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이…….”
채하는 그녀의 이름을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부른다는 게 이토록 가슴 절절한 것이었던가.
채하는 가슴이 답답해져서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그는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천천히 침대 맡으로 다가가 꿇어앉았다. 모로 누워 잠들어 있는 유이의 얼굴 옆에 자신의 얼굴을 기대며 그녀의 잠든 얼굴을 응시했다.
“유이……, 내 여자……. 나의 유이…….”
채하는 자신도 모르게 유이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었다. 그 손길에 살짝 잠이 깬 듯 유이가 눈을 천천히 떴다. 그때서야 채하는 자신의 행동에 적잖이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유이는 완전히 잠에서 깬 건 아닌 것 같았다. 잠에 취한 눈을 몇 번이가 깜빡이더니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유하…… ?”
“……!
채하는 유이의 입에서 유하의 이름이 잠꼬대처럼 흘러나오자 질투심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유이가 유하의 여자였고, 그를 좋아했던 것만은 사실이라는 것도 알고 있는데, 어째서 미칠 듯이 화가 나는지 채하는 그 순간엔 알지 못했다.
“유하야…….”
완전히 잠이 깨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을 보며 유하의 이름을 부르는 유이에게 채하는 화가 났다. 자신을 사랑한다고, 이제야 그걸 깨달았다고 고백한 지 얼마나 됐다고, 자신을 보며 유하를 부르다니!
유이는 점점 잠에서 깨는 듯했다. 채하는 그녀의 검고 깊은 눈동자가 어둠속에서도 점점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고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유이가 채하의 얼굴을 응시하다가 흠칫 놀라며 몸을 떨었다.
“채하?”
“날 사랑한다고? 날 사랑하는 게 아니라! 내게서 유하를 찾고 싶었던 거 아닌가!”
“……?”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리는 유하에게 지쳐서, 너 역시 내게 눈을 돌리고 싶었던 거 아니냐고! 유하가 유일하게 내게만은 뭐든 뺏기고 싶지 않아하는 걸 아니까! 그래서 그의 마음을 돌리려고 내게 다가온 거 아냐?”
유이는 화가 나서 소리를 지르는 채하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 사이 채하는 문으로 성큼성큼 다가가 불을 켰다.
“잘 봐! 난 강유하가 아냐! 강채하라고! 내게서 그 녀석을 떠올리는 주제에……, 날 사랑한다고? 두 번 다시 그딴 말 지껄이지 마!”
“널 보면서 유하를 떠올린 거 아냐. 꿈, 단지 꿈을 좀 꿨을 뿐이야. 그래서…….”
“꿈? 꿈에서도 유하를 만나나? 네가 사랑하는 게 내가 맞긴 한가? 어째서 내 눈엔 네가 유하를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 넌 그 녀석에 대한 불만과 그리움으로 내게 돌아선 거다!”
유이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눈으로 묵묵히 채하를 바라보기만 했다. 부인한다고 해서 채하가 수긍하고 믿어줄 것 같지 않았다. 반발을 해봤자 그의 화만 더 돋울 것 같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기만 하는 유이의 태도에 채하는 심장이 불타는 것처럼 쓰라리고 뒤틀렸다.
“난 그 녀석의 대타인가? 유하의 영화를 대신 찍기로 했어. 그가 내버려두고 간 모든 것들을 고스란히 받기로 했지. 너까지도 말야.”
채하는 유이를 아프게 노려보았다.
“어머니조차도 날 보는 눈이 예전과 달라지셨어. 날 보고 웃으시는 눈이 예전 같지 않아. 그런 눈빛은 유하에게나 보이시던 거였지. 미안한 듯, 애틋한 사랑이 가득한 시선. 네게도 그런 눈빛이 보여. 날 보면서 그 녀석을 떠올리지 마.”
유이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채하는 유이의 부인을 믿지 않았다. 유하의 일과 아파트, 자동차, 그 모든 것을 받고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가슴이 먹먹했다. 결국 그의 인생을 대신 사는 것 같단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유이가 떠나는 것도, 그녀가 다른 남자의 머리를 매만지고, 얼굴을 바라보고, 옷매무새를 다듬기 위해 몸을 만지는 것도 싫었다. 그런 것 따윈 보고 싶지도,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유이가 그렇게 해도 용서할 수 있는 남자는 유하밖에 없었다.
사실 그마저도 참기 힘든 질투심에 몇 번이나 유하의 매니저와 전담 스턴트맨 일을 버릴까도 했었다. 차라리 보지 않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하루라도 유이를 보지 못하면 그게 더 견디기가 힘들곤 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심약한 유하가 걱정되었다.
채하는 유하가 유이를 두고 다른 여자연예인들과 호텔을 들락거린다는 것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에게서 유이를 뺏어 오지 못한 건, 순전히 그의 발작과도 같은 유이에 대한 집착 때문이었다.
처음 그런 일이 있었을 때 채하는 더 이상 유이를 그의 옆에 있게 할 수 없다고 화를 낸 적이 있었다. 그때 채하가 정말 유이를 빼앗아 갈까봐 조바심이 난 유하는 신경질적으로 물건을 부수고, 닥치는 대로 채하에게 집어던졌다. 한참을 그러고 난 후 유하는 울면서 매달렸다. 자기가 잠시 미쳤었나보다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그리고 며칠 후 다시 그런 일을 벌인 유하는 채하가 다그치기도 전에 자해를 시도하며 울부짖었다. 자신에게서 유이를 뺏어 가면 죽어버리겠다고.
유이는 그런 사실을 전부 알고 있으면서도 유하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물론 원망하고 다그치기도 했지만, 떠나진 못했다.
안정은의 로맨스 장편 소설 『사랑흔적』.