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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문명과 황제의 나라 고려, 고려사 고려사절요 정인지 김종서 1권 상세페이지

인문/사회/역사 인문

요하문명과 황제의 나라 고려, 고려사 고려사절요 정인지 김종서 1권

소장전자책 정가3,000
판매가3,000

요하문명과 황제의 나라 고려, 고려사 고려사절요 정인지 김종서 1권작품 소개

<요하문명과 황제의 나라 고려, 고려사 고려사절요 정인지 김종서 1권> 東夷文明(遼河文明)과 黃帝國 高麗



韓民族은, 만주대륙을 비롯한 중국대륙 東部地域에 대해, 항상 아련한 노스탤지어를 지니고 있다. 이는 다분히 生來的인 것이다. 굳이 누가 설명해 주지 않아도, 저절로 갖게 되는 鄕愁다. 본래 그곳이 우리 한민족의 영토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를, 親中主義나 事大主義인 것으로 自己誤解할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이 본래 우리 민족의 영토이므로, 향수를 갖는 것과는 명료히 분별되어야 한다. 비록 朝鮮王朝 이후 중국에게 빼앗겨버렸지만, 언제라도 그곳은 收復해야 할 우리의 영토이다.
그 故土는, 漢族이 차지하기 훨씬 이전부터, 한민족의 始祖인 東夷族(東夷族 聯盟)의 영토였다. 중국인들은 흔히 黃河文明(西紀前 2,500)이라는 신석기문명이 漢族의 시조이므로, 중국대륙이 중국인들의 영토라는 식으로 주장한다.
그런데 동이족은 遼河文明(西紀前 5,500) 시절부터, 그곳을 영토로 삼았다. 그래서 그 故土에 대한 鄕愁가 遺傳的으로 각인되어 있는 것이다. 이후 이어지는 古朝鮮, 夫餘, 高句麗, 渤海 등에 의해, 여전히 그곳은 한민족의 영토로서 지배되었다.

그러다가 조선왕조 이후, 불과 6백여 년 정도, 수천 동안 지배하던 그곳을 중국에게 빼앗긴 상태이다. 그러니 현재 대한민국헌법 제3조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것은, 국제정치의 틈바구니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를 국제법적 질서로써 존속시키기 위한 不得已일 따름임을 인식해야 한다.
만약 그런 선언을 하지 않는다면, 다른 나라들이 한반도를 자기의 영토라고 선언한다고 해도, 국제법적으로 대항키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민족의 역사를 살핀다면, 응당 ‘대한민국의 영토는 만주대륙과 한반도로 한다’는 것이 마땅하다.
나아가 東夷族과 百濟의 영토였던 중국대륙 동부지역과, 新羅와 伽耶의 영토였던 일본열도 서부지역까지도, 우리 영토임을 주장해야 한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엄혹한 현실 속에서, 그러한 속내를 결코 드러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이를 빌미로, 植民史觀을 지닌 親日主義者들이나, 事大主義史觀을 지닌 親中主義者들은, 어떻게든 韓民族의 疆域을 韓半島로 한정하려고 劃策한다. 더욱이 한민족이 현재적으로 점유하고 있는 영토는, 한반도 내에서도 남한지역에 한정되며, 북한지역은 傀儡政府에 의해 불법적으로 强占된 상태이다.
북한지역의 人民들이 韓民族임은 자명하지만, 남한지역에서 自由民主主義와 資本主義를 추종하는 대한민국으로서는, 主體思想과 共産主義를 추종하는 북한의 勞動黨政府를 결코 인정할 수 없다. 이러한 일련의 판단에는, 우선 역사적 지식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

黃河文明은, 중국의 황허강 중하류 지역에 성립한 옛 문명의 총칭이다. 문명의 성립이란, 일반적으로 國家·靑銅器·文字의 성립 등이 요소가 되는데, 이런 의미에서 황하문명의 성립기는, 수메르문명(메소포타미아문명, 西紀前 3,500)나 인더스문명(西紀前 3,000)보다 늦은, 西紀前 2,500년 경이라 말하고 있다.
예전에는 세계 4대 문명으로 분류되었지만, 현재는 長江文明(西紀前 3,500) 등, 다양한 문명이 중국 각 지역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4대 문명에 황하문명만을 채택하지는 않으며, ‘黃河 및 長江文明’이라 한다.
黃河文明은, 黃河流域에서 나타난 중국의 고대 문명을 통틀어 나타내는 말로서, 揚子江文明과 함께 중국의 고대 문명을 대표한다. 新石器 시대에 나타난 仰韶文化와 ?山文化 등을 거쳐, 商과 周의 ?銅器 문화로 발전하였다.
1921년, 중국의 河南省 ?池縣 仰韶에서, 신석기 시대의 대규모 취락지가 발굴된 뒤, ?河 유역에서는 新石器와 靑銅器 시대와 관련된 고고학적 발견이 잇달아 이루어졌다. 그 뒤 학계에서는, ?河文明을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 가운데 하나로 꼽으며, 중국 문명이 ?河流域에서 시작되어 주변 지역으로 확산되었다는 견해가 지배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그 뒤, 중국의 각 지역에서, 다양한 유형의 신석기 문화가 발견되면서, 이러한 학설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1973년, 浙江省 寧紹 평원의 河姆渡에서는, 벼농사와 高床式 건축물 등의 遺蹟이 발굴되어, 揚子江 유역에서 仰韶 문화와 비슷한 시기에, 黃河文明과는 다른 계통의 수준 높은 신석기 문화가 발달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東北 지방의 遼河流域에서도, 黃河文明과 다른 계통의 신석기 유적들이 발굴되었다. 그것이 바로 遼河文明이다. 이 요하문명은 분명하게 韓民族의 始祖에 의한 東夷文明이다. 이에 대해서, 중국은 東北工程으로써 역사를 조작하고 있다.

대체로 先史時代 中國人의 생활구역은, 黃河流域 지대의 산기슭에 있는, 물이 솟아나는 지대에 많으며, 수해를 피하기 위하여, 段丘 위에 거주했다. 나일 강이나 인더스 강 유역에서는, 하천의 정기적인 범람으로 인한, 비옥한 흙의 퇴적을 이용한 관개 농업이 성립했으나, 이 점은 중국 농업의 성립 조건과는 다르다.
黃土는 잿빛이 나는 황색의 石英이나 長石 등의 微粒의 퇴적으로서, 빗물 속의 석회질을 모아, 땅이 비옥하고 부드러워서, 농경 생활을 하기에는 아주 적합했다. 이 황토 지대에서, 농업 생산력의 발전을 기초로 문명은 성립된 것이다.
長江流域에 古文明이 성립하지 않은 이유는, 高溫多濕하기 때문에 초목이 무성하여, 철기시대 이전에는 개간이 곤란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최근 장강 中·下 유역의 문화 유적의 발굴 조사가 진척 중이어서, 그 결과가 주목된다. 황하문명의 하부 문화는 다음과 같다.
‘페이리강 문화(裴李崗文化, 西紀前 7,000?~西紀前 5,000?)’의 대표 유적은 허난성 화 현의 페이리강 유역에 있다. 이들은 원형·방형의 움집에 살았으며, 조 등의 밭농사 농업을 하고 있었다. 홍갈색의 陶器나 磨製石器 등을 특색으로 한다.
‘라오관타이 문화(老官台文化, 西紀前 6,000?~西紀前 5,000?)’의 대표 유적은 샨시성 화 현(웨이난 시)의 老官台이다. 이들은 원형의 움집 주거에 살며, 조 등의 밭농사 농업을 하고 있었다. 암적색의 협사도기를 특징으로 한다.
‘베이신 문화(北辛文化, 西紀前 6,000?~西紀前 5,000?)’의 대표 유적은, 산둥성 텅저우 시의 베이신이다. 황갈색의 도기를 특징으로 한다.
‘츠산 문화(磁山文化, 西紀前 6,000년~西紀前 5,000?)’의 대표 유적은, 허베이성 우안 시의 츠산이다. 이들은 원형, 타원형의 움집 주거에 살며, 조 등의 밭농사 농업을 하고 있었다. 홍갈색의 협사도기를 특징으로 한다.
‘양사오 문화(仰韶文化, 西紀前 4,800?~西紀前 2,500?)’는, 1921년 허난성 몐츠 현 양사오촌에서 발견된, 붉은 바탕에 채색 한 토기(칠무늬토기)를 특색으로 하는 문화이다.
前期(西紀前 4,800)는, 紅陶가 주류로 대표 유적은 산시성(섬서성) 시안 시 반파, 양샤오 반파 유형 문화라고 불린다. 모계 제도로 농촌의 계층화가 보인다. 기원전 4000년경에, 녹로의 사용을 볼 수 있는 양사오 묘저구유형 문화가 나타났다.
後期(西紀前 3,500)에는, 반파 후기 유형, 시왕촌 유형, 대사공 유형, 진왕색 유형의 4종의 문화로 크게 분류되어, 빈부의 차이가 보이는 사회 분업, 계층화가 진행되었다.
‘허우강 문화(後岡文化, 西紀前 5,000?~西紀前 4,000?)’의 대표 유적은, 허난성 안양 시 허우강이다. 베이신 문화를 계승 발전했다.
‘다원커우 문화(大漢口文化, 西紀前 4,300?~西紀前 2,400?)’는, 1959년 산둥성 닝양현 보투오 촌에서, 유적이 처음 발견되었다. 후에 산둥성 타이안시 타원커우에서도 유적이 발견되고, 이쪽이 대표 유적이 되었다.
전기는 홍도가 주류를 이루었지만, 후기에는 흑도, 회도가 주류로 나타났다. 후기의 란곡흑도의 고병배 무늬도기는, 정교하고 아름다워 산둥 룽산문화에 계승된다.
‘룽산 문화(龍山文化, 西紀前 2,500?~西紀前 2,000?)’는, 중국중앙연구원 역사어언연구소에 의해서, 1930년 산둥성 장추시 룽산진에서 발견된 흑도(흑색 토기)나 회도를 특색으로 하는 문화이다. 흑도는 얇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흑색의 토기로, 제작에는 소성 온도는 약 1,000도 이상 되는 녹로가 사용되었다.
후기에는 청동기의 주조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중원 룽산 문화(섬서 룽산문화, 진난 요서 룽산문화, 허난 룽산문화)와 산둥 룽산문화로 나뉜다. 중원의 룽산문화는, 양사오 후기 문화를 계승해 灰陶가 주류를 이루며, 뼈가 갈라진 특징을 가진다. 산둥의 룽산 문화를 계승하여, 黑陶가 주류를 이룬다.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 西紀前 2,000?~西紀前 1,600?)’는, 1959년 허난성 옌스시 얼리터우에서 발견되었다. 유적은 약 2km 사방에서 뻗어있고, 중심부에는 두 개의 궁전 자취가 있다. 이 유적의 사람들은, 진난 요서 룽산문화, 허난 룽산문화를 계승하였으며, 청동 주조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上記한 문화들이, 대체로 黃河流域과 長江流域을 중심으로 형성된, 中國文明의 始原이다. 그런데 황하문명과는 전혀 다른 고대문명이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遼河文明이다. 그것은 韓民族의 始祖인 東夷族 聯盟에 의한 東夷文明이다.
‘훙산 문화(紅山文化, 西紀前 9,000)’는 중국 만리장성 북동부에 존재했던 신석기 시대의 문화이다.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네이멍구 자치구 츠펑시와 랴오닝 성 조양시 일대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큰 특징인 玉器는, 한반도 강원도 고성군 패총에서 출토된 옥 귀걸이(7천년 전)와 전남 여수 안도리(6천년 전) 등지에서 발견된 옥 장신구, 귀걸이와 유사점이 있어, 古朝鮮 등 한반도 초기 역사와도 관련이 있다.
홍산문화는 1908년 일본의 인류학자 ‘도리이 류조’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는데, 연대는 西紀前 9,000년 경으로, 지금까지 赤峰, 凌源, 建平, 朝陽 등 500여 곳의 유적을 찾아내어, 발견 지역은 옌산 산맥의 北 랴오허 지류의 西 랴오허 상류 부근에 널리 퍼져 있다.
중국은 1980년대부터 본격적인 발굴을 하면서, 興隆窪文化, 紅山文化, 趙寶溝文化, 新樂遺跡 등의, 요하 일대의 신석기문화를, 문화(culture)의 단계를 넘어선 새로운 문명(civilization)으로 간주하여, 遼河文明으로 명명하여 부르고 있다.
현재 중국은, 요하문명을 東北工程으로써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영토를 빼앗기고서, 역사까지 빼앗기는 상황에 이르고 만다. 따라서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하략-


저자 소개

중국에서는, 遼河流域에서 새로운 유적들이 계속 발견됨에 따라, ‘도리이 류조’의 처음 발견 당시의 추정보다, 연대가 훨씬 오래된 기원전 8,000년까지 인상되었다면서, 광의의 紅山文化에 기원전 8,000년경의 신러문화까지를 포함시켜 遼河文明으로 간주하여, 홍산문화가 황하문명의 원류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으나, 이러한 평가가 세계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韓民族의 입장에서는, 東北工程에 의한 역사적 조작을 결코 수긍할 수 없다. 요하문명의 홍산문화는 분명한 우리 선조들의 역사이다. 요하문명 이후에도, 古朝鮮, 夫餘, 高句麗, 渤海로 이어지는 우리 민족의 영토임을 명확히 인식해야 한다.
내몽골자치구 츠펑 시에는, 붉은 기운이 도는 紅山이 있다. 이 곳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지역에서, 옥기가 발견돼 紅山玉器라 하였고, 중국 중원에서 보기에, 홍산 뒤쪽에서 발견되었기에, 내몽고 자치구의 츠펑 시에 있는 ?山 後 유적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현재의 내몽골 자치구 동남부, 랴오닝 성 서부와 중부, 동부에 해당된다.
현재의 홍산문화라는 명칭은, 내몽고 자치구의 츠펑 시에 있는 ?山 後 유적에서 유래하였다. 홍산문화는 1906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의 저명한 인류학자 겸 고고학자인 ‘도리이 류조’가, 赤峯 일대 지표조사를 하던 중, 우연찮게 많은 신석기 유적과 ‘돌로 쌓은 묘(積石墓)’ 등을 발견한 것이다. 이것이 後代에, 세계를 놀라게 한 홍산문화 적석총 유적이다.

積石塚은 동북지방과 만주, 한반도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무덤 형태였다. 하지만 當代에는 큰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후 20세기 초, 중국에 온 프랑스 예수회 신부 ‘Emile Licent(1876~1952)’도, 22곳의 신석기 유적을 발견했지만, ‘류조’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글만 남겼다.
그러나 1920년대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중이던 고고학도 梁思永(양계초의 아들)은, 이 글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 1930년 귀국한 양사영은, 그해 겨울에 적봉으로 향했다. 중국 중앙연구원 고고분과 담당자로서, 내몽골 임서 일대와 흑룡강 등, 동북지방에서 잇따른 신석기 유적 발견을 바탕으로, 본격적 발굴작업을 계획한 것이다.
하지만 정세불안과 건강 악화로 발굴이 지연되다, 1934년 ‘熱河考古報告로 학계에 첫 보고를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보고서에는, “동북 4성(요녕·길림·흑룡·열하성) 발굴작업을 완성하지 못했지만, 절대 잊어선 안 된다.”고 썼다. 이것이 오늘날 동북공정은, 중국인 양사영으로부터 시작된 격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발굴은, 일본인 손에 의해 이뤄졌다.
일본 고고학의 아버지인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그 주인공으로, 당시의 대규모 발굴단을 끌고와 발굴을 진행했는데, 만주족과 몽골족이 내몽골 동부에서 발원, 중국과 역사적으로 독립했음을 밝히는 게 목적이었고, 일본 편입이 목표였다.
이렇게 1906년, 일본의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에 의해 발견되어, 1935년 ‘하마다 코사쿠(濱田耕作)’나 ‘미즈노 세이치(水野?一)’ 등에 의해 대규모의 조사가 이루어졌다. 전후 각지에서 발굴이 잇달았으며, 채도와 세석기의 특징을 가진 이 문화는, 1954년 홍산후를 기념하여 홍산문화라고 명명되었다.

中華人民共和國은,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이 실시한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에 입각한 공정 연구의 일환으로, 2003년 6월부터의 中華文明探源工程을 통하여, 중국은 황하문명보다 빠른 요하문명을, 중화문명의 뿌리로 규정하고 있다.
이제까지 야만인인 東夷族의 땅으로 보던 요하문명을, 중국문명의 시발점으로 보기 시작했으며, 이를 중화민족과 중국사에 편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2012년 7월 초, 중국사회과학원 고고연구소 내몽고 제1공작대와 熬漢旗 박물관의 합동발굴팀은, 중국 네이멍구자치구 츠펑시 오한치의 興隆溝 유적 제2지점에서, 5,3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陶塑男神像(흙으로 구운 남신상)을 발굴하였다.
홍산문화 유적에서 女神像은 발굴된 적이 있지만, 남신상이 발견된 것은 중국 최초이다. 인민일보·CCTV 등 중국 언론들은, ‘5,300년 전의 조상 발견’, ‘中華祖神 찾았다’는 내용으로, 발굴성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2010년 8월 8일, 중국 내몽고 자치구 적봉박물관을 개관하였다.

紅山文化에서는 수렵, 채집 중심으로, 후기에 기초적인 農作이 보이며, 신석기 시대의 특징을 보인다. 가축을 사육한 축산도 발달하고 있어, 돼지나 양이 길러졌다. 한편에서는 수렵이나 채집 등으로, 야생 동물을 사냥하거나 야생초를 채집하기도 했다.
이들은 만든 옥들과 용 등을 본떠 만든 비취 등의 구슬로부터, 문화나 종교의 존재도 볼 수 있다. 그것은 東夷文明으로부터 중국대륙과 일본열도에까지 전해졌다. 홍산문화의 주된 유적은, 서 랴오허 상류의 지류인 潢水 및 土河 유역에 퍼져 있다.
발견된 석기는 打製石器, 磨製石器, 細石器 등으로, 그 대부분은 신석기 시대의 농기구이며, 돌보습(石?), 돌쟁기(石犁), 돌호미(石鋤) 등의 종류가 많다.
홍산문화의 陶器는 진흙 紅陶 및 夾沙灰陶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진흙으로 만들어, 붓으로 그림 그린 彩陶(彩文土器)는, 취사나 식사 등에 사용되고, 문양이 새겨진 狹斜灰陶는 음식을 담는 곳에 사용되었다. 다른 도기에서는, 임산부를 본뜬 흉상이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홍산문화에서는, 양사오문화와 같은 彩陶文化는 발달하지 않았지만, 룽산문화의 黑陶와 같은 세련된 조형미를 가진다. 또 후기 유적에서는, 청동으로 만든 環刀도 발견되고 있다. 홍산문화의 분묘에서는 비취 등의 석재로, 동물 등의 형태로 조각한 장식품이 많이 출토되었다. 돼지, 호랑이, 새 외에도 용을 새긴 것도 발견되고 있다.
높은 공예의 수준이 홍산문화의 큰 특징이 되고 있다. 猪龍 또는 玉猪龍이나 玉熊龍등으로 불리는, 홍산문화의 玉龍(용을 조각한 구슬)의 조형은 단순하며, 용이 원형으로 된 것이 많지만, 후기로 가면서 盤龍, 紋龍 등의 구별이 분명해진다.
고고학자 중에는, 홍산문화가 이후 중국에서 시작된 용 숭배의 근원이라는 견해도 있다. 한편 홍산문화의 옥기나 유적 등에 대한 다른 견해 또한 존재한다. 중국인들이 주로 猪龍이나 玉猪龍이라고 명명하는 형태의 용을 본뜻 모양을, 중국에서 시작된 용 숭배의 근원이라고 보고 있다.
그런데 龍을 숭배하는 문화는, 현재의 중국에게 익숙하다고 해서, 그 기원을 독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용을 상서로운 신화 속 동물로 여기며 숭배하는 문화는, 동아시아 전역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요하문명에서 이미 발견되므로, 중국문명으로부터 전파된 것이라고 주장은 아무래도 억지스럽다.

홍산문화에서 積石塚(돌무지무덤)과 玉器가 발견되는 것을 근거로 하여, 홍산문화가 적석총이 다수 발견되는 고조선,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의 韓民族(東夷族 聯盟)문화의 연원이라는 견해가 나오면서, 韓中 間에 이 지역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중국은, 홍산문화 유적지가 밀집한 내몽고의 적봉시, 옹우특기, 오한기, 요녕성의 능원시, 건평현 조양시 등의 상징을, 몇 해 전부터 홍산문화의 상징인 玉猪龍ㆍ玉熊龍으로 교체했다. 중국 영토에 사는 민족은 중화민족이고, 역사도 中國史라는 논리이다.
이는, 56개 민족을 하나의 단일한 중화민족으로 묶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론’이론의 바탕이다. 夏商周斷代工程(1996 ~ 2000) → 東北工程(2002 ~ 2007) → 中華文明探源工程(2003 ~ 현재 진행중) → 國史修正工程(2005 ~ 2015)으로 이어지는 논리의 구조이다.

多民族 聯合國의 경우, 미국처럼 소속된 민족들이 미국인으로서 살아간다면 문제될 게 없으나, 중국의 경우, 신장위그르나 티베트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독립을 바라는 민족들이 대부분이다. 조선족 역시 그러하다. 그래서 중국은 中國分裂에 대한 공포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중국대륙의 역사를 살피면, 현재의 중국처럼 統一帝國이던 시대와 분열된 戰國時代의 비율은 비슷하며, 통일제국의 경우도 그 절반 이상은, 漢族이 아니라 북방민족의 왕조였다. 그리고 북방민족이 東夷文明과 깊은 역사적 연관을 갖고 있음은 두말 할 나위 없다.
현재 진행 중인 國史修正工程은, 이런 일련의 역사 관련 국가 공정의 완결판인데,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들을 토대로, 중국사를 전체적으로 수정하는 것이다. 2005~2007년 기초자료 수집을 마치고, 2007년부터 본격 수정을 시작해, 2015년 완료를 목표로 중국의 正史인 25史를 대대적으로 수정해 재편찬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이 이러한 작업을 하고 있는 순간에도, 대한민국은 植民史觀과 事大主義史觀 따위를 극복하지 못해, 우리 끼리 泥田鬪狗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최고의 지식을 지녔다는 자들이, 과연 무식해서 그런 짓을 하겠는가. 알면서도 ‘生存의 利得’을 목적하며, 일부러 그렇게 한다고 판단하는 것이 타당하다.
결국 식민사관을 추종하는 자들은, 어떤 식으로든 일본의 受惠를 받아서 親日主義者가 되고, 사대주의사관을 추종하는 자들은 중국의 수혜를 받아서 親中主義者가 되어버린 상태인 것으로 이해된다. 돈을 받아먹었으니, 어떻게든 그러한 史觀을 좇아 역사를 구성해야 하는 것이다.
돈이란 것은 惡魔性을 지닌 탓에, 일단 한 번 받아먹으면, 그것이 끝이다. 賂物이 무서운 까닭은, 한 번 코를 꿰이면 결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라서, 뇌물을 준 측에서는 반드시 상응하는 대가를 요구한다.
만약 그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受賂한 사실을 공개하겠다며 恐喝脅迫한다. 그러니 痲藥이나 알코올에 중독되면 벗어나기 힘들 듯이, 공짜돈도 한 번 잘못 받아 먹으면, 이제 그 굴레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1983년에, 랴오닝성 링위안 시에서 젠핑 현에 걸친 넓은 범위에서 발견된 牛河梁遺跡에서는, 기존의 홍산문화와 다른 거대한 祭祀 시설이 발견되었다. 유적은 5제곱km의 넓은 범위에, 돌을 쌓아 만들어진 분묘나 제단이 정연하게 분포하고 있다.
또한 돌 마루와 채색한 벽이 있던 신전이 발견되었고, 눈을 비취로 만든 여성두상 도기가 발견되어 女神廟라고 불리게 되었다. 발굴 과정에서, 지하 1m 지점에서, 제사를 지냈던 장소나 제단, 벽화, 돌무덤(石塚) 등이 발견되었다.
여신묘 안에는, 사람 세 배 크기의 도제의 상이 줄지어 있었다. 이 상은 신상으로 추측되며, 현재 중국 문화에서는 유례 없는 것이다. 뉘우허량에서 발견된 기념비적인 건축물의 존재나, 또 여러 가지 토지와 교역의 증거로 인해, 이 시기에 先史時代의 首長國인 왕국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여신묘에서는 彩陶도 발견되었다. 부근에서 60개 이상의 고분도 발굴되었고, 이것들은 돌을 짜서 석실을 만들고, 그 위에 조약돌을 씌워 무덤을 만들었다. 그 내부에서 구슬 등의 유물도 발견되었다. 근처의 두 곳의 언덕 위에는 돌무덤이 발견되었고, 그 가까운 곳에서는 석회암을 쌓아 올려 만든 둥근 무덤이나, 사각형의 무덤도 있었다.
이러한 고분 중에서는, 곰이나 용, 거북이 조각이 발견되었는데, 이러한 유물로써, 홍산문화에서는 이미 제물을 바쳤다는 지적이 생겨나고 있다. 홍산문화의 유적에서는, 초기의 풍수의 증거로 여겨지는 것이 발견되고 있다. 뉘우허량 유적 등, 홍산문화의 제사 유적에 볼 수 있는 圓形이나 方形(四角形)은, 天圓地方의 우주관이 벌써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시사하고 있다.
-하략-

목차

▣ 목차




序說 : 東夷文明(遼河文明)과 黃帝國 高麗

1장. 高麗史를 임금께 지어올리는 서문 / 정인지

2장. 高麗史節要를 임금께 지어올리는 서문 / 김종서

3장. 高麗史, 高麗世系(고려왕실의 계보)
1. 태조실록의 기록
2. 平那山의 과부 山神이 虎景과 결혼하다
3. 꿈에, 寶育이 鵠嶺에서 소변을 보니, 온 산천이 은빛 바다로 변하다
4. 寶育의 딸 辰義가, 언니의 ‘소변보는 꿈’을 사다
5. 王建의 先祖 作帝建은, 당나라 숙종의 아들이다
6. 神弓 作帝建이 늙은 여우를 쏘아 죽이다
7. 作帝建이 용왕의 딸과 결혼하고, 松嶽에서 살다
8. 용왕의 딸은 黃龍이었다
9. 道詵이 王建의 탄생을 예언하다
10. 李齊賢의 서문

4장. 高麗史節要, 제1권, 太祖 神聖大王
1. 고려 태조 왕건
2. 王建이 高麗를 開國하다
3. 道詵의 예언
4. 甄萱의 後百濟와 弓裔의 泰封
5. 궁예의 부하가 되어 공을 세우다
6. 견훤의 艦隊에게 승리하다
7. 견훤의 名將 能昌을 처형하다
8. 권력을 멀리하며, 다시 外職을 청하다
9. 궁예가 觀心法을 자랑하다
10. 거울에서 豫言이 나타나다
11. 궁예에게 예언의 내용을 거짓으로 보고하다
12. 부하들이 왕건에게 革命할 것을 권하다
13. 궁예가 백성들에게 살해당하다
14. 王建의 혁명 선언문
15. 혁명의 과정
16. 각 벼슬아치들을 임명하다
17. 전폭적인 개혁을 시행하다
18. 반란을 진압하고, 조세제도를 개혁하다
19. 反革命 세력이 後百濟와 반란을 도모하다
20. 大赦免令을 시행하다
21. 功臣들을 褒賞하다
22. 견훤이 祝賀使節을 파견해오다
23. 王權과 권력 내부의 位階를 정립하다
24. 佛敎를 國敎로 규정하다

5장. 高麗史, 世家, 太祖總序
1. 鄭麟趾가 編修하다
2. 王建은 누구인가
3. 龍의 기운을 받고 태어나다
4. ‘甄萱의 後百濟’와 ‘弓裔의 泰封’
5. 궁예가 왕건을 勃禦塹 城主로 임명하다
6. 궁예가 왕건을 精騎大監으로 임명하다
7. 궁예가 왕건에게 阿粲을 제수하다
8. 궁예가 왕건을 閼粲으로 임명하다
9. 궁예가 철원으로 還都하다
10. 궁예가 통일신라를 정복하려고 하다
11. 궁예의 暴政이 심해지다
12. 궁예의 폭정을 비판하다
13. 能昌의 목을 베다
14. 다시 변방으로 가기를 원하다
15. 궁예가 왕건을 칭찬하다
16. 궁예가 자기의 彌勒觀心法을 자랑하다
17. 불에 달군 쇠절구공이를 음부에 찔러 넣어 죽이다
18. 궁예가 왕건을 처형하려고 하다
19. 羅州의 백성들을 구휼하다
20. 거울에서, 고려 건국 豫言이 나타나다
21. 고려 건국혁명이 일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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