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구한 은행의 빅히스토리
방대한 금융이론의 직관적 서술
왜곡된 은행제도의 실체를 밝히는 책
"은행제도는 실패한 제도다"
방대한 역사적 증거와 치밀한 이론적 분석,
현대 은행제도의 모순을 파헤치는 책
일상에서 늘 접하는 은행. 우리는 은행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가 필수불가결하다고 여기는 현대 은행제도가 과잉부채, 저성장, 양극화, 사회분열, 기후위기 등, 현대 사회의 수많은 부작용의 원인이라고 주장한다면 믿겠는가. 놀랍게도 저자는 그렇다고 말한다. 은행이 우리 경제에 필수적인 존재, 나아가 특별한 존재여서, 갖은 정책을 동원해 은행을 구제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저자의 주장은 잘못된 것 아닌가. 심지어 2022년 은행의 특수성과 은행구제의 정당성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학자가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이 마당에 말이다.
저자는 현대 은행제도가 갖고 있는 근본적 모순과 여기에서 파생되는 수많은 부작용을 가감 없이 들추어낸다. 혹시라도 시중에 넘쳐나는 얄팍한 음모론이나 감성에 기반한 책을 기대한 독자라면 이 책을 볼 필요가 없다. 이 책은 무차별적이고 감정적인 은행 때리기, 대안 없는 비판과는 완벽한 대척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글은 우리가 갖고 있는 통념(conventional wisdom)을 과감하게 깨뜨린다. 그러나 통념을 깨뜨리는 저자의 작업은 결코 섣부르거나 무모하지 않다. 오랜 세월 금융연구에 천착해 온 저자는, 은행제도가 가진 모순과 부작용을 역사적 증거와 이론적 분석이라는 탄탄한 기초 위에서 하나하나 치밀하게, 그러나 어렵지 않게, 무엇보다 명쾌하게 밝혀낸다.
은행은 대출로 예금을 만들어내는 곳
대부분의 사람은 은행이 예금을 받아 그 돈으로 대출한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다. 은행은 대출을 통해 허공에서(ex nihilo) 예금을 뚝딱 만들어 낸다. 믿기 어렵겠지만 이는 여러분이 은행에 가서 대출받을 때 실제로 벌어지는 일이다. 은행 창구 직원은 그냥 여러분 명의의 예금계좌를 띄운 모니터에 대출금액을 기록하고 엔터키를 칠 뿐이다. 엔터키를 칠 때마다 은행에는 대출금리와 예금금리의 차이만큼 이익이 떨어진다. 엔터키를 치는 횟수가 늘수록 은행 이익도 커지는 것이다. 은행이 경쟁적으로 대출을 늘리려는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전 세계 경제가 과도한 부채에 신음하고 있는 작금의 현실은 현대 은행제도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
은행의 역사는 곧 위기의 역사
은행의 부채인 예금은 만기가 없다. 요구불예금은 물론 정기예금도 마찬가지다. 3년 만기 정기예금이라고 해도 여러분이 해지하겠다고 말하는 즉시 은행은 원금을 다 돌려준다. 부채 중 만기가 없는 부채는 은행예금이 유일하다. 예금자 입장에서는 편리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만기 없는 부채는 은행 취약성의 근원이다.
은행 간 대출 확대 경쟁, 즉 신용팽창이 벌어지면 필연적으로 불량차입자가 늘어나 은행의 건전성이 훼손된다. 그리고 건전성이 훼손되었다는 소식이 시장에 알려지는 즉시 예금자는 치열한 인출 경쟁을 펼친다. 뱅크런이다. 뱅크런이 일어나는 것은 예금의 만기가 없기 때문이다. 은행에 의한 집단적 신용팽창, 뒤이어 벌어지는 집단적 뱅크런은 시공간을 가로질러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현상이다. 뱅크런의 결과는 100% 파산이다. 예외는 없다.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 중세 이후 유럽의 수많은 은행들이 한결같이 집단적 파산을 피해가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그래서 은행의 역사는 파산의 역사다. 은행파산을 뜻하는 bankruptcy라는 단어가 파산 전체를 아우르는 단어가 된 이유다.
불사의 몸이 된 은행
유사 이래 은행은 집단적 신용팽창과 집단적 뱅크런을 겪은 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변화가 생긴 것은 19세기 중반 영국이 중앙은행을 통해 은행을 구제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후 주요 선진국이 영국의 선례를 따랐고, 20세기 들어 대부분의 나라는 중앙은행을 통해 은행을 구제하고 있다. 여기에다 예금보험제도, 정부 지급보증에 이르기까지 은행에 대한 다양한 구제장치, 즉 안전망(safety net)은 지속적으로 확대되었다. 덕분에 오늘날 은행, 특히 대형은행은 사실상 불사의 몸이 되었다. 그 결과 뱅크런도 점차 지난 시절의 기억이 되고 있다.
과잉금융의 시대, 부채의존경제의 도래
어떤 일을 저질러도 죽음을 맞이하지 않는다면 우리 삶은 어떻게 될까.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우리는 겸손해지고 제한된 시간 속에서 조금이나마 의미 있는 삶을 살고자 애쓴다. 은행은 그렇지 않다. 무한 안전망에 힘입어 불사의 몸이 된 은행에 겸손과 조심스러운 자산운용을 기대하는 것은 애초 불가능하다. 은행에 제공되는 안전망 확대에 맞춰 은행 규모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진 것은 이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최대 은행 제이피모건체이스(JP Morgan Chase)의 자산은 일반기업 중 최대 기업인 아마존(Amazon) 자산의 7.4배에 달한다. 영국도 사정은 비슷하다. 심지어 중국 최대 은행과 최대 기업의 자산 배율은 무려 15배나 된다. 전 세계 자산 규모 상위 100개 기업 리스트는 온통 은행 이름으로 도배되어 있다. 이는 불사의 몸이 된 은행들이 끝 간 데 없는 대출 확대 경쟁을 펼치면서 덩치를 불린 데 따른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과도한 부채가 집적된 소위 부채의존경제(debt-dependent economies)에서 살고 있다.
신의 자리에 오른 자산가격(In Asset We Trust)
부채의존경제에서는 자산가격이 신의 자리에 오른다. 부채를 땔감 삼아 상승한 자산가격이 자칫 하락할 경우, 부채상환이 불가능해지면서 경제가 파탄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부채의존경제에서 모든 경제주체들은 자산가격을 지켜내기 위해 단일대오를 형성한다. 실제로 모든 사람이 주가를 얘기한다. 모든 사람이 집값에 대해 얘기한다.
주가 부양은 부채의존경제의 지상명령이다. 단기적 주가 부양을 위한 과도한 자사주 매입, 인력 감축 등 기업의 체력을 거덜내는 일이 광범위하게 벌어진다. 주가 부양에 앞장서는 경영진에게는 높은 보상을, 일반 직원에게는 낮은 보상을 주려는 힘이 강하게 작동하면서 소득 양극화가 심화된다. 여기에다 중앙은행의 자산가격 지지 정책이 더해지면서 극단적 자산 양극화가 이루어진다. 소득 양극화에다 자산 양극화까지. 이제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장년층과 청년층 간에 건널 수 없는 경제적 협곡이 생긴다. 경제적 양극화는 곧 정치 양극화로 이어진다. 전 세계 곳곳에서 목격되는 정치적 분열상은 부채의존경제가 잉태한 경제 양극화의 미러이미지(mirror image)에 불과하다.
은행개혁, 금융의 제자리 찾기를 위한 출발점
지난 2,000여 년에 걸친 역사가 보여주듯 은행제도는 자생력을 갖지 못한 제도다. 자생력을 결여해 진즉 소멸되었어야 할 제도를 안전망이라는 특권 부여를 통해 소생시킨 것이 현대의 은행제도다. 그러나 자유시장경제에서 특권의 부여는 항상 왜곡을 낳는다.
저자는 자산가격 숭배, 소득 양극화, 자산 양극화, 정치 양극화는 물론, 얼핏 은행제도와는 무관해 보이는 기후위기, 심지어 민주주의의 위기까지도 은행제도와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다소 도발적으로 느껴지는 주장이지만, 저자가 제시하는 방대한 역사적 증거와 치밀한 이론적 분석을 따라가다 보면 고개가 절로 끄떡여진다.
저자는 과잉금융, 부채의존경제에서 벗어나려면 은행제도 개혁이 필수라고 말한다. 개혁을 위한 대안은 100%준비제도다. 새로운 제도 하에서는 은행의 통화 창출, 즉 은행이 허공에서 대출을 통해 예금을 만들어내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 대신 대출을 하려면 먼저 저축이 유입되어야 한다. 지극히 당연할 뿐 아니라 얼핏 단순해 보이는 개혁조치가 가져올 변화는 실로 놀랍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은행개혁으로 변화될 세상의 청사진을 구체적으로 목격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