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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봉사의 중심 이상 상세페이지

교회 봉사의 중심 이상

  • 관심 0
소장
전자책 정가
4,200원
판매가
4,200원
출간 정보
  • 2014.11.27 전자책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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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 정보
  • EPUB
  • 약 8.5만 자
  • 4.7MB
지원 환경
  • PC뷰어
  • PAPER
ISBN
9791165781798
ECN
-
교회 봉사의 중심 이상

작품 정보

서문

이 책은 위트니스 리 형제님이 1975년 8월 19일부터 26일까지 타이베이에서 열린 극동지방의 인도하는 동역자 장로 집회에서 전한 메시지들을 모은 것입니다. 같은 해 8월 중순부터 9월 중순까지 위트니스 리 형제님이 타이베이에서 사역하실 때 인도하신 특별 집회 및 훈련에서 전한 메시지는 <영 안에서 생활함>, <주님과 함께 삶>(중문판),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중문판) 및 <비밀의 계시>(중문판) 네 권으로 이미 출간되었습니다.


교회 봉사의 중심 이상

제1장
봉사는 영 안에서 계시를 받는 것이 필요함

바울이 열성적으로 주님을 섬긴 것이 도리어 하나님을 극도로 대적하는 것이었음

성경은 우리에게 바울이 이방인도 아니고, 우상을 숭배하거나 심각한 죄를 짓지도 않았으며, 하나님을 추구하는 환경에서 자란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고 알려 준다. 그는 “… 나는 유대교 안에서 내 동족 중 많은 동년배들보다 앞서 가고 있었으며…”(갈 1:14)라고 말했다. 바울은 종교적인 환경에서 많은 동년배들보다 더 진보하고 더 경건하며 더 열정적이었고 더 하나님을 추구했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을 추구하는 방면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탁월하게 하나님을 추구한 사람이었다. 그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말하면 가장 훌륭했고, 도덕과 인류의 문화적인 관점에서 말하면 흠잡을 데가 없을 만큼 하나님을 추구했다. 심지어 바울은 빌립보서 3장 6절에서 “… 율법의 의로 말하자면 나무랄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라고도 말했다. 바울은 가장 좋은 종교적인 환경에서 종교적으로 가장 좋은 일을 했지만, 신약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바에 따르면 그가 한 일은 하나님을 극도로 대적하는 것이었다(딤전 1:13). 우상을 숭배하는 이방인이나 심각한 죄를 지은 사람조차도 바울만큼 하나님을 대적하지는 않았다. 바울은 하나님 자신을 대적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숨을 버려서 피 흘려 거듭나게 하신 교회를 대적했다(갈 1:13, 23상).

여기서 우리는 바울이 비할 데 없이 열성적이고 충성스러우며 진지하게 하나님을 섬겼지만, 이렇게 절대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 도리어 극도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그림을 본다. 바울은 사도행전 22장 3절에서, 가말리엘 문하에서 조상들의 율법에 관해 엄격한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한다. ‘가르침을 받았다’라는 말은 헬라어 원문에서 훈련을 받았다는 뜻이다. 바울은 하나님을 추구하고 섬기는 환경에서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으며 훈련받았다. 그는 우상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고 간음과 도적질과 음란한 일에 손을 대지 않았다. 그가 한 모든 일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빛이 없다면 아무도 이와 같은 사람이 하나님을 극도로 대적했다는 것을 믿지 못할 것이다.

바울의 전철을 다시 밟을 수 있음

오늘날 우리도 바울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것을 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교회 가운데서 여러 해 훈련을 받았고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보다 열심히 봉사했다. 우리 스스로 이렇게 생각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우리를 이렇게 본다. 바울 시대의 상황과 같이 그때 열성적으로 주님을 추구했던 사람 중에 사람들의 칭찬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아마 나이 많은 제사장들과 장로들까지도 이 청년을 칭찬하며, 그가 하고 있는 일들이 바로 그들이 바라던 일을 이루어 주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이들 나이 많은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나이가 많아서 많은 일을 할 수 없었지만, 전도유망하고 패기와 능력 있는 이 청년이 그들의 바라던 일들을 이루어 줄 수 있으니 얼마나 기뻤겠는가! 그러나 바울은 그가 한 일들이 비록 열정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어둠 가운데서 행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수년간 훈련받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하나님을 위해 한 일들을 결코 자랑할 만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는 일들이 바울이 구원받기 전에 한 일과 같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구원받기 전에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고 주 예수님의 이름을 공격하는 것이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탄은 하나님에 대한 사람의 경건함과 열성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움직임을 손상시킴

우리는 이런 일들이 과연 누구에게서 비롯된 것이며 누가 한 것인지를 물어야 한다. 사탄에게서 비롯되었고 사탄이 한 일이라고 말한다면 종교인들은 곧바로 당신과 논쟁을 벌일 것이고, “그렇다면 사탄이 사람에게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도록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까?”라고 말할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연극이나 영화 또는 술 마시고 노래하며 춤추는 것에 빠졌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분명히 사탄이 한 짓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부지런히 집회에 참석하고 교회에서 장로로서 하나님을 섬길 뿐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을 낸다면, 감히 누구도 이것이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열성이 사탄에게서 나올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의 실례에서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6장 2절에서 주 예수님은 “사람들이 여러분을 회당에서 쫓아낼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올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반드시 사탄이 선동해서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은 분명히 사탄에게서 나온 것이다. 여기에서 주 예수님은 사람을 죽이는 일과 하나님을 섬기는 일, 이 두 가지 일을 한 가지로 말씀하셨다. 사탄은 사람을 죽이도록 사람들을 선동하고 또 그 일을 통해 스스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여기게 만든다. 바꾸어 말하면 사탄이 하는 일은 양의 머리를 걸어 놓고 개고기를 파는 격으로, 표면상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라는 명분을 내세우지만 실지로는 ‘사람을 죽인다’.

성경의 계시에 따르면, 아직 몸의 구속을 받지 못한 우리는 사탄의 권세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경건하고 열성적이든지 그것들은 모두 사탄에게서 비롯되었을 수가 있다. 하나님께 가장 경건하고 열성적인 사람조차도 사탄에게 이용당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사탄이 이용할 수 없는 일은 한 가지도 없다. 다소의 사울이 바로 이렇게 사탄에게 극도로 이용당했다. 그는 강도짓도 도둑질도 하지 않았고, 간음을 범하지도 않았다. 율법의 의를 따라 말하자면 그는 나무랄 데 없을 정도로 율법을 지켰다.

그러나 그는 사탄에게 극도로 이용당했고, 심지어 그 시대의 하나님의 움직임을 손상시키기까지 했다.
하나님은 그분의 갈망을 이루시기 위해 직접 육체가 되셔서(요 1:14) 예수라는 이름의 사람이 되셨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는 열성이 지극했던 사울은 도리어 갖은 방법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대적했고(행 26:9), 어떻게든 이 이름을 무너뜨리려고 했다. 이 얼마나 모순되는 일인가? 바울은 누군가의 이름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예수님의 이름이 우주 가운데 존재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여러분은 그가 어느 정도까지 사탄의 계략에 현혹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결코 이런 일이 여러분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런 일이 우리에게 나타날 리가 없다고 단언하지 말라. 우리는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위한다고 생각하지만 ‘교회를 위하는’ 것조차도 사탄에게 이용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탄은 여러분의 ‘교회를 위하는’ 마음을 이용하여 교회를 손상시킨다. 그때 바울은 열성적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예수님의 이름을 대적하고 이 이름을 무너뜨리려는 것이고, 다른 한 가지는 남자나 여자를 가리지 않고 결박하여 감옥에 가둘 정도로 교회를 박해한 것이다(8:3, 22:4). 그는 각지 회당에서 성도들을 처벌하고(26:11) 그들을 죽이는 데 찬성하는 표를 던졌다(10절).

가장 선한 것이 이용당하여 가장 악한 것으로 변할 수 있음

동일한 원칙으로, 우리가 오늘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사탄의 도구로 이용되어 하나님의 일을 손상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도 않거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별 일이 아닌 것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열성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교회를 위하는 마음을 주님 앞에 가져가서, 우리가 과연 하나님의 갈망을 이루고 있는지 아니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지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결코 선을 선으로, 악을 악으로 여겨 선악으로만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일단 사탄이 개입되면 선한 것은 더 이상 선하지 않고, 악한 것도 더 이상은 악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사탄은 선과 악을 함께 뒤섞어 놓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도 선악을 뒤섞어 놓는다. 그러므로 당신은 화도 내지 않고, 도박도 하지 않으며,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고, 교회의 책임을 짊어지거나 전시간으로 봉사하며, 주님을 위해 수년간 일해 왔다고 해서 결코 사탄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사탄이 아직 결박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라(벧전 5:8). 성경의 계시에 따르면 오늘 사탄은 하나님이 계신 셋째 하늘까지 가서 하나님께 그분의 자녀들을 헐뜯을 수 있다(욥 1:6-12상, 2:1-6). 요한계시록 12장에 와서야 사탄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던져지고(9절), 20장에서는 잠시 결박되어 무저갱에 갇히게 된다(2-3절). 그때에야 당신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사탄에게 이용되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사탄은 여전히 일하고 있으므로 우리는 결코 사탄이 이용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만일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이 일을 자신 있어 한다면 그런 자신감을 버리기 바란다. 많은 성도들이 이런 확신을 가지고 “나는 오랫동안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살아 왔다. 바닷물이 마르고 바위가 닳아 없어진다 하더라도 나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절대 사탄의 손아귀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절대로 이렇게 말하지 말라. 여러분이 스스로 사탄의 손아귀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자신 있어 할수록 그렇게 될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심지어 십중팔구 사탄의 손아귀로 떨어질 것이다. 선악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선한 것 중에 최고로 선한 것조차도 사탄에게 이용되어 가장 악한 것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다소의 사울이 자신은 하나님을 극도로 섬긴다고 여긴 것과 같다. 그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최고점에 도달했을 때에 최고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는 것을 어찌 알았겠는가? 아담 이후로 사울보다 더 심하게 하나님을 대적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사울은 전혀 악의 영역 안에 있지 않았고 완전히 선의 영역 안에 있었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서는 정점에 있었다. 그는 율법을 지키고 열성적으로 하나님을 섬겼지만, 그의 가장 높은 선은 도리어 사탄에게 이용당하여 가장 악한 것으로 변했다. 당신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자랑하지만, 당신이 형제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사탄에게 이용당할 수도 있다. 당신은 참되게 주님을 위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주님을 대적할 수도 있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사탄은 당신이 이렇게 주님을 위하는 것을 이용하여 주님을 대적할 수 있다.

우리의 참된 상태를 주님 앞에 가져감

이번 메시지의 부담은 우리 각 사람이 자신의 참된 상태를 주님 앞에 가져가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십 년 넘게 장로로 봉사하며 교회에서 수년간 책임을 맡아왔고, 어떤 사람은 이십여 년 동안 동역자로서 주님의 일에 수년간 참여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자신의 상태를 주님 앞에 가져가야 한다. 사탄은 더없이 교활하여 틈만 보이면 어디든지 파고들어서 침투하기 때문에, 우리의 경건함과 기도조차 그에게 침투당할 수가 있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은 기도하지 않아도 자신만은 기도하기 때문에, 자기가 기도를 가장 잘 하는 사람이라고 자신할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이 기도하지 않는 것 때문에 사탄에게 침투할 여지를 주는 것은 그래도 비교적 쉽게 드러나지만, 당신의 기도하는 것을 통하여 사탄이 침투하는 것은 그리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드러나는 것은 두려운 일이 아니다. 두려운 일은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이다. 마치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병이 훨씬 더 위험한 것과 같다. 사람들은 기도를 통해 사탄이 침투할 수 있다는 것은 믿지 않으며, 욕설이나 한담 또는 험담 같은 말을 통해서 사탄이 침투한다고 생각한다. 방 안에서 기도하는 한 시간 동안은 절대로 사탄에게 침투당할 리가 없다고 여기지만, 도리어 사탄에게 가장 쉽게 이용당하는 사람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은 사탄의 계략의 결과임

주 예수님은 나무를 알려면 열매를 보아야 한다고 하시면서,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고 말씀하셨다(마 7:17-18). 그러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어떤 나무인가? 바로 살아 있는 죽은 나무이다. 신약 성경에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잘라 버리라고 기록되어 있다(눅 13:7). 비록 살아 있기는 하지만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에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어서 그 자리에 계속 있어도 쓸모가 없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들이다. 어떤 이들은 기도를 많이 하는데도 열매가 없고, 어떤 이들은 경건한데도 열매가 없다. 오늘날 타이베이 교회의 집회 인수는 십 년 전에 비해 오히려 더 감소되었다. 한 국가를 예로 들면 반드시 출생이 있고 죽음이 있기 마련이지만, 출생 인구가 사망 인구보다 적은 경우를 제외하고는 십 년 후의 인구가 십 년 전보다 감소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십여 년 동안 우리는 항상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인도하여 침례를 받게 했다. 하지만 십 년 동안 침례를 받은 사람은 다 어디로 갔는가? 나는 그들 모두가 세상을 떠났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남아 있는 열매가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만일 지역 집회의 인수가 계속하여 증가하지 않는 상태에서, 형제자매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털끝만큼도 가치가 없고, 도리어 사탄에게 이용을 당할 뿐이다. 겉으로는 형제자매들이 떡을 떼고 주님을 기념하며 아버지를 경배하지만 실상은 사탄이 이미 그 지위를 차지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에게 열매가 없을 수 없다. 열매가 없는 것은 사탄의 계략의 결과이다.

누군가가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을 보았다면 우리는 그것이 사탄의 소행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지만, 주님의 상 앞에서 떡을 떼고 잔을 돌리는 봉사를 한다면 우리는 그 안에 있는 사탄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오랜 기간 지켜보면서 우리는 사탄이 그 안에도 있다고 단정했다. 왜 그런가? 악은 없지만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죽음은 악보다 더 불결하다. 여기에 죽음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아는가? 낳고 기르는 것이 없고, 구원받도록 하는 사람이 없으며, 열매를 맺지 않기 때문이다.

타이베이 교회의 인수가 십여 년 동안 증가하지 않은 것은, 죽어 있고 사탄에게 속임을 당했기 때문으로 의심된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한 지방에 있는 교회의 인수가 십 년 동안 전혀 증가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부부가 신체적으로나 심리적으로 정상이고 건강하다면, 결혼한 지 십 년이 되면 적어도 생기발랄한 아이들 몇은 낳아야 한다. 그러나 타이베이 교회의 성도들의 상태는 죽어 있다고 말하자니 그런 것 같지 않고, 살아 있다고 말하자니 그것도 아니다. 이것은 주님이 사데 교회의 상태에 대하여 “…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사실 죽어 있다.”(계 3:1)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사데 교회의 모든 것이 죽어가고 있었다(2절). 오늘날 교회의 상태도 이러하다.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사실 죽어 있으며 또한 실지로 죽어가고 있다. 이런 상태는 사탄이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아마 형제자매들은 교회 안에서 봉사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으면서도 실상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명목상으로는 교회를 위하지만 사실은 교회를 제한한다. 이것이 바로 사탄의 계략이다.

모든 것이 다 있으나 계시가 없음

우리는 바울이 그렇게 열성적으로 하나님을 섬겼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극도로 대적했고, 이것은 사탄의 소행이라고 말했다. 이제 우리는 어떤 지방 교회가 서쪽 하늘에 지는 해처럼 날이 갈수록 쇠락해 가는 것을 본다. 이런 상태에 있는 교회의 사람이 여전히 자신이 기도하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자랑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그런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열성이 사실은 하나님을 대적한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우리에게 계시가 있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바울이 큰 빛을 보기 전에는 지식도, 종교도, 전통도, 훈련도 있었고 열성까지 있었지만 계시는 없었다. 내가 관찰한 것에 근거하여 말하면 형제자매들의 상태가 참으로 걱정스럽다. 우리의 상태를 그 당시 바울이 살았던 때와 비교하면 백 퍼센트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구십 퍼센트는 일치한다. 우리에게 모든 것이 다 있지만 계시가 없다. 나는 지난번 지역 만찬 집회에 참석했을 때 형제들이 수십 년간 답습해 온 풍조를 보았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가운데에는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말씀을 기도로 읽기, 찬송 가사를 선포하기와 같은 방식들이 몇 가지 더해졌다. 그때 나는 집회에서 계시가 충만한 한 마디의 기도조차 듣지 못했고, 하나같이 타성에 젖은 형식적인 말들뿐이었다. 십여 년 전과 비교했을 때 방식만 달라졌을 뿐이다. 십여 년 전에 한 가지 방식이 있었다면 지금은 또 다른 방식이 있다. 하지만 여전히 계시는 없다.

사무엘상 3장 1절부터 3절까지는 이렇게 말한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 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1절에 나오는 ‘희귀’라는 말은 원문에서 ‘드물고 귀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어떤 영어 번역본은 ‘귀중한(precious)’으로 번역했다. 물건은 그 수가 적을수록 귀하다는 말이 있다. 천지가 황금으로 가득하다면 황금은 귀하지 않겠지만, 온 땅을 뒤져도 황금을 찾기가 어렵다면 비로소 황금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귀중해진 것은 여호와의 말씀이 없고 희귀해졌기 때문이다. 내가 그 집회를 참석했을 때 그 상태는 확실히 늙은 엘리 시대의 상태와 비슷했다. 나는 교리만 들었을 뿐 주님의 말씀은 듣지 못했다. 형식적인 기도만 들었을 뿐 계시의 말씀은 듣지 못했다.

주님의 빛 비춤 때문에 바울은 볼 수 없게 되었고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게 됨

바울이 어둠 속에서 섬길 때는 자신감이 넘치고 자기가 가장 옳다고 생각했다. 자신감으로 말하면, 그의 자신감은 최고도로 높았다. 그러나 어둠 속에 있는 사람만이 이런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큰 빛이 임했다(행 9:3). 하나님의 빛이 비추자, 모든 것을 알고 모든 일에 분명했던 사람이 갑자기 눈이 멀어 볼 수 없게 되었다(8절).

사도행전 22장 11절 상반절에서 바울은 “나는 그 빛의 영광 때문에 볼 수 없게 되어서”라고 말한다. 이전에 그는 다른 사람을 이끄는 사람이었고 앞장서서 달리는 사람이었으며 길도 잘 알았다. 그러나 그가 빛 비춤을 받고나서는 동서남북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되어 누군가가 그를 이끌어 주어야만 했다. 그래서 11절 하반절은 “… 나와 동행하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들어갔습니다.”라고 말한다. 같은 원칙으로 당신이 당신을 이끌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당신은 복이 있는 사람이다. 이것은 당신에게 빛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오늘날의 문제는 당신이 열성적인지 열성적이지 않은지, 주님을 사랑하는지 사랑하지 않는지, 장로나 동역자인지 아닌지에 있지 않고, 완전히 당신에게 빛이 있는지 없는지, 계시가 있는지 없는지에 달려 있다.

주님이 바울에게 나타나셔서 계시를 주심

바울은 아그립바 왕에게 해명할 때 주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신 것에 대해 말했다(행 26:16). 전에 바울은 너무 많은 교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주님을 만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그날 주님은 특별히 바울에게 나타나셨고, 그때 그분께서 바울에게 하신 일은 빛을 비추시는 일이었다. 주님께서 오셨을 때 빛이 임하여 그를 비추셨다. 이전에 바울은 지식으로 가득했으나 빛이 없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셔서 바울에게 빛을 비추셨을 때, 그는 자신이 가진 지식은 그를 혼미하게 하고 사탄에게 이용당하게 할 뿐이라는 것을 보았다. 바울은 그의 눈을 멀게 하고 어리석게 만드는 빛이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봉사를 할 때 자신이 어떤 것도 분명하게 볼 수 없다고 느끼는 때가 대개 빛 비춤과 계시를 얻는 때이다. 반대로 우리가 스스로 모든 것을 잘 알고 다른 사람을 인도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느끼는 때는, 바로 우리가 가장 어두운 상태에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큰 빛 가운데서 주님은 바울에게 “내가 너에게 나타난 것은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너에게 보여 줄 일에 대하여 너를 사역자와 증인으로 삼기 위한 것이다. … 이것은 그들의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16, 18절)라고 말씀하셨다. 바울 자신도 스스로 증언하며 “… 신언자들과 모세가 장차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 것 외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실 것과 그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시어 이 백성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포하시리라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22-23절). 그는 자신이 빛 비춤을 받고 계시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증언했다.

빛과 계시를 받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긍휼에 달려 있음

우리가 빛을 볼 수 있는지의 여부와 계시를 받을 수 있는지의 여부는 전적으로 주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 바울은 계시를 구하지 않았고 하늘에서 빛이 그를 비추기를 기도하지도 않았다. 그는 이렇게 기도하기는 커녕 도리어 정반대의 길을 갔다. 내 말은 모두에게 반대로 길을 가라고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빛을 볼 수 있고 계시를 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는 인식을 갖기를 바라는 것이다. 계시는 긍휼에서 비롯된다.

어두운 데서 빛이 비치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 마음속에 빛을 비추신 것은(고후 4:6), 우리의 기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 때문이다. 하나님은 누구든지 긍휼히 여기고자 하시면 긍휼히 여기신다. 사탄이 자기 뜻대로 바울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하나님은 사탄에게 “비록 네가 이미 이 사람을 수십 년간 이용했지만 이제 나는 그에게 긍휼을 베풀 것이고 그를 선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실 수 있다.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말해서 빛 비춤과 계시는 바로 주님의 긍휼에서 온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롬 9:15, 18), 빛을 비추시기를 원하는 사람에게 빛 비춤이 임하도록 하신다.

더 이상 전통이나 지식을 따르지 않고 영 안에서 삶

이 말은 바울이 그때 빛 비춤을 받고 난 후에는 더 이상 가리는 것이 없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러나 신약은 바울이 그때 빛 비춤을 받은 후로 확실히 중대한 공과를 철저하게 배웠기 때문에, 다시는 과거와 같이 전통이나 낡은 지식, 자신의 견해를 따라 섬기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는 바울이 쓴 서신을 통해 그가 빛 비춤을 받은 후에 영 안에 살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전통이나 지식을 원하지 않았고, 자신의 의견을 따르는 사람이 아니라 영 안에 있는 사람이 되었다. 바울은 에베소서 3장 5절에서 그가 영 안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사도들과 신언자들의 영 안에 복음의 비밀과 그리스도의 비밀과 교회의 비밀을 계시해 주셨다.

영을 떠난 결과는 빛과 계시의 부족임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빛과 계시와 눈이 열리는 것과 어둠에서 빛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나는 오늘 극동 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들이 계시가 부족한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깊이 느낀다. 그들에게 교리가 있고 방법들이 있지만 영이 없고 계시가 없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어둠 가운데 떨어졌다. 우리가 오늘날과 같은 상태에 떨어진 주된 원인은 바로 영에서 빗나간 데 있다. 일단 우리가 영을 떠나면 과거에 배운 그 방식에 떨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배운 그 방식은 비교적 실행하기가 쉽고 이미 갖추어져 있으므로 사용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영을 사용하지 않은 결과는 계시가 부족한 상태에 떨어지는 것이다.

타고난 성품상의 문제점 ― 게으름

또한 타락한 사람인 우리에게는 한 가지 타고난 성품상의 문제점이 있는데 바로 게으름이다. 나는 빛 비춤을 받기 전에 사울이 하루 종일 집에서 잠이나 자는 게으른 사람이었다면, 하나님께서 절대로 그를 찾아가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그를 찾으신 것은 그가 부지런할 때, 다시 말해 그가 부지런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을 때였다. 무디(D. L. Moody)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매우 능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구원시켰지만, 그는 “나는 게으른 사람이 구원받는 것을 본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게으른 사람은 구원받는 것조차 불가능한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는 것조차 원하지 않을 정도로 게으르기 때문이다.

몇몇 지방 교회들이 계시를 잃어버리고 빛이 없는 이유는 게으름 때문이다. 몇몇 지방 교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것은 그들이 느슨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저녁 일곱 시 삼십 분에 떡 떼는 집회를 시작하는데, 여섯 시 사십오 분이 되면 이미 많은 형제자매들이 앉아서 찬양을 시작한다. 그들은 여섯 시가 되기 전에 자리를 정돈하는데 의자를 가지런히 배열할 뿐 아니라, 심지어 의자와 의자 사이의 간격을 자로 재어서 얼마만큼의 간격을 둘 것인지를 고려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이 이 일을 매우 신중하게 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우리는 이런 물질적인 방면의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은 다만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말해 주고 또 증명해 주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어 책임 형제가 앞에 서서 만찬을 인도하면서 복장이 단정하지 않고 셔츠의 단추도 다 채우지 않았다면, 이런 교회에 어떻게 빛이 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형제자매들이 교회에서 봉사할 때는 반드시 단정하고 흐트러지지 않아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게으르고 느슨하고 마지못해 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인도자로 세우지 말아야 하며 이런 사람에게 집회를 맡겨서는 안 된다. 만일 일곱 시 삼십 분에 떡 떼는 집회가 시작된다면 적어도 여섯 시 삼십 분 이전에는 자리가 정돈되어 있어야 한다. 봉사하는 사람은 어떻게 자리를 배열할 것인지 또 몇 명이 앉을 것인지를 고려하여 성도들이 집회하는 데 불편하지 않게 해야 한다.

1950년 1월에 니 형제님은 중국 대륙에서 홍콩으로 갔고, 이로 인해 홍콩 교회에 부흥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는 홍콩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기 때문에 타이베이에 있는 나에게 홍콩으로 오라고 전보를 쳤다. 내가 홍콩에 도착한 다음 날 새벽에 그는 나를 장로 동역자 봉사 집회로 데리고 갔다. 집회에서 형제님은 공개적으로 나에게 동역자와 장로와 집사들의 봉사를 포함한 홍콩 교회의 모든 일을 안배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나는 장로실과 집사실을 안배하고 장로와 집사가 어떻게 봉사해야 하는지를 인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집회소 안에 있는 시설물들을 살펴 보았는데, 많은 비품들이 낡고 망가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 성도들이 가정에서 사용하는 물건들은 집회소의 물건들보다 나쁘지 않을 것이다. 벽에 걸려있는 그림도 더는 낡을 수 없을 만큼 낡았고 한 번도 청소한 적이 없는 것처럼 먼지가 가득했다. 피아노 역시 많이 망가져서 밖에 내다 버려도 주워갈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집회소의 초인종도 전기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철사 줄을 당겨야 하는 허술한 것이었다. 밖에서 사람이 줄을 당기면 집회소 안에서 땡땡하는 소리가 들렸다. 성도들의 집에는 전기초인종이 있었지만 집회소의 초인종은 줄을 당기는 것이었다. 이런 설비들은 홍콩과 같은 일류 도시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형제자매들에게 모두가 이렇게 봉사한다면 차라리 집회소 문을 닫고 집에 가서 잠을 자는 것이 낫다고 말했다. 주님께 감사하는 것은 형제자매들이 은혜로 이러한 교통을 받아들이고 다음날 곧바로 집회소의 설비들을 개선시켰다. 이것은 1950년 2월 20일의 일이다.

이것은 물질적인 면을 특별히 중시하라는 것이 아니다. 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참여하게 되었다면, 마땅히 정성을 다해 그 일을 해야 하고, 우리의 존재만이 아니라 목숨까지도 내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비를 내려 주시기를 간구할 때 간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빗물을 받을 그릇을 준비해야 하는 것과 같다. 만일 우리가 그릇을 예비하지 않는다면 하늘에서 비를 내려 주실지라도 담지 못하고 흘려 버리게 된다. 형제자매들이 교회생활을 오래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느슨해진다. 한 번 느슨해지면 축복은 없다. 축복만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안에 많은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느슨해지면 제멋대로 행한다. 잠언 29장 18절은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게으르고 느슨한데다 방자하고 제멋대로이기까지 한데,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해낼 수 없는 사람이 된다. 나는 몇몇 지방 교회의 소식을 듣고 그들이 아무런 제한도 받지 않는 부끄러운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다. 사람이 느슨하고 제한을 받지 않으면 갖가지 부패한 상태가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이상이 없고 빛이 없기 때문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가 제한 없이 행하면 즉시 빛을 잃게 된다.

우리는 한담을 하거나 다른 사람의 허물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이런 것이 빛과 계시를 잃어버리게 하는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긍휼에 의지하여 긴장을 늦추지 않고 영 안에 산다면 반드시 날마다 계시가 있을 것이다. 계시는 우리의 생각 속이나 지식에 있지 않고 영 안에 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영 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계시가 있으려면 반드시 영 안에 있어야 한다.
강한 개성과 타고난 재능은

계시의 문을 닫을 수 있음

어떤 사람은 개성이 너무 강해서 그에게 어떤 일을 시키면 반드시 그 일의 책임자가 되려고 하고 그렇지 않으면 아예 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타고난 재능에 강한 개성이 더해진 데다가 자신의 영향력까지 사용하기 때문에, 교회가 이런 사람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면 계시의 문이 닫힐 것이다. 인도하는 책임 형제들이 주님을 향해 열려 있으면 빛 비춤과 계시를 받을 수 있고, 성도들도 따라서 빛과 계시를 받는다. 만일 인도하는 이들이 열려 있지 않으면, 성도들에게 마음이 있어도 계시를 얻을 기회를 갖지 못한다. 양무리는 항상 길잡이 양을 따라 가므로 따르는 양들은 길잡이 양의 어떠함을 그대로 본받으며 따라 간다. 인도하는 사람은 길잡이 양이다. 앞서가는 사람이 빗나가면 양무리도 바른 길로 가기가 쉽지 않고, 그 결과 빛이 없어진다. 어떤 인도자들은 정말 일도 잘하고 능력도 있다. 그러나 교회는 한 몸이고 몸에는 많은 지체들이 함께 동역하여 일하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다고 해서 모든 일을 우리의 주장대로 해야 한다고 말하면 안 된다. 우리는 강한 개성이 굴복되기 위하여 반드시 주님의 긍휼을 앙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계시의 문이 닫힐 것이다.

사교적인 방법과 수완도 계시의 문을 닫을 수 있음

또 어떤 사람은 일반 사회에서 통용되는 사교적인 방법과 수완을 교회에 가져와서 친분을 쌓고 관계를 맺으며 서로 연락한다. 교회 안에서 이렇게 하는 것은 계시의 문을 닫는 것일 뿐이므로 절대로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교회는 반드시 건강한 교통이 있어야 하며, 당신이 나를 지지하고 내가 당신을 옹호하는 사회적인 관계를 맺어서는 안 된다. 교회 가운데 이런 사교적인 방법이 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가 서로 지지하는 것은 옳지만 내가 당신을 지지하고 당신이 나를 옹호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영 안으로 돌이키는 것이 필요함

교회 안의 상태가 이러한 것은 우리의 인성 안에 수많은 타고난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우리가 영에서 빗나갔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이유로 우리는 십자가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는 영 안으로 돌이킬 필요가 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받아들이지만 영 안으로 돌이키지 않으면,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것은 일종의 인간적인 고행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참되게 영 안으로 돌이킬 때 우리의 자아는 존재의 여지가 없어진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참되게 영 안으로 돌이킬 때 우리의 육체, 소위 인정이나 낡은 관습은 모두 없어지고 또 필요 없게 된다.

오늘날 우리의 어려움은 영의 부족이다. 영이 부족하기 때문에 계시도 부족하다. 영 안에 있지 않으면 지식이나 낡은 것들이 나온다. 여러분이 밀랍으로 나와 똑같이 생긴 밀랍 인형을 만들 수 있을지라도, 나는 사람이고 그것은 밀랍 인형에 불과하다. 그것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안에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큰소리로 기도하고 빠르게 기도한다고 영이 나온다는 말이 아니다. 영이 나오고 안 나오고의 여부는 그가 영 안에 있느냐 있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개성이 강한 사람은 자신의 수완을 사용하는 데 익숙하기 때문에, 집회에 와서 기도할 때도 영이 별로 흘러 나오지 않는다. 수완을 사용하는 모든 사람은 기도를 하지 않으며, 몇 마디 하는 기도조차도 대부분 머리에서 나온 것이다.

영이라는 것은 가장하거나 모방할 수 없고 숨기는 것은 더더욱 할 수 없다. 교회가 참되게 영 안에 있을 때 사람의 어떠함을 가장 잘 드러낸다. 사람이 입을 열어도 드러나고 입을 닫고 있어도 드러난다. 움직여도 드러나고 가만히 있어도 드러난다. 육체에 속한 사람은 성질을 낼 때 육체에 속할 뿐 아니라, 성질을 내지 않을 때도 그는 육체에 속한 사람이다. 육체에 속한 사람은 그가 성질을 내건 내지 않건 똑같이 육체에 속한 사람이다. 영 안에 있지 않으면 즉시 우리의 본성이 나온다. 게으른 사람은 게으른 본성이 나오고, 재능이 있는 사람은 그의 재능이 나온다. 사교적인 수완이 좋은 사람은 그의 사교적인 수완을 사용하여 사람들에게 연락하고 끌어들인다. 그러나 우리가 영 안으로 돌이키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은 지위를 잃게 된다. 결코 사람의 겉모습을 중시하지 말아야 한다. 사회에서는 쓸모가 있을지 모르지만 교회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진실함과 영 안에 있는 것이 필요하다.

교회에서 지위를 얻고 싶어 하는 것은 분명히 어둠 가운데 있는 것임

수년 전에 나는 사람이 교회에서 지위를 얻으려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도, 생각지도 못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나는 실지로 이런 일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예를 들어 두 명의 자매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을 집사로 보내자 다른 한 명이 어째서 자기는 집사로 보내지 않느냐고 원망했다. 또 한 예로 형제들이 장로를 세우는 일로 교통할 때는 언제나 “어떤 형제는 장로로 세우고, 다른 어떤 형제는 장로로 세우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느낌은 너무나 형편없는 것이다. 만일 이렇다면 이 형제도 장로로 세우지 말아야 하고 저 형제도 장로로 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지위를 말하는 사람 중에 장로가 될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

1933년 10월에 내가 처음으로 상하이에 갔을 때, 나는 니 형제님 집에서 사 개월을 머물렀다. 다음 해에 주님은 나와 온가족이 상하이로 이주하여 니 형제님과 함께 일하도록 인도하셨다. 나는 상하이 교회와 관련하여 잘 모르는 것들이 많이 있었지만, 니 형제님은 집회의 책임을 나에게 맡기고 내가 그곳의 말씀의 사역을 책임지도록 하였다. 당시 그곳에 한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활력적이고 매우 진취적이었으며 누가 보아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어느 주일 오후에 그 형제가 나에게 와서는 “형제님, 오늘 오후 집회는 제가 말씀을 전해도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기회를 주었다. 그날 니 형제님이 없었는데, 나중에 니 형제님은 이 일을 아시고는 내게 그 형제가 강단에서 메시지를 전하지 못하게 하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때서야 나는 그 형제가 처음 교회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장로가 되기를 추구했다는 것을 알았다.

니 형제님은 누구든지 장로 지위를 얻기 원하는 사람은 결코 장로로 세우면 안 된다고 말했다. 니 형제님은 그 형제를 장로로 세우지 말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또 그렇게 하였다. 그는 내가 다시 상하이로 돌아온 1948년까지 장로가 되지 못했다. 니 형제님은 매우 엄격하게 이 일을 고수하였고 그 형제를 장로가 되지 못하게 하였다. 1948년 말에 그 형제는 자신의 집에서 별도로 집회를 시작하고 순회 전도자를 고용했다. 그 순회 전도자는 나중에 책을 써서 니 형제님을 공격했다. 만일 우리 안에 교회에서 지위를 얻고자 하는 의도를 감추고 있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떨어질 것이며 빛도 없고 계시도 없게 될 것이다.

영 안에 살지 않은 것을 주님께 회개함

우리가 오늘과 같은 상황에 떨어진 것은 앞에서 말한 소극적인 상태들 때문이다. 우리에게 빛이 없고 계시가 없는 이유는 이런 상태들 때문이다. 이런 상태들이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는 영 안에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나는 각지 동역자들이나 장로들이 모두 함께 모여서 주님 앞에 엎드리고 겸손히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고 깊이 느낀다. 이런 소극적인 상태가 사회에는 존재할 수 있지만 교회 안에는 존재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 있는 우리는 반드시 영 안에 있어야 한다. 영 안에 있지 않으면 교회 안에서 우리가 있을 곳이 없다. 누구든지 교회 안에서 영 안에 있지 않는 사람은 곧 끝나게 된다. 그가 얼마나 분투하고 사력을 다하여 수단을 강구할지라도 결국은 좋은 결과를 맺지 못한다. 정치를 하는 데는 정치를 하는 법칙이 있지만, 교회에는 오직 하나의 법칙만 있는데, 곧 영 안에 있는 것이다. 영 안에 있지 않으면 길이 없다. 말을 잘 하는 것도 쓸모가 없고, 머리가 좋고 학문이 높은 것도 쓸모가 없으며, 다른 어떤 것도 쓸모가 없다. 교회 안에서는 오직 영 안에 있는 것만이 쓸모가 있다. 우리가 영 안으로 돌이키기만 하면 성령은 모든 성도의 영 안에서 “아멘!”이라고 하신다.

우리가 입을 열 때 말만 그럴 듯하게 하고 영이 없다면, 아무리 말을 잘하더라도 성도들은 움직이지 않고, 또한 활동을 하면 할수록 성도들은 더 아멘하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우리 가운데 빛은 서산으로 저무는 해와 사그라지는 불처럼 점점 소멸되어 간다. 원인은 우리가 영을 소홀히 하기 때문이다. 장로들이 행정과 방법과 안배에는 주의하면서 영은 주의하지 않고, 영 안에서 성도들을 공급하는 것도 주의하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형제자매들도 동일하다. 메시지를 전할 때 영을 중시하지 않고, 집회에서도 영을 중시하지 않으며, 기도할 때도 영을 중시하지 않으며, 모든 상황 가운데서 영을 중시하지 않는다. 반대로 사람들은 수완과 방법과 지식을 중시하고 즐거움을 위해 총명함을 사용한다. 영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그 결과는 전등에 전기가 통하지 않아서 빛을 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영이 통하지 않으면 주님은 계시지 않는다. 주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없다. 우리에게 빛이 없고 생명이 없고 계시가 없는 것은 영이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죄를 미워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영 안에 있지 않는 것을 미워해야 한다. 사람이 죄를 짓거나, 타락하거나, 제한을 받지 않으려 하거나, 수완을 부려서 지위를 얻으려고 하는 것은 영 안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단 영 안으로 돌이키면 사람은 지위를 얻기 위해 다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위를 싫어하기까지 하고, 지위를 자신으로 하여금 영 안에 살 수 없도록 방해하는 것으로 여긴다.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가 다만 죄를 회개할 뿐 아니라 영 안에 살지 않는 것도 회개하기를 바란다. 주님에 대한 가장 큰 죄는 우리가 영 안에 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영 안에 있지 않으면 계시도 빛도 있을 수 없고, 교회 인수도 증가될 수 없으며, 일을 해도 사람을 산출하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어려움이 생겨난다. 오늘날 우리는 자신의 개성과 편의는 관심하면서 우리의 영을 관심하지 않는 것을 미워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바란다.

타이베이에서 전함

작가

위트니스 리李常受
국적
중국
출생
1905년 9월 3일
사망
1997년 6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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