안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을 노려보았다.
‘똑똑히 봐. 차진욱. 널 버리고 다른 남자를 안았던 여자야. 잘못했다는 말 한마디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못 들었어. 넌 그 충격으로 남자로서의 생명도 잃었었어. 근데 지금 저 여자를 보고 흥분한 거야? 너 진짜 병신이야?’
진욱은 자신에 대한 실망감으로 미칠 것 같았다. 유안은 진욱의 처분을 기다리는 듯 얌전히 서 있었다. 여전히 부끄러워하지도 당황하지도 않고 담담히.
“뭐라고 말 좀 해.”
진욱은 심호흡을 크게 했다 자신의 몸 상태를 유안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되도록 차갑게 쏘아 붙였다.
“영 별로야. 실망이야. 나 정도 조건이면 너보다 젊고 예쁜 여자들도 줄 서. 거기다 바람기없는 정숙한 여자들도. 고작 그 정도 몸으로 나를 유혹하려 하다니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야? 도대체 그 뻔뻔한 얼굴로 무슨 말을 하나 잠시 궁금해서 와 봤는데 괜히 왔다. 눈만 버렸어. 내 제안은 안 들은 걸로 할게. 다시 경고하지만 병원으로 찾아오지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