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경제의 막후조정자로 불리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의 작동원리와 통화정책 결정의 역학관계를 분석한 책이다.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대공황, 아시아 외환위기, 9.11 테러 등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해 분석하고 있다. 또 Fed가 창설된 역사적 배경과 성장발전 과정을 통해 미국의 특유의 시스템과 세계 경영전략, 위기 대응방식을 이해할 수 있게 돕는다.
통화정책이 미치는 정치 경제적 파급효과가 어떤지 보여주기 위해 우리나라 외환위기 발생을 먼저 사례로 소개한다. 또 미국의 이라크 침공이 후세인 제거와 석유자원 통제 목적 외에 미국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 유지와도 깊은 연관이 있다고 지적한다. 더불어 Fed가 블랙멘데이와 롱텀캐피털 구제금융, 9.11 테러 등 금융시장을 붕괴직전까지 몰고갔던 위기상황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도 보여준다. 기준금리 결정이 경제적 합목적성에 의해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이해관계까지 포함된 복합적인 과정이라는 것도 알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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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국내 경제부 기자 쓴 미국 중앙은행의 정치경제학
‘세계경제의 막후 조정자’,‘미국의 경제 대통령’,‘금융 마피아’. 이상은 모두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Federal Reserve System: 이하 Fed)와 그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연방준비제도이사회(Board of Governors of the Federal Reserve System: 이하 FRB)를 일컫는 용어들이다. 전세계 금융시장에 종사하는 수많은 이코노미스트들은 오늘도 Fed의 홈페이지를 들락거리고 행여 통신사 뉴스에 FRB라는 단어가 튀어 나오지 않을까 밤잠을 설쳤을 것이다. 오는 12월 운명의 한판 승부를 겨룰 미국의 대권주자들도 Fed의 금융정책 향방에 신경을 집중하며 물밑에서 이해득실을 분주하게 계산하고 있을 것이다. Fed의 막강한 경제권력에 의심의 눈길을 보내 온 학자와 언론인들은 미국에서는 드물게도‘우리(We)’라는 표현을 사용하기에 주저함이 없는 Fed의 동지적 결속감과 비밀주의를 경계하기도 한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주식시장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은 한국의 대통령도 재경부장관도 아닌 FRB 의장 그린스펀(A. Greenspan)이라는 설문조사가 제출되어 국민들을 새삼 놀라게 한 바 있다.
Fed가 지니고 있는 이러한 영향력 때문에 최근 들어 국내 서점가에도 Fed와 그 수장인 그린스펀 의장과 관련된 책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난 5월 발간된『미국 중앙은행 -금리결정의 비밀』은 번역서가 아니라는 점에서 일단 그 의미가 새롭다. 저자는 경제학 전공자가 아니면서도 경제부 기자로서의 경험과 문제의식을 살려 미국경제 나아가 세계경제를 이해하기 위한 첩경으로 Fed를 해부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격변의 한국경제를 직접 취재하는 과정에서 느꼈을 이론적 갈증과 직관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한 권의 책을 완성했다는 점만으로도 저자는 박수 갈채를 받을만한 자격이 있다. 이 책은 Fed의 역사에서부터 최근의 이라크 전쟁에 이르기까지 숨가쁘게 달려오느라 호흡이 다소 거칠어진 점만 제외한다면 미국의 경제정책과 세계전략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충분히 기여할 것으로 생각된다.
Fed와 세계경제 : 외환위기와 이라크 전쟁
저자는 우선 기계적이고 자동적인 통화수급 조절이라는 한정된 기능으로 출발한 Fed가 세계경제의 막후조정자로서 전세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를 위해 동아시아 경제에 아직도 깊은 정신적 상처(trauma)를 남기고 있는 외환위기의 요인 중 하나가 Fed의 연방기금금리 인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는 가설에 주목한다. 취약한 동아시아의 성장 구조에 대한 시장의 회의감이 일기 시작할 즈음에 단행된 불과 O.25% 포인트의 연방기금금리 인상이 동아시아의 외환위기를 잉태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국의 연방기금금리 인상이 아시아 통화와 신흥시장에 과도하게 투자해 온 투자자들의 심리를 급속도로 위축시켰고 이들이 미국의 금리인상과 더불어 달러 표시 자산으로 포트폴리오를 변경하기 시작하자 태국, 인도네시아, 한국 등지에서 외환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물론 고평가 된 환율, 허약한 금융시장 인프라 등 위기의 소용돌이에 빠져 든 국가들의 경제구조 자체에 문제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위기의 시작이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Fed의 금리인상 방침이었다는 점, 이후 Fed가 세계금융시장의 안정을 위해 저금리로 선회하자 위기 탈출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은 세계화의 숙명에 직면한 발전도상국과 저개발국이 갖춰야 할 조기경보체계의 중요성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
Fed가 세계경제의 상호작용에 대한 저자의 관심은 내친 김에 이라크 전쟁의 배경에 대한 분석으로까지 발전한다. 저자에 따르면 이라크 전쟁은 부시(G. W. Bush)의 편협한 국수주의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라크 전쟁의 본질은 석유대금 결제를 계속 미국 달러로 묶어둠으로써 세계 기축통화국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통화전쟁이다. 요컨대 후세인이 2000년 11월 석유 결제기준을 유로로 변경하고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국제거래를 달러에서 유로로 변경하려는 징후가 감지되자 미국은 더 이상 인내할 수 없었다는 가설이다. 저자는 국제 석유대금을 달러로 결제하는 페트로 달러(Petro-Dollar)의 붕괴는 Fed에게 더 없는 악몽의 시나리오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실제로 OPEC이 가격결정을 달러에서 유로로 전환한다면 석유소비국들은 중앙은행의 지급준비금 중 상당부분을 유로로 대체해야 한다. 이는 전세계 석유에 대한 미국의 통제권 상실을 의미할 뿐 아니라 달러의 평가절하, 미국 주식시장에서의 자본유출, 국채발행과 신용팽창의 제약 등으로 연결되어 기축통화국으로서 미국이 누려왔던 기득권의 상실을 초래한다. 물론 이러한 시나리오는 미국 내에서도 아직은 소수의 견해이다. 그러나 Fed의 통화정책이 단순히 일국의 경제정책 차원이 아니라 달러가치와 세계경제 그리고 미국의 세계전략이라는 복잡한 정치경제학의 산물이라는 점을 인식시켜 주기에는 충분하다.
Fed의 역사 : ‘연약한 갈대’에서 ‘미국경제 최후의 보루’로
이 책의 보다 큰 미덕은 Fed의 역사를 꼼꼼하게 기록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시하고 있는 것과 달리 중앙은행은 1900년대 초기까지만 해도 영란은행(Bank of England)을 포함하여 전세계적으로 18개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미국 중앙은행의 역사는 곧 미국 경제사이며 제도 혁신의 지난한 과정을 일깨워 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의 중앙은행 설립 시도가 주(州)정부의 반대로 두 번이나 좌절된 적이 있다거나 초대 FRB 총재 찰스 S. 햄린(Charles S. Hamlin)이 재무부의 처우에 품위가 손상되고 창피함을 느낀다고 일기장에 토로했다는 일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경제실정에 대한 여론의 질타를 행정부 혼자 뒤집어 쓰지 않기 위해 Fed는 대통령의 영향력 하에 있는 기구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결과, Fed가 재무부로부터 본격적인 독립을 쟁취하기 시작했다는 에피소드들은 책 읽는 재미를 더해 준다.
Fed의 역사는 위기에 대한 대응의 역사이다. 반복되는 유동성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설립되었고(1913년), 제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는 숨가쁜 위기 과정 속에서 법률상 대통령의 권한이 미치지 않는 독립기구로서 통화정책에 대한 최종 결정권을 움켜쥐게 된다. FRB 의장은 밖으로는 Fed의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 대통령 및 재무부와 때로는 긴장하고 때로는 협조하는 곡예의 리더십을 펼치고, 안으로는‘페드 워처(Fed Watcher)’라 불리우는 경제학자들의 분석을 토대로 - Fed는 단일기관으로는 전세계에서 경제학자들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기관이다 - 대학을 방불케 하는 토론을 통해 의견의 일치를 유도해 낸다.
선거를 위해 통화팽창 정책을 암암리에 강요하는 정치권에 맞서 인플레이션 억제를 통한 경제안정만이 Fed의 존재 근거임을 강조하는 역대 FRB 의장들의 분투는 현재까지도 계속된다. 1992년 대선에서 클린턴(B. Clinton)에게 패한 부시(G. H. W. Bush)는 그린스펀 FRB 의장이 회복기에 들어 선 경제를 충분히 지원하지 않아 낙선의 고배 마시게 되었다고 두고두고 비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그리스펀 의장은 그의 아들이 대통령이 된 지금도 건재하다. 클린턴은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우리가 수립한 경제 계획의 성공과 나의 재선은 오로지 Fed와 소수의 채권시장 거래자들에게 달려 있다”며 Fed와 시장의 협력을 간절히 호소한 바 있다.
Fed 의 힘 : 전문가집단으로서의 명성과 신뢰
그렇다면 Fed가 향유하고 있는 권력의 원천은 과연 무엇일까? 이에 대한 저자의 설명을 살펴보자. 저자는 Fed의 조직상의 특징을‘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이면계약’이라고 표현한다. 미국은 선거라는 대의 민주주의 원리에 의해 권력의 향배가 좌우되는 사회인 동시에 민주적인 가치 이상으로 효율성을 중시하는 자본주의 원리가 지배하는 사회다. 저자에 따르면 정치적으로 독립된 전문가집단에게 권력을 이양한 Fed야말로 이 양자의 충돌을 방지하기 위한 절묘한 타협기구이다. 요컨대 정치집단은 장기적인 경제시스템의 안정보다는 일시적인 정치적 승리를 위해 대중과 영합할 수 있기 때문에 미국은 이들과 거리를 둔 전문가집단의 분점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저자는 Fed를 특정 정파나 계층의 이해에 국한되지 않고 국가공동체를 지속적으로 번영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미국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이해하고 있다.
물론 Fed에 대한 시장의 신뢰와 엄청난 파급효과가 법적 지위만으로 얻어진 것은 아니다. Fed 스스로도 주어진 역사적 소명을 다하기 위해 끊임없는 변신을 추구해 왔다. Fed는 출범초기부터 통화정책 방향이 사전에 노출되면 투기를 조장하고 정책효과를 반감시키며, 언론의 비판 때문에 소신발언이 불가능하다는 주장 아래 철저한 비밀주의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대통령이나 의회에 의해 충분한 견제를 받지 않는다는 비판이 제기되자 정책 결정과 관련된 비밀주의 전통을 과감히 벗어던졌다. 연방기금금리를 결정하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회의 결과를 공표함으로써 오히려 시장의 신뢰를 얻는데 성공했다. 이러한 사례는 Fed의 독립성은 전문가집단의 프로의식과 윤리의식 그리고 이를 유도하는 사회의 감시체제가 전제될 때 더욱 빛난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그 외에도 Fed는 거시경제정책의 미세조정(fine tunning)을 위해 변신을 시도했다. 많은 사람들이 중앙은행은 물가안정이 최우선의 유일 목표라고 주장하는 속에서도, 환경변화에 따라 정책기조를 유연하게 변화시켜 왔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Fed는 물가안정만이 아니라 경제성장과 실업률과 같은 거시경제 목표를 동시에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신경제로 대표되는 미국경제의 구조변화도 가장 먼저 감지했다. Fed의 세심한 거시경제 관리에 힘입은 미국경제는 1990년대에 들어 1960년대의 ‘황금시대(Golden Age)’에 버금가는 ‘전설과도 같은 10년(Fabulous Decade)’을 향유할 수 있었다.
Fed의 어제와 오늘을 단순히 중앙은행의 독립성 문제에만 초점을 맞추어 읽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Fed의 역사는 제도개혁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경제에 보다 많은 시사점을 준다. 우선 Fed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설계된 제도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Fed는 중앙은행의 선례도 시원찮고 주정부와 연방정부의 분권과 갈등이라는 미국의 독특한 역학구조 속에서 자신들에게 적합한 제도를 창출하기 위해 고민하고 노력한 결과이다. 그렇다고 Fed와 정치권이 유별난 견제와 협력 장치를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다. 저자에 따르면 Fed와 행정부의 관계는 재무부장관과 FRB의장의 오찬, FRB이사들과 행정부 경제팀과의 정기적인 미팅, 1년에 2회 정도 갖는 대통령과 FRB의장의 비공식 회동 등이 전부라고 한다. 이는 새로운 제도를 수입·신설하고 조직 개편을 시도할 때마다 이해집단간에 사활을 거는 한국의 제도개혁 과정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아울러 제도혁신을 추구할 수 있는 풍부한 전문가집단 그리고 필요하다면 이들을 압도할 수 있는 리더십의 존재야말로 개혁과 경제정책에 대한 시장의 신뢰를 유지하는 근간이 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일깨워 준다.
미국의 중앙은행 시스템과 세계전략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들이라면 지금이라도 과감하게 이 책의 첫 장을 열어 보기를 권한다.
최인철 (삼성경제연구소 경영전략실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